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저택 앞에 흰 세단이 멈추고 차에서 내린 건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멋스럽게 뒤로 넘긴 노신사로 그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 저택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리 휑하니 사람 사는 거 같지 않구만.”
그래도 전엔 일하는 사람이 많아 북적북적하던 곳이었는데, 친구가 죽고 나니 이보다 더 쓸쓸할 수가 없다.
그는 현관을 지나 로비로 들어서며 혀를 찼다.
“해리스 씨. 오셨습니까.”
한달음에 달려온 조엘이 해리스를 반겼다.
“알렉스는 어딨는가?”
“회장님이 쓰시던 서재에 있습니다. 차라도 내어 올까요?”
“됐네. 일하는 사람도 없는데 자네가 내올 차라면 안 마시는 게 낫네.”
“일하는 사람이 없긴요. 차 정도는 준비할 사람 있습니다. 우선 들어가시죠.”
“서재가 어딘지는 아네. 그 아이나 불러오게. 여기 있겠지?”
“당연하죠. 금방 불러오겠습니다.”
해리스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곧장 노아부터 찾았다. 친구가 고집을 피워 기어이 유언장에 그 아이의 이름을 올렸다. 사람을 믿지 않는 친구가 드물게 금세 마음을 열었으니 궁금할 수밖에. 생전에 소개해 달라는 말에도 친구는 다음에, 다음에 소리만 하다가 결국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대체 어떤 아이이길래 에디가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는지 해리스는 몹시 궁금했다. 오늘은 확인하게 되겠지.
서재로 향하는 해리스의 걸음은 빨라졌다.
노아는 몇 번이고 거울 앞에서 제 모습을 확인했다.
조엘의 권유에 다듬은 머리 모양이 영 어색해 짧아진 앞머리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눈썹에 살짝 닿을락 말락 한 길이로 자른 머리 때문에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표정 없이 얼어 있었다. 상속대리인에게 들키지 않을까, 밤새 잠을 설치는 바람에 눈 밑이 조금 붉었다. 습관처럼 입술을 혀로 적신 노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남을 속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짓말하면 다 티 난다고 카일이 그러지 않았던가.
노아는 제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욕실을 나왔다. 때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나가요.”
마지막으로 옷차림을 점검하고 문을 열자 조엘이 서 있었다.
“와. 멋지네요. 이 정도면 해리스 씨도 노아 씨에게 홀딱 반할 겁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노아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 갈까요?”
“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노아는 긴장한 채로 조엘과 함께 서재로 내려갔다.
서재로 들어서자 알렉스와 처음 보는 노신사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소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조엘의 말에 노신사가 가장 먼저 숙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더니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머리가 센 노신사의 눈빛은 진중했다. 연령대는 에디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나이대치고는 자세가 반듯했고, 정장을 입은 체격은 제법 단단해 보였다.
“자네가 노아 칼튼인가?”
그의 물음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은 곧 부드럽게 바뀌었다. 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멀뚱히 서 있는 노아에게로 다가갔다.
“에디가 왜 자네를 소개해 주지 않는지 알겠군. 이렇게 미인이라는 소릴 쏙 빼놓다니. 하여튼 에디도 성격이 참 나쁘단 말이야.”
낯선 노신사가 에디를 언급하는 순간,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살짝 풀어졌다.
“그 친구 심미안은 알아줘야 해. 어디서 이런 미인을 찾았을까? 거기 있지 말고 이리로 앉게.”
그의 권유에 얼떨결에 노아는 해리스 옆에 앉았다.
“알렉스가 결혼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는데, 자네 얼굴을 보니 저 녀석이 왜 이 결혼을 받아들였는지 알겠군그래. 너도 별수 없는 알파로군.”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해리스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알렉스에게 보냈다.
“네, 뭐어….”
떨떠름한 표정이긴 했지만, 평소처럼 적의가 가득한 눈빛은 아니었다. 노아는 행여나 알렉스의 태도가 돌변할까 봐 내심 마음을 졸였다.
“에디가 자네 얘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는가. 보기 드물게 심성이 착하고 좋은 청년이라더니, 심성만 좋은 게 아니라 미모도 갖추었네. 어째 그 친구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니 역시 다 속셈이 있었어.”
“아, 아니에요…. 전… 한 게 없는데요….”
노아는 쏟아지는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사래를 쳤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에디는 이분께 어떤 얘길 한 걸까.
“한 게 없긴. 자네가 에디에게 해 준 일을 생각하면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네. 덕분에 에디는 복잡한 제 신변을 정리할 시간을 벌었으니까.”
해리스는 노아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알렉스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받을 자격? 정리할 시간? 역시 저 오메가와 조부가 작당을 한 거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알렉스는 일단은 참았다.
“자넨 행운아야. 이리 미인에 마음씨도 착한 배우자를 맞이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자넨 조부께 감사해야 해.”
“감사할 일인지 아닌지는 좀 더 살아 봐야 알 것 같네요. 아직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그보다 결혼식은 왜 간소하게 치렀나. 헌트 그룹의 대표 결혼인데 시청에서 끝내는 게 말이 되나.”
노아는 저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결혼이 형식적인 걸로 생각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들어서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해리스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할아버지 장례 치른 지가 얼마 안 됐잖습니까. 애도 기간에 크게 식 올리는 게 아무래도 좀 꺼려져서요.”
“아…. 그건 또 그렇네. 그럼 신혼여행도 그것 때문에 생략인가? 그래도 결혼 휴가는 받아야 하지 않나.”
“승계 작업도 있고, 지금 당장은 저도 여유가 없어서요. 그게 급한 건 아니잖아요.”
“급하지 않긴! 이제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닌가! 서로에 대해 알 시간이 필요하지. 자네 조부도 그걸 바랐을 걸세.”
“그렇다고 회사 일을 나 몰라라 할 순 없잖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유언 조건, 기억하지? 이 결혼이 제대로 잘 진행되는지 난 확인할 의무가 있네. 그게 에디가 요구했던 사항이고. 그리고 그걸 확인한 후에 자네에게 상속을 진행할 거야.”
알렉스의 표정이 굳었다. 이를 악문 턱이 단단해졌다. 화를 참는 듯 그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 막 알게 된 사람입니다. 저에게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것까지 강요할 생각입니까?”
“서로 가까워질 시간이 필요한 건 나도 아네. 그러니 하는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 딱 좋은 시기 아닌가. 없는 시간이라도 내서, 노력해야지!”
호통치는 소리에 노아는 목을 움츠렸다. 알렉스에게서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결혼한 부부가 남처럼 지낼 수는 없는 법이야. 그건 에디가 원한 결혼이 아니네. 나는 에디의 대리인으로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을 지켜볼 의무가 있네. 그러니 두 사람 다 노력해야 하네. 서로 가까워지려면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야 하지 않나. 자네가 일이네 뭐네, 하면서 회사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언제 가까워지겠나.”
으드득. 이 가는 소리에 노아는 더더욱 목을 움츠렸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알렉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좋습니다. 결혼 휴가, 받죠. 그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목 안에서 울린 목소리는 간신히 쥐어 짜내는 듯 힘겨웠다.
“그래, 그래야지.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해리스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서류를 차곡차곡 챙겨 노아 앞으로 밀었다.
“이건 자네의 상속 재산들일세. 자네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몰라도, 결혼은 상속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네. 필요한 내용은 여기에 있으니 찬찬히 읽어 보게.”
노아 앞에 펼쳐진 서류에는 수없이 많은 글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어려운 법률 용어가 지나치게 많아 정확한 문맥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해리스가 곁에서 하나하나 설명을 해 주었다.
상속 조건은 단순히 결혼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에디의 유언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작성되었고, 결혼이 그저 형식적인 것으로는 성립할 수 없었다.
이래서 6개월이란 시간 동안 남에게는 진짜 결혼으로 보여야 한다는 거구나.
노아는 그제야 그들의 제안을 제대로 이해했다.
에디는 매우 꼼꼼하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노아와 알렉스가 지켜야 할 부부의 의무에는 같은 집에서의 동거와 합방의 의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 합방에는 법을 위반하지 않는, 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건 합방을 어느 한쪽이 강제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히트 사이클과 러트를 같이 보내야 한다는 항목을 발견하는 순간 노아는 눈을 크게 떴다.
조엘은 이런 조항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히트 사이클 주기를 알려 달라고 했다.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그를 힐끔거리자, 그는 어느새 창가에 서 있었다. 그가 팔짱을 끼자, 슈트 상의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옷감 아래 숨겨진 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보이는 듯했다.
“결혼 생활이 무탈하게 6개월 동안 유지될 경우 에디의 유언대로 노아, 자네에겐 오백만 달러의 신탁기금과 배드포드가에 있는 펜트하우스를 상속받게 되네. 물론 결혼 생활 동안 자네에게 생활비는 따로 지급이 될 거네.”
해리스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노아의 머릿속은 온통 사이클 주기를 같이 보내야 한다는 문구에 정신이 팔렸다.
사이클 주기를 같이 보내야 한다니.
분명히 주기는 서로 피해야 한다고 그랬는데…. 노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푸른 눈동자는 원망하듯 이번엔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조엘을 힐끔거렸다.
“에디의 유언이 자네에게 갑작스러웠다는 건 아네. 하지만 에디는 자네를 무척 아꼈고 놓치고 싶지 않아 했네.”
톡톡, 손등을 두드리는 감촉에 노아는 조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네? 네에…. 저, 저도 할아버지를 좋아했어요…. 제겐 늘 친절하셨던 분이시니까….”
“그래. 자네가 이해해 주니 다행이야. 기왕 결혼한 거니까 자네도 노력해야 하네.”
에디의 친구인 노신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노아는 시선을 피하듯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상속 서류에 서명을 다 받은 해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을 응시하던 알렉스는 몸을 돌렸다.
알렉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멀리 안 나갑니다.”
“그래, 내 조만간 또 한 번 들르지. 그리고 휴가는 꼭 받아.”
해리스의 당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알렉스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그러나 곧 그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죠.”
이죽거리는 게 틀림없다. 해리스가 곧장 눈썹을 찌푸리더니 노아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알렉스가 자넬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면 연락하게.”
노아의 손에 명함을 쥐여 주고 해리스는 저택을 떠났다.
해리스를 배웅하겠다며 조엘이 서재를 나가 버리자 두 사람만 남았다.
그와 단둘이 남게 되자 노아는 잊고 있던 긴장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그에게선 조금씩 페로몬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공간을 서서히 채우듯이, 싸하고 어딘가 묵직한 향이 번지고 있었다.
“물, 물어볼 게 있어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노아는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우물쭈물 입을 열자마자 창가에 서 있던 그가 움직였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빈틈없이 몸에 딱 맞는 슈트 상의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다리가 천천히,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느긋하게 움직였다.
잿빛 눈동자는 고요한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끝도 없이 깊은 동공(洞空)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시선을 사로잡는 남자의 모습에 노아는 갈증이 밀려왔다. 물어봐야 해.
“히트 사이클을…, 같, 같이 보내야 한다고….”
우물우물 말을 흘리는 사이, 남자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향이 공기 중에 맴돌며 노아를 둘러쌌다.
“그래서 나더러 유언에 따르라?”
지나치게 낮게 깔리는 어조에 노아는 파드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너무 놀라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조엘 씨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없을 거라…, 당황해서 주절거리며 어떻게든 설명하려던 순간, 갑자기 폭풍처럼 그의 페로몬이 노아에게 쏟아졌다.
“헉…!”
숨이 턱 막혔다. 폭력에 가까울 정도로 난폭하고 위협적인 페로몬은 노아를 완전히 깔아뭉갰다. 그저 아름답다고 여겼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더없이 짙고 위험한 색으로 일렁거렸다. 노아는 새파란 눈동자를 크게 뜨고 헐떡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오메가의 감각을 건드리는 알파 페로몬이 숨통을 조여 왔다.
“깜빡하면 이 얼굴에 속을 뻔했어. 말해 봐. 이것도 다 조부와 네 계획이었지? 해리스를 시켜서 감시하게 하면 어떻게든 결혼을 진짜로 만들 기회가 있을 거라고.”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 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
숨을 토해 내듯 노아는 간신히 입을 열어 변명했다. 그러나 위협적으로 쏟아진 페로몬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노아의 긴 속눈썹은 쉴 새 없이 파르르 떨렸고, 막힌 숨을 찾기 위해 입술이 벌어졌다.
“아!”
“내가 괜히 혼전 계약서를 작성한 줄 알아? 저 좆같은 항목은 이미 혼전 계약서로 무용지물이 됐어. 그리고 네가 해리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순간, 너는 내게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줘야 하지. 혼전 계약서의 비밀엄수 조항에 따라서 말이야.”
잿빛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거렸다. 입매를 이죽거리는 얼굴이 분노로 절여져 있었다. 삽시간에 뻗은 큰 손이 노아의 턱을 부숴 버릴 것처럼 억세게 잡아 눌렀다. 그의 손은 아래턱을 누르고 노아의 귀밑까지 감쌌다. 노아를 내리누르는 건 이제 페로몬이 아니었다. 물리적으로 가해진 그의 손아귀 힘에 정말로 숨이 막혀 왔다.
시야가 뿌예졌다.
“너는 절대로 날 어떻게 하지 못해. 알아?!”
“놔, 놔…, 주, 숨, 을… 못…,”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긁어 댔다. 눈동자에 몽글몽글 물기가 맺히다 이윽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벌어진 입술에선 곧 꺼져갈 듯 희미한 숨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을 씨근거리며 노아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힘 빠진 다리를 버둥거렸다.
살려, 제발….
호소는 목 안으로 삼켜지고, 바람 빠진 풍선 소리만 밖으로 새어 나갈 뿐이었다. 살기 위해 노아는 그의 팔을 긁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는 눈물로 가득하고 눈가는 붉어졌다.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고 분홍빛 혀가 꿈틀댔다. 점점 혈색이 사라지는 얼굴은 점점 더 도자기 인형처럼 굳어 갔다. 죽음의 위협에 닥치자 오메가의 본능은 알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페로몬을 개방했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주면, 가느다란 목은 똑 부러지리라는 걸 알렉스는 알았다. 난폭한 본능이 제 안을 휘저었다. 그때였다. 달짝지근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아랫배가 불시에 뜨거워졌다. 갑자기 제 손아귀에 다 잡힐 정도로 가는 목덜미만큼이나 허리도 한 손에 잡힐지 궁금해졌다. 쌔액쌔액, 가느다란 숨을 토해 내는 도톰한 입술이 알렉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갈증이 밀려왔다. 헐떡이는 저 분홍색 혓바닥을 한입에 삼키고 단내 나는 타액을…,
“―!”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인지하는 순간, 알렉스는 노아를 밀쳤다.
“이 썩을 페로몬 당장 거둬!”
컥,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없이 헐떡거리는 노아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네가 감히, 나한테 페로몬을 풀어?! 이 천박한 오메가 따위가!”
알렉스는 화가 나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이따위 페로몬에 현혹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발정 난 페로몬을 풀면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어?! 절대로! 그럴 일 없어! 아무리 네가 발버둥 쳐도 난 오메가랑 안 자! 그런 일 따윈 없어!”
알렉스의 가슴은 분노로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제 눈앞에 쓰러진 오메가의 목을 꺾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알렉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살아. 허튼수작 부리다가 내 눈에 띄면, 그땐 이 목을 부러뜨릴지도 모르니까.”
잇새로 으르렁대며 경고한 알렉스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쾅. 거칠게 닫힌 문소리가 복도 가득 울렸다.
“어? 대표님? 어디 가십니까?”
때마침 해리스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조엘은 알렉스의 표정을 확인하는 순간 멈칫했다.
아니, 저 표정은 누구 하나 죽인 표정인데?
쉬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로 알렉스가 조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야…? 노아랑 얘기가 잘 안 됐…, 헉! 혹시 싸우셨나?”
조엘은 서둘러 서재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광경에 그는 소리쳤다.
“노아 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괜찮아요?!”
조엘이 쓰러진 노아를 부축했다. 노아는 목을 감싸며 정신없이 기침을 내뱉었다. 노아의 두 뺨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턱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대표님이 목을 졸랐어요?! 미친 거 아니야?! 일어나요. 병원, 아니…, 병원은 안 되겠네요. 주치의를 부를게요!”
“괜, 괜찮…….”
성대를 다친 모양인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서둘러 만류하는 손짓에 조엘은 노아의 몸부터 먼저 일으켰다.
똑바로 서질 못하고 휘청하는 노아를 부축해 소파에 앉히고는 조엘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선 마셔요. 정말 괜찮겠어요? 대표님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몸의 떨림이 가라앉질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그건 노아가 묻고 싶었다. 그가 왜 제게 화를 냈는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노아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에디와 자신이 뭘 꾸몄다는 거지? 그냥 에디와 알게 된 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가.
노아의 눈에선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자신을 이런 상황으로 밀어 넣었냐며 에디에게 원망도 들었다.
“의사를 부를게요.”
일어나려는 조엘을 붙잡았다.
“그, 그만…두세요…. 괜찮아질 거예요.”
“하지만 노아!”
노아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답답함에 조엘이 제 가슴을 턱턱 두드렸다.
“대표님이 오메가를 싫어하는 줄은 알았는데, 당신한테 이럴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죠? 자기보다 한참 작은 사람한테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가 있냐고요!”
정말 이해 못 하겠다고 조엘이 한참 동안 씩씩거렸다.
분이 풀릴 만큼 혼자 화내더니 조엘이 노아를 부축해 방까지 데리고 갔다.
“푹 쉬시고요, 내일 상태 봐서 안 되겠다 싶으면 의사 부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돼요….”
노아는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거절했다.
“안 그래도 되긴요! 당신은 가짜 결혼을 한 거지 대표님께 이런 일을 당하라는 게 아닙니다.”
화조차 내지 않는 노아를 대신해 조엘이 화를 냈다. 아무리 유언 때문에 화가 났다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대표가 오메가를 대하는 방식은 폭력이 아닌 말로 모욕을 주고 경멸하는 게 다였다. 물론 칼보다 더 날카로운 말솜씨가 상대를 완전히 깔아뭉개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몸에 손대는 짓은 안 했다.
결혼 상대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노아를 만난 건 어찌 보면 대표에겐 행운에 가까웠다. 만약 그 상대가 지금까지 대표에게 들이댔던 오메가들 같았으면 지금보다 훨씬 시끄러웠을 테니까.
무심코 결혼 상대가 다른 사람일 경우를 떠올리다 조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론이며 신문사에 대표와의 결혼을 떠들어 대는 게 너무 쉽게 떠올랐다.
조엘의 시선은 파리한 안색으로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린 노아에게 향했다. 턱 주변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게 너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저 멍이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갑갑한 심정에 조엘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세요. 내일 오겠습니다.”
평소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라도 했을 노아였지만, 지금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딸깍,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고요함이 침실을 가득 메웠다.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운 노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이내 멈췄다.
* * *
어두운 마호가니 바 테이블에 걸터앉은 인영(人影)이 잔을 탁 내려놓았다. 작고한 전 회장의 컬렉션이라 불리는 홈 바 선반에는 온갖 종류의 술이 쭉 늘어서 있다. 은은한 노란색 조명이 프리미엄이 붙은 값비싼 술병을 비추고 있었다.
발효주보다는 증류주를 즐겨 마시던 전 회장의 취향을 물려받은 알렉스는 제 조부가 애지중지하며 특별한 날이 아니면 꺼내지 않던 귀한 위스키를 아낌없이 위 속에 들이부었다.
그 앞에 놓인 위스키는 이미 반 이상이 줄어 있었지만, 알렉스는 망설임 없이 다시 술병을 기울여 잔에 가득 따랐다.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알코올도수 40도가 넘는 술을 반병 이상 비웠는데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전 깊숙이 끓어오른 열기는 더해졌다. 잔에 남은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알렉스는 아예 잔을 밀어내고 술을 병째 퍼부었다.
달짝지근하고 은은한 향이 자꾸만 코끝에 맴도는 기분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검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술병이 늘어선 선반을 노려보았다. 입이 바짝 말랐다. 다시금 술을 들이부어도 제 속을 바짝 태우는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열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손에 쥔 술병을 알렉스는 기어이 내던졌다.
쨍그랑!
선반에 부딪혀 병 두어 개가 깨어졌다. 선반을 타고 술이 흘러내렸다.
“시발.”
성인이 된 이후엔 좀처럼 입에 담을 일 없던 욕설을 내뱉었다. 분출할 수 없는 화가 알렉스의 이성을 뒤흔들었다.
퍽퍽. 그의 긴 다리가 단단한 마호가니 바를 몇 번이고 걷어찼다. 구김 하나 없이 매끈한 그의 슈트가 구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열기와 갈증으로 짜증이 난 그는 넥타이에 손을 걸어 단번에 그것을 벗겨 냈다. 솜씨 좋은 테일러가 재단한 값비싼 슈트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몸을 죄는 조끼도 벗고 셔츠 단추도 풀어 버렸다. 커프스도 풀어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소매를 둘둘 말아 올렸다. 190센티미터의 커다란 몸을 감싸고 있는 건 이제 셔츠 한 장과 정장 바지가 다였다. 그는 반들반들 윤기 나는 구둣발로 선반으로 다가갔다. 카펫에 스며든 술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서걱거리는 유리 조각이 밟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팔을 뻗어 손에 잡히는 술을 가져와 뚜껑을 따고 병째 들이마셨다.
식도를 태우는 독한 보드카에 알렉스의 눈썹이 잠깐 꿈틀했다.
그는 인상을 쓴 채로 한 손엔 보드카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걷는 도중에도 그는 보드카 마시는 걸 멈추지 않았다.
소리를 흡수한 카펫 위로 그의 구둣발이 움직였다. 그렇게 술을 들이부었는데도 알렉스의 정신은 멀쩡했다.
제길. 왜 취하지 않는 거야.
알렉스는 어느덧 노아가 머무는 방 앞에 도착했다. 문 너머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에 감기던 가는 목덜미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분홍빛으로 움찔대던 혓바닥. 습윤한 눈동자. 눈꼬리가 살짝 길게 빠진 아몬드형의 눈과 한 손으로도 다 가려질 정도로 작은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달짝지근하고, 어딘가 간질거리게 만들던 페로몬이 지금도 나는 것 같았다.
아랫배가 단단하게 조였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단단하게 걸어 잠근 이 문 너머 잠들어 있을 오메가의 목덜미를 낚아채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고 싶었다.
“제기랄!”
묵직하게 달아오른 열기를 깨닫는 순간, 알렉스는 다시금 보드카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이게 다 저 요망한 오메가의 농간이다. 알파를 유혹하는 짐승 같은 페로몬을 뿜어 댔기 때문이다.
“시발!”
알렉스는 곧장 제 방으로 달려갔다. 제 몸을 맴도는 달짝지근한 페로몬을 당장 지워 버려야 한다.
쾅, 제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간 그는 욕실로 향했다. 보드카를 한 손에 든 채로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물줄기가 거세게 알렉스의 온몸을 적셨다. 물에 젖은 셔츠 너머로 피부가 얼룩처럼 달라붙었다. 두툼한 흉곽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보드카를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바짝 섰다. 숙인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알렉스는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시야로 불룩 솟은 고간이 보였다. 바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갑갑함을 호소하듯 꿈틀대며 자기주장을 해 댔다. 달라붙은 셔츠 너머로 복근이 단단하게 꽉 조였다.
미칠 듯이 끓어오른 성욕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불룩 솟은 성기를 옷 위로 주물렀다. 그러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욱 안달 나게 했다.
그는 보드카를 내던지고 다급하게 지퍼를 내렸다. 손을 넣어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두툼한 성기를 오른손으로 감아쥐고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단단히 흥분한 남근의 감촉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밀려오는 흥분에 알렉스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그대로 맞으며 그는 감아쥔 성기를 더욱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거리며 눈물을 흘리던 노아를 떠올리는 순간, 발기한 것이 더욱더 뜨거워지며 핏줄이 도드라졌다.
“큿,”
목 안에서 새어 나온 신음이 샤워부스 안에서 물소리에 섞였다. 달싹거리는 붉은 입술이, 작고 갸름한 얼굴이,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가, 계속해서 알렉스를 부추겼다. 성기를 쥔 오른손이 점점 속도를 높였다. 손바닥으로 감싼 성기를 터트릴 것처럼 강하게 쥐고 흔들었다. 하반신으로 몰린 열기는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툼한 귀두의 갈라진 틈이 젖어 갔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팔 근육이 요동쳤다.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등줄기와 꼬리뼈를 강타하는 강렬한 감각에 기둥을 쥐고 흔들던 오른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휘몰아치는 쾌감에 이를 더욱 악물었다. 그륵대는 나직한 신음이 목 안에서 울렸다. 핏줄이 불거진 성기 끝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청록색 타일에 여러 차례 쏘아졌다. 정액을 쥐어 짜내듯이 그는 몇 번이고 오른손을 움직여 남은 것을 모두 쏟아 냈다.
몸 안에서 나온 정액은 물과 뒤섞여 금세 흘러내렸지만, 알렉스에게 남은 자괴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택의 서쪽에 자리한 방에서 보이는 풍경은 잘 가꾸어진 숲길이었다. 푸른 잎사귀가 곧 다가올 여름을 맞이하듯 생생한 생명력을 뽐내는 모습은 새벽부터 밤까지 쉼 없이 일하던 노아의 삶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그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그에게 턱이 잡힐 때 성대 어딘가가 다친 모양이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아프더니 목소리도 형편없이 갈라져 평소와 달랐다.
자는 동안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은데 막상 눈을 뜨니 꿈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서럽고 무섭고 두려웠던 감정만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씻으면서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한 노아는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확인하고는 옷장을 뒤져 목을 가리는 터틀넥 니트를 찾아 입었다.
방을 나서려던 노아는 도로 발길을 돌려 짐 가방을 뒤졌다.
찾았다. 노아가 꺼낸 건 억제제였다. 어제 무심코 페로몬을 흘리는 바람에 그가 더욱 화를 냈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노아가 먹는 억제제는 호르몬 함량이 낮아 부작용이 극히 적은 약이었다. 부작용이 적은 대신 효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지금까지는 이 억제제로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약을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딱 6개월이면 되니까.
부작용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그리 길게 복용할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페로몬으로 그를 유혹했다는 오해는 받고 싶지 않았다.
노아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억제제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최대한 빨리 병원에 다녀와야지.
약을 전부 삼킨 노아는 그제야 모든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방문을 열었다. 조용히 복도로 나와 1층으로 향하는 계단 난간이 보일 때였다.
긴 인영이 노아의 시선 끝에 걸렸다.
형편없이 구겨진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노아는 자리에서 멈춰 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셔츠는 형편없이 구겨졌고, 셔츠 소매는 굵은 팔뚝이 드러나도록 아무렇게나 둘둘 말아 올린 모습이었다. 깔끔하던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이마를 가렸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맹수처럼 노아에게 내리꽂혔다.
노아는 목을 움츠리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정수리에 내리꽂히던 시선은 한참을 머무르다 사라졌다. 천천히 고개를 든 노아는 알렉스가 계단을 내려간 걸 확인하고서야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남자의 상태는 무척 나빠 보였다. 설마 어제 일 때문에 그런가.
가만히 시선을 떨구고 있던 노아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의 반을 내려갔을 때, 아래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이게 무슨 꼴…, 어제 술 드셨어요?”
“소리 지르지 마. 머리 울려.”
“아니, 대체 얼마나 드셨길래 상태가 그렇습니까? 지금 술 냄새 엄청나요.”
“시끄럽다니까.”
“회사는 어쩌시려고…. 아! 오늘부터 결혼 휴가 쓰실 건가요? 그럼 지금 당장 급한 일들은 어떻게 하시고요? 스케줄 조정을 해 봐야겠네요.”
조엘이 잔소리인지 걱정인지 애매한 어조로 신나게 떠들었고,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는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노아는 평소와 다른 그의 상태가 숙취 때문이라는 걸 대화로 알게 되었다.
대화 중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직 일하는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이라 그런지 주변은 조용했다.
아, 맞다. 조엘에게 병원 가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달리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제자리에서 서성거리다 목적지를 정했다.
주방이 이쪽이었던가?
워낙 넓은 저택이라 방향이 헷갈렸다. 노아는 기억을 더듬어 움직였다.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긴 복도를 한 번 꺾자, 현대식 주방이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들이 있었다.
“노아 씨! 일어났어요? 몸은 좀 괜찮나요? 병원 안 가도 되겠어요?”
노아를 발견한 조엘이 아침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다. 관자놀이를 누른 채로 아일랜드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그도 고개를 돌려 노아를 쳐다봤다.
“아, 네…. 괜찮아요….”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금세 시선을 떨구고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쉬시지, 왜 벌써 일어났어요?”
“그냥….”
“거기 있지 말고 물 좀 갖고 와.”
짜증 섞인 명령에 조엘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물 가지고 되겠어요? 델슨 부인에게 뭐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세요. 곧 오실 때 됐는데….”
“놔둬. 노인네 학대하는 취미는 없어.”
생수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켜는 걸 보니 어지간히 숙취가 심한 모양이었다.
“이래서 출근 가능하시겠어요? 미리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조엘의 호들갑에 알렉스는 생수병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짜증스레 쓸어 넘기고는 조엘을 한번 노려보았다.
“오늘따라 말이 많아. 이쯤에서 적당히 닥치는 게 좋을 거야.”
관자놀이를 또 한 번 문지르던 그가 조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분이 아주 좆같거든. 사람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헙.”
알렉스의 경고에 조엘이 화들짝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잔뜩 구겨진 셔츠 차림의 그가 노아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노아의 목덜미에 닿은 듯했지만 알아채기도 전에 그는 이미 저만치 사라졌다.
“후유…. 십 년 감수했네. 혹시, 어제 저 퇴근하고 두 분 무슨 일 있었어요?”
알렉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조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아니요…. 전 어제, 그대로 잠들었어요.”
“그래요? 그런데 왜 저런대? 술을 마시면 마셨지, 생전 숙취 따윈 없더니 오늘따라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요. 하여튼, 성질 정말 더럽고….”
조엘이 욕을 중얼거리면서 연봉만 아니었으면 진작 때려치웠다고 한탄을 시작했다.
노아는 혼자 중얼대는 조엘을 놔두고 냉장고를 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던 그가 출근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냉장고 안에는 원하는 재료가 갖춰져 있었다.
노아는 주방을 뒤져 필요한 도구를 꺼냈다.
토마토와 필요한 소스를 믹서기에 넣었다.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재료들을 한 번에 넣고 갈았다.
다 갈아진 주스를 기다란 유리컵에 쪼르륵 따라 조엘에게 내밀었다.
“이거 뭔가요?”
“블러디 메리예요. 알코올은 뺐어요. 숙취에 도움이 될 거예요….”
“설마…이거 대표님 갖다 드리라고요?”
“네….”
눈앞에 놓인 붉은 주스를 보며 조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대표님이 뭐가 이쁘다고 이런 걸 주세요? 숙취로 고생 좀 해 보라지.”
“그래도요…. 출근하신다면서요….”
“노아 씨는 정말 착하네요. 어제 대표님한테 그 꼴을 당하고 챙겨 주고 싶어요?”
노아는 그 물음에 힘없이 웃었다. 노아에겐 알렉스가 무서운 사람이지만, 그래도 숙취로 끙끙대는 걸 보니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카일도 가끔 심하게 숙취를 앓곤 해서 그때마다 노아가 블러디 메리를 만들어 주었다. 네가 만들어 주는 블러디 메리가 최고라고 말하던 카일이 떠올라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제는 카일을 위해 블러디 메리를 만들어 줄 일이 없겠구나.
어깨를 으쓱하며 조엘이 주스를 들고 일어났다.
“아, 그리고 저 오후에 병원 좀 다녀와야 해요.”
“병원이요?”
주방을 나서던 조엘이 깜짝 놀라 물었다.
“역시 어제 일 때문에 아픈 거죠?”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억, 억제제가 다 떨어져서….”
“그래요. 오후에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아, 저기…!”
“왜요?”
“그거… 제가 만들었다고 하지 마세요. 혹시라도 안 드실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그럼. 제가 만들었다고 하죠, 뭐.”
고개를 끄덕인 조엘은 이 좋은 걸 왜 성질 더러운 대표에게 줘야 하냐면서 구시렁대면서 나갔다.
저 블러디 메리가 그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이제야 걱정이 밀려왔다.
노아는 고개를 숙이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 하는 거지, 나는.
괜히 팔을 들어 목을 쓰다듬었다. 통증은 없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아직 생생하다.
어제 그의 손에 죽을 뻔해 놓고 숙취 걱정이나 하는 저 자신이 무척 한심했다.
‘너는 좀 약게 살아. 사람이 너무 착하게만 살면 너만 손해 보게 돼.’
카일의 잔소리가 떠올라 얕게 웃었다. 오늘은 카일에게 전화라도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