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3)

5.

“약을 바꾸시겠다고요?”

“네. 지금 먹는 거 말고 좀 더 함량이 높은 걸로….”

“음.”

중년의 의사가 슬쩍 이마를 찌푸리며 차트를 뒤적거렸다.

“환자분의 경우는 페로몬이 불안정한 편이라 웬만하면 기존에 드시던 거로 그냥 복용하는 걸 권합니다. 그 약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할 텐데…. 혹시 약을 바꾸려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굳이 약을 왜 바꾸냐는 질문에 노아는 대답을 망설였다.

“혹시 지금 복용하는 약이 안 맞는 겁니까?”

“아, 아니요…. 그건 아닌데…… 주변에 페로몬에 민감한 분이 계셔서 당분간만 바꾸려는 건데요, 안 되나요?”

“환자분이 말씀하신 그 약은 보통 페로몬이 아주 정상인 분들이 단발로 사용하는 약이라 환자분께는 약효가 너무 셀 수 있어요. 부작용은 말할 것도 없고, 혹시라도 잘못되면 페로몬 폭주가 일어날 수도 있어서 권해 드리지 않습니다.”

어쩌지…. 노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알렉스가 페로몬 때문에 또 화를 내는 건 무서웠다.

“그, 그래도 괜찮아요. 약 바꿔 주세요.”

노아가 결정을 바꾸지 않은 걸 확인하자마자 의사는 별수 없군요, 라며 주의 사항이 적힌 안내문과 동의서를 꺼냈다.

부작용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들었고, 차후 발생할 문제에 대해 환자가 안내받았음을 확인하는 문서였다. 노아는 해당 서류에 서명하고 처방전을 받았다.

‘복용 시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변화가 있으면 꼭 내원하셔야 합니다. 아, 그리고 히트 사이클 때는 절대로 복용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페로몬을 억눌렀다간 정말로 큰일 납니다. 아셨죠?’

의사가 주의사항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진찰실을 나오자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거절했는데도 기어이 같이 온 조엘이 다가왔다.

“끝났어요?”

“이제 약만 받아 오면 돼요.”

병원에 딸린 약국에서 처방전을 주고 약을 받자, 조엘이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억제제만 사는 데도 처방전을 받아야 합니까? 전 특이형질자가 아니라서 모르지만 보통 억제제는 약국에서 살 수 있지 않나요?”

조엘의 질문에 순간 멈칫했다.

“그, 그건 약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요. 저는 페로몬이 불안정한 편이라서 따로 처방전을 받아서….”

사실대로 말하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아서 노아는 페로몬 핑계를 대며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이 들통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으나, 그래요? 하며 조엘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제 여기 볼일은 다 끝난 거죠? 따로 더 가야 할 곳이 있나요?”

“아, 아니요.”

“그럼 돌아갈까요?”

노아는 먼저 병원을 나서는 조엘의 뒤를 따라가다가 멈칫했다.

“저…, 매디슨 씨.”

“네? 왜요?”

주차된 차량 앞에서 조엘은 문을 열다 말고 돌아보았다. 뒷말을 기다리며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는 그의 표정에 노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씀하세요.”

“저… 할아버지 묘에… 갈 수 있을까요?”

“안 될 게 뭐 있나요? 당신도 이제 헌트가의 정식 가족인데. 가족묘에 묻히신 거라 저택이랑 가까워요.”

어서 타라는 손짓에 노아는 서둘러 차에 탔다. 조엘은 노아가 안전벨트 메는 걸 확인하고 출발했다.

차가 디콘강을 따라 콜리나 지역으로 들어섰을 때,

“그러고 보니 계속 궁금했는데요.”

조엘이 노아를 힐긋, 곁눈질하며 물었다.

“대체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멍하니 창밖을 보던 노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냥… 우연히 에디 할아버지를 도와드리게 되어서….”

“도와드려요? 회장님을요?”

“네. 6개월 전쯤에 포장센터 근처 작은 공원에서 할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제가 구급차를 불렀는데, 그때 이후로 할아버지 쪽에서 연락을 주셔서 만난 거예요. 저, 정말 일부러 할아버지한테 접근한 거 아니에요.”

노아는 제게 우호적인 조엘이 오해라도 할까 봐 걱정했다.

“회장님이 6개월 전에 쓰러지셨어요? 어…, 그러고 보니 회장님이 그즈음에 은퇴 선언을 한 것 같네요. 아. 그것 때문이구나.”

다행히 조엘의 반응은 평범했다. 노아는 조금 안도했다.

“대표님은 이거 모르시죠?”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설명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리고 얘기한다고 해도 안 믿으실 거 같아서…….”

“하긴…. 대표님은 오메가라면 덮어놓고 싫어하시니까 얘기해도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난리 치실 거 같네요.”

쯧. 조엘이 낮게 혀를 찼다.

“여하튼 노아의 도움으로 회장님은 위기를 한번 넘겼고, 그때 은퇴 준비를 시작하신 거니 노아에게 유산을 남긴 것도 이해가 되네요.”

“하지만 저는 보상은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런 유언을 남겼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할아버지가 보답하고 싶다고 강하게 얘기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노아는 보답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몇 번이고 거절했었다.

“회장님은 되게 무섭고 깐깐하신 분이셨지만, 은혜는 절대 잊지 않는 분이셨거든요. 당신이 거절했다고 해도 회장님은 이미 그때 도와줄 방법을 계속 생각하고 계셨을 거예요.”

조엘은 겉으로는 좋게 말했지만, 사실은 작고한 전 회장의 이기심에 혀를 내둘렀다. 오메가 혐오증인 제 손자와 결혼하면 유산을 준다니. 누가 보답을 이딴 식으로 하냐. 조건 없이 유산만 남겼어도 될 일을.

회장님은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정말로 순수했다면 조건 따윈 없는 게 맞다. 은인인 노아를 결혼하지 않겠다는 손자에게 떠넘기다니. 노아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유언. 파렴치한도 이런 파렴치한이 없다.

조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처연하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노아를 확인하니 차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운 내요. 대표님이 좀 싹수없고 오메가 혐오증에 변덕스럽긴 해도 얼굴이랑 신체 조건은 좀 좋잖아요? 거기다 돈도 많고. 그냥 말하는 마네킹이다, 생각하시고 대하세요.”

조엘의 너스레에 노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말하는 마네킹이라니.

우울하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자, 조엘은 운전하다 말고 잠시 넋을 놓았다가 정신 차렸다. 아차, 운전 중이지?

“학창 시절에 인기 많았죠? 학교에 노아 씨 정도의 미인이 있으면 다들 난리가 났을 거 같은데. 더군다나 오메가고.”

“네? 아, 아니에요….”

쑥스러운 얼굴로 노아가 손사래를 쳤다.

“저… 발현이 늦어서… 그런 거 없었어요.”

“예? 에이. 거짓말하지 마요. 말도 안 돼. 미인인데 형질이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노아가 몰랐던 거 아닌가요?”

“진짜예요. 친구도 카일뿐이었고…….”

“카일이란 분이 같이 살던 그 친구예요?”

“네. 저 20살 때 발현해서 그때 카일이 많이 도와줬어요. 엄마가 쓰러지셔서 절 신경 쓸 수가 없었거든요. 저도 정신이 없었고.”

그때 생각만 해도 노아는 아직도 몸서리쳤다. 보통 일반인과 특이형질자 사이에는 임신 확률이 확 떨어진다. 임신이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설사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특이형질자로 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노아를 낳은 어머니는 당연히 노아가 일반인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페로몬 조절이나 특이형질에 관한 걸 어떤 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노아가 20살 때 발현한 것이다. 하필이면 그때 어머니는 병으로 쓰러졌고, 발현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노아를 도와준 건 카일이었다.

특이형질자 센터 등록도 카일이 도와주었고, 쓰러진 엄마 대신 보호자 노릇도 대신해 주었다.

사춘기 즈음에 발현하는 특이형질자들은 어릴 때부터 페로몬 조절을 익히기 때문에 모든 게 자연스럽지만 노아에게는 그 개념조차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 적응하는 데 꽤 시일이 걸렸다. 거기다 노아는 다른 특이형질자보다 페로몬이 불안정한 편이라 조절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특이형질자 센터에서 노아에게 억제제 복용을 권유했고 그때부터 쭉 억제제를 먹었다.

“친구분이 정말 좋은 분이네요.”

카일을 좋게 봐 주는 조엘의 칭찬에 노아는 신이 났다.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맞아요. 정말 좋은 애예요. 얼굴도 정말 정말 잘 생겼어요. 인기가 정말 많았거든요. 고백도 숱하게 받았는데 카일은 늘 절 챙겨 줬어요. 그리고 얼마나 상냥한지 몰라요.”

카일은 잘하는 게 무척 많았다. 요리도 운동도, 뭐든 시키면 못하는 게 없었다.

“오…. 혹시 그분이 노아를 좋아한 건?”

“아니에요. 카일도 오메가인 걸요. 그리고 카일이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 전 알아요. 지금까지 사귀었던 사람들을 보면 전부 운동선수인걸요? 음…, 몸통이 크고, 팔뚝이 엄청 두꺼운…, 좀….”

절친의 취향이 좀 이상하다고 말하는 대신 노아는 에둘러 표현했다. 그렇게 잘생기고, 똑똑한 친구가 왜 머리 빈 육체파 운동선수만 좋아하는지 노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서 자주 쓰는 단어의 철자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카일이 지금까지 사귄 알파 중 노아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뭐, 운동선수를 좋아하는 취향도 있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는 조엘에게 노아도 동조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는 어느덧 헌트가의 묘지에 도착했다.

노아는 가족묘 근처에서 백합 한 다발을 샀다. 가족묘 입구에 서자 문득 제 차림이 신경 쓰였다. 위아래로 튀는 차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장을 입은 건 아니어서 마음에 걸렸다.

“저…, 옷차림 괜찮아요? 오늘 오게 될 줄 몰라서 가볍게 입고 왔는데….”

“뭘 그런 걱정을 다 하세요? 뭘 입어도 얼굴이 다 살려 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조엘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걱정이냐면서 가족묘니까 격식 차릴 필요 없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조엘의 안내로 노아는 에디 할아버지가 묻힌 곳에 금세 도착했다. 그의 비석 앞에 서자, 비로소 에디 할아버지가 정말로 돌아가신 게 실감이 났다.

에드워드 챈들러 헌트.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지 마라.’

비석에 새겨진 명언을 가만히 입속으로 되뇌었다. 에디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걸까.

노아는 몸을 숙여 비석 앞에 백합 한 다발을 다소곳이 놓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를 위해 기도했다. 에디를 원망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저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해 도와준 것 또한 맞았다. 단지 노아가 생각한 그런 도움이 아니었을 뿐.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의미 없는 물음을 던졌다. 당연히 아무런 대답도, 신호도 없었다.

불현듯 벌레 보듯 자신을 내려다보던 알렉스의 시선이 떠올랐다.

노아는 그에게 잡혔던 목덜미를 무심코 매만졌다. 손끝에 닿은 그곳이 뜨거운 것 같았다. 노아는 애써 그의 생각을 털어 냈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란 말이지. 만반의 준비를 다 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다가, 잠깐 방심하는 사이 해일이 밀어닥치더라고.’

‘에디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있었지. 아주 오래전에…….’

노아는 에디와 만났던 어느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처음에 걱정도 됐었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지. 실제로 몇 년간 아무 문제도 없었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요?’

‘글쎄. 나도 모르겠네.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지.’

그 말을 하며 웃던 에디의 얼굴이 얼마나 슬펐던가. 섣부른 위로의 말 따위는 쉽게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크나큰 슬픔에 젖어 있었다.

‘내 인생의 계획이 그때 틀어졌다는 걸 알았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살아야지.’

쓸쓸히 웃던 에디가 노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조언했다.

‘자네도 너무 그리 아등바등할 필요 없네. 아무리 피한다고 해도 일어나야 할 일은 결국은 일어나기 마련이네. ……가끔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네. 기왕이면 내 도움도 거절하지 말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에디는 평소의 다정하고 온유한 그로 돌아왔다.

그리워요. 에디.

노아는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 한 에디가 보고 싶었다.

그를 떠올리며 사색에 잠긴 노아의 귓가로 전화벨이 울리는 게 들렸다.

“…네. 지금요? 저 지금 가족묘에 와 있습니다.”

그를 돌아보자, ‘대표님 전화예요.’ 입으로 속삭인 조엘이 “네. 네. 아… 회장님을 추모하고 싶다고 하셔서….” 라며 대답했다.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인지 조엘은 한참 통화했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오라네요.”

통화를 마치고 조엘이 다가왔다.

노아는 그를 만날 생각에 긴장했다. 왜 오라는 걸까? 무슨 일이지?

병원에서 가져온 억제제를 지금 먹어야 하나. 오만 생각이 노아를 휩쓸었다.

“별거 아닙니다. 결혼 휴가 들어가기 전에 결혼했다는 걸 남들에게 보이는 자리니까 마음 편히 가지세요.”

공식적으로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 역할을 하는 자리라는 말에 오히려 더 긴장했다.

“노아. 그렇게 겁먹을 거 없습니다. 그냥 얼굴만 회사에 좀 비치는 것뿐이니까요. 대표님이 설마 노아 씨 데리고 어딜 가겠습니까?”

잠깐이면 된다고 조엘이 큰소리쳤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은 내렸다. 조엘의 안내로 노아는 얼마 전 이곳에서 곤욕을 치렀던 것과는 달리 수월하게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노아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메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축이며 노아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는 걸 쳐다보았다.

전에도 방문했었던 바로 그 층에서 내렸다. 그날과는 달리 오가는 사람이 종종 보였다.

“어? 매디슨 씨? 당분간 출근 안 하신다고…, 헉.”

반갑게 조엘과 인사하던 남자가 순간 입을 떡 벌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것처럼, 그의 눈이 한껏 커졌다. 넋을 놓은 직원의 표정에 조엘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노아는 제게 와 닿는 모르는 남자의 시선이 불편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갑시다, 노아 씨.”

노아…. 노아의 이름을 멍하니 중얼거린 남자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표실로 향하는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은 남자만이 아니었다.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노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뒤통수가 따끔거리는 느낌에 노아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습관처럼 챙을 만지려고 손을 올리려다 어정쩡하게 멈췄다.

“곧 사내에 소문이 돌겠네요. 끝내주는 미인이 대표님을 방문했다고.”

뭔가 재밌는 일을 발견한 것처럼 조엘이 낮게 키득거렸다. 그는 매우 신이 난 얼굴로 비서실의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대표님께서 기다리십….”

현재 조엘이 노아를 보좌하느라 그의 일을 대신 처리하던 비서가 뒤따라 들어오던 노아를 발견하곤 말을 멈췄다.

스크린을 뚫고 나온 것 같은 고전적인 미인에 그저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노아 헌트가 방문했다고 알리세요.”

조엘은 부러 노아의 성을 그녀에게 알렸다. 어차피 오늘 방문한 목적이 그거였으니까.

“네. 노아 헌트…, 네? 헌트요?”

“응. 인사드려요. 이분이 대표님 배우자분이세요.”

인사해야 하나? 망설이다 노아는 상대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엘은 폭탄을 던져 놓고는 대표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마도 곧 사내에 소문이 쫙 퍼질 것이다. 대표가 비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은 진작 퍼졌지만, 누구도 배우자를 본 적이 없으니 반신반의하던 차였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반쯤 누워 있던 알렉스가 힐끔 시선을 던졌다.

“아직도 술이 안 깨셨습니까?”

조엘은 능숙하게 노아를 손님용 테이블로 안내하고 방만한 자세로 누운 알렉스의 책상 위를 척척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술 냄새는 안 나네요. 제가 드린 블러디 메리 효과는 어땠습니까?”

“뭐… 마실 만했어. 근데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대표님은 절 잘 모르시잖아요. 그것 말고도 재주는 많습니다.”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조엘이 가만히 소파에 앉은 노아를 힐끔거렸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그 특유의 미묘한 시선이 그들 사이에 오갔다.

“참, 휴가는 며칠로 하셨습니까?”

“3일. 그보다 더 뺄 순 없어.”

“결혼 휴가치고는 짧지만, 뭐 적당히 애도 기간이라 그렇다고 둘러댈 정도는 되네요.”

“해리스만 아니었다면 굳이 휴가를 따로 빼진 않았을 거야. 빌어먹을 노인네.”

나직이 욕설을 뇌까린 그가 노아를 원흉이라는 듯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노아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었다.

“에이. 왜 그러세요. 어쨌거나 두 분의 결혼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대외적으로 보여야 하는 건 맞잖아요. 그래서 오늘도 일부러 여기로 부르신 거고. 여기서 좀 시간을 보내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실 거죠?”

조엘의 물음에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노아를 쳐다보았다.

눈썹을 살짝 가린 머리 아래로 긴 속눈썹이 깜빡였다. 도톰한 윗입술은 어째서인지 또 촉촉하게 젖어 있다. 저놈의 입술은 왜 맨날 젖어 있어.

곧게 뻗은 알렉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늘은 코를 자극하던 달짝지근한 향이 전혀 나지 않았다. 캐시미어 터틀넥 니트가 피부에 달라붙어 가느다란 목을 강조해 오히려 더 눈이 갔다.

알렉스는 저리는 손끝을 책상 위에 꾹 내리눌렀다.

“그보다 정식으로 선보이는 건 언제로 하실 거예요? 대충 얼굴만 내비치는 거로 해리스 씨가 만족하진 않으실 거 같은데….”

“다음 달에 있을 취임식을 생각하고 있어.”

“그거 좋군요. 따로 자리를 마련할 것도 없이 취임식에 함께 참석하시면 되겠군요.”

취임식 준비는 잘되어 가나 확인해야겠다며 조엘이 대표실을 나갔다.

조엘도 없이 알렉스와 단둘이 남겨지자 노아는 초조함에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얼굴로 내리꽂히는 시선이 불편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드륵. 알렉스가 발을 굴려 의자를 뒤로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그림자가 탁자에 길게 늘어지며 그늘을 만들었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노아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탁자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지나치게 크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노아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게 잡혔던 턱 아래가 아리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벌벌 떨고 있어? 아무 짓도 안 해.”

알렉스가 맞은편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오늘은 약 제대로 먹었나 보지?”

“네….”

다행이다, 페로몬 냄새가 안 나나 보다.

노아는 안도의 한숨을 아주 작게 내쉬었다. 아침에 억제제를 여러 개 털어 넣은 게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당분간 일부러 외부로 다닐 거야. 취임식 때 정식으로 소개할 거지만, 그 전에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해리스가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귀찮아하는 어조였다.

“당분간은 언론에 노출될 일도 있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그가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기대고 있던 등을 바로 세웠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가죽 소파가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떨구고 있던 노아가 그 소리에 눈을 들었다.

짙은 잿빛 눈동자가 똑바로 노아를 쏘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노아는 목을 움츠렸다.

“계속 내 앞에서 쥐새끼처럼 벌벌 떨 거야? 그 꼴로 우리가 부부라고 잘도 사람들이 믿겠다.”

“…….”

당신이 무섭게 했잖아요. 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노아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사람들 앞에서 그딴 꼴 보여서 괜한 말 나오게 하지 마. 그리고 볼 거라곤 그 잘난 낯짝뿐인 주제에 왜 꼴사납게 고개는 숙이고 다녀?”

짜증 섞인 핀잔이 이어 터져 나왔다.

“얼굴 들어. 적어도 알렉스 헌트가 뭐 때문에 널 선택했는지 사람들이 이해하게는 해야지, 안 그래?”

할 말이 끝나자마자 알렉스가 일어났다. 노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조각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얼굴을 구성하고 있는 이목구비는 비율이 완벽했다. 곡선은 존재하지 않는 조형이지만 그게 그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노아는 잘생긴 얼굴을 눈으로 더듬었다. 푸른 눈동자에 그가 가득했다. 시선을 뗄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그를 더듬던 시선이 순간 잿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쭉 뻗은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죄, 죄송….”

화들짝 놀란 노아는 허둥지둥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가 손을 뻗는 게 더 빨랐다.

“아!”

쭉 뻗은 그가 검지로 노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밀더니 목을 꽁꽁 싸맨 옷자락을 슬쩍 내렸다.

“자국이 남았군.”

흠. 눈썹을 좁히더니 그가 입매를 꿈틀했다.

“네가 페로몬으로 날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나도 네게 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지금처럼 페로몬을 완전히 감춰. 그럼 안전할 거야.”

“안, 안 해요. 약… 잘 먹을 거예요. 이제, 그럴 일 없어요.”

“그래. 그럼 됐어.”

대답에 만족한 듯 그가 손을 거뒀다.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일어나. 오늘은 이 근처에서 얼굴도장이나 찍고 가지.”

먼저 움직이는 그를 따라 노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부하직원과 대화 중이던 조엘이 돌아보았다.

“어? 두 분 이대로 같이 퇴근하십니까?”

“이쪽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네 일 하다 퇴근해.”

조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노아를 힐긋 쳐다보았다. ‘괜찮겠어요?’ 걱정이 가득한 눈빛에 노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하기로 한 일이다. 빚도 대신 갚아 준 사람에게 못 한다고 말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다.

여전히 알렉스가 언제 화를 내고 돌변할지 몰라 두려웠지만, 노아는 애써 두려움을 꾹 눌렀다.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걷는 게 무척 생소했다. 아직 회사에는 많은 사람이 남아 있는 탓에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알렉스에게 정중한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은 그 옆의 노아를 확인하곤 멈칫거리기 일쑤였다.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주목은 노아를 주눅 들게 했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가 노아에게로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어깨 펴고, 얼굴 들어. 넌 이제부터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야. 네가 노렸던 이 자리를 만끽해야지.”

알렉스가 사뭇 다정하게 노아의 어깨를 감싸고는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단숨에 딱딱하게 몸이 굳었다.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갔다. 노아는 바짝 마른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손은 허벅지에 딱 붙어 흡사 딱딱한 로봇 같았다.

“쯧. 왜 이렇게 긴장해? 아무 짓도 안 한다니까. 회사 벗어날 때까지만이야.”

알파와 사적으로 이렇게 가깝게 붙었던 적이 없었던 노아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끊임없이 그와 맞붙은 부분이 의식되었다. 엘리베이터에 타면서도 알렉스는 노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심지어 그의 숨소리까지 지척에서 들렸다.

노아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다. 그에게 들킬까 두려울 정도였다.

이대로 쭉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더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는 내려가던 도중 7층에서 한번 멈췄다. 막 엘리베이터에 타던 남자가 알렉스를 보곤 반색했다.

“대표님. 지금 퇴근하십니까? 오늘부터 휴가시라고….”

말을 걸던 남자의 시선이 노아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오. 혹시 이분이?”

“뭐어….”

“비밀 결혼을 왜 하셨나, 했더니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하하하.”

대놓고 아부가 철철 흐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남자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아를 힐끔거리기 바빴다. 그의 목울대가 꿈틀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노아는 이런 눈빛을 가진 자를 많이 겪었다. 피부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노아의 어깨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좀 더 몸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노아는 그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했다.

“심슨. 자네가 맡은 게 전략기획이었던가?”

노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남자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습니다.”

“지난해에 1억 달러 손실 난 게 그 팀에서 분석을 잘못해서였지, 아마?”

“예? 아, 그건 대표님…, 그때도 충분히 설명을….”

“설명을 들었지. 그런데 상반기에 손실액 따위는 금방 메꿀 수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왜 내 보고서에는 여전히 그대로지?”

알렉스의 지적에 이번엔 남자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식은땀이 흐르는 모양인지 그의 이마가 땀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대표님… 그건, 올해 그룹에 큰, 큰일이 생겨서….”

“엉뚱한 데 눈을 돌리니 정작 봐야 할 걸 제대로 못 보지 않나. 자네는 아무래도 좀 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어. 이 부분을 다음 개편 때 고려해 보도록 하지.”

“예? 대, 대표님! 그, 말씀은…!”

땡. 때마침 엘리베이터 벨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뭐 하나? 안 내리고. 1층이야.”

알렉스는 당장 내리라는 눈빛으로 남자를 압박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남자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은 닫혀 버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진동이 느껴지자 노아가 그에게서 몸을 떼었다.

혹시 내가 불쾌해하는 걸 알고 도와준 걸까?

그를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표정을 확인하는 게 두려웠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지하 3층에 도착했다. 혹시 그가 다른 말을 하지 않을까 긴장했던 노아는 그가 아무 말 없이 내리자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빼곡히 차가 들어찬 지하 주차장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아득히 울려 퍼졌다.

알렉스는 은색 세단 앞에 섰다. 그의 귓가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삽시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뒤룩뒤룩 살이 찐 얼굴이 노아를 훑는 순간 알렉스는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다.

번들거리는 그 두 눈을 찔러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맞닿은 육체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지자마자 평소라면 상대조차 안 했을 기획부장을 말로 난도질했다.

끓어오른 화는 여전히 알렉스의 내장을 자글자글 태웠다.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박대는 작은 발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기분이 더러워.”

가까이 다가오던 발소리가 멈칫했다.

알렉스가 휙 몸을 돌려 가만히 멈춰 선 노아를 쏘아보았다.

“타. 돌아간다.”

제 할 말만 끝내고 운전석에 타 버린 알렉스의 행동에 노아도 서둘러 조수석으로 돌아갔다.

미적거리다가 그가 화를 낼까 싶어 냉큼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는 와중에 차가 출발했다.

노아는 운전대를 잡은 알렉스를 힐끔거렸다.

이를 악문 그의 턱이 꿈틀거렸다. 윤곽이 도드라진 턱과 꾹 다문 입술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왜 화가 난 걸까?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그 사람 때문인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노아는 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숨을 죽였다. 회사 근처에서 얼굴을 보이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데는 다른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왠지 노아는 알렉스가 화난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도 멀기만 했다.

* * *

“인사가 늦었습니다. 헨리 델슨입니다.”

“저는 루시 델슨입니다. 대표님 신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가 어쩐지 눈가를 촉촉하게 적신 채 노아를 바라보았다.

소개받은 이들은 관리인 부부였다. 조엘에게 듣기로는 헌트가의 오랜 고용인이라고 했다.

저택에 온 지 며칠 만에 관리인 부부를 보게 된 건, 그동안 헨리가 병원에 입원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련님이 그새 결혼을 한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회장님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여전히 눈가의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 내며 루시가 감격에 겨운 얼굴로 기뻐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한 알렉스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자기랑 상관없다는 듯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휴. 어쩜 이렇게 고운 사람을 만났을까. 도련님이 통 결혼 생각을 안 하시더니 이렇게 예쁜 신부를 만나려고 그랬나 보네. 그렇죠, 여보?”

“그런가 보오.”

알렉스의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노부부를 앞에 두고 노아는 착잡했다. 이 결혼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 두 분은 얼마나 상심하실까. 노아는 슬쩍 시선을 내리고선 그를 힐끔거렸다.

“그동안 이 사람 간호하느라 내가 신경을 못 써 줘서 미안해요. 이제 여기 안주인은 헌트 씨에요. 앞으로 쭉 여기에서 살 거죠? 오래된 저택이라 혹 고쳐야 할 게 있으면 말해 줘요.”

“아…. 괜찮습니다.”

“그래도 불편한 게 많을 텐데….”

“충, 충분해요. 엄청 좋아요….”

“사람도 늘었으니 일하는 사람도 늘려야겠죠?”

루시가 걱정스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헨리도 역시 그렇지, 하며 노부인에게 동조하려던 찰나, 그때까지 방관하던 알렉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건 안 돼. 사람 더 늘릴 생각은 없어요, 루시.”

“도련님은 여기에 익숙해서 좀 불편해도 될 테지만 부인은 아닐 거예요. 앞으로 아이들도 태어날 거고!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에요.”

루시의 강력한 주장은 알렉스에게 먹히지 않았다.

“루시, 그리고 헨리에게도 당부할 게 있습니다. 고용인을 더 안 늘리는 건 쓸데없는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섭니다. 그리고 고용인의 근무 시간도 조정할 겁니다. 되도록 우리 두 사람이 저택에 있을 때는 드나드는 이는 최소로 하고 일하는 시간은 우리가, 아니 적어도 내가 저택에 없을 때 하라고 하세요.”

“지금도 인원수가 부족해요! 이미 고용인의 숫자를 많이 줄였는데.”

“안 쓰는 공간은 잠가 두세요. 어차피 열어 둬 봤자 먼지만 쌓일 테니까. 그리고 고용인 입단속은 철저히 하세요. 제 사생활이나 결혼 생활에 관해 말이 퍼져 나가면 지금 있는 고용인을 전부 교체할 겁니다.”

할 말은 끝났다는 듯 알렉스는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곤란한 표정으로 루시가 알렉스를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는 한번 결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오후에 나갈 준비해. 그 전까진 나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노아는 알렉스의 말에 움찔 놀랐다.

“오후… 몇 시요?”

그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3시. 라고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아이고. 좀 다정하게 대해 주시지.”

노아의 등 뒤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쭈뼛대며 몸을 돌리자 루시가 안쓰러운 눈으로 어깨를 토닥이더니 앉아서 대화 좀 하자고 했다.

아. 알렉스가 나갈 때 따라 나갔어야 했는데….

노아는 상냥하고 다정해 보이는 이 노부부에게 거짓말을 잘할 자신이 없었다. 별로 속이고 싶지도 않았고.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차라도 마실래요? 아니면 커피?”

“괜찮습니다.”

눈을 반짝이며 맞은편에 앉은 노부인에게 노아는 애써 웃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은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얼굴이 동글동글했다. 그 곁에 무뚝뚝하게 앉은 노인도 노부인과 인상이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표정이 조금 없다뿐이지 눈빛은 다정했고, 몸은 나이치고는 제법 다부져 보였다.

“그동안 병원에 계시는 줄 알았으면 찾아뵈었을 텐데…. 미처 챙기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유. 무슨 그런 말을. 괜찮아요. 이이가 허리를 좀 삐끗했는데 어찌나 엄살이 심한지 하도 난리를 피워 대서 입원시켰던 거예요. 지금 봐요. 아주 멀쩡하잖아요.”

“이 사람이 내가 뭘…. 정말 아팠다고.”

억울한 듯 항변하는 남편을 힐긋 쳐다보더니 그건 됐고, 하며 루시의 관심은 노아에게 향했다.

“도련님이 영원히 결혼은 안 할 줄 알았지 뭐예요. 회장님도 매일매일 걱정이었다오.”

네. 그래서 강제 결혼을 시켰죠…. 노부인에겐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신혼여행은 안 가기로 했어요? 오늘부터 도련님이 휴간데 결혼식은 성대하게 못 해도 신혼여행은 가야 하는데….”

“나중에… 시간이 좀 더 나면 그때 갈 거예요.”

신혼여행은 영원히 못 갈 테지만 기대에 찬 노부인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노아는 적당히 둘러댔다.

궁금한 게 무척 많은 모양인지 노부인은 노아의 신상에 관한 몇 가지 얘기를 더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궁금해한 건 역시 알렉스와 어떻게 만난 것인지였다. 그에 관해선 노아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첫 만남은 채권자로 오해해서 도망치려다 기절했고 그를 다시 본 건 병원에서였다. 심지어 계약 결혼 제의를 그날 받았다.

그때 일을 떠올리니 창피함이 밀려와 노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더는 묻지 않았다. 노아는 적당히 핑계를 대고 허둥지둥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어쩌면 그녀는 노아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노아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노아는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오후에 그와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벌써 배가 조여 왔다.

무슨 일로 나가는 걸까. 제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아무 일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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