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거기 지내기는 어때? 좋아?
“으응….”
핸드폰을 귀에 대고 카일이 보지도 못하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반응이 그래? 생각보다 별로야? 그 노인네, 아니 그분이 남겨 준 집이 설마 되게 오래되고 고칠 곳 많고 그래?
“아니야!”
-너 반응 보니까 그런 거 같은데? 혹시 수리해야 하는 거면 내가 도와줄게. 수리할 동안은 우리 집에 있어도 되고.
“아니야. 정말, 그런 거 아니고…, 여기 엄청 좋아. 침실이 전에 쓰던 방의 세 배? 아니 한 다섯 배쯤 크고 침대도 엄청 푹신해.”
-다섯 배라고? 우와. 엄청 큰집인가 보네. 정말 내가 꼭 가 봐야겠다. 그래서 언제 초대할 거야?
노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아직 카일에게 정작 중요한 얘기를 못 했다.
“그건… 좀 더 정리가 되면….”
나중에, 혹시라도 신문이나 이런 거로 내가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되면 카일은 분명 실망할 것이다. 결혼의 속사정까진 말하지 못해도 적어도 결혼했다는 건 직접 말하고 싶었다.
“카일. 언제 시간 돼?”
-나? 어디 보자….
핸드폰 너머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주 주말에 시간 괜찮을 것 같다. 그때 만날래?
“으응. 할 얘기가 있는데 만나서 해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수상한데…?
“수상할 건 없고…, 그냥 네가 직접 들어야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긴지는 만나서 알려 줄게.”
-그래, 그럼. 토요일 3시에 내가 자주 가던 펍 알지? 거기서 보자.
카일이 지금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노아는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카일이 놀라겠지. 너무 갑작스러운 결혼이니 눈치 빠른 카일이라면 분명 뭔가 다른 게 있을 거라는 걸 알아챌 거다. 하지만 비밀유지 조항에 서명한 이상, 노아 입으로 정확한 내용을 말할 수는 없었다.
카일이 의심하지 않으려면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야 할 텐데 거짓말에는 소질 없는 노아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만 가득했다.
조엘이랑 의논해 볼까…?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조엘이 오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 잊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중얼거리며 문을 여는 순간, 바로 앞에 알렉스가 버티고 서 있었다. 막 샤워를 끝내고 방문한 듯 그의 머리칼은 젖어 있었다.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 아래로 굴곡진 팔뚝과 두툼한 흉곽이 위협적이었다.
“어디 가?”
“아, 아니요….”
“얘기 좀 해.”
그를 방 안으로 들이는 건 꺼려졌으나 거절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발코니 근처에 놓인 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노아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알렉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로 할 말을 고르는 듯했다.
“얘기 들었어.”
노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얘기?
“조부를 공원에서 발견했다고?”
“아….”
조엘이 했던 얘기 말이구나. 노아는 그제야 그가 무슨 얘기 하는지 깨달았다.
“네.”
“이미 지난 일이라 해도 조부를 도와준 건 고마워.”
입으로는 고맙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키지 않은 얼굴을 한 그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노아는 침묵했다.
“왜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
노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가 먼저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됐어.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내 태도가 바뀌진 않았을 테니까.”
“말할 생각 없었어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알렉스의 이마가 한껏 찌푸려졌다. 입매가 꿈틀거리는 게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할 얘기… 끝나셨어요?”
노아는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버릇처럼 노아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알렉스는 촉촉하게 젖은 노아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갑자기 목구멍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갈 정도로 거센 갈증이 느껴졌다.
알렉스의 잿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차라리 조부와 만난 계기가 의도적인 편이 나았다. 눈앞의 오메가가 돈만 좇는 골드 디거였다면 자신도 이리 흔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조부의 목숨을 한 번 구해 준 이를 막 대하기엔 알렉스의 양심이 찔렸다.
내리꽂히는 알렉스의 시선에 노아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졌다. 무릎 위에 둔 손이 꼼지락거렸다.
알렉스는 바짝 마른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꾹 다물고는 벌떡 일어났다.
“오후에 갈 데가 있으니까 준비해.”
이곳에 더 있다가는 저 팔랑거리는 속눈썹과 촉촉한 입술에 홀려 버릴 것 같았다.
목구멍까지 조여 오는 긴장감이 알렉스를 들쑤셨다.
“저기….”
막 방을 나서려는 알렉스의 등 뒤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다음 주에…, 친구를 만날 거예요. 결혼했다고 말해야 할 거 같아서….”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며 알렉스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친, 친구가 눈치가 빨라요. 유산 받자마자 결혼했다고 하면…, 분명… 다른 사정이 있는 걸 눈치챌 거예요.”
“그래서 우리 계약을 말하겠다고?”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말을 꺼내는 노아의 표정에 곤욕스러움이 가득했다.
알렉스는 팔짱을 끼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친구를 안 만나면 되잖아.”
“그건 안 돼요!”
그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절, 많이 도와줬던 친구예요. 제일 친한 친구고…, 제 걱정이 많은 애라…, 못 만난다고 하면 의심할 거예요.”
그건 절대로 안 된다면서 고개를 가로젓는 노아를 내려다보는 알렉스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해외 나갔다고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아니면 6개월 동안 안 보면 안 되는 사인가? 혼전 계약서에 분명 정절의 의무가 있었을 텐데? 애인을 두는 건 상관없지만 결혼 상태로는 곤란해.”
“애인 아니에요. 지금까지 신세 졌었고, 이미 유산 얘기를 했기 때문에 친구를 안심시키려면 만나야 해요.”
노아는 필사적이었다. 행여나 알렉스가 카일과 만나는 걸 금지할까 봐 걱정되었다. 6개월이나 카일을 못 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알렉스의 기분은 점점 나빠졌다. 제 앞에서 노아가 이렇게 길게, 그것도 시선을 맞추면서 적극적으로 말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면, 이렇게 필사적이지?
짜증이 솟구쳐 올랐지만, 알렉스는 억지로 그것을 내리눌렀다. 조금 전까지 조부를 구해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하지 않았던가.
지금 상황에서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애인이 아니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애인이 틀림없다.
“그 친구가 의심하지 않을 만한 결혼의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지?”
“네.”
“그럼 한 가지밖에 없지. 비밀 연애했다고 해.”
“…비밀 연애요?”
깜짝 놀란 얼굴로 노아가 되물었다.
“내 조부와 알게 된 게 6개월 전이지? 그걸 그 친구도 알고 있고.”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를 통해서 날 소개받았다고 해. 조부도 우리 만남을 적극적으로 권유했고 너도 좋아서 만났다고 하면 돼.”
“하지만… 그럼 왜 지금까지 말 안 했냐고 물으면요?”
“나 때문이라고 해. 내가 우리 결혼할 때까진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고. 알다시피 내가 좀 유명인이잖아? 연애하는 게 알려지면 네가 피곤해질 수 있어서 당분간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고. 그런데 조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결혼을 서둘렀다고.”
이런 이유를 대면 그 자식 어지간히 열 받겠지.
상상하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자길 속였다고 길길이 날뛰다가 헤어질지도 모르겠네. 화근이 될 싹은 일찌감치 자르는 게 낫다.
단단하던 알렉스의 입가가 슬그머니 풀어졌다.
“이 정도 이유면 되겠지?”
“안 믿을 거 같아요….”
“믿건 안 믿건 그쪽 사정이고, 넌 이렇게 말해. 아니면 이거 말고 더 좋은 이유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노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이유 따위 생각나지 않았다. 가짜 결혼이라는 가장 중대한 사실을 말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해도 둘러대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이따 1시에 밖으로 나와. 옷은 적당히 가볍게.”
알렉스가 나가자마자 노아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평소라면 그와 외출할 게 걱정되었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거짓말 못하는 자기 말에 카일이 과연 속아 넘어가 줄 것이냐. 더군다나 그와 비밀 연애라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쿵쿵거렸다.
“어쩌지….”
한숨처럼 새어 나온 말이 조용히 방 안으로 퍼졌다.
* * *
“오. 오랜만이네. 알렉스.”
환하게 웃으며 알렉스를 반기는 남자의 시선이 금세 그 옆으로 향했다.
“이런. 이렇게 미인이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지? 전 새뮤얼 듀프리라고 합니다. 그대 이름은?”
한쪽 팔을 배에 대고 정중하게 고개 숙인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알렉스가 자연스럽게 노아의 허리를 감싸며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파트너에게 허튼수작 부리지 마.”
싱글거리며 웃던 새뮤얼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뭐! 파트너?! 알렉스! 너 결혼했어?”
“뭐야? 알렉스가 결혼했다고?”
“무슨 소리야, 이게?”
새뮤얼의 외침으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노아는 갑자기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자 불안함에 바짝 얼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노아를 알아챈 알렉스가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오랜만에 들른 승마 클럽이다.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승마 클럽은 최첨단 관리와 고급스러운 클럽 시설로 명성을 얻는 곳이었다.
알렉스가 굳이 이곳에 온 이유는 결혼을 좀 더 널리, 그리고 확실시하기 위해서였다. 이곳 승마 클럽에서 생긴 일은 단 반나절 만에 상류층 전반으로 다 퍼져 나갈 정도로 소문의 온상지였다.
또한 이곳은 해리스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반나절이면 해리스도 알렉스가 노아를 승마 클럽에 데려갔다는 소식을 들을 것이다.
결혼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여 준다면 해리스도 조금 의심을 거둘지도 모른다.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던 알렉스 헌트가 결혼을? 그것도 오메가와?!”
“이거 섭섭한데? 왜 결혼식에 초대 안 했어?”
“나도 못 받았어.”
결혼식 초대를 못 받았다고 아우성인 사람들에게 알렉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조부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돼서 간소하게 치렀어. 나중에 정식으로 하게 되면 그때 초대하지.”
“그보다 소개는 안 해 줄 거야?”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노아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노아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함을 감추려고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알렉스와 친해 보이는 사람 중엔 알파도, 베타도 있었다. 거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오메가도 보였다.
“소개는 나중에 정식으로 하지. 오늘은 파트너에게 승마의 즐거움을 알려 주러 온 거라.”
이만 실례.
모여든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알렉스는 노아를 데리고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피했다.
홀을 지나고 클럽 안쪽 건물로 들어가자, 주위 풍경이 바뀌고 개인실이 보였다.
겨우 주변이 한산해지자 바짝 굳었던 어깨에 힘이 탁 풀렸다.
“겨우 이 정도로 딱딱해지면 어쩌지? 앞으로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 텐데.”
“죄, 죄송해요…. 갑자기 사람들이 모이는 바람에…. 저 때문에 일이 틀어진 건 아닌가요?”
노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개인실 내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사교 활동하러 여기 온 게 아니야. 이곳은 소문이 금세 퍼지는 곳이거든. 결혼을 알리는 데는 이만한 장소가 없어서 온 것뿐이야.”
“그렇군요….”
“뭐, 온 김에 겸사겸사 승마도 좀 하고…. 그나저나 말은 탈 줄 아나?”
“아니요….”
말을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노아의 대답에 놀랄 것도 없다며 알렉스가 안쪽 캐비닛을 열었다.
“이걸로 갈아입어. 여기까지 왔으니 말 한번은 타고 가야지.”
옷을 건네준 알렉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노아가 밖으로 나가자, 이번엔 알렉스가 옷을 갈아입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검은색 재킷과 검은 승마 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알렉스는 노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사이즈는 대충 맞는 것 같군. 불편하면 말해. 매니저한테 다른 거로 갖고 오라고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노아는 제 모습을 어색하게 내려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쪽으로 와. 준비는 다 됐을 거야.”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넓은 야외 공간이 나타났다. 야외 마장 공간에서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반듯하게 잘 닦인 길을 따라 좀 더 걸어가자, 유선형 지붕의 긴 사각형 건물 여러 채가 엇갈리듯 놓여 있었다.
“저기가 마사랑 실내 마장이 있는 곳이지.”
알렉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클럽하우스는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건물이었지만, 마사(馬舍)는 좀 더 고풍스러운 느낌의 건축물이었다. 승마 클럽의 부지가 얼마나 넓은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마사까지 걷는 길이 제법 길었다.
“어서 오십시오, 헌트 씨.”
“내가 부탁했던 건 준비가 다 됐습니까?”
“네. 먼저 확인하시겠습니까?”
유니폼을 입은 조련사가 안내를 도왔다.
“세미라는 암말입니다. 초보자분들이 타시기에 매우 적합하고 얌전한 아입니다.”
조련사는 마방을 열어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갈색 말이 푸르르, 콧김을 내뿜었다.
가까이 오라는 알렉스의 눈짓에 노아는 조심스레 세미에게 다가갔다.
“손등을 내밀어 냄새를 맡게 하십시오.”
조련사의 말에 노아는 세미의 주둥이에 천천히 손을 갖다 대었다. 까맣고 반들반들한 눈동자의 세미가 푸르르 가볍게 머리를 흔들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세미의 콧김이 손등이 닿았다. 노아는 손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 주시면 됩니다. 세미가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노아는 세미가 놀라지 않도록 긴 주둥이를 부드럽게 쓸며 갈기를 어루만졌다.
엄청 부드럽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자 노아는 좀 더 세미에게 다가갔다. 말을 직접 본 소감은 생각보다 무척 크다는 거였다. 그리고 엄청 예뻤다.
노아는 세미의 목덜미와 갈기를 계속 쓰다듬었다. 푸르르, 가볍게 투레질을 하는 세미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노아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하얀 뺨에 은은한 홍조가 돌았다. 붉고 도톰한 입술이 곡선으로 휘어졌다.
조련사가 알렉스의 말을 가지고 왔음에도 그의 시선은 노아에게 향했다.
미소 짓는 노아의 주변이 환해지는 듯했다. 알렉스의 눈에는 오로지 노아만이 선명했다.
알렉스는 또다시 심한 갈증을 느꼈다. 심장이 갑자기 꽉 조여드는 기분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노아가 세미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경쾌한 어조가 마치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
“안장을 얹을까요?”
온전히 노아에게 사로잡혀 있던 알렉스는 조련사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왜 내가 저 오메가한테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페로몬으로 절 유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게 노아에게선 페로몬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억제제를 먹은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은은하다 못해 희미한 그 페로몬이 느껴지는 듯했다.
“코치를 불러 드릴까요?”
“코치는 됐습니다.”
부드러운 거절에 조련사는 세미에게 안장을 얹고 단단하게 고정한 뒤 꼼꼼하게 점검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조련사가 실내에서 탈 거냐고 물었다. 알렉스는 이다음부턴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하며 조련사의 도움을 거절했다.
“고삐 잡고 따라와.”
알렉스가 제 말의 고삐를 잡고 먼저 마사를 나갔다. 노아는 어리바리한 상태로 어설프게 세미의 고삐를 잡았다. 이렇게 잡는 게 맞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세미가 노아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왔다.
따그닥, 따그닥. 말발굽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노아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알렉스는 실외 마장으로 말을 끌고 갔다. 몇몇 사람들이 여유롭게 승마를 즐겼다. 그중 알렉스를 알아본 자들이 가볍게 한 손을 흔들기도 했다.
막상 드넓은 마장을 눈앞에 두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노아도 세미를 끌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말에 올라타는 것부터 배워야겠군.”
노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제 말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더니,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일 테니까 잘 봐 둬.”라고 말했다.
그는 고삐를 느슨하게 쥔 채로 등자에 왼발을 올리고 단숨에 말에 올라탔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무척 가벼웠다.
“잘 봤어?”
“……못, 할 거 같아요….”
“해 보지도 않아 놓고 벌써 포기야?”
“하지만….”
노아는 알렉스처럼 노련하고 능숙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 노아를 내려다보더니 알렉스가 도로 말에서 내렸다. 내려올 때도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우선 왼편에 서. 이쪽에서 올라타는 게 말에게 익숙하니까.”
좀 더 가깝게 붙으라면서 알렉스가 엉거주춤 서 있는 노아를 세미 쪽으로 살짝 밀었다.
“왼손으로 양쪽 고삐랑 갈기를 함께 꽉 쥐어. 그다음 등자에 왼발을 올려. 아, 그리고 발가락 끝이 말에게 닿지 않도록 해. 올라타면서 옆구리를 건드리면 달려 나갈 수가 있으니까.”
“네. 이, 이렇게요?”
그의 지시대로 노아는 고삐와 갈기를 함께 잡았다. 왼발을 등자에 올리고 나자, 말의 높이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 났다.
“긴장하지 말고. 네가 어설프게 뻣뻣하게 굴면 말도 불안해해. 그리고 지금은 내가 잡고 있지만, 혼자 탈 때는 아주, 재빨리 올라타야 해.”
초보자용 안전 장비를 빈틈없이 차고 있는데도 노아는 불안해졌다.
“등자에 건 왼발에 힘을 주고, 오른손은 안장 뒤쪽을 힘껏 잡아당겨서 올라가. 그리고 오른발을 돌려서 안장에 걸리지 않도록 벌려서 조용히 올라타면 돼. 여기까지 알아들었어?”
“네….”
“괜히 어설프게 쥐지 말고 왼손으로 고삐와 갈기를 팽팽하게 잡는 편이 좋아. 그래야 말이 안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의 표정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매달리듯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려운 거 아니야. 자, 이제 해 봐. 내가 이쪽에서 잡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노아는 그의 설명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고삐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으로 안장 뒤쪽을 꽉 움켜쥐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
등자에 걸린 왼발을 눈으로 확인하고 노아는 양손에 힘을 주어 그대로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단숨에 시야가 바뀌었다. 오른쪽 다리를 쭉 뻗어 안장에 앉으려던 찰나 히힝, 세미가 불편한 듯 몸을 움직였다.
“아!”
휘청거리며 상체가 무너졌다. 그때였다. 알렉스가 팔을 뻗어 노아의 왼쪽 옆구리를 잡아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했다.
“그대로 발을 뻗어. 앉으면 돼.”
그의 외침에 간신히 노아는 안장에 앉았다. 놀란 가슴이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자세 잡아. 고삐 놓지 마.”
생명줄인 것처럼 노아는 고삐를 꽉 움켜잡았다. 갑자기 높아진 시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
평소에 보던 풍경과는 달랐다. 잠깐 몸을 움직여 노아를 식겁하게 했던 세미도 얌전했다. 노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허벅지는 안장에 딱 붙이고 엉덩이와 허리는 말의 리듬에 맞춰서 유연하게 움직여야 해. 그리고 팔꿈치는 몸에 가깝게 붙여.”
풍경을 감상할 틈도 없이 알렉스의 매서운 지시가 이어졌다.
“이제 내가 세미를 끌고 움직일 텐데, 옆구리 차지 않도록 조심해.”
노아는 바짝 긴장한 채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알렉스가 세미의 목덜미를 톡톡 두드리며 고삐를 잡아당기며 앞으로 이끌었다.
따각 따각. 드디어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아의 상체는 바짝 얼어붙었다.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세미가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익숙하지 않은 리듬감에 노아의 몸은 굳은 각목처럼 뻣뻣하기만 했다.
“허리에 힘 빼. 그러다 다쳐. 적당히 움직임에 몸을 맡겨도 돼.”
“하지만….”
떨어질까 봐 무서워요. 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노아는 눈을 부릅떴다.
고삐를 쥐고 여유롭게 움직이는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승마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이곳에 아주 잘 어울렸다. 그의 존재감은 이 넓은 마장 안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띄엄띄엄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을 둘러보아도 알렉스만큼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족함 없이 살아온 사람 특유의 오만하고 당당함이 그에겐 있었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에디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평생 이런 사람과 얽힐 일은 없었겠지.
힐끔거리며 그를 살피던 노아는 고개를 돌렸다.
말 위에 앉아 딴생각에 빠져 있다니, 어느 사이엔가 승마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제 혼자 타 봐.”
노아를 이끌던 알렉스가 고삐를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네?”
“멈추고 싶으면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면 돼. 얌전한 애라 별일은 없을 거야.”
이만하면 됐다면서 알렉스가 한가하게 노닐고 있는 제 말에 훌쩍 올라탔다.
“난 좀 타고 오지.”
이랴. 알렉스는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그를 태운 검은 말이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넓은 마장을 신나게 달리는 그에겐 이미 노아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노아는 세미가 날뛰지 않기만을 바랐다. 다행히 세미는 울타리 근처만 천천히 걷는 것에 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알렉스가 사라지자 노아는 잊고 있던 불안함이 밀려와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노아는 고삐를 움켜쥔 채로 몸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미안. 무서워서 이제 안 되겠어.”
다행히 노아의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세미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노아는 금세 당황하고 말았다.
“어떻게 내리지?”
올라탈 때와 정확하게 반대로 하면 될 것 같은데 설명을 듣지 않은 채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당황한 노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두리번거리던 그때, 청색 재킷과 흰색 승마 바지에 부츠까지 깔끔하게 갖춰 입은 상대가 능숙하게 말을 몰고 노아 곁으로 다가왔다.
“알렉스의 파트너라고?”
짙은 갈색 머리칼의 상대가 노골적으로 노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갸름한 얼굴에 깨끗한 피부. 승마 자세 또한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미인이네.
정말 잘 빚어진 인형 같은 얼굴의 그는 오메가였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외국에 있다가 온 거야? 아니면….”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걸 알렉스가 주워 온 거야?”
상대는 다짜고짜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럴 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노아는 그저 말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벙어리야?”
“아닙니다.”
“벙어리는 아니네. 근데… 너 말이야. 절대로 오메가는 상대 안 하는 알렉스는 어떻게 꼬셨어? 심지어 결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알렉스는 절대로 오메가랑 안 자거든.”
상대의 얘기에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조엘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혹시 알렉스 약점이라도 잡은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오메가 혐오증인 알렉스가 신분도 모르는 너 같은 애와 결혼할 리가 없거든. 아니면… 이 결혼은 그냥 형식적이라든가? 뭐, 그런 거야?”
아무 말이나 던지는 게 분명한데도 노아는 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말해 봐. 알렉스는 오메가에게 반응 안 해. 눈앞에서 페로몬을 쏟아 부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했거든. 반쪽짜리 알파라고 우리 사이에선 소문이 자자해. 그랑 잤니? 아니면 알렉스의 러트 주기 때 몸이라도 던졌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름도 모르는 상대는 턱을 문지르며 혼자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결혼했다는 건 알렉스가 그냥 한 얘기지? 우리 놀라게 하려고, 장난친 걸 거야. 그치?”
“결혼한 거 맞아요.”
결혼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여기에 온 거니까 대답은 해야겠다고 노아는 생각했다.
“거짓말할 필요 없잖아. 아니면 알렉스가 너랑 결혼하겠다고 꼬셨니? 너 정도 얼굴이니 알렉스가 드물게 오메가라도 혹하는 거 이해 가긴 하는데…, 걔는 근본적으로 어딘가 문제가 있어. 오메가 페로몬에 반응 안 하는 알파가 정상이라고 볼 순 없잖아?”
“그는 멀쩡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한 게 맞아요. 법적으로 우리는 부부예요.”
“헌트 그룹의 총수인데, 남몰래 결혼할 이유가 없잖아.”
“에디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되어서 간소하게 한 겁니다. 지금은 애도 기간이니까요.”
“아… 애도 기간….”
길게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그는 피식 웃었다.
“알렉스와 말을 잘 맞췄나 봐? 되게 준비된 대답인데?”
노아는 이름도 모르는 상대의 비꼼에 입을 다물었다. 괜히 말을 더하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실수할 거 같았다.
이 사람은 그저 분풀이하는 것뿐이다. 그의 시선이 때때로 알렉스에게 향하는 게 보였다.
거절당한 오메가 중 한 명일까.
노아는 검은 말을 능숙하게 타고 있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외모. 굴지의 대기업인 헌트 그룹의 오너.
오메가를 싫어하는 것 빼고는 그는 완벽한 알파였다.
눈앞의 오메가가 귀한 보물을 강제로 뺏긴 사람처럼 부들부들 떠는 것도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저 사람은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뭐라고 할까? 역시 그것 보라며 날 무시할까?
뭐였든 노아는 그런 얘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결혼은 6개월. 그동안엔 이 결혼에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듯 굴어야 한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말의 목덜미를 톡톡 두드리며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의 모습이 노아의 푸른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겼다.
“야! 지금 내 말 무시해?”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노아는 눈을 돌렸다. 붉으락푸르락 낯빛을 바꾸며 상대가 노아를 노려보았다.
“출신도 모르는 천한 것이 물주 잡았다고 지금 뻗대는 모양인데 이 결혼이 오래갈 것 같아?!”
노아는 상대의 말에 곤란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 결혼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 노아가 잘 알았다.
상대는 알렉스에게 거절당한 게 무척 마음이 상했던 게 틀림없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게 어디서도 거절이라곤 당해 본 적이 없는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도 모르고.
“이…!”
그때였다. 부들부들 몸을 떨던 상대가 분풀이로 세미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노아가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걸 알고 한 행동이었다.
히이이잉!
“아!”
세미가 흥분해 앞발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세미!”
노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고 고삐를 움켜쥐었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몸이 휘청했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노아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세미의 목덜미에 완전히 얼굴을 파묻었다.
갑자기 벌어진 소란은 알렉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의 눈동자가 더없이 커지더니 이내 일그러졌다.
“노아!”
알렉스가 노아를 외쳐 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제길! 고삐 잡고 매달려 있어!!”
세미에게 완전히 상체를 딱 붙인 노아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알렉스는 힘차게 박차를 가해 전속력으로 노아에게 달려갔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 노아라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게 분명했다.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알렉스를 이를 악물었다.
“이랴!”
다급하게 말을 재촉했다. 노아를 태운 세미가 어느새 울타리 가까이 접근했다. 직선으로 내달리던 알렉스는 고삐를 오른쪽으로 꺾어 방향을 바꾸었다.
흥분한 세미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깐의 실수만으로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말 두 마리가 나란히 달렸다. 느긋하게 승마를 즐기던 이들도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걸 알자마자 웅성대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조련사를, 또 다른 누군가는 의사를 부르러 갔다.
알렉스는 고삐를 고쳐 쥐고 점점 세미 가까이 몸을 붙였다.
“노아! 갈기를 꽉 잡아! 다리에 힘 풀지 말고!”
겁에 질린 노아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납작 엎드린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였다.
“내 말 들려?! 머리라도 끄덕여 봐!”
알렉스의 외침에 갈기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노아가 움찔 떨며 슬쩍 머리를 들었다.
바로 곁에서 달리고 있는 알렉스를 확인했다.
노아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다. 푸른 눈동자에 어린 두려움을 확인하는 순간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불안함에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대로 있어!”
알렉스는 왼손으로 고삐를 모아 쥐고 반대편 팔을 뻗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상대의 고삐를 쥐는 건 쉽지 않았다.
긴박감 넘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긴장감에 목 뒤가 뻣뻣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온몸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무섭게 쿵쾅거렸다. 알렉스는 있는 힘껏 허벅지에 힘을 주었고, 상체를 노아에게 기울이며 팔을 쭉 뻗었다.
늘어진 고삐가 닿을락 말락 했다. 알렉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를 악문 탓에 턱이 단단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뻗은 손끝에 세미의 고삐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제길!”
알렉스는 고삐를 잡아당겨 노아에게 좀 더 몸을 붙였다. 그대로 쭉 뻗은 팔이 간신히 세미의 고삐 끝을 잡았다.
“됐다!”
알렉스는 움켜잡은 고삐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워. 워.”
빠르게 달리던 세미가 고삐에 반응했다. 양손으로 두 말의 고삐를 잡은 알렉스는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울타리에 도달하기 직전, 질주하던 말이 천천히 발을 굴리며 멈춰 섰다.
“노아!”
알렉스는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노아에게 달려갔다.
세미의 갈기를 얼마나 세게 움켜잡았는지 노아의 양손이 새하얬다. 여전히 엎드린 채인 노아에게 다가가 알렉스는 팔을 뻗었다.
“이제 괜찮아. 아무 일 없어.”
파르르 어깨를 떨며 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 놔도 돼. 이제 괜찮으니까.”
놀란 노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을 세게 깨문 탓에 아랫입술에 핏기가 비쳤다.
알렉스는 팔을 뻗어 정신이 나가 있는 노아의 허리를 잡아 조심스럽게 안아 내렸다.
풀썩, 다리에 힘이 풀린 노아가 알렉스 품으로 꼬꾸라졌다.
“쉬…. 괜찮아. 다 끝났어. 아무 일도 없어. 이제 안전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알렉스는 노아를 달랬다.
안심해. 이제 괜찮아.
알렉스는 녹아내릴 듯 다정한 어조로 속삭이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오직, 제 품에서 떨고 있는 노아를 달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알렉스! 괜찮아?!”
상황이 끝난 걸 알자마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였다. 누군가 부른 의사가 달려왔다.
“다친 곳이 있습니까? 환자분을 내려놓으시면 저희가 확인을….”
“여기 말고. 안으로 갑시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노아가 움찔 어깨를 떨며 비죽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팔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나 단단하게 몸을 감고 있는 알렉스의 팔은 오히려 더욱 옥죌 뿐이었다.
“…저 이제 괜, 괜찮아요…. 조,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괜찮다고 말하는 노아의 안색은 지나치게 창백했다.
“그런 얼굴로 괜찮다고 말해 봤자 아무도 안 믿어. 안쪽으로 옮깁시다.”
“정말, 괜찮…. 앗!”
괜찮다고 몸을 빼려는 노아를 알렉스가 그대로 안아 올렸다. 노아가 놀라 반사적으로 그의 재킷을 꽉 움켜쥐었다.
뭐가 이렇게 가벼워?
가중되는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그의 시선은 저만치 물러서 있는 조슈아에게 닿았다. 얌전하던 세미가 갑자기 날뛴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세미가 폭주하기 직전, 노아 곁에는 조슈아가 있었다.
필시 조슈아가 무슨 짓을 한 거다.
알렉스의 눈동자는 한층 짙은 색으로 일렁거렸다. 1년 전, 세토라 제약회사에서 주최한 리셉션장에서 코가 썩을 정도로 페로몬을 개방하고서 제게 접근했던 자였다.
노골적인 그의 접근에 싸구려처럼 굴지 말고 썩 꺼지라고 대놓고 모욕한 이후로 1년이나 제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더니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
세토라 제약의 오너의 막내로 오냐오냐 자랐다더니 고작 거절당했다고 이런 짓을 해?
그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클럽 매니저가 달려 나와 그들을 VIP 휴게실로 안내했다. 따라붙으려는 친구들을 알렉스는 모두 무시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을 한 그들에게 굳이 노아의 상태를 알릴 필요는 없었다.
길고 푹신한 소파에 노아를 내려놓자마자 의사가 다가왔다.
여전히 몸을 떨며 노아는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승마 전에만 해도 깔끔하던 그의 차림이 지금은 엉망이었다. 승마 재킷은 형편없이 구겨졌고,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은 이마에 몇 가닥 흐트러져 있었다.
이마를 구기고 선 그의 잿빛 눈동자는 차가운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단단한 턱이 꿈틀거리며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것 같은 그를 보자, 노아는 얌전히 의사가 시키는 대로 지시에 따랐다.
가벼운 검진이 끝나고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는 다행히 별 이상 없다고 말했다.
“조금 놀란 것 같으니까 오늘은 푹 쉬시고, 혹시라도 어지럽거나 구토가 일면 반드시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네.”
새하얀 도자기 같은 얼굴빛으로 노아가 긴 소파에 반쯤 기대앉았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앉을 수가 없었다.
진료를 끝낸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곁에 버티고 섰던 알렉스도 함께 움직였다.
“여기서 꼼짝 말고 쉬고 있어. 잠시 나갔다 오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가 휴게실을 나가 버리자 적막만이 감돌았다.
노아는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을 꾹 눌렀다.
세미의 등에 매달려 있던 그때, 노아는 어쩌면 이대로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껏 움켜쥔 세미의 갈기가 뺨에 부딪히던 감각이 여전히 느껴졌다. 질근 감은 눈꺼풀 안으로 파고들었던 어둠이 어느 때보다 두려웠던 그때,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를 파고 들어왔다.
언제나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한껏 커져 있었고 외쳐 부르는 목소리에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
그가 제 곁으로 달려온 그 순간이 꿈만 같았다.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이 선명했다. 그의 말대로 갈기를 꼭 쥐고, 다리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버텼다.
세미가 멈추고, 그의 품에 안기는 그 순간 노아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안정감을 느꼈다.
단단하게 자신을 꽉 끌어안은 그의 품이 그때만큼은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의 페로몬이 노아의 전신을 감쌌다. 자신을 위협하고 협박하던 그 페로몬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락하고 따뜻한 요람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열기가 자신을 감쌌다. 그 후 두려움과는 다른, 낯설고 기묘한 느낌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자신 만큼 세차고 빠르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박동에 노아는 어째선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 몸을 으스러뜨리듯 꽉 껴안은 그의 팔이 어찌나 단단한지 노아는 그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어떻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찰나의 순간에 확인한 그 표정이 진짜처럼 보였던 건 두려움에 미쳐 환상을 본 것일까.
노아는 제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착각이다. 그가 자신을 걱정할 리가 없다. 아마도 그는, 이 결혼이 이대로 끝날까 봐 그게 신경 쓰였던 거다.
그래, 그게 맞을 거야.
아무도 없는 휴게실에서 홀로 노아는 그때의 순간을 떠올리며 제 어깨를 꼭 감싸 안았다. 왠지 모르게 그의 페로몬에 남아 제 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2권에 계속]
결혼 계약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