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3)

6.

시간 맞춰 밖으로 나간 노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차에 기대선 알렉스였다.

더블 버튼의 핀 스트라이프 슈트를 차려입은 그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가 넓고 흉통이 큰데도 불구하고 그가 둔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저 잘록한 허리 때문이겠지.

노아는 제 차림을 힐긋 내려다보고는 도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하고 고민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격식 있게 입은 그와는 달리 노아는 목까지 올라오는 터틀넥 니트에 가벼운 재킷과 청바지 차림이었다.

“뭐 해? 빨리 와.”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노아를 재촉해 부른 그가 먼저 차에 탔다.

옷을 지적하지 않는 걸 보니 이 차림으로도 상관없나 보다.

노아는 조금 안심하고 조수석에 자리 잡았다.

말 한마디 없이 차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 가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에 몇 번 입을 열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목소리를 내려고 할 때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노아는 얌전히 어깨에 힘을 빼고 등을 기대고 앉아 바뀌는 바깥 풍경만 감상했다. 평일 낮이라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저택에서 대략 이십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분위기가 고즈넉한 거리였다.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알렉스가 먼저 내렸다. 노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벽돌 건물들이 많았다. 어딘지 중세 시대의 한 골목 어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칼밴시에 이런 곳이 있구나.

벽돌 건물들 사이 상점 간판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 조용한 거리에도 상점은 들어와 있는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건물들을 지나쳐 붉은 나무문이 있는 건물로 곧장 향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노아는 그와 거리가 벌어지자마자 걸음을 재촉했다.

딸랑.

문을 열자마자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면을 빼곡 채운 것은 원단이었다. 가게 중앙에 긴 작업대에서 몸을 숙이고 있던 백발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백발의 노인은 알렉스를 보자마자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오랜만입니다.”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노인의 목에는 긴 줄자가 걸려 있었다.

“급하게 옷을 맞춰야 해서 방문했습니다. 시간이 좀 촉박한데 가능할까요?”

알렉스가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노아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게 안에서는 리넨과 각종 섬유 냄새가 났다. 원단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흐트러짐 없이 정리된 선반이 가게 주인의 꼼꼼한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오래된 손님이신데 맞춰 드려야지요. 오늘 방문하신 것을 보면 치수를 다시 재 드릴까요?”

“오늘은 제가 아니라 이 사람입니다. 노아, 이쪽으로.”

멍하니 가게를 훑어보던 노아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쭈뼛거리며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이 찬찬히 노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필요한 옷은 어디서 입으실 건가요?”

“다음 달에 제 취임식이 있습니다. 격식 있는 자리라 그에 맞는 정장이 필요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대표님은 원단을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동안 이분의 치수를 재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 주십시오.”

두툼한 원단 카탈로그를 꺼내 알렉스에게 건넨 노인은 가게 안쪽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불렀다.

“일로드, 이쪽으로 나와 보게.”

가게 안에 또 다른 공간이 있었던 모양인지 잠시 후 안쪽에서 커튼을 걷고 젊은 남자가 나왔다.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는 눈매가 조금 날카롭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다. 그리고 노아는 바로 알아챘다. 일로드라 불린 남자는 알파였다.

“드디어 도제를 받아들이신 모양이군요.”

카탈로그를 보던 알렉스가 흥미로운 눈으로 일로드를 쳐다보았다.

“네. 저도 이제 좀 힘에 부쳐서 사람을 들였지요. 이래 봬도 손이 빠르고 매우 꼼꼼한 친굽니다.”

간단한 소개를 마친 노인은 일로드에게 노아의 치수를 재라고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가게 안쪽, 커튼이 드리워진 근처로 안내한 남자는 노아를 거울 앞에 세웠다.

“재킷을 벗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부탁에 노아는 주섬주섬 재킷을 벗었다. 거울 속에 비친 마른 육체가 볼품없어 조금 부끄러웠다. 뒤에 선 남자가 무뚝뚝한 얼굴로 목에 걸고 있던 줄자를 꺼내 진지하게 일을 시작했다.

남이 제 몸의 치수를 재는 행위는 무척 부끄러웠다. 더군다나 이런 일은 노아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치수 재기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어깨너비부터 등, 팔 길이. 가슴둘레 등등. 잴 수 있는 모든 곳의 치수를 쟀다.

낯설고 부끄러워 노아의 뺨은 발그레해졌다. 남자는 줄자를 이용해 치수를 재고 꼼꼼하게 노트에 기록했다. 어느 틈엔가 카탈로그를 보고 있던 알렉스도 곁에 와 있었다.

상체의 치수 재기가 끝나고 일로드가 줄자를 노아의 다리에 댈 때 알렉스의 눈썹이 몇 번 꿈틀거렸다.

낯선 사람에게 몸을 맡긴 이 상황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한술 더 떠 알렉스까지 뚫어지게 쳐다보니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허리에서 다리 길이를 재느라 일로드가 한쪽 무릎을 꿇자 노아는 쑥스러움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때였다. 거울 속에 비친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붉히며 선 노아와 상반된 표정으로 알렉스의 표정은 무섭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를 악문 탓에 턱이 한층 각이 져 있었다.

“바지 품은 어느 쪽으로 여유를 두시겠습니까?”

“…네?”

질문을 이해 못 해 노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일로드가 가만히 노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지? 당황한 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였다.

알렉스의 상체가 노아 쪽으로 기울었다.

귓불에 닿은 그의 숨결에 목을 움츠리자, 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성기가 어느 방향으로 휘었는지 묻는 거야.”

재밌다는 듯, 그의 어조에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삽시간에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이런 걸 말, 말, 말해야….”

고장 난 라디오처럼 어버버대는 노아의 곁에서 알렉스가 시선을 내리더니 일로드에게 말했다.

“오른쪽으로 부탁합니다.”

휙 고개를 돌렸다. 그걸 어떻게?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알렉스가 그 순간 손을 뻗어 노아의 귀밑머리를 살짝 건드리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명색이 부부 사인데 내가 그걸 몰라서야 쓰나.”

작업대에서 원단을 하나씩 꺼내던 노인이 “결혼을 하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하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노아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알렉스가 슬쩍 뒤로 물러나 노인에게 갔다.

“네. 조부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조용히 식을 치렀습니다.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제게 미안해하실 일은 아니지요. 단지 작고한 회장님께서 무척 아쉬워하셨겠군요.”

“조부께서 맺어 준 인연입니다. 천국에서 몹시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대표님의 배우자분이 입을 옷이니 더욱 정성을 다해 짓겠습니다. 일로드. 치수는 다 쟀나?”

“네.”

일로드가 노인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곤욕스러운 치수 재기가 끝나고 나자 노아는 긴장이 확 풀렸다. 힘을 너무 준 탓에 온몸이 욱신거렸다.

“원단은 고르셨습니까?”

“여기 이 원단으로 보여 주시겠습니까?”

알렉스와 노인이 원단을 고르는 사이 노아는 벗어 두었던 재킷을 도로 껴입고 얼굴의 열이 식기를 기다렸다.

좀 더 구경도 하고 싶었지만, 왠지 일에 빠져든 두 사람을 방해할까 봐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인이 가리키는 원단을 일로드가 척척 꺼내 작업대 위에 늘어놓았다. 알렉스는 원단의 감촉을 일일이 손으로 확인했다.

“쓰리피스 정장으로 해 주시고, 원단은 역시 이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십여 분이 지난 후, 드디어 마음에 드는 걸 찾은 모양인지 알렉스가 결정을 내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노아를 불렀다.

“노아. 이쪽으로 와.”

멍하니 그들을 구경하던 노아는 제 이름이 불리자 당황했다. 쭈뼛거리며 그 곁으로 다가가자, 알렉스가 원단을 노아에게 대어 본다.

“역시 이게 어울리네요. 조끼는 저 하늘색 실크로 해 주시면 되겠네요.”

“역시 대표님은 안목이 좋으십니다.”

노인의 칭찬에 알렉스는 과찬이라며 겸양을 떨었다. 가게에 들어온 지 사십 여분 만에 옷 짓기는 끝이 났다.

열흘 후 가봉을 하러 오라는 얘기를 듣고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왔다.

볼일은 이제 끝이겠거니 했더니 알렉스가 차가 세워진 방향이 아닌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

“여기는 장인의 거리라고 불리는 곳이야. 간판도 없고, 홍보도 안 하지만 실력자들이 즐비한 곳이지.”

“…거래를 오래 한 곳인가 봐요.”

“할아버지도 저 가게에서 옷을 지었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실력자지. 옷은 그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첫 번째 지표야. 너도 이제 헌트가의 사람이니 제대로 된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해.”

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자신이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 신분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예전처럼 하고 다니면 안 된다는 얘기였다.

“이제 어디 가요?”

“옷을 맞췄으니 이제 신발을 맞춰야지.”

목적지가 명확한 그의 걸음은 빨랐다. 다리가 길어서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이미 저만치 앞섰다. 노아는 잰걸음으로 부지런히 그를 따라갔다.

그는 좀 더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까 들어갔던 가게보다 한 블록 정도를 더 걸었다. 역시 지어진 지 오래된 벽돌 건물이 즐비한 곳을 지나 육중한 오크 문 앞에 섰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 가게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진열된 구두가 많지는 않았지만 예스러운 느낌보다는 조금 더 현대적인 느낌의 가게였다.

알렉스가 들어가자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노아는 이번에도 뭐가 뭔지 모른 채로 신고 있던 스니커즈를 벗어 본뜨기용 스펀지에 발을 꾹 눌렀고, 직원이 발 둘레를 꼼꼼하게 쟀다.

그나마 몸의 치수를 재는 것보단 덜 창피했다.

신발 가게에서의 일은 삼십 분 만에 끝났다. 알렉스는 빠르게 디자인을 골랐고, 이 주 후에 재방문 약속을 하고 그곳을 나왔다.

겨우 두 군데 가게를 갔을 뿐인데 노아는 진이 다 빠졌다.

쉬고 싶다는 말도 못 하고 그가 가는 대로 뒤를 따르기만 했다. 알렉스는 골목을 빠져나와 지났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아, 이제 돌아가나 보다.

차를 세워 둔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 확인한 노아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노아는 잠시 후 바뀌는 풍경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표정이 그게 뭐야?”

“예? 아니에요….”

노아는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짜증이 난 모양인지 알렉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라고 너랑 같이 있는 게 좋은 줄 알아? 결혼하고 나서 공식적으로 알리기 전에 행적을 만들어야 해서 나온 거니까 표정 관리해. 누군가는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아…. 그런 거군요.”

“당분간은 일부러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일 거야. 그래야 해리스도 우리가 진심이라고 믿을 테니까. 한 삼 개월 정도만 사이좋은 척하면 돼.”

“네.”

“그리고 언제까지 그렇게 뻣뻣하게 굴 거야?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면 누가 우리를 부부로 보겠어? 나하고 결혼하겠다고 조부와 작당까지 해 놓고 그따위 태도는 대체 뭐야.”

“그, 그거 아니에요….”

“아니라는 말 같은 거 듣고 싶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결혼 이뤘으니 제대로 하란 말이야. 아까도 말이야, 도제한테 정신이 팔려서는 뺨이나 붉히고….”

“그런 거 처음이어서 그랬어요. 민망하고 쑥스러워서….”

“민망하고 쑥스러우면 너는 눈동자를 적시고 상대를 보나?”

노아는 억울했다. 자기는 도제를 본 게 아니라 그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부끄러웠던 것뿐이었다. 변명이라도 꺼내려고 했으나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니 말해 봤자 소용없어 보였다.

“혼전 계약서 제대로 안 본 모양인데,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정절의 의무를 지켜. 이 상황이 좆같은 건 너만이 아니야. 천박하고 싼 네 몸뚱이 굴리는 건 이혼한 다음에나 해.”

모멸감이 들 정도로 모욕적인 말을 퍼붓자마자 알렉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얼굴을 한 노아를 보니 화가 울컥 치밀어 올라 참지 못했다.

옆자리가 너무 조용했다. 이마를 찌푸린 채로 알렉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노아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이 정도로 왜 저딴 표정을….

괜히 신경이 쓰여 자꾸만 곁눈질하던 중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툭,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왜 울어?”

후다닥 노아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눈, 눈에 뭐가 들어갔어요. 운 거 아니에요.”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로 노아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물기 젖은 목소리가 떨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알렉스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금까지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인 오메가는 많았다. 하지만 눈가가 젖어 있든 말든 알렉스는 지금까지 그들을 신경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더 차갑게 마음이 식어 갔다. 그랬는데, 어째서 저 오메가의 눈물은 이리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메가의 눈물만큼 값싼 것도 없지. 안 울었다니까 하는 말인데, 우는 거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나한텐 안 통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안 울어요…. 그리고, 제가 뭘 한다고 해도 헌트 씨는 신경 안 쓰실 거잖아요.”

노아는 거칠게 뺨을 훔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 정정할게요. 제가 하는 모든 게 마음에 안 드시겠죠. 앞으로는 신경 안 거슬리게 할게요.”

이 사람 앞에서 주눅 들어 있는 것도 이제 한계였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언제 알렉스가 화를 낼까 노심초사하는 것도 지쳤다. 뭘 하든 이 사람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노아한테 화를 낼 사람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낮게 깔리는 음성에 어깨가 움찔 떨렸지만, 노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신,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운전 중이시잖아요. 앞… 보셔야 할 거 같아요.”

뺨이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쏟아졌지만, 노아는 꿋꿋이 앞만 바라봤다.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쿵쾅거렸다. 욱한 마음에 질러 놓고 간이 콩알만 해졌다.

할 거 빨리 하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

노아는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 * *

“아, 거기 다녀오셨어요? 취임식 때문에 정장 맞추러 가신 거구나. 그럼 신발도요?”

“네. 거기에 그런 가게들이 있는 줄 몰랐어요. 되게 거리가 예뻤어요.”

맞아요. 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리에 있는 가게들은 대부분 100년 넘게 이어져 오는 곳이에요. 테일러 씨도 그 가게 대대로 해 오던 곳이거든요. 다만 지금 나이가 많으신 데다 그분이 자식이 없으시거든요. 워낙 까다로운 분이라 도제도 안 받으신다고 해서 그곳 신사복만 고집하시는 분들이 걱정이 태산이에요.”

“도제가 있었어요. 이번에 새로 오셨대요.”

“그래요? 잘됐네요.”

알렉스와 불편한 쇼핑을 끝내고 저택으로 돌아오자 조엘이 와 있었다. 알렉스는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냉큼 방으로 올라가 버려 노아가 그를 상대했다.

“멋을 아는 정치가와 기업가들은 꼭 그곳에서 옷을 맞춰요. 테일러 씨가 심성이 까다롭고 괴팍하긴 하지만 솜씨 하나는 정말 끝내주거든요. 그분은 심지어 손님도 가려 받으세요.”

“정말요? 엄청 좋은 분이시던데….”

“네. 노아는 대표님과 함께 가신 거라 운이 좋았던 거죠. 돈다발을 싸 들고 찾아가도 손님이 마음에 안 들면 절대 옷을 안 지어 줘요.”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예요. 그렇게 손님을 골라 받아도, 그분한테 옷 한 벌 지어 달라고 매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뭐든 사람은 실력이 있고 봐야 한다면서 조엘이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옷 한 벌에 몇만 달러씩 받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몇만 달러요?!”

적당히 대화를 즐기던 노아는 옷 가격을 듣는 순간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렇다는 건, 제 옷도 그 정도 가격이라는 말이었다.

“어, 어떻게…. 옷, 가격이 그 정도 하는 줄 몰, 몰랐어요.”

손이 덜덜 떨렸다. 노아에겐 너무 과한 금액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노아의 태도에 조엘이 태연하게 말했다.

“걱정 덜어요. 어차피 대표님이 계산할 건데 무슨 걱정이에요? 그리고 노아 씨도 이제 부자예요. 그 정도 가격은 충분히 지불할 능력이 있다고요.”

“아, 아니, 그, 그래도….”

여전히 진정이 안 되었다. 제 손으로 지불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옷을 입는 건 자신이었다.

“망가지면, 어떡하죠? 구겨지기라도 하면….”

“구겨지면 펴면 되고, 망가지면 수선해 달라고 하면 되죠.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조엘은 전혀 옷 가격에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가 있지? 옷 가격이 무려 몇만 달러라는데.

노아가 쉬는 날 없이 한 달 내내 일해도 벌 수 없는 돈이었다.

“대표님 파트너니까 그 정도 돈은 쓰셔야죠. 매달 생활비로 노아 씨에게 드리는 돈 이십만 달러가 괜히 책정된 게 아니에요. 대표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품위 유지를 위해서 그 정도는 써야 하는 거예요. 그 조건은 배우자인 노아 씨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즉, 매달 이십만 달러를 써야 한다는 겁니다. 라며 조엘이 아무렇지 않게 무서운 소리를 입에 담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매달 이십만 달러를 어떻게 써. 손발이 뻣뻣해졌다.

“나, 나는, 그, 그렇게 못, 써요…. 어떻게 매달….”

목소리를 덜덜 떨며 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으로 돈 쓰는 법도 배우셔야겠네요. 뭐, 외부에 당신 존재가 알려지고 나면 싫어도 신경 쓰게 될 거에요. 사람들이 얼마나 시간이 많은지 아십니까? 노아가 입는 거, 먹는 거, 다니는 곳 하나하나 사람들이 입에 담을 겁니다. 결국은 시선이 신경 쓰여서라도 비싸고 좋은 거 쓰게 된다니까요.”

노아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태어나고 자라면서부터 한 번도 풍족한 생활을 했던 적이 없었다. 늘 빠듯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왔던 노아에겐 조엘의 얘기가 와닿지 않았다.

“돈 쓰는 게 왜 걱정이죠? 저한테 매달 이십만 달러라는 돈이 있으면 우선 차부터 바꾸고,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도 원 없이 사줄 텐데….” 하며 조엘이 아쉬워했다.

“아이가 있어요?”

“네. 보실래요?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핸드폰을 꺼내 사진첩을 연 조엘은 노아 옆자리로 옮겨왔다. 귀엽죠? 하며 내민 사진 속 아이는 조엘과 닮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였다.

“큰 애가 다니엘이고 작은 애가 릴리예요.”

조엘과 닮은 갈색 고수머리의 다니엘과 금발을 양 갈래로 묶은 릴리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많이 닮았네요.”

사진첩을 휙휙 넘기자 사진이 끝도 없이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다니엘, 몸집만큼 커다란 튜브를 끼고 있는 릴리. 그리고 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어 올린 푸른 눈의 미인까지.

사진 너머로도 이 가족의 행복한 일상이 눈에 그린 듯 보였다.

“부인이 미인이시네요.”

“하하하. 그렇죠? 물론 노아만큼은 아니지만, 내 아내도 엄청 예쁩니다.”

팔불출 면모를 그대로 드러낸 조엘은 평소와는 달랐다. 은테 안경을 추켜올릴 때면 꽤 인텔리하고 차가워 보이지만 막상 가족 얘기가 나오자 몹시 부드럽고 따스한 사람이 되었다.

가족 자랑을 이어 가는 조엘의 얘기를 들으며 노아는 부러운 한편,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도 이렇게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엔 자주 집 안 곳곳에 웃음꽃이 피었다.

화사하게 웃는 어머니의 미소에 아버지는 늘 당신이 최고라는 말을 하며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나는? 나는?’

아버지의 다리에 매달리면 저를 번쩍 들어 올린 아버지가 우리 노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 하며 이마에 쪽쪽 입을 맞춰 댔다.

단란한 그 시절은 무척 짧았다. 노아가 취학하기 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진 때는 그때부터였다.

상대방 과실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제대로 된 배상금을 받지 못한 어머니는 슬픔에 잠길 시간도 없이 일자리를 구하러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뿐이었는데, 든든한 보호자가 사라진 애 딸린 오메가 여성에게 사회는 험난하기만 했다. 노아가 자라면서 어머니의 걱정은 더 커졌다. 노아의 얼굴은 가난한 싱글맘이 홀로 보호하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차라리 노아가 좀 더 남자다운 체격과 얼굴을 가졌더라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어머니의 체형을 닮아 뼈대가 가늘고 왜소했고, 얼굴도 그녀를 그대로 빼어 박았다. 어머니는 노아가 나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다니라고 신신당부한 게 노아가 12살 때였다.

“…지 않아요?”

생각에 잠겨 있던 노아는 조엘이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표정이 어두운데 괜찮아요?”

“죄송해요…. 매디슨 씨네 가족사진 보니까 어머니 생각이 나서….”

말을 꺼내자마자 조엘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괜히….”

“아니, 아니에요! 사진 보는 거 좋았어요. 저까지 행복해지는 사진이었는걸요. 그 덕분에 잊고 있던 추억이 떠올랐어요.”

여전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우지 않는 조엘에게 노아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괜한 얘기를 꺼낸 탓에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축축하게 처진 분위기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몰랐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여도 조엘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

응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던 알렉스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조엘을 힐긋 쳐다보는 그의 표정에 의심이 가득했다.

“낮에 장인의 거리에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취임식 때문이죠?”

“겸사겸사.”

“가신 김에 옷 좀 많이 맞추고 오시지. 앞으로 공식 석상에 나갈 일이 많을 텐데 한 벌로 되겠어요?”

알렉스는 조잘대기 시작한 조엘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 휴가 동안 회사로 출근하라니까 왜 여기로 와?”

“회사에 들렀다 온 거죠. 취임식 준비는 착오 없이 진행 중인 걸 확인했습니다. 아, 그리고 어제 노아 씨가 다녀간 이후로 회사가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가 나?”

“네. 대표님이 그동안 오메가를 멀리했던 건 노아 씨만 한 미인을 못 만났기 때문 아니었겠냐는 게 대세 의견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야.”

눈썹을 한껏 찌푸리며 알렉스가 노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무늬 없는 흰 티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은 노아가 시선을 느끼고는 목을 움츠렸다.

남의 얘기 듣는 것처럼 그다지 관심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노아 씨 얼굴을 본 사람들은 노아가 배우 지망생이었는데, 대표님이 데뷔하기 전에 낚아챈 거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되게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그럴싸하긴 뭐가.”

핀잔을 놓는 알렉스의 태도에 조엘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니, 저 얼굴을 보고 아무 감흥이 없는 거야? 눈이 발바닥에 붙었나.

그의 반응에 노아는 가만히 침묵했다.

알렉스는 그런 노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라운드 티셔츠를 입은 탓에 턱 아래의 멍이 눈에 띄었다. 일부러야 뭐야. 나 보라는 건가?

“하여튼 대표님 결혼에 관한 반응은 다들 긍정적입니다.”

“그보다 너. 앞으로 네 행적을 파고드는 이들이 많을 텐데 내가 알아야 할 게 있나?”

노아가 얼굴을 들었다.

“행적이요? 그런 거 없어요.”

“빚지는 생활하면서 법에 걸리는 일 같은 거 한 적 없냐는 말이야. 언론에서 내 결혼에 대해 떠들어 댈 텐데, 행여나 이쪽에서 막아야 할 일 같은 거, 정말 없어?”

그의 질문에 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가… 불법적인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저, 그런 건 한 적 없어요.”

“그래? 내 조부와 작당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말이군.”

“저는 작당한 게….”

항변하듯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말해 봤자 뭐하나 싶었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사람인데.

“노아 씨. 대표님께 말씀 안 드렸어요? 회장님이랑 어떻게 만나셨는지?”

조엘이 불쑥 끼어들었다. 노아에게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됐는지 상황을 전해 들었던 그는 알렉스가 노아에게 함부로 대하는 게 이상했다.

“무슨 말이야?”

“전에 궁금해하셨잖아요. 회장님과 노아 씨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대표님도 기억하시죠? 6개월 전에 회장님께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던 거요.”

“별거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굳이 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알렉스는 조엘에게 사정을 전해 들어도 노아가 일부러 그 시간에 가 있었다고 말할 사람이었다. 그게 노아가 에디에게 접근한 방법이라고 믿을 테니까.

“별거 아니긴요! 회장님의 목숨을 구해 주셨잖아요.”

“아니에요. 그건 누구나….”

“무슨 소리야, 이게? 제대로 말해.”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날카로운 눈으로 조엘에게 얘기하기를 종용했다.

“그게…, 6개월 전에 회장님께서 물류센터에 시찰하러 가셨던 모양입니다. 그때 심장마비로 쓰러진 회장님을 노아가 발견해서 구급차를 불렀답니다. 대표님도 그때 그러셨잖아요. 일 욕심 많은 회장님이 갑자기 왜 은퇴 선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여전히 내켜 하지 않는 노아를 힐긋거리며 조엘은 얘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그때 노아가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덕에 회장님의 상태가 금세 호전되었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회장님께서 노아를 찾은 거죠.”

회장님은 노아에게 보답하고 싶어 했는데 그걸 거절하시니까 매주 수요일마다 물류센터 공원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었답니다.

조엘은 노아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얘기가 진행되자 알렉스는 믿기 어렵다는 듯 연신 얼굴을 찌푸렸다. 조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거 확인된 사실이야?”

“예? 제가 그걸 굳이 확인할 이유가….”

“거짓말인지 둘러대는 말인지 어떻게 알아?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적당히 꿰어 맞춘 거겠지.”

그의 말에 노아는 쓰게 웃었다. 역시 믿지 않을 줄 알았다. 자신이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그는 들을 생각 따윈 없었다.

“아니, 노아 씨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고 조엘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지만, 알렉스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조부가 준비할 시간을 마련했다고 해리스가 한 말이 혹시 이걸 얘기하는 걸까.

알렉스는 해리스와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조부와 노아가 한통속이 되어 이 일을 꾸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알렉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혼자 생각해 봐도 아무런 결론은 나지 않는다.

알렉스는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치의와 통화해야겠어.”

“진짜 확인하시려고요?”

“난 오메가가 하는 말은 안 믿어.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 버리는 뒷모습을 보며 조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상했죠? 대표님이 원래 의심이 많아요. 하도 당한 게 많아서….”

“괜찮아요. 그냥… 너무 예상한 대로라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웃는 듯 마는 듯 힘없이 대답하는 노아의 표정에 조엘은 안타까움에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 *

밤새워 뒤척이다 잠을 설쳤다. 노아가 눈을 떴을 땐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노아는 일어나자마자 침대 옆 서랍장을 열어 억제제부터 입안에 털어 넣었다.

평소보다 두통이 심했다. 쓴 약이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긁으며 내려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게 약 부작용은 아니겠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피곤한지 혓바늘이 오돌토돌 돋아나 있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노아는 이렇게 있다가는 영영 침대에서 못 나가겠다 싶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욕실에서 가볍게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 커튼 틈 사이로 아침 햇살이 어슴푸레 비쳤다.

발코니를 활짝 열어 환기부터 시켰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해가 떠오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서서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 밤새 맺힌 아침 이슬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지끈거리던 두통도 살짝 가시는 기분이었다. 노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상쾌한 공기를 마셨다.

한참을 서 있다 보니 조금 서늘한 공기에 피부가 차가워졌다. 노아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클로짓에서 카디건을 꺼내 걸치고 방을 나섰다. 정원을 조금 걷고 싶었다. 이런 여유가 언제 또 찾아올지 알 수 없으니 일찍 깬 김에 산책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헨리가 저택의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일찍 깨셨군요.”

“네. 일찍 눈이 떠졌어요. 좀 도와드릴까요?”

“아닙니다. 50년 넘도록 제가 하던 일입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게 얼마나 눈에 밟히던지.”

중앙의 샹들리에의 전등을 켜고, 현관 바닥을 쓸며 헨리는 제 일이니 빼앗을 생각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침 차라도 마시겠어요? 안사람이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데, 차 한잔 달라고 하면 기꺼이 내어 줄 겁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걷고 싶어서요. 다녀와서 마실게요.”

“그러십시오. 뒤쪽 숲으로는 가지 마세요. 나무 심을 구덩이를 파 놓은 곳이 많아 다칠 수 있으니.”

“네. 그럴게요.”

헨리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그새 해가 좀 더 떠올랐다. 푸르스름하던 빛이 점점 옅어지고 사위가 밝아지고 있었다.

큰 저택만큼이나 정원도 꽤 넓었다. 저택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은 구획별로 나뉜 프랑스식 정원으로 꾸며져 있지만, 저택의 측면으로 돌아가면 분위기는 좀 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회양목 아래 장미와 데이지가 어우러졌고, 이름 모를 들꽃도 소담하게 피어 한자리를 차지했다.

산책하기에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노아는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에 오고부터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타인의 경멸을 온종일 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노아는 그 이유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오메가 혐오증을 가진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경멸과 혐오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본래 인간이란 저와 다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존재한다. 특이형질자가 처음 알려졌을 때만 해도 돌연변이 취급을 받았다. 인간은 맡을 수 없는 고유의 그들만의 페로몬을 서로 맡을 수 있고, 동물에게만 발견되는 발정기가 있다.

겉모습은 인간과 다르지 않지만, 근본적인 부분이 다른 특이형질자들을 인간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배척했다.

그런 역사가 존재했기 때문에, 이미 특이형질자를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현재에도 여전히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알렉스는 알파다. 특이형질자가 같은 특이형질자를 배척하고 혐오하는 건 특별한 이유가 없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아가 다른 알파들을 꺼리는 건, 자신이 알파에게 있어 피식자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포식자에게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처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조심하는 것뿐이다.

그가 어떤 이유로 오메가를 싫어하는지 노아는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설사 알게 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

모처럼 편안했던 마음은 그의 생각으로 다시금 무거워졌다.

노아는 카디건을 꼭 여미고 발길을 돌렸다.

아침 공기에 몸이 차가워졌다. 헨리의 권유가 떠올라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와요. 산책 잘 다녀왔어요?”

주방 가득 진한 커피 향이 번졌다. 루시가 환하게 웃으며 노아를 반겼다.

그리고 아일랜드 식탁에는 노아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던 알렉스가 커피를 물처럼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눈 밑이 거뭇했다. 어제도 술을 마셨나.

노아는 이대로 발길을 돌려 제 방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알렉스의 옆자리에 새 잔에 커피를 따르고 손짓하는 루시 때문에 피할 수가 없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색한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온 건 어두운 시선이었다.

밖에 꽤 오래 있다 들어온 노아의 뺨은 찬 공기에 붉어져 있었다. 노아가 조심스레 옆자리에 앉자 아침 공기를 온몸으로 두르고 온 듯 물기 머금은 상쾌한 향이 은은하게 알렉스의 코끝을 자극했다.

알렉스는 지난밤 해리스와의 통화를 떠올렸다.

‘노아가 얘기하던가? 그런 일이 있었지.’

‘6개월 전에 할아버지께서 쓰러졌다는 얘길 왜 안 하셨습니까? 주치의도 제게 아무 말 안 했다고요.’

‘자네 조부가 함구하라고 했네. 자네도 알지 않는가. 기업을 이끌어 나가는 총수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주가가 어떻게 되겠나. 에디는 그저 자네에게 안정적으로 회사를 물려주고 싶어 했네.’

‘남들에겐 함구해도 저한텐 당연히 알렸어야죠!’

‘이미 다 지난 일을 가지고 왜 화를 내는가. 노아가 자네 조부를 구했냐고? 물론이네. 노아가 에디에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았더라면 자네 조부는 그때 죽었을 거야.’

알렉스는 해리스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 일로 할아버지가 유언장을 고친 겁니까? 그냥 보상하지 그러셨습니까. 아무리 생명을 구했다지만 뭘 믿고 이런 짓을 했답니까? 일부러 접근한 걸 수도 있잖아요.’

‘설마 노아를 그렇게 생각한 건가? 아니네. 절대로 아니야. 보상? 당연히 하려고 했네. 하지만 그가 극구 사양했네. 그리고 에디가 유언장을 고칠 때 그런 것도 조사 안 했을 거 같은가? 자네 조부가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그저 서류로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완강한 알렉스의 태도에 해리스가 한숨을 내쉬고는 쯧쯧, 혀를 찼다.

‘모친 때문에 경계하는 건 알겠으나 오메가가 전부 알파의 감정을 가지고 농락하지는 않네. 머리는 좋은 사람이 어째서 오메가에 대해서만큼은 시야가 좁은지 모르겠군.’

그 말에 화가 나 알렉스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조부의 술 창고를 털어 밤새 위스키를 들이부었다.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커피를 홀짝거리는 노아를 응시했다. 해리스의 얘기가 내내 머릿속을 휘저어 댔다.

어쩌면, 정말로 노아는 그저 조부에게 휘말렸을지도 모른다.

이 단순하고 복잡한 명제가 알렉스의 내면을 어지럽혔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얼마나 마셨는지 아직도 술 냄새가 진동하네.”

루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잔소리해 댔다.

“루시, 잔소리는 나중에요. 그보다 얼음물 좀 주세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루시는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물을 따라 주었다. 뼛속까지 시린 물을 알렉스는 단번에 들이켰다.

여전히 속은 쓰리고 아파,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루시, 혹시 블러디…, 아니요. 됐습니다.”

그냥 매디슨이 오면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군.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시가 아침은 안 먹을 거냐고 물었다.

“지금 먹으면 다 토할 것 같네요. 전 좀 뛰고 오겠습니다.”

나가기 전 알렉스가 노아를 불렀다.

“이따가 얘기 좀 해.”

일방적으로 통보하고는 사라졌다. 노아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어제 그 얘기를 하려는 건가? 역시… 의심하는 거구나.

이미 예상했음에도 노아는 기운이 빠졌다. 얘기를 왜 하려고 하지?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겨우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헌트 씨는 아침 먹는 거죠? 끼니 거르면 안 돼요. 너무 말랐어요.”

“그냥 노아라고 부르세요. 그러고 저도 그다지 아침 생각은 없네요.”

“새 신부가 그리 말라서 어째요. 도련님 체력 감당하려면 잘 먹어야 해요. 아침 푸짐하게 차려 줄 테니까 꼭 먹어요, 알았죠?”

루시의 장난스러운 당부에 노아는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저, 저희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어대기 시작하자, 새 신부의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는지 루시가 후후, 하고 웃었다.

노아는 그녀의 오해를 풀어 줘야 하는지, 그냥 둬야 하는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커피 잔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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