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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X일 X일, 임페리얼 승마 클럽에서 벌어진 사고로 조슈아 세토라가 가벼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세토라사의 대표이자 조슈아 세토라의 부친 알프레드 세토라는 그 사실을 부인했다. 승마 클럽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관리하던 말이 흥분하면서 그 말에 타고 있던 회원이 가벼운 현기증을 일으킨 사실은 있으나 다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그 회원이 조슈아 세토라인지 묻는 질문에 관계자는 입을 다물었다.
임페리얼 승마 클럽은 19XX년에 설립된 곳으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최신식 설비를 갖추어…….』
“기사는 대충 이 정도로 마무리했습니다.”
조엘은 책상에 거만한 자세로 앉은 고용주에게 신문을 건네며 한숨을 쉬었다. 얼굴 팔러 간다더니 거기서 사고를 치고 올 줄이야.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안 하니 조엘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 고용주한테서 사건 경위를 들을 가망이 없자, 노아를 구슬려 얘기를 들으려 했으나, 어째선지 노아도 거기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건 경위는 모르나, 알렉스가 세토라 사장의 금지옥엽 막내아들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알파 페로몬을 뒤집어쓴 조슈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실례를 해 버렸단다.
망신당한 게 분해 발작하다가 클럽 하우스 테라스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 구급차를 부르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만 조엘이 아는 사실이었다.
평소 오만하고 제멋대로 날뛰던 그 오메가는 다친 다리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크지 않았을까.
가십을 좋아하는 돈 많은 한량들이 모여서 그걸 봤으니 상류층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마도 조슈아는 두 번 다시 그들 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하겠지.
“세토라 회장이 이 일을 덮고 넘어가자고 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대표님이 오메가를 위협하려고 페로몬을 완전히 개방했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졌을 겁니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저지른 것 같아?”
“세토라 회장이 고소하길 바라기라도 하셨단 말입니까?”
“고소는 무슨. 투자 금액을 회수할 생각이었지.”
“아…. 맞아. 세토라 제약 신약 개발에 헌트사가 투자한 게 있었죠? 이 정도로 조용히 끝났으니 투자비 회수는 안 하시는 건가요?”
“아니. 할 생각이야, 시기 봐서.”
“예? 대체 조슈아 세토라가 무슨 짓을 했길래….”
조엘은 또 한 번 답답해서 가슴을 팡팡 치고 싶었다. 이 정도로 한다는 건 어지간히 조슈아가 고용주에게 밉보인 거 같은데, 그게 대체 뭐지?
“1년 전에 해야 했을 일을 지금 하는 것뿐이야. 그보다 이제 결혼 기사 내보낼 때가 된 것 같군.”
“아….”
알렉스의 얘기에 조엘은 그제야 작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조슈아가 오메가 페로몬으로 무장한 채로 고의로 고용주에게 접근했었지.
그때도 알렉스에게 망신을 톡톡히 당하더니 이번에도 설마 같은 짓을 했나? 노아까지 같이 있었을 텐데?
조엘은 대충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무래도 고용주는 제 결혼의 진실성을 보여 주려고 일부러 조슈아에게 복수하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쯤 하면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알렉스가 꽤 노아를 아끼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홍보팀에다 관련 내용 전달하겠습니다. 기사 초안이 나오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휘휘 손을 내젓는 알렉스에게 묵례하고 조엘은 대표실을 나왔다.
의자를 밀어 자리에서 일어난 알렉스는 창가에 섰다.
칼밴시의 가장 중심가인 셀다 거리에도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헌트 인더스트리의 본사, 가장 꼭대기층의 전면 창을 바라보는 남자의 실루엣이 석양에 따라 긴 꼬리를 만들어 냈다.
190센티미터의 실루엣은 보는 이로 하여금 거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단하다.
넓고 단단한 어깨와 운동으로 다져진 가슴과는 달리, 조끼 상의의 허리께는 잘록해 그의 역삼각형 몸을 그대로 비추었다.
창밖의 마천루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고요하다.
고작 3일이었던 결혼 휴가는 이틀도 못 쉬고 반납했다. 승마 클럽에서 돌아온 후 알렉스는 노아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노아를 보는 게 불편했다.
바들바들 떨며 재킷을 꼭 쥐어 오던 하얀 손과 밑바닥까지 비쳐 보일 듯한 푸른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불편해졌다.
제 품속에 그대로 감기던 그 작고 마른 몸을 떠올릴 때마다 알렉스는 찬물 샤워를 했다.
이건 일시적인 거야.
알렉스는 턱이 단단해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한 번도 페로몬을 제어 못한 적이 없는데, 최근 저택에만 돌아가면 페로몬이 제멋대로 날뛰는 기분이었다.
안간힘을 다해 세미에게 몸을 붙이고 있던 노아를 떠올릴 때마다 내장이 조여들었다.
다칠까 봐 놀란 건 당연하다. 6개월 동안 결혼 생활이 유지되려면 당연히 노아가 다치거나 죽으면 안 된다. 그래서 놀랐다. 그것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달려간 거다. 그대로 뒀더라면 필시 큰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냉정하게 분석하고 결론을 내렸지만, 알렉스의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고, 또 짜증이 났다.
창밖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차라리 안 보면 괜찮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터폰을 꾹 눌렀다.
“차 대기시켜.”
지시를 내린 그는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두통이 한층 심해졌다.
노아는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계속 말을 걸어오는 루시를 무시하지 못해, 지금까지 상대해 주다 겨우 제 방으로 올라온 참이었다.
그녀와의 대화가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알렉스와의 일을 물어 오는 게 곤란해서 피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오래 일한 루시는 알렉스를 어릴 때부터 봐 왔다고 한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 앞에서 거짓말하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루시는 노아가 말을 얼버무리는 걸 수줍음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가 침실을 따로 쓴다는 걸 루시는 알 텐데도 거기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와 대화하면서 얻은 건 있었다. 알렉스의 어린 시절 얘기라든가…, 그의 부모님 얘기 같은 거 말이다.
알렉스의 오메가 혐오증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고 싶었다. 루시의 과거 얘기 속에 뭔가 해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건진 건 하나도 없었다.
알렉스의 부친은 모친을 무척 사랑했고, 알렉스도 두 사람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는 얘기만 들었다.
루시 말에 의하면 알렉스가 어렸을 때는 정말 천사 같았다고 한다. 방긋방긋 잘 웃고 낯가림도 없던 아기였다고.
지금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이 안 가지만, 과거를 떠올리는 루시의 표정이 정말로 즐거워 보여서 노아는 두통을 감추고 애써 웃어 보였다.
노아는 빙글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찌르는 듯한 두통에 온몸이 축 늘어져 꼼짝도 하기 싫었다. 씻어야 하는데….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움직이며 축 늘어뜨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엄지로 반지를 살살 굴렸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이젠 조금 익숙해졌다.
승마 클럽 이후로 알렉스를 볼 수 없었다. 결혼 휴가를 반납할 정도로 바쁜 일이 생겼다고 조엘이 말했다.
귀가를 안 하는 건 아니었다. 가끔 저 휑한 복도 너머로 그의 인기척이 들리기는 했으니까.
단지 이상하게도 그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이건 아마도… 일부러 피하는 거겠지.
조엘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을 때, 노아는 침묵을 택했다. 자신이 뭔가 실수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알렉스는 귀가하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걸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노아는 벌떡 일어났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제 이틀 후면 카일을 만날 수 있다.
그걸 생각하자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욕실로 향하는 걸음이 가벼웠다.
차는 어느덧 빌딩 숲을 지나고 디콘강을 따라 달리다가 콜리나 지역으로 들어섰다. 불야성을 지나 한적한 곳으로 차는 쉼 없이 달렸다.
상주 고용인이 없는 저택은 완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정원 등의 노란 불빛이 주변의 풍경을 비추었다.
흰 세단을 적당한 곳에 세운 알렉스는 핸들을 잡은 채로 불 꺼진 저택을 응시했다.
오늘은 저택에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회사 근처 콘도에서 자고 바로 출근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휑하니 빈 콘도 안이 몹시 낯설고 이상했다. 알렉스는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깜깜한 실내와 달리 밖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화려했다. 알록달록한 시가지의 불빛이 쉴 새 없이 알렉스의 얼굴을 물들였다.
아주 오래, 그것도 네온사인마저 꺼져 가는 자정이 한참이나 지난 후 알렉스는 적막한 그곳을 나왔다. 주차장에 세워 뒀던 세단을 직접 몰고 무작정 저택으로 달렸다.
불 꺼진 저택을 한참 응시하던 알렉스는 핸들에 손을 떼고 차에서 내렸다.
긴 다리로 성큼 걸어 묵직한 문을 열었다. 자동 센서로 인해 주황색 등이 켜졌다.
알렉스는 목을 죄는 넥타이에 검지를 걸어 쭉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풀린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왼손에 쥐고 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오른손으로 가볍게 풀었다.
한 번에 두 계단씩 올라 금세 2층에 도착했다.
적막한 복도를 걸어가던 알렉스는 중간에 걸음을 멈췄다. 오래된 고택에서 나는 묵직한 오크 향과 미미한 먼지 냄새 사이로 아주 옅은 오메가 향이 났다.
단단하게 닫힌 문 너머, 이 냄새의 주인공이 잠들어 있다.
억제제를 챙겨 먹으라고 한 이후로 노아에게서는 페로몬의 향이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렉스에게는 달짝지근하고, 못 견디게 뒷덜미를 간지럽히는 향이 떠다니는 먼지처럼, 푹신하게 깔린 카펫 섬유의 올 하나하나에 새겨진 것처럼 그 향이 느껴졌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사라질 듯 말 듯, 건드려 대는 향기가 그를 목마르게 했다. 침입할 수 없는 성역처럼 굳게 닫힌 문을 꼼짝없이 노려보았다. 저 안에 잠들어 있는 오메가를 깨워 미치도록 감질나는 향을 쏟아 내게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묻고 마음껏 향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여린 몸을 품에 완전히 가두어 제 페로몬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시고 싶었다. 항상 젖어 있는 도톰한 입술에 제 것을 밀어 넣고….
“제길….”
퍼뜩 정신을 차린 알렉스는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문 너머 잠들어 있는 오메가가 제 생각을 눈치챌까 봐 알렉스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그날 밤도 알렉스는 찬물로 끓어오르는 몸을 식혀야 했다.
온몸이 흔들렸다. 두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무서워. 무서워.
소리 없는 외침이 뇌리를 쾅쾅 때려 댔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갈기를 한껏 움켜쥐었다.
바짝 숙인 몸이 달달 떨렸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안 돼. 숨을 죽인 채로 노아는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히이잉. 갈색 말의 긴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던 그때, 노아! 이름을 외쳐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빙글 회전했다. 떨어진다.
두 눈을 질끈 감는 그 순간, 단단한 가슴에 푹 안겨 있었다.
‘쉬, 괜찮아. 이제 안전해.’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남성적이고 묵직한 향이 그대로 온몸으로 퍼졌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속삭이는 어조가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크고 단단한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귓가를 어루만지는 손이 목덜미로 내려갔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일었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었다. 갈증이 목구멍을 태웠다.
‘쉬…. 괜찮아.’
부드러운 입술이 눈꺼풀에 내려앉았다. 쪽쪽. 쉼 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에 몸은 더욱 뜨거워졌다.
더워….
‘더운 게 아니야. 이건 흥분한 거야. 이것 봐. 여기가 벌써 이렇게 됐잖아?’
휙 몸이 뒤로 젖혀졌다. 잿빛 눈동자가 집어삼킬 듯이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내리자,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 제 것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페로몬을 질질 흘리고 있는 주제에.’
“헉!”
번쩍 눈을 뜨자마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뭔가 꾸어서는 안 될 꿈을 꾼 기분이었다.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아….”
뒤척이며 일어나려던 노아는 어정쩡한 자세로 정신없이 눈을 깜빡거렸다.
뒤가 흠뻑 젖어 있었다. 속옷의 회음부가 축축한 게 느껴질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 머리를 흔들었지만, 축축하고 찝찝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아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 올렸다.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하반신이 드러났다.
얇은 잠옷 사이로, 뻣뻣하게 발기한 성기를 확인하는 순간 온몸이 붉게 물들었다.
미쳤나 봐.
후다닥. 누가 볼까 봐 서둘러 이불을 다시 덮었다. 그리고는 곧 다시 이불을 걷었다. 누가 보기 전에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허둥지둥 일어나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방에 혼자 있는데도 노아는 부끄러움에 파다닥 몸을 흔들었다. 휘청, 하고 다리가 꼬여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잔뜩 흥분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당장 흥분한 것을 달래고 싶을 정도로 몸이 배배 꼬였다.
노아는 이를 악물고 네 발로 엉금엉금 기었다.
“으흣….”
욕실까지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발을 멈춰야 했다. 이대로 손을 뻗어 성기를 쥐고 흔들고 싶었다. 움찔대는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싶었다.
“하아…, 흐,”
노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바닥에 대고 숨을 몰아쉬었다. 자극을 주지 않으면 결국 가라앉기 마련이다. 줄곧 그래 왔다.
흥분한 탓에 노아의 페로몬이 방 안 가득 퍼졌다.
아직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이렇게 흥분한 적은 없었다.
노아는 다시금 팔에 힘을 주어 엉금엉금 욕실로 기어갔다. 재빨리 옷을 벗고 몸을 씻고 싶었다.
온몸 가득한 페로몬 향도 씻어 내고 억제제도 먹어야 했다. 행여나 알렉스가 저를 발견할까 봐 노아는 다급해졌다.
욕실에 도착하자마자 낑낑거리며 잠옷을 벗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이 움찔 떨렸다.
간신히 다 벗은 잠옷을 구석에 밀어 넣고 노아는 서둘러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몸으로 노아는 어느 때보다 박박 씻었다.
“하, 으…, 읏, 으.”
몸을 문지를 때마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여전히 엉덩이 사이는 축축했고, 발기한 성기는 까딱대며 자기주장을 해 댔다.
대체 무슨 꿈이었지. 붉게 물든 뺨을 타일 벽에 대고 노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꿈을 떠올리려 눈을 감는 순간, 나직이 속삭이던 목소리가 뇌리에 되살아났다.
‘쉬, 괜찮아.’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
“아앗.”
노아는 이 이상 참지 못했다. 벽에 기대 결국 제 것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정신없이 흔들었다. 움찔움찔, 엉덩이 사이가 자르르 떨리며 구멍 사이로 애액이 울컥 쏟아졌다.
손바닥으로 성기를 꼭 감싸고 흔들던 노아는 또 다른 손을 뒤로 가져갔다. 움찔거리는 뒷구멍이 씹어 삼킬 듯이 손가락을 물어 왔다.
“앗. 앗.”
주르륵, 벽을 타고 노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완전히 몸을 말았다.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로 제 손을 가져갔다.
애액을 질질 흘리는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고 몇 번이나 흔들었다. 좁고 뜨거운 그곳이 손가락을 꽉꽉 물어오며 잘게 떨렸다.
온몸이 흥분으로 떨려 왔다.
“아아, 앗, 으, 흣.”
아랫배가 바짝 조여들고, 벌어진 허벅지가 자르르 떨렸다. 엉덩이가 옴쭉대며 흥분을 부추겼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안쪽으로 파고들듯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푹푹, 소리를 낼 정도로 빠르게 안을 자극했다.
“흣, 읏.”
짧게 새어 나오는 신음이 물소리에 묻혔다. 온몸으로 쏟아지는 물줄기조차 참을 수 없는 자극이 되었다. 점점 고조되어 가는 감각에 노아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안쪽, 더 깊숙한 곳에 닿지 못해 노아는 안달이 났다. 벌어진 다리가 달달 떨렸다. 손가락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아아.
등줄기가 저릿저릿했다. 푹푹, 쑤시는 손가락을 물어 오는 내벽이 기쁨으로 파르르 떨렸다.
“아아아, 아앗―!”
긴 울음과 함께 노아는 이내 절정에 달했다. 하얀 정액이 타일 벽에 쏘아졌다.
애액으로 흠뻑 젖은 손가락이 미끈거렸다.
기력이 다 빠진 노아는 물을 맞은 채로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잘 잤어요?”
주방에 들어서자 아침 준비를 하던 루시가 돌아보았다.
“음? 왜 얼굴이 붉어요?”
“네? 어, 얼굴이요?”
아무 의미 없는 질문임에도 노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며 별거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이 있나?”
아일랜드 식탁을 돌아 나온 그녀가 노아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은데 주치의를 부를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내려오기 직전 평소보다 많은 양의 억제제를 먹었다. 아침의 일을 누가 눈치챌까 봐 페로몬을 완전히 없애야 했다.
페로몬 조절을 잘 못하는 노아는 제 몸에 남은 흥분의 흔적을 그렇게밖에 없앨 수가 없었다.
“식사 전에 차 한잔 마실래요? 금방 우려 줄게.”
괜찮다고 거절하려던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얼굴로 찬장을 열어 티포트와 찻잔을 꺼낸 그녀는 다른 장을 열어 찻잎도 꺼냈다. 차 준비를 하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맞다.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늦게 도련님이 귀가한 모양이더라고요. 또 한밤에 술이라도 마신 모양인지 술이 또 줄었지 뭐예요.”
알렉스 얘기가 나오자마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쩌면 그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차는….”
나중에 마시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가 불쑥 주방으로 들어왔다.
승마 클럽 이후로 며칠 만에 처음 마주한 그였다.
잿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노아의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손끝이 움찔, 떨려 왔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대로 노아에게 내리꽂혔다. 그의 눈꼬리가 아주 잠깐 꿈틀거리는 듯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그러다 건강 망쳐요.”
루시의 목소리에 그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보자마자 잔소립니까.”
“새벽에 들어온 것 같던데, 왜 안 자고 술을 마셨어요? 아유, 이 봐. 눈 밑이 푹 꺼졌네.”
걱정이 가득한 시선을 보낸 루시가 시원한 물을 알렉스에게 건넸다.
“토마토 스튜 만들었으니까 오늘은 아침 먹고 출근해요. 알았지?”
알렉스는 대답 없이 물 한 병을 그대로 쭉 들이켰다. 밤새 잠 한숨 못 잔 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렉스는 옆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는 노아를 보았다. 큰 눈을 깜빡거리며 윗입술을 살짝 베어 물더니 눈이 마주치자마자 목을 움츠린다.
뺨과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오른 데다 뭔가 크게 잘못한 사람처럼 시선을 피하기 바쁘다.
“어디 아파?”
“감기 기운이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괜찮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동시에 루시가 감기 얘기를 꺼냈다.
“주치의 불러. 아니면, 그때 승마 클럽에서 문제가….”
“아니에요. 정말 아무렇지 않아요. 굳, 굳이 의사는 부를 필요 없어요.”
노아는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오늘 날이 조, 조금 더운 것 같아요. 그래서….”
날씨 핑계를 대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아를 쳐다보았다. 탐색하는 듯한 그 시선에 꼼짝할 수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끝까지 저릿해 오는 낯선 감각에 노아의 뺨은 더더욱 붉어졌다.
한참 노아를 응시하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노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그가 코를 씰룩거리며 곧장 상체를 숙였다.
“…!”
목덜미 근처에 그의 숨결이 닿는 걸 깨닫는 순간, 그대로 딱딱하게 몸이 굳었다.
“억제제 먹었나?”
냄새를 확인하듯이 그가 코를 킁킁거렸다. 목덜미에 따스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노아는 울상을 지었다. 왜, 왜 이러지? 억제제… 많이 먹었는데, 설마 페로몬이 계속 새어 나온 걸까.
숨결이 닿자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절로 목이 움츠러들고 어깨가 말렸다.
“먹, 먹, 먹었어요. 불쾌하시면…, 약, 더 먹을게요.”
휙 몸을 일으킨 알렉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한껏 몸을 움츠린 노아를 바라보는 시선에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방금 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희박할 정도로 희미한 오메가 페로몬을 맡으려고 하다니.
기가 막혔다.
“됐어. 확인한 것뿐이야. 페로몬 같지도 않은 흐리멍덩한 향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불쑥 나타난 알렉스는 사라질 때도 뜬금없었다.
“식사는요?!”
멀어지는 알렉스의 등 뒤에서 루시가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왜 저러지?”
루시가 되물었지만, 노아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방금 닿았던 그의 숨결이 여전히 목덜미에 머물러 있었다.
* * *
“우와―. 이게 누구야? 내가 아는 노아 칼튼 맞아?”
바로 들어서는 노아를 발견한 카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벌떡 일어나더니 곧장 노아에게 다가가 주변을 맴돌며 휘파람을 불어 댔다.
“놀리지 마….”
잘 지내는 걸 보여 주겠다는 생각에 나름 멋을 부렸더니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후드티에 네이비 블레이저 재킷, 그리고 검은색 진을 입은 노아는 생기 넘치는 대학생처럼 풋풋해 보였다.
“놀리는 거 아니야! 너 엄청 근사해. 이러니까 미모가 확 살아나네.”
“카일.”
“왜? 너 얼굴 예쁜 줄은 알았는데, 이러니까 정말 예쁘긴 하네. 보여? 여기 있는 놈들 눈 돌아가느라 바쁜 거? 아무래도 오늘 내가 너 가드 하느라 고생할 거 같다.”
“오랜만에 봤는데 자꾸 놀리기만 할 거야?”
카일은 쑥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노아에게 싱긋 웃었다.
“자, 일단 앉아. 뭐 마실래? 가볍게 식사라도 할까?”
노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카일은 요깃거리가 될 만한 걸 골라 시켰다.
맥주를 건네는 바텐더의 시선이 노아를 훑었다. 눈동자에 어린 감탄을 읽은 카일은 낄낄거리며 노아에게 그것 보라며 내 말이 맞지 않냐고 으스댔다.
즐거운 듯 한참 노아를 놀리던 카일이 맥주를 한 모금 털어 넣고는 물었다.
“너 보니까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제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직장도 그만뒀잖아. 충분히 쉴 만큼 유산이 남은 거지?”
“어? 으응…. 유산은 충분해. 그, 그동안 너무 일만 했잖아.”
거짓말하는 건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
노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근데 결혼 얘기 언제 꺼내지….
“뭐, 그건 그렇지. 빚 때문에 한 번도 쉰 적이 없었잖아. 이번 기회에 느긋하게 쉬면서 앞으로 뭘 할 건지 천천히 생각해도 되지 뭐.”
“응.”
노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결혼이 끝나면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한 게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6개월이나 남았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건 좀 더 여유를 갖고 생각해도 될 터였다.
“그보다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노아는 카일의 질문에 멈칫했다.
“어? 뭐, 뭐… 말이야?”
오른손으로 턱을 괴더니 슬쩍 고개를 기울인 카일이 슬쩍 노아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반지.”
“이, 이거…?”
노아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숨기듯 오른손으로 감쌌다. 자신이 말하기 전에 카일이 먼저 눈치챘다.
어쩌지…, 말해야 하는데….
“네가 이유 없이 그런 액세서리를 할 리도 없고. 뭐야? 말해. 설마… 결혼반지는 아니지?”
절대 그럴 리는 없다는 말투에 노아는 당황했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자 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설마, 진짜 결혼한 거야? 노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 이거…, 그게 말이지……. 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정말 결혼반지야?! 노아!”
카일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눈꼬리가 안 그래도 올라간 카일의 눈매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말해. 너 누구한테 속았어? 어떤 새끼가 너 꼬드겨서 결혼하자고 한 거야? 대체 며칠 됐다고 그새 결혼을 해? 너 사기 결혼 당한 거 아니야?!”
폭풍처럼 말을 쏟아 내며 카일이 흥분했다. 그냥 뒀다가는 사기꾼 새끼 죽이러 간다고 난리 칠 것 같아서 노아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설명할게. 이거 설명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빨리 앉아 봐. 노아는 달래듯 그에게 부드럽게 부탁했다.
여전히 사나운 표정으로 카일이 털썩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해 봐. 일주일도 안 되어서 결혼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어…, 그게….”
말하기 전 노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한 탓인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기도 모르게 왼손 약지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달달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유산 문제 때문에 그 가족을 만났다고 했잖아. 에디 할아버지 손자분 말이야.”
듣고 있다는 듯 카일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사, 사실은… 에디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부터 알고 지냈어.”
제 얘기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걸까. 노아는 카일을 힐끔 쳐다보았다.
“지금 네 말은 에디의 손자랑 결혼했다는 말이야?”
“응. 응.”
노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몇 마디로도 카일은 단번에 노아가 무슨 얘길 하는지 알아챘다.
“그렇게 안도하는 얼굴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그놈이랑 그 전부터 알고 지냈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그놈이랑 결혼해? 근데 왜 조용히 했어? 나한텐 한마디도 말 안 하고? 그리고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나한테 얘기할 기회는 아주 많았을 텐데?”
쏟아지는 질문에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카일은 매우 엄한 표정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그게…, 결, 결혼을 조용히 치른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기도 했고…. 그, 그 사람이 좀 유명한 사람이라…….”
“유명? 설마, 자기가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결혼 사실을 알리면 시끄러워지니까 우리 둘만 조용히 하고 때가 되면 사람들한테 알리겠다고 했어?”
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비슷한 이유로 결혼식을 조용히 치른 건 맞았다.
카일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진한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아. 네가 순진한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순진한 줄은 몰랐네. 그 새끼 알파지?”
“응…. 왜에? 그, 사람. 이상한 사람 아니야.”
“너한테야 아니겠지! 그 새끼가 작정하고 너 속였을 테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버럭 내지른 카일은 흠칫 어깨를 떠는 노아를 달래듯 손을 꼭 쥐었다. 카일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하이스쿨 때도 그딴 새끼들 쳐 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잘 들어, 노아. 결혼을 숨긴다는 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다는 말이야. 유부남이 싱글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말인데, 그딴 놈을 두둔해? 싱글 행세하는 놈이 밖에서 애인을 안 만든다는 보장이 없잖아. 안 그래?”
걱정스러운 카일의 충고에 노아는 뭐?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카일이 오해하고 있는 걸 알아챘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카일, 네 오해야. 그 사람이 유명하다는 건 사실이고, 결혼식만 조용히 치렀을 뿐이야. 그 사람 회사에도 배우자 신분으로 방문했고, 그 사람이 다니는 승마 클럽도 다녀왔어. 그리고 우리 데, 데이트도 많이 했어.”
데이트라는 단어를 쓰면서 노아는 뺨이 달아올랐다. 일부러 얼굴을 보이기 위해 외출하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노아는 알렉스 배우자로 소개가 됐고.
노아의 손을 꼭 잡고 충고하려던 카일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 바텐더가 푸른색 칵테일을 슬쩍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저쪽 분들이 보내신 겁니다.”
바텐더의 눈짓에 좀 떨어진 테이블을 휙 돌아본 카일은 표정을 구겼다. 머저리같이 생긴 알파 두 명이 똑같은 칵테일을 들어 올리며 바보 같이 웃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이건 안 받겠습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들어오는 요청은 전부 거절해 주세요.”
지금 헌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매정하게 거절한 카일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려 노아를 돌아보았다.
“그거 정말이야? 그 개새끼가 너 갖고 노는 거 아니라고 확신해?”
카일의 적나라한 표현에 노아는 쓰게 웃었다. 거짓말한 건 아니지만 카일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뜬금없이 결혼했다고 하니 못 믿겠지.
“있잖아…. 에디 할아버지가 평범한 분이 아니셨거든. 너 헌트 인더스트리라고 알아?”
노아를 좀 더 다그쳐서 사실을 들으려던 카일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건 왜? 하고 되물었다.
“엄청난 규모의 물류 허브를 가지고 있는 회사잖아. 투자, 유통, 호텔 사업을 크게 하는 그룹 아니야? 갑자기 헌트 얘기는 왜 해?”
“그게… 결, 결혼한 분이… 에디 할아버지 손자이자, 현재 헌트 그룹 대표이사거든….”
힘겹게 말을 꺼내자마자 노아는 카일의 반응을 살폈다. 이것도 거짓말이라고 하면 그땐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사진 보여 달라고 하면 어쩌지…? 핸드폰에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걸.
노아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카일이 잔뜩 표정을 구긴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헌트 그룹 대표 이사님과 결혼했다고, 나….”
대답을 확인하자마자 카일이 또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순진한 너 꼬드긴 그 후레자식이 헌트 그룹 대표라고?”
“나쁜 사람 아니야.”
변명하자마자 불쑥, 뻗어 온 손이 맞잡고 있던 두 사람의 손을 떼어 냈다.
“이건 뭐야?”
고개를 치켜들고 바락 화를 내던 카일은 눈앞에 선 알파를 올려다보았다.
“말이 너무 심하네. 얼굴 한번 안 본 상대가…. 노아, 친구한테 이런 얘기 듣고 있었어?”
덜컹. 의자가 흔들릴 정도로 노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 알렉스. 여, 여긴 어떻게……?”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지? 깜짝 놀란 노아에게 알렉스가 짐짓 다정한 태도로, 노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봐. 믿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혼자 오더니 친구한테 홀대나 받고 말이야.”
언제 같이 오겠다고 했어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노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알렉스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노아의 어깨를 슬쩍 감으며 눈을 부라리는 상대에게 말했다.
“당신이 노아가 말하던 가장 친한 친구로군. 그쪽이 말하던 그 후레자식 나타났는데 우리 소개나 할까?”
최고급 슈트를 입은 알렉스의 모습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단단한 체구와 두툼한 흉통. 아래로 내려가며 좁아지는 허리선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다리.
수제가 틀림없는 윙팁의 정장 구두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으로 처바른 티가 물씬 풍겼다. 그렇다고 천박한 것이 아닌, 타고 나길 오만한 지배자의 기운을 가진 알파였다.
하지만 카일은 눈앞에 선 알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꼬리를 끌어올린 표정도 재수 없었다.
“알렉스 헌트. 그쪽은?”
“카일 밀러. 그쪽이 노아 남편이야?”
“그렇지. 이거 보여?”
알렉스가 왼손 약지를 들어 노아와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음을 보여 줬다.
겨우 통성명을 했을 뿐인데도, 노아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알렉스를 쏘아보는 카일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알렉스 역시 카일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카일을 어디서 만나는지 자신은 말한 적이 없었다.
“내 파트너가 어딜 가는지 내가 몰라서야 쓰나. 그리고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우리 결혼 기사가 났어. 오면서 파파라치가 따라붙었더라고.”
“기사요?”
“그래. 당분간은 절대 혼자 다니지 마. 워낙 비밀스러운 결혼이라 궁금해하는 작자가 많거든.”
“잠깐. 노아가 어디 가는지 감시를 붙였다는 말이야?”
얘기 도중 끼어든 카일이 매섭게 물었다.
“감시라니? 이건 노아의 안전을 위한 조치야.”
“아니, 파파라치 얘기 전에 노아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고 했잖아. 보아하니 노아가 말한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길 어떻게 왔어? 감시 붙인 거 아니야?”
“그건 당연히 노아를 여기까지 데려온 기사에게 물은 거지. 네 친구는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알렉스가 노아에게 슬쩍 말을 돌렸다.
“아…, 친, 친구는 절 걱정해서 그런 거예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날 후레자식이라고 부른 것도 걱정해서 한 말이겠지?”
노아가 미안한 얼굴로 그건, 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봐, 왜 자꾸 노아를 걸고 넘어져? 후레자식이라고 부른 건 나라고.”
“이것 봐. 또 후레자식이라고 부르네?”
“카일. 그만해. 알렉스, 미안해요.”
“왜 네가 사과해? 내가 의심하는 거 당연하잖아! 누구라도 나처럼 생각할 거야. 절친이 갑자기 결혼했다는데 걱정하는 거 당연하잖아.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대뜸 후레자식이라고 말하는 건 괜찮은가 보지?”
“아, 진짜 이 사람 피곤하게 하네. 당신 재수 없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
“글쎄? 다들 내 앞에선 욕을 안 하더라고.”
두 사람의 말다툼에 노아만 중간에서 울상이었다. 그만하라고 카일을 말려 봐도 한번 화가 나면 끝장을 보는 친구라 아무래도 조용히 끝날 거 같지 않았다.
노아는 빈정대는 카일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만해, 카일…. 결혼 사실 늦게 알린 건 내 잘못이야. 먼저 얘기했어야 했는데…, 나도 정신이 없었고, 너 놀랄까 봐….”
화내지 마, 응?
꽉 쥔 주먹을 감싸며 노아는 카일을 달랬다. 속상함이 가득한 얼굴로 카일을 올려다보자 표정을 구기고 있던 카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은 마음 약한 친구가 내내 이 일로 신경 쓸 게 뻔해 억지로 화를 내리눌렀다.
“알았어.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거지, 너한테 화난 거 아니야.”
카일이 자연스럽게 노아의 손을 맞잡으려는 순간, 조금 전 제 손을 잡고 있던 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당함에 알렉스를 노려보자 당연하다는 듯 그가 노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물론 노아의 손도 그가 차지했다.
이 자식!
짜증이 나서 한마디 하려는데 노아의 눈동자가 또 서글프게 카일을 응시했다.
카일은 노아에겐 화를 못 내고 알렉스만 죽어라 노려보았다.
이 뻔뻔하고 오만하고 재수 없는 자식이 노아의 배우자라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마음 약한 노아를 제멋대로 휘두를 게 뻔하다. 자기가 먼저 알았더라면 절대로 저런 놈하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했을 텐데.
“회사는… 안 바빠요?”
카일의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마자 노아는 알렉스를 신경 썼다. 어째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회사가 중요한가? 네 소중한 친구 얼굴이 궁금해서 참을 수 있어야지.”
카일 얘기를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궁금했다고? 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제 일에 관심 가진 적이 없는데, 이것도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계획일까.
“결혼하기 전까진 너하고 같이 살았다는데, 내가 당연히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
“…왜요?”
“왜긴 왜야. 친구라고 하는 놈이 친구인지 전 애인인지 알게 뭐야? 친구라는 말만 믿고 있다가 나중에 정부라고 밝혀지기라도 하면 나만 곤란하잖아.”
“뭐?! 이 자식! 너 말 다 했냐?”
발끈한 카일이 알렉스에게 덤벼들자, 노아가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알렉스. 그만 하세요. 카일은, 친구가 맞아요.”
“친구치고는 너무 친밀하지 않나? 난 내 친구들과 그렇게 친밀하지 않은데?”
“네놈한테 친구가 있긴 해? 이 저질스러운 자식아!”
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다. 사사건건 알렉스는 빈정거렸고, 성격이 불같은 카일은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
노아만 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았나 봐.
노아는 울고 싶었다.
* * *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알렉스 헌트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들고 대표실로 들어온 조엘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런 표정일 땐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아야 적절히 대응할 수가 있다.
기사에 실린 사진이 마음에 안 드신 건가? 아니면 노아랑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며칠 전에 노아의 친구를 만난다더니 그때 사건이라도 터졌나?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떠올려 봐도 딱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대표님…?”
아는 척도,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조엘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알렉스가 그제야 반응했다.
“조사 좀 해.”
“조사요? 누구요?”
“노아 칼튼.”
갑자기? 궁금증을 참지 못한 조엘이 물었다.
“전에 조사했었잖아요. 뭘 또 조사하라는 겁니까?”
“전에 조사한 건 인적 사항뿐이잖아. 좀 더 자세한 게 필요해.”
“좀 더 세밀하게요? 인적 사항 빼고 말입니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행적, 학창 시절에 어땠는지, 지금까지 사귀었던 놈들은 어떤 놈인지. 그 룸메이트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떤 관계인지 등등 말이야.”
줄줄이 흘러나오는 말에 조엘은 그제야 눈치챘다. 노아 친구하고 무슨 일 있었구나.
“그 친구분의 행적도 전부요?”
당연한 걸 되묻지 말라는 얼굴로 알렉스가 사납게 조엘을 노려봤다.
이크, 잘못하다간 나한테 불통 튀겠네. 눈치 빠른 조엘이 냉큼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전부 다 조사해. 아주 세밀한 것까지 모두.”
알렉스의 명령에 조엘은 슬쩍 낯을 찌푸리긴 했지만 여기서 더 대거리했다가는 저 성질 나쁜 고용주가 무슨 난리를 피울지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다.
알렉스는 조엘이 서둘러 대표실을 나가 버리자 또다시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둘이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카일에게 기대는 노아의 모습이 떠오르자 짜증이 솟구쳤다. 손을 만지작대는 행동도 그렇지만, 그 표정이 정말 사람을 열 받게 했다.
신뢰 가득한 눈빛이라니.
알렉스가 보아 왔던 노아는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피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불편해하는 모습이었다. 답답할 정도로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다.
물론 아직도 노아에 관한 모든 의심을 지운 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조부에게 접근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지만, 노아가 조부를 도와 준 게 거짓이 아닌 걸 알게 되니 그 의심은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거기다 직접 겪은 노아는 그렇게 영악하게 구는 타입이 아니었다. 페로몬으로 개수작을 부리는가 싶었지만, 억제제 챙겨 먹는 걸 잊지 않았고 쓸데없는 짓을 벌이지도 않았다.
노아에 관한 인식을 막 바꿀 참에 친구와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하는 걸 보니 또다시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의심은 알렉스를 매우 불쾌하게 했고,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알렉스는 정확하게 결론 나지 않은 제 기분을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불확실한 게 원인이라면 그걸 제거하면 된다. 자신이 모르는 노아의 인간관계에 티끌이라도 존재한다면, 차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알렉스는 그걸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쾌함을 해소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혼전 계약서에 버젓이 기재된 정절의 의무를 노아가 어긴 거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알렉스는 제 손에 쥐어진 서류가 카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양손으로 거칠게 구겼다.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도련님이 질투하셨나 보네요.”
“네? 그, 그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절대로.”
자리에서 펄쩍 뛰며 노아는 손사래를 쳤다.
차를 따라 내밀던 루시가 모르는 소리 말라면서 빙긋 웃었다.
“도련님은 어릴 적부터 제 것에는 강한 애착을 보였답니다. 분명 노아 씨가 친구분과 너무 친한 게 질투 나서 그랬을 거예요.”
속 모르는 루시의 말에 노아는 그런 게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했다. 어차피 그녀는 결혼의 속사정 같은 건 모를 테니까.
노아는 알록달록 꽃이 핀 화단으로 눈을 돌렸다.
날이 좋았다. 이제 완연한 봄이 되어 저택 정원 곳곳에 꽃이 만발했고, 햇볕은 따스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루시가 정원에서 차 한잔하지 않겠냐고 권유해 와 쫄래쫄래 따라왔다가 어쩌다 보니 그날 일을 입에 담게 되었다.
루시는 알렉스가 질투한 게 틀림없다면서 확신에 차 말했지만, 노아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그날 그가 보인 반응은 자신과 카일의 관계를 의심해서였다.
하이스쿨 때도 카일과의 사이를 오해하는 애들이 많았다. 카일이 하도 자신을 싸고돌아서 대놓고 둘 중에 누가 박냐고 빈정대는 애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노아와 카일은 남들이 생각하는 성애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카일이 보호자 노릇을 했던 것뿐이었다.
그건 다 자신이 너무 소심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렸기 때문이었다.
‘네 교우 관계를 간섭할 생각은 없지만,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까진 조심해. 난 이런 스캔들에 오르내리고 싶은 생각 따윈 없으니까.’
‘카일하고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런 사이고 아니고, 그건 나랑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저딴 놈이랑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서 비비고 속살거리고 낄낄대면 기자들이 아주 좋아하겠지.’
‘제가 언제….’
‘명심해. 파파라치는 네 사정 같은 거 봐주면서 사진 찍지 않아. 별 시답잖은 장면도 불륜 현장으로 만드는 게 그 작자들이니까.’
서슬 퍼런 경고에 노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카일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울적해졌다.
그의 말대로 파파라치가 언제 어느 때 어떤 사진을 찍을지 모르니까.
그날 이후로 알렉스의 기분은 내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던 그였는데, 요즘은 마주칠 때마다 눈빛이 사나워 이번엔 노아가 그를 피해 다녔다.
“곧 도련님의 취임식이네요. 노아 씨도 취임식에 참석하죠?”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노아는 시선을 옮겼다.
“아, 네.”
대답하고 나니 그날 일이 걱정이었다. 공식적으로 노아가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로 서는 날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격식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노아는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었다. 실수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요? 걱정돼요?”
“네…. 전, 그런 자리는 처음이라….”
“그런 자리가 뭐 그리 특별한가요? 걱정하지 마요. 사람들은 노아 씨를 좋아할 거예요. 이렇게 예쁜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나요? 오히려 도련님을 엄청 부러워할걸요?”
“정말 그럴까요?”
“암요. 전부 부러워할 거예요.”
확신에 찬 그녀의 응원에 노아는 피식 웃었다.
쪼르륵 차를 따르던 그녀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걱정거리가 있어요?”
“회장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누구보다 좋아하셨을 텐데…. 도련님 결혼 소식을 모른 채로 돌아가셔서 안타깝네요.”
푹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노아는 대답 없이 쓰게 웃었다. 그분은 아실 거예요. 이 결혼을 추진한 게 에디니까. 에디가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노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결혼을 기뻐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티타임이 끝날 무렵, 알렉스가 헨리와 함께 정원으로 들어섰다.
“도련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등지고 앉아 있던 노아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왜 그가 벌써 왔지?
“벌써 퇴근하셨어요?”
“퇴근은 무슨. 볼일이 있어서 잠깐 들른 거야.”
천천히 몸을 돌리자마자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볼일이라는 게 아무래도 난가 보다.
노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착 가라앉은 시선이 천천히 노아를 훑었다. 투명하리만치 깨끗한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반짝거리는 듯했다. 살짝 들린 윗입술은 도발하듯이 반들거렸다. 푸른색의 맑은 눈동자가 순하게 알렉스를 올려다본다.
알렉스는 알 수 없는 물결이 제 안을 휘젓는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가 일부러 제 속을 파헤치는 것처럼.
“이대로 가도 되겠군. 따라와.”
그는 일부러 차갑게 말을 꺼내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로 자박거리는 느릿한 걸음 소리가 아주 약하게 들려왔다.
“어디 가는데요…?”
주차한 곳까지 따라온 노아는 차에 타기 전 물었다. 운전석 문을 열다 말고 알렉스가 노아를 쳐다보았다.
“왜? 약속 있나? 아니면 그 친구를 또 만나?”
“아니요. 그건 아니고…. 갑자기 어딜 가자고 하시니까….”
어쩐지 눈빛이 추궁하는 듯해서 노아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가봉하러 가는 거야. 옷 맞춘 거.”
“아….”
“빨리 타. 시간 없으니까.”
냉큼 운전석에 타 버린 그를 따라 노아도 꾸물대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늘은 웬일인지 기사 없이 그가 직접 운전하고 온 모양이었다.
차는 장인의 거리를 향해 달렸다. 차 안에 감도는 침묵에 노아는 괜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힐긋힐긋.
몇 번 눈동자를 굴려 그를 훔쳐보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든 건지 전방을 응시하는 얼굴은 설핏 찌푸려져 있었다. 꾹 다문 입술은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노아의 시선은 핸들을 쥔 손으로 향했다.
핏줄이 툭 불거진 손등의 뼈가 핸들을 돌릴 때마다 도드라졌다.
누군가 공들여 그린 듯한 반듯한 옆모습은 그 자체로도 완벽했다. 단단한 턱선은 지극히 남성적이었고, 툭 튀어나온 목젖은 이따금 꿈틀거렸다.
맞춤 슈트를 입은 탓인지, 옷의 주름에 따라 팽팽하게 당겨진 부분의 근육이 몹시 두툼했다.
푸른 눈동자는 또다시 승마 클럽에서의 일을 더듬고 있었다. 온전히 제 몸을 감싸 안았던 그의 단단한 육체. 귓가에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 코끝을 간질이던 알파 페로몬이, 마치 방금 뿌린 향수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쩐지 갈증이 일었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 노아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순간 노아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눈치를 봤다.
“점심 안 먹었어?”
“아, 아니요?! 먹었어요.”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노아를 잠시 쳐다보았다. 쯧. 가볍게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가봉부터 하고 간단하게 뭐 먹고 가지.”
“그, 그러실 필요 없어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그 정도 시간은 있어. 그리고 네 꼴을 봐. 누가 보면 굶긴 줄 알겠어. 나 망신시키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정말 괜찮은데…. 조용히 중얼거리던 노아는 사나워지는 그의 눈빛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의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지난번 주차했던 것과 같은 곳에 차를 대고 내렸다. 그래도 한 번 방문했다고 전보단 덜 어색했다.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업대에 허리를 숙이고 있던 테일러가 고개를 들었다.
“오셨군요.”
“준비는 다 됐습니까?”
“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일로드.”
이번에도 커튼 안쪽에서 도제가 나왔다. 알렉스와 노아를 확인하자 그가 고개를 까딱 숙였다.
“이겁니다. 외투를 벗고 입어 보시겠습니까?”
시접 처리가 덜 된 상의를 마네킹에서 벗겨 낸 테일러가 노아에게 다가왔다.
옷을 잘 모르는 노아가 보기에는 넝마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얌전히 재킷을 벗고 슈트를 받아들었다.
“바지도 함께 갈아입고 나오십시오.”
안쪽 탈의실로 들어가 넝마조각으로 갈아입었다. 바느질이 완전히 된 옷이 아니라 뜯어질까 봐 움직임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입고 온 옷을 가지런히 개켜 구석진 곳에 놓아두고 노아는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로드가 노아를 거울 쪽으로 안내했다.
노아의 모습을 테일러가 꼼꼼하게 확인하더니 팔을 들어 보시라, 단추를 잠가 보시라, 몸을 숙여 보시라 등,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그때마다 옷의 품을 확인하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주름지는 방향, 슈트의 모양까지 확인하더니 불편한 데는 없는지, 혹 팔이 땅기거나 꽉 끼는 부분은 없는지 확인했다.
옷 맞추는 과정을 처음 겪는 노아는 그가 시키는 대로 마치 인형이 된 것처럼 움직였다.
“전에 쟀을 때보다 허리가 조금 남네요. 이 부분은 수정하겠습니다.”
확인을 모두 끝낸 테일러가 최종 결과를 알렉스에게 보고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마무리만 남았으니 일주일이면 됩니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일로드가 다가와 이제 갈아입으셔도 됩니다, 며 말을 전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얘기는 다 끝난 모양인지 알렉스가 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차에 타자 알렉스가 곧장 시동을 걸었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노아는 차창 밖으로 바뀌는 풍경에 그를 보았다.
“왜 쳐다봐?”
“돌아가는 게 아닌가요?”
“가봉 끝나고 간단하게 먹기로 한 건 그새 잊었어?”
“아…. 저, 배 안 고파요.”
“치수 잰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살이 빠져? 아까 허리가 줄었다는 말 못 들었어?”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원래 들쑥날쑥해요. 굳이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면 집에 돌아가서 뭐라도 먹을게요.”
“제대로 챙겨 먹었으면 치수가 줄어들 정도로 살이 빠지진 않았겠지. 이번엔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괜찮다고 말해도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요 며칠 식욕이 그다지 없어서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건 맞는데, 그새 살이 빠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도 제때 식사만이라도 할걸.
노아는 이제야 후회했지만, 운전대를 쥔 알렉스는 목적지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를 설득하는 건 포기했다. 노아는 등받이에 몸을 묻고 조용히 창밖만 응시했다.
차는 한참을 달려 세련된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차가 멈추자 건물 안에서 검은색 베스트와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서버가 달려 나왔다. 알렉스는 자연스럽게 차 키를 그에게 건네고 노아에게 눈짓했다.
건물 내부는 현대식의 깔끔한 인테리어였다. 군더더기 없는 장식이지만, 벽면 곳곳에 노아도 이름은 알고 있는 화가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안쪽 자리로 안내해 주게.”
정장 차림의 매니저에게 짧게 지시를 내린 알렉스는 머뭇거리는 노아를 재촉해 안쪽으로 이동했다.
홀과는 구분된 안쪽의 룸으로 안내받은 그들은 서버의 시중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알렉스가 메뉴판을 눈으로 훑으며 몇 가지를 주문했다. 맞은편에 앉은 노아는 그가 주문하는 게 뭔지 알지 못했다.
노아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사각형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방이었다. 천장 몰딩은 흰색으로 유선형의 양각 무늬가 새겨져 있고, 건물의 뒤뜰을 비추는 커다란 창은 막힌 공간의 답답함을 없애 주었다.
그가 앉은 왼쪽 벽면에 걸린 풍경화가 단조로운 내부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노아는 커다란 창 너머 작은 뒤뜰을 구경했다.
실내에 흐르는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부드럽게 공간을 에워쌌다.
알렉스는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따금 팔랑거리는 노아의 긴 속눈썹을 감상했다.
부드러운 곡선의 콧날과 살짝 도톰한 입술 선을 더듬는 눈빛이 짙어졌다.
디퓨저의 은은한 향이 코밑으로 잠시 스며드는 듯했다. 알렉스는 코를 씰룩대며 이것과 매우 비슷한 오메가의 향을 떠올렸다.
은밀하게 내부로 살금살금 파고드는 연약하고 감질나게 달짝지근한 그 향.
알렉스의 내부를 들끓게 만드는 페로몬이 지금도 피부 깊숙이 새겨진 듯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렉스의 착각일 뿐이었다. 노아가 복용하는 억제제 때문에 최근에는 그 향을 맡아 보질 못했다.
알렉스는 천천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깍지 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목구멍이 쩍쩍 갈라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와 잔에 든 물을 벌컥 들이켰다.
밖을 응시하던 시선이 천천히 알렉스에게 향했다. 투명하리만큼 깨끗하고 맑은 눈동자가 아주 잠시 알렉스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떨구었다.
도톰한 윗입술을 혀로 축인 노아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알렉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뭐지?”
“저…, 페,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는데요….”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마자 노아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알렉스는 그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페로몬이 샌다고?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페로몬을 무의식적으로 개방한 적이 없었다. 오메가와 얽히는 상황 따위 만들고 싶지 않아 페로몬만큼은 철저히 제어한 그였다.
그는 제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도 노아가 지적하기 전까지 몰랐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페로몬에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마 눈앞의 오메가 때문은 아니겠지. 심각한 표정으로 그는 노아를 응시했다. 노아의 숨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제 페로몬 때문에 자극받은 게 틀림없다.
“설마, 너 이 정도로….”
“실례합니다.”
똑똑, 노크와 함께 요리가 담긴 트레이를 밀고 서버가 들어왔다. 알렉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접시 위에 정갈하게 세팅된 요리들이 하나둘씩 테이블에 놓였다.
잔에 와인을 채우고 서버가 조용히 물러났다.
살짝 흐트러진 숨을 고르려는 듯 노아가 고개를 숙였다. 불그스름한 목덜미와 귓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알렉스의 시선은 몹시 뜨거웠다.
알렉스는 자신이 핥듯이 노아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랫배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갔다.
후. 알렉스는 아주 짧은 숨을 내쉬며 애써 그 감각을 지워 버렸다.
금세 창백한 안색으로 돌아온 노아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머물렀다.
테이블에 놓인 요리는 웰던으로 조리된 스테이크 외에도 구운 채소를 예술 작품처럼 장식한 접시, 토마토가 베이스인 차가운 수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먹어. 그거 다 먹을 때까지 일어나지 마.”
“이걸… 다요?”
평소 노아의 식사량에 비하면 한없이 많은 양이었다.
“이게 많아? 보통 이 정도는 먹어.”
“저한테는 많은데요….”
“그 꼴로 취임식에 참석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 빼빼 말라서 볼품이라곤 하나도 없는 주제에 살집이라도 있어야 덜 빈곤해 보일 것 아니야.”
냉정한 그의 평가에 노아는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감시하는 그를 앞에 두고서 음식을 먹는 건 고역이었다.
차가운 수프를 반, 그리고 구운 채소 약간과 스테이크를 반 정도 먹고 나자 더는 먹을 수 없었다.
노아는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 정도면 되려나? 더는 못 먹는데….
목구멍까지 음식으로 들어찬 기분이었다. 여기서 더 먹으면 분명 탈이 날 거다.
미적미적 손의 움직임이 느려지는 걸 보던 알렉스가 한마디 했다.
“겨우 그거 먹고 지금 배부른 거야?”
반도 비우지 못한 접시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몸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어떻게 그것만 먹고 배가 부를 수가 있어?”
다 먹으라고 말하려던 알렉스는 안색이 창백한 노아를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포크를 쥔 손목이 가늘기 짝이 없다. 알렉스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입매를 꿈틀거렸다. 손에 쥐고 조금만 힘을 주면 똑 부러질 것 같은 가는 손목이었다. 하긴. 가는 건 손목만이 아니지.
한 손아귀에 꽉 들어차던 목덜미도 가늘었고, 제 허리의 한 줌도 되지 않는 저 몸도 가늘기 그지없다.
아무리 자신과 체격 차이가 크게 난다고 해도 잠깐이지만 안았을 때도 무게가 형편없이 가벼웠다.
제 품에 완전히 파묻고 덜덜 떨고 있을 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연약하고 작았다.
그 순간 저릿한 감각이 손끝에 느껴졌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어 알 수 없는 그 감각을 애써 내리눌렀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
알렉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던 노아는 그가 뭐 해? 하고 짜증 내자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일어났다.
다행이다. 남은 음식을 다 먹어야 하는 줄 알고 긴장했던 노아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매니저가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뭡니까?”
“후문으로 이동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지금 입구에 기자들이 있어서요.”
“기자?”
“네. 조금 전에 셀럽 한 분이 저희 레스토랑에 오셨는데 그분께서 기자 몇 분을 달고 오신 모양입니다.”
매니저가 죄송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연신 알렉스에게 사과했다.
“누가 왔길래 내가 뒷문으로 나가야 합니까? 어차피 기자들 관심은 셀럽에게 있을 텐데.”
“아, 그것이…….”
알렉스의 물음에 매니저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말하세요. 내가 나가면 곤란한 상황이라는 겁니까?”
매니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노아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코트니 윌슨 씨가….”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자마자 요염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알렉스. 당신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코트니.”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금발의 코트니가 우아하게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노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석처럼 서 있는 알렉스와 자연스럽게 알렉스의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는 코트니를 쳐다보았다.
코트니 윌슨. 노아도 이름을 아는 유명한 배우다. 풍성한 허니 블론드에 헤이즐넛 눈동자가 매력적인 그녀는 달콤한 외모와는 달리 실력파 배우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다수의 팬을 보유하고 있는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인기배우다.
스크린에서나 보던 배우를 눈앞에서 보는 건 비현실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노아는 큰 눈을 깜빡거리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는 사이일까? 어떻게 아는 거지? 헌트 그룹의 대표쯤 되면 배우하고도 친구 하게 되는 걸까.
혼자 이런 생각을 떠올리다 노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건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의 몸짓은 매우 친밀하고 노골적이었다. 자연스럽게 알렉스의 팔짱을 끼는 거나, 말을 할 때마다 알렉스의 팔을 건드리고, 은근슬쩍 가슴에 손을 올리는 행동들은 단순히 아는 사이에서는 나올 수 없는 친밀함이었다.
문득 노아는 몇 년 전, 코트니 윌슨이 대기업 후계자와 결혼설이 나돌았던 것이 생각났다.
아, 그 사람이 알렉스였구나….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먹었던 게 올라올 것 같았다. 노아는 주먹을 꼭 쥐고는 불편한 속을 애써 내리눌렀다.
알렉스와 다정하게 얘기 나누던 그녀의 시선이 노아에게 향했다.
“이쪽은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혹시 신인 배우인가?”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이쪽은 노아 헌트. 내 파트너지.”
견제하던 시선이 일순 놀란 듯 크게 뜨였다가 곧 표정이 바뀌었다.
“결국 오메가랑 결혼했군요? 절대로 안 한다더니.”
“내 결혼 사정에 대해서 당신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군.”
“당신 결혼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어요? 그냥, 알파가 하는 말은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에요.”
우아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노아는 괜히 자신이 불청객이 된 기분에 시선을 내렸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기자가 진을 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그들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나?”
“당신은 너무 자기중심적이에요. 과거 연인이었던 여자와 이제 막 결혼한 신부가 같은 레스토랑에서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이분 입장이 뭐가 되겠어요?”
“피하면 피하는 대로 소설을 써 댈 작자들이야. 펜대를 함부로 굴리다가 인생 말아먹을 거 아니면 입조심들 하겠지.”
단호한 알렉스의 태도에 그녀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풍성한 허니 블론드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노아는 그들을 지켜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스캔들에 조심하라고 했던 건 알렉스가 아니었던가. 당신은 왜 조심하지 않나요? 이렇게 묻고 싶었다.
알렉스의 당당한 태도가 노아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저 대배우에 비하면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가.
자신이 오메가라서가 아니라, 그의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이라서, 눈치 볼 필요도 없는 거겠지.
노아는 조금 억울하고, 심란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노아, 당신도요. 혹, 배우 할 생각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 줘요. 얼굴이 정말 끝내주네요.”
코트니는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퇴장할 때도 우아했다.
알렉스는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에게 차는 정문으로 갖다 놓으라고 말했다.
“혹 기자들이 질문해도 아무 말 하지 마. 그리고 죄지은 것처럼 고개 숙이지 말고.”
노아에게 당부하던 알렉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노아의 시선은 미묘하게 아래로 향해 있고, 입술은 꾹 다물어 누가 보면 화가 난 줄 착각할 정도였다.
“표정이 왜 그래? 아까 먹은 게 체했어?”
노아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는 정면을 응시했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눅이 든 것도 아니었다.
노아는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고집스레 앞만 보았다.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기분이 나빴다. 마음이 술렁거리고, 삐죽삐죽 가시가 돋은 기분이었다.
정수리에 꽂히는 시선은 매니저가 차 키를 가져오면서 사라졌다.
알렉스는 거리낌 없이 정문을 열었다. 찰칵찰칵. 쉴 새 없이 셔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트니가 아닌데? 하고 술렁거리던 기자들 사이에서 누군가 알렉스 헌트의 이름을 불렀다.
각오했던 것보다 레스토랑 입구에는 더 많은 기자가 있었다.
“헌트 씨! 이곳엔 무슨 일입니까? 코트니 윌슨과 만나신 겁니까?”
누군가의 질문을 시작으로 우후죽순으로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 전에 결혼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옆의 분이 배우잡니까?! 혹시 신인 배우인가요?”
“코트니 윌슨은 무슨 일로 만나신 겁니까!”
찰칵대는 셔터 소리와 웅성대는 질문. 갑작스레 밀려드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서 노아는 넋이 나갔다.
“헌트 씨! 잠깐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연예 전문 채널의 로고가 찍힌 카메라를 든 기자가 불쑥,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노아의 어깨가 무거운 카메라 장비에 부딪혔다.
“아!”
움찔 노아가 몸을 움츠리는 순간, 알렉스는 팔을 뻗어 노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다른 팔로 카메라를 낚아채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퍼억!
비싼 장비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며 부서졌다.
웅성대던 소음이 일순 멈췄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큰 알렉스가 위압적으로 좌중을 훑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내 눈앞에 있는 기자를 응시했다.
“막무가내로 카메라 들이대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 왜들 이러실까.”
알렉스가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눈빛만은 사납기 그지없어, 지척에 서 있던 기자가 목을 움츠렸다.
“우리는 헌트 씨와 코트니 윌슨이 이곳에서 무얼 했는지 궁금한 것뿐입니다.”
“나는 이곳에 내 파트너와 식사하러 왔습니다. 그러니 비켜 주시죠. 여기 있는 카메라를 내가 다 부숴 버리기 전에.”
알렉스의 경고가 어느 정도 먹혔는지, 가까이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카메라 변상은 언제나 그렇듯 홍보팀으로 연락 주시죠. 그럼 이만.”
알렉스는 노아의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고, 차체를 빙 돌아 조수석으로 데려갔다. 문을 대신 열어 노아가 조수석에 타는 걸 확인하고, 그는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운전석 문을 열던 알렉스가 잊었다는 듯, 몸을 세우고 말했다.
“그리고 다들 아시겠지만,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기사는 싣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고소장을 받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할 말을 끝낸 알렉스는 그대로 차에 타고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뭣 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알렉스의 표정을 눈치챈 건지 기자들은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후다닥 자리를 물러났다.
찰나의 순간에 차가 부웅,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차 뒤로 쉴 새 없이 눌러 대는 셔터 소리가 그 후로도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