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른 아침, 조엘이 노아가 입을 정장을 보내 주었다.
영업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이걸 어떻게 구했을까. 노아는 고급스러운 옷 상자를 받아 들고 조금 궁금해졌다.
“이따 10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상자를 전해 준 사람이 깍듯이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아니, 저기 괜찮은데…. 저기요? 저기요…!”
알아서 시청으로 찾아가겠다고 말하려 그를 불렀으나, 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노아는 상자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포장만으로도 노아가 쉬이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오늘만 입고 돌려줘야지.
행여나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노아는 아주 조심스럽게 거실 탁자에 상자를 내려놓고 포장을 풀었다.
검은 상자를 천천히 열자 얇은 흰 종이가 옷을 감싸고 있었다. 포장째 그대로 돌려주려면 이 흰 종이도 구겨지면 안 되겠지.
주의를 기울여 겹겹이 쌓인 종이까지 걷어 내자 은은한 크림색의 정장이 보였다.
이걸 입으라는 건가.
노아는 조심스레 슈트 상의와 바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드레스 셔츠까지 세트로 갖추어져 있었다.
괜찮을까….
크림색 정장을 내려다보며 노아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고급스러운 옷을 입어 본 적도 없고, 망가뜨리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노아는 정장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갈아입는 내내 구김을 신경 썼더니 평소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렸다.
노아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의 긴 거울 앞에 섰다. 급하게 구했을 텐데 치수가 맞았다. 남들보다 좀 마른 탓에 허리가 살짝 겉돌았지만, 바지가 내려갈 정도로 큰 건 아니어서 괜찮았다.
어깨나 품도 이 정도면 맞는 편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노아는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옷은 정장인데 머리는 덥수룩해서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았다.
가위로 대충이라도 자르는 게 나을까, 생각하다가 괜히 건드렸다가 더 이상해질까 봐 그냥 두었다.
그래도 깔끔하게 가야겠지…?
덥수룩한 머리를 가볍게라도 손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노아는 카일이 쓰는 헤어 제품을 찾았다. 왁스를 대충 손에 덜어 길게 내려온 머리를 이마 뒤로 넘겼다. 손에 익질 않아서 처음엔 좀 헤맸지만 몇 번 만지다 보니까 그럭저럭 깔끔하게 다듬어졌다.
늘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모자를 눌러쓰고 다닌 탓에 노아는 매우 오랜만에 제 눈을 보았다.
푸른색이 도드라진 눈동자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 밝은 햇살 아래 서 있으면 가끔 보랏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이후로 노아는 제 얼굴을 제대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남의 눈에 띄어 원치 않는 관심을 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제 얼굴을 본 게 오랜만이어서인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초라한 옷차림에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던 알렉스를 떠올리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 정도면 그 사람도 만족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오메가를 싫어하는 알렉스가 나 따위를 신경이나 쓸까? 에디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알렉스는 나 같이 가난하고 속물인 오메가 따윈 상대도 안 했을 거야.
기분이 가라앉았다. 곧 있으면 그 사람과 결혼을 한다. 노아는 거울 앞에 서서 그 사실을 곱씹었다.
걱정이 밀려왔지만 애써 그것을 털어 냈다. 이제 와 돌이킬 수 없다.
6개월은 금방이야. 시한부 결혼이라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노아는 괜스레 머리를 매만졌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드디어 데리러 갈 사람이 왔다.
노아는 현관으로 걸어가며 마음을 다잡았다.
* * *
“대표님, 표정 좀 푸시죠.”
시청 입구에 삐딱하게 선 알렉스가 눈동자만 굴려 조엘을 노려보았다. 대망의 결혼식 날인데 신랑 되는 사람 표정이 그게 뭐냐고 한마디 하려던 조엘은 매서운 눈빛에 시선을 돌렸다.
“짜증 나게 굴지 말고, 주주 총회 준비는 어떻게 돼가?”
“3일 후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결혼 증명서 발급이 딱 3일 걸린다고 하니까 주주 총회까지는 문제없습니다.”
“해리스한테 통보는 했어?”
“네. 당연히 했습니다. 일단 이걸로 상속 문제는 한시름 덜 겁니다.”
조엘의 대답에 알렉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유산 상속 조건 때문에 알렉스의 기분은 내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장례식 후에 곧바로 그룹을 승계할 거라 예상했던 알렉스에게 결혼이라는 복병이 터진 이후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오메가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에 대한 보복 행위로 조부가 제대로 알렉스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리는 유언이었다.
심지어 완전한 상속을 위해 6개월의 유예기간까지 두었다. 분명 결혼만 조건으로 내걸면 알렉스가 제대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서 내린 조치였다.
상속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시에 6개월 후 조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기부 재단에 양도한다고 했다.
조부가 자신의 것이었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까진 알렉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 유산 중에는 헌트 인더스트리의 주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조부 몫의 주식을 빼고도 현재 알렉스가 그룹 내에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룹을 승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그 주식이 시장에 풀리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알렉스는 불확실한 게임을 무엇보다 싫어한다. 만약에, 어쩌면. 이라는 가정이 생길 만한 상황을 사전에 차단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조부는 자신이 절대 그 주식을 포기하지 않을 걸 알고서 이딴 유언을 남긴 것이다.
오메가와 결혼이라도 하면 어쩔 수 없이 알파의 본능에 따라 살 거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건 조부의 착각일 뿐이다.
알렉스는 죽어도 오메가와 제대로 된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유산을 받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결혼이라도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결혼이 조건일 뿐, 아이를 낳으라고 한 게 아니라는 거다.
오메가에게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조건이 없는 한,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6개월만 유지하면 된다.
생각하니 또다시 이가 갈렸다. 이를 꽉 물었던 탓에 알렉스의 턱이 단단해졌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알렉스는 노아를 기다렸다.
시청에서 결혼하고 나면 본격적인 승계 작업에 돌입해야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었다.
“왜 이렇게 안 와?”
도롯가를 노려보며 알렉스가 투덜거리자, “곧 올 겁니다. 아까 출발했다고 연락받았거든요.” 하고 조엘이 대답했다.
“아, 참. 이거요.”
조엘은 준비했던 부토니에를 들고 다가갔다.
“뭘 이딴 걸 달아?”
“그래도 결혼이잖아요. 그냥 달고 계세요.”
조엘은 흰 장미로 장식한 부토니에를 알렉스의 왼쪽 가슴에 달아 주었다. 아무리 형식적인 결혼이라도 시청에서 목사님 앞에서 서약을 나누는 거니 격식은 갖추어야 한다고 조엘이 덧붙였다.
“격식 좋아하네.”
한껏 비꼬는 고용주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조엘은 도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저기 오네요.”
은청색의 세단이 시청 앞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조엘이 냉큼 달려가 마중을 나갔다.
입구 바로 옆에 차가 서자 조엘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노아 씨! 잘 도착하셨…. 어.”
상체를 숙이며 말을 걸던 조엘이 입을 떡 벌렸다. 그의 손에서 부토니에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안녕하세요….”
쑥스러운 듯이 노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를 하다 말고 마치 석상처럼 굳어 버린 조엘이 이상해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불렀다.
“매디슨 씨…?”
눈조차 깜빡이지 않던 조엘이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다 쿵, 하고 차체에 머리를 박았다.
“악!”
“괜찮으세요?!”
깜짝 놀라 노아는 조엘에게 다가갔다. 조엘이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았다.
“괜, 괜찮으세요? 병원 가셔야 할까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그보다 내리시죠.”
어째서인지 노아가 고개를 숙이자 화들짝 놀라며 조엘이 허둥지둥 몸을 뒤로 뺐다. 물러서는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많이 아픈가 봐.
노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리려다 바닥에 떨어진 부토니에를 발견했다.
“이거 떨어졌어요.”
“아, 네네.”
잽싸게 부토니에를 받아든 조엘은 노아의 시선을 피하며 부산스레 움직였다.
“대체 뭐 하느라 꾸물거려?”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알렉스가 다가오더니 노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크림색 정장을 입은 노아에게 고정되었다. 줄곧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거나, 지저분한 앞머리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모습만 보았다.
모자 아래로 드러나는 턱선이라든가, 살짝 들린 윗입술이 얼굴을 짐작게 했지만, 이마를 완전히 드러낸 얼굴은 예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고전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끝이 살짝 들린 코끝. 눈매는 깊었고, 푸른 눈동자는 마치 바다를 품고 있는 듯했다. 푸른 눈동자를 감싸고 있는 속눈썹이 어찌나 긴지 파르르 떨며 눈을 깜빡이자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 아랫입술보다 살짝 도톰한 윗입술은 마치 뜨거운 키스를 나눈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아랫배가 나사로 꽉 조여지는 것 같았다.
알렉스의 한 손으로도 가려질 것 같은 작은 얼굴 안에, 조형미가 뛰어난 이목구비가 있었다.
이 얼굴로 할아버지를 꾄 거구나. 알렉스는 단번에 이해했다. 미인이라 불리는 오메가를 수없이 많이 보았던 알렉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마주한 노아의 얼굴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너무 짜증이 났다.
노아는 미동도 없이 제게 내리꽂히는 시선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불안한 얼굴로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알렉스는 어딘지 화가 난 듯 보였다.
이상한가? 어, 어울리지 않은 걸까.
평소 슈트를 입지 않은 노아에겐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차림이었다. 역시 제 옷이 아니라는 티가 나는 거겠지.
노아는 습관처럼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만지려 손을 올리다 머리를 죄다 이마 뒤로 넘긴 것을 깨닫고 어정쩡한 자세로 손을 내렸다.
의연하게 대처하고 싶었지만, 노아는 평가당하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노아가 고개를 숙이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광대 아래 그늘을 만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움직임에 알렉스는 어째서인지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저…, 노아? 이거….”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조엘이 부토니에를 가슴에 달아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와…. 진짜. 얼굴을 그렇게 드러내니까,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노아 씨 정말….”
부토니에를 달아 주면서 조엘은 횡설수설했다. 말문이 막힐 정도의 미인이란 이런 것이구나, 조엘은 새삼 감탄하면서 저 싹수없는 고용주가 부러웠다.
“헛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언제 그랬냐는 듯 알렉스는 휙 몸을 돌려 먼저 움직였다.
조엘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고용주는 왜 또 저래? 하며 노아에게 칭찬을 쏟아부었다.
“역시 크림색 정장이 잘 어울리는군요. 피부가 하얘서 급한 대로 이걸로 했는데 제 선택이 틀리진 않았네요. 몸에는 잘 맞나요? 대충 눈대중으로 치수를 고르긴 했는데….”
“아, 네. 잘 맞아요. 감사합니다. 이건 깨끗하게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이건 당신 겁니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왜 얼굴을 맨날 가리고 다니세요?”
라고 질문을 꺼내는 순간 조엘은 그 답을 바로 알아챘다.
“하긴, 노아로선 굳이 그 얼굴을 드러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겠네요. 잘 생각하셨어요.”
조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라리 다행이라고 말했다.
노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모호한 표정만 지었다.
“빨리 안 와?!”
저만치 앞서가던 알렉스의 고함에 두 사람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바삐 계단을 올라갔다.
아침 내내 긴장하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결혼식은 매우 간단하게 끝났다. 목사의 주관 아래 두 사람은 의례적인 결혼 선언문을 동시에 읽었다.
반지 교환 때 멈칫했던 노아와는 달리, 조엘이 품 안에서 반지 케이스 두 개를 꺼내 각자에서 전달했다.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우고, 알렉스 역시 노아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급하게 준비한 탓에 반지는 약간 컸지만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제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아도 여전히 실감이 안 났다.
혼인 신고서에 서명하고 목사님이 결혼이 성립되었음을 선고했을 때도 노아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결혼을 꿈꾼 적은 없었지만, 자신이 가짜 결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노아는 성큼성큼 앞서가는 알렉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짙은 회색 슈트를 입은 그의 넓은 등이 노아에겐 마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저 사람과 6개월간 싫어도 같이 지내야 한다.
막막한 앞날에 명치끝이 조여 왔다. 가볍게 가슴을 꾹꾹 누르고 있자, 어디 아픕니까? 하며 조엘이 물었다.
“아, 아니에요.”
괜한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노아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청 밖 광장 쪽에는 이미 알렉스를 데려갈 차가 대기 중이었다.
“저… 이제 어디로 가나요?”
“여기 잠깐 계세요. 대표님께 얘기하고 돌아올게요.”
차에 타기 직전인 알렉스에게 달려간 조엘이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노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로 조엘과 대화를 나누는 알렉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체에 느슨하게 기대선 남자에게서 위압감이 넘쳐흘렀다.
값비싼 슈트가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방만한 자세에도 그가 가진 존재감은 가려지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팔뚝과 직각으로 뻗은 어깨선은 남자의 단단한 체형을 짐작게 했다.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한 강인한 턱선과 남자다운 입매가 어딘지 고집스러워 보였다. 살짝 시선을 내린 탓에 그의 얼굴에 옅은 음영이 져 반듯한 이목구비를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는 노아는 아주 옅은 가슴 떨림을 느꼈다. 입이 바짝 마르는 느낌에 노아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들을 바라보던 노아는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멍하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평소와 달리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서 불안해졌다.
힐끔대는 시선을 피해 노아는 걸음을 서둘렀다.
“…럼 당분간은 제가 보좌하도록 하겠……. 아, 노아 씨.”
대화 중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노아를 쳐다보았다.
“대표님과는 얘기 끝났습니다. 우선 신혼집으로 가실까요? 필요한 설명은 제가 하겠습니다.”
신혼집이라는 말에 저절로 움찔했다. 알렉스가 가소롭다는 듯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타시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거리는 얼굴로 조엘은 뒷좌석 문을 열어 주며 노아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을 짜증스레 쳐다보는 알렉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제가 당신을 보좌할 겁니다. 결혼 내막을 아는 사람이 저뿐이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어려워서요.”
노아는 슬그머니 알렉스의 눈치를 보았다. 기분 좋아 보이는 조엘과는 달리 알렉스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서 타세요. 할 일이 많답니다. 대표님은 이대로 회사로 가시는 거죠? 급한 건 없으시고, 오후에 있을 회의만 참석하시면 됩니다.”
자자, 어서 타세요.
신이 난 음성으로 조엘은 노아를 차 안으로 밀어 넣다시피 했다. 서둘러 여기를 피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노아는 조엘에게 떠밀려 자길 데려왔던 차에 탔다.
노아는 알렉스와 다른 차를 탄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시야에서 그가 사라지자 노아는 그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렸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깊은 한숨을 목 안으로 삼켰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조엘의 말에 차가 출발했다.
차는 시청 광장을 빠져나와 디콘강을 따라 쭉 달렸다. 강 서쪽으로 이동한 차는 칼밴시의 부촌이라 불리는 콜리나 지역으로 들어섰다.
지형적으로 야트막한 언덕인 콜리나는 언덕을 따라 명품숍이 늘어서 있었고, 시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교차로 좌측에는 백화점이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상점과 백화점이 늘어선 번화가를 지나자 분위기는 점점 더 고즈넉하게 바뀌었다.
담장이 높은 호화 주택이 군데군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기부터는 개인 사유지가 많아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노아는 조엘의 말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풍경이 매우 낯설었다. 모형으로 찍어 낸 듯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늘어선 로테 거리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지저분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온통 푸르고 상쾌한 기운이 가득했다.
“아, 저긴 파스 공원이에요. 산책하기 좋은 곳입니다. 이곳 주민들이 주로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곳이기도 하죠. 아, 신혼집에서 공원까지 걸어서 20분 거리니까 종종 나오세요.”
그의 말대로 차는 조금 더 달려 커다란 철문 앞에 도착했다. 조엘이 경비를 선 직원에게 얼굴을 확인시키자, 서서히 그 문이 열렸다.
어쩐지 노아는 주눅이 들었다. 왠지 목적지가 여긴 거 같은데 이 철문은 왜 있는 걸까. 집은 어디에…?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19세기의 유럽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위압감이 넘쳤다.
“이곳은 본래 전 회장님께서 지내시던 곳으로 대표님도 어린 시절엔 여기서 자라셨죠.”
“아….”
유럽 왕족이 살 것 같은 저택에서 지냈다는 말에 노아는 감탄사만 내뱉었다. 노아가 아는 에디는 소탈하고 다정하며 소박한 사람이었다. 조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에디와 노아가 아는 에디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괴리감이 엄청났다.
“자, 들어가시죠. 지내실 곳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위용이 넘쳐 나는 저택을 올려다보던 노아는 조엘의 말에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갔다.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번쩍번쩍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나 손님용 카우치의 고급스러움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닥은 관리가 잘된 대리석이었다.
“회장님께서 돌아가신 후로 비어 있었습니다만, 저택 관리는 별채에 상주하는 관리인 부부가 도맡아서 하고 있어서 당신이 신경 쓸 건 없을 거예요.”
“이렇게 넓은 집을 두 분이 관리하려면 힘들 텐데….”
“그렇진 않아요. 회장님이 계실 때는 상주하던 고용인들이 많았는데 대표님이 관리인 부부만 빼고 출퇴근으로 다 바꿔 버렸습니다. 밤까지 굳이 사람을 둘 필요 없다고 판단하신 거죠.”
아, 보안직원들은 교대 근무하긴 합니다. 라고 조엘이 덧붙였다.
넓고 화려한 현관을 지나자 1층 홀 정면에 부드러운 곡선 모양의 계단이 나타났다.
“워낙 넓은 곳이라 공간 전부를 사용하지는 않아요. 관리가 어렵기도 하고요. 2층도 해가 잘 드는 남쪽 방 몇 개를 대표님이 서재와 침실로 사용 중입니다.”
노아는 조엘의 설명을 들으며 여기서는 길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뜬 채로 주변 장식물 위치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2층 복도는 1층보다 조금 차분한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실내 장식은 현대적이었고 회색과 크림색이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이 복도를 쭉 따라 네 번째 방이 대표님이 쓰시는 침실이고요, 바로 그 옆이 서재입니다. 뭐, 출퇴근이 번거로워서 여기에 묵는 일은 거의 없지만 말이에요.”
“여기 말고 쓰는 집이 또 있으신가요?”
“대표님이요? 네. 당연히 있죠. 회사 근처 콘도에서 주로 생활하세요. 하지만 거기는 신혼집으로 하기엔 너무 삭막한 곳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 눈도 생각해야 해서 신혼집은 여기로 정했습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처하기도 이쪽이 좀 더 편하기도 하고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 뭐… 대표님이 결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아무래도 언론 쪽에서 취재하겠다고 들이닥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대응은 그룹 미디어팀에서 할 겁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 조엘이지만 안 그래도 소심한 노아를 벌써 걱정하게 할 필요는 없어 그는 분위기를 바꿨다.
“아. 그러고 보니 노아 씨가 이 저택에 처음 온 오메가네요!”
“제가요…?”
“네. 대표님 어머님을 빼면 처음이에요. 일하는 고용인들은 죄다 베타 아니면 알파니까요. 대표님의 오메가 혐오증은 매우 오래된 고질병이거든요. 오메가라면 여기 철문조차 통과를 못 한다니까요.”
알렉스가 제게 보이는 태도는 단순히 할아버지를 꾀어내서 생긴 경멸이 아니었던 건가.
이렇게 큰 저택을 관리하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했을 거고, 굳이 베타나 알파로만 사람을 뽑았다는 얘긴데 그 긴 세월 동안 어머님을 제외하곤 오메가는 출입조차 못 했다는 말이 놀라웠다.
“어쩌다…, 아, 아니에요.”
무심코 내뱉은 말을 노아는 재빨리 주워 삼켰다. 어차피 시한부 관계인데 알렉스의 개인 사정을 알게 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다.
“뭐. 궁금해할 수도 있죠. 제 입으로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그보다 여기가 당신이 쓸 방입니다. 대표님 방이랑은 좀 떨어져 있습니다.”
그가 열어 준 방을 보는 순간 노아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내부는 노아가 지내던 연립 주택 전체를 합친 것만큼이나 넓었다.
“계시는 동안 여기를 쓰시면 되고요, 일부러 욕실이 딸린 방으로 요청했습니다. 아무래도 불편하실 테니까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간 조엘은 테라스 창을 열었다.
“서 계시지 마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의논을 해야죠.”
충격에 빠져 허우적댈 틈도 없이 조엘은 척척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이사는 언제쯤이 좋을까요? 사람을 부르려면 미리 알아야 해서요.”
“이사요…? 별로… 사람은 안 불러도 돼요. 그냥 제가 옮길게요. 짐이 별로 없어서….”
“예? 그래도 짐을 완전히 옮기셔야 하는데 혼자 되겠어요? 이쪽에서 사람을 부르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정말 괜찮아요…. 짐이라고 해 봤자 제 옷가지가 다라서요.”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 집을 팔 때 쓰던 가구와 덩치 큰 물건은 중고로 내다 팔았다. 카일에게 얹혀살면서 개인 물건을 두는 것도 염치없어서 짐은 입을 옷 정도로 줄여서 살았다.
“아…. 뭐, 정 그러시면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죠. 그보다 이제 결혼 증명서가 발급되고 나면 회장님의 유언집행인이 상속 때문에 이쪽으로 오실 겁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속이라고 해도 딱히 실감 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멍하니 조엘의 얘기만 들었다.
결혼을 유지하는 동안에는 경제 활동은 하지 말라는 것과 결혼 소식은 업계에 알려지게 마련이니 되도록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당부가 이어졌다. 외출은 자유롭게 해도 되나, 이쪽에서 제공하는 운전기사를 반드시 대동한 채로 움직이라고 했다.
어차피 차가 없으면 외출이 쉽지 않으니 그 부분은 노아도 수긍했다.
“아, 그리고 이건 노아 씨가 사용할 카드와 현금이에요.”
“네? 이걸 왜…?”
“혼전 계약서 제대로 안 읽으셨죠? 결혼 기간에 대표님이 생활비를 일체 부담하실 거예요. 가짜 결혼이라 해도 배우자에게 아예 돈을 안 쓸 순 없잖아요.”
“그, 그럴 필요는 없어요…. 딱히 쓸 일도 없고…. 좋아서 하는 결혼도 아닌데, 경제적 부담까지 지우는 것 같아서….”
“경제적 부담이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조엘이 파하하 웃었다.
“생활비로 지급되는 20만 달러 정도는 대표님께 아무런 부담도 안 됩니다. 돈이 썩을 만큼 많은 분인데 무슨 그런 걱정을 하세요?”
20만 달러가 아무런 부담이 안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노아는 모른다. 자신은 그 돈이 없어서 몇 년이나 고생했고, 결국 가짜 결혼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웃음을 멈추지 않은 조엘은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한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무릎에 놓인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는 낯설고 어색했다.
“아, 그리고 주의하셔야 할 건 저택 내에서는 평범하게 지내셔도 됩니다만, 곧 방문할 상속대리인인 해리스 씨에겐 이 결혼이 가짜라는 티를 내선 안 됩니다.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 그분은 회장님의 유언대로 결혼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는 분이거든요.”
“네? 그럼… 어떻게…….”
“두 분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처음부터 좋은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어색하니까요. 어차피 이 결혼은 서로 필요에 의한 거라는 건 해리스 씨가 더 잘 아실 거니까,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일부러 더 거리를 두시면 안 됩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건 보여 줘야 하니까요. 점점 두 분 사이가 좋아지고 있다고 그분이 믿기만 하면 됩니다.”
“전… 그런 거 자신 없어요…. 그리고 대표님은… 오메가를 싫어하시잖아요. 안 믿을 거예요.”
누군가를 속여야 하는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오메가라면 무조건 싫다는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여 줘야 한다니.
자신 없는 노아의 표정에 조엘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아 씨 얼굴이라면 대표님의 마음을 흔들기는 어려워도, 다른 사람은 대표님이 당신 얼굴에 넘어갔다고 믿을 테니까요.”
확신에 가득 찬 대답과 칭찬에도 노아의 걱정스러운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일단 그 첫 번째로 평소 모습부터 바꿔야 할 것 같네요.”
의아함에 노아가 말끄러미 조엘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미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부르는 것 같아서 노아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한참 통화하던 그는 얘기가 끝난 모양인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그 전에 몇 가지 더 확인할게요. 노아 씨. 이런 걸 묻는 건 실례라는 건 알지만 상황이 특수하니까 물어볼게요.”
그는 무척 조심스럽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내키지 않는 것인지 시선을 조금 내렸다.
“히트 사이클 주기가 어떻게 됩니까? 정말 저는 다른 의도 없습니다. 어차피 전 베타고요, 결혼도 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물어보는 이유는 두 분의 사이클 주기를 확인해야 불상사를 막을 수 있어서 그럽니다.”
“아…. 그렇네요….”
특이형질자에게 사이클 주기를 묻는 건 자칫하면 오해를 살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조엘이 필사적으로 자기변호를 했다.
“오해 안 해요. 그러니 변명 안 하셔도 돼요.”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저도 이런 거 묻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혼하는데 괜한 일로 얽혀서 좋을 게 없으니….”
“네. 이해해요….”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과 알파의 러트는 의지로는 제어가 안 되는 본능의 영역이었다. 억제제가 있기는 하나 사이클 기간에는 효과가 평소의 반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사고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 기간에는 무조건 칩거하고 주변에 사람을 물리는 방법을 택했다.
예외가 있다면 각인한 상대가 있을 때였다.
각인한 알파와 오메가는 두 사람의 페로몬만 느낄 수 있다. 다른 특이형질자의 페로몬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게 되어 베타와 가까운 상태가 된다.
페로몬이 불안정한 노아도 불규칙적으로 히트 사이클을 겪는다. 죽을 만큼 괴로운 감각에 몸을 뒤틀 때면, 차라리 각인한 상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히트 사이클이 끝나면 그 생각은 또 저만치 달아나 버리기 일쑤였다.
“노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노아는 조엘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히트 사이클 주기요…. 제가 페로몬이 불안정한 편이라 주기가 정확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전조증상은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미리 말씀 드릴게요.”
“네. 네. 꼭 그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노아의 반응에 조엘이 한시름 덜었다며 안경을 한번 추어올렸다.
중요한 얘기는 다 끝난 듯했다. 노아는 아직 결혼 증명서가 나오기 전이니 꼭 여기서 지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말도 없이 집을 나오면 카일이 걱정할 테니까.
“저… 결혼 증명서가 나올 때까진 친구와 같이 지내고 싶어요.”
“네? 굳이 거기서 지낼 필요가…….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과 작별할 시간도 필요하겠죠.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
“지금은 괜찮은 모습입니다만, 평소엔 덥수룩한 편이라, 머리 손질해 줄 사람을 불렀습니다. 명색이 대표님의 배우자신데 그러고 다니면 아무래도 좀…….”
그는 대놓고 평소에 너무 초라하게 다닌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노아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그렇구나. 하긴, 이런 모습으로는 누구도 그 사람 배우자라고 보긴 어렵겠지.
미안함이 가득 담긴 표정에 노아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럼 잠깐 쉬고 계세요. 헤어 디자이너가 도착하면 부르러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조엘은 오래 안 기다려도 될 거라고 말하며 방에서 나갔다.
혼자가 되고 나자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평소에 입지 않는 슈트를 입고 시청에서 결혼식에, 앞으로 지내야 할 저택 방문까지.
뭐 하나 노아에게 편안함을 주는 게 없었다.
당분간 지낼 방마저도 너무 넓고 고급스럽기만 하다. 가구나 물건은 척 보기에도 고가라 망가뜨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괜한 짓을 저지른 건 아닌지 벌써 후회가 밀려왔지만, 노아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빚을 갚았다. 더는 그들에게 시달릴 일은 없었다. 자신도, 카일도 이제 안전할 것이다.
제 선택으로 인해 벌어지는 모든 일은 앞으로 자신이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오히려 다르게 생각하면 이건 제게 주어진 기회였다. 노아는 지금까지 쉼 없이 일했다. 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생겼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계약이 끝나면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지금부터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자 노아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바짝 긴장하고 살 이유가 이젠 없었다.
아…. 그렇구나.
노아는 뒤늦게 깨달았다. 하루하루, 미래 따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허덕거리던 날들은 이제 끝났다는 걸.
마음을 편히 먹어도 된다고 중얼거렸다. 작게 움츠렸던 어깨를 일부러 쫙 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도 일부러 더 눈에 담았다. 괜찮을 거야. 하지만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 말은 금세 바람처럼 흩어졌다. 불안이라는 작은 불씨는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노아의 안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노아는 6개월의 결혼 생활을 위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고 개인 소지품을 상자에 차곡차곡 접어 넣었다.
집을 팔고 카일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짐 대부분을 정리한 탓에 정리가 끝난 짐은 노아의 옷가지와 어머니의 유품 정도가 다였다. 상자는 고작 세 개.
카일과 함께 산 지도 벌써 3년인데 그동안 늘어난 짐이 딱 상자 두 개였다.
카일에게는 상속으로 받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처음 유산 얘기를 꺼냈을 땐 기뻐하던 카일이 유산 덕분에 빚도 다 갚았다고 말하자, 대번에 표정이 심각해졌다.
‘너 솔직히 말해. 그때 그 자식들한테 속아서 이상한 데랑 계약한 거 아니지? 그렇게 자르라고 했던 머리도 새삼 이제 와 정리한 것도 그렇고.’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정말 유산 상속 받은 거로 다 처리한 거야.’
‘내가 그때는 좋은 소식이라서 그냥 넘어갔는데, 갑자기 모든 게 너무 술술 풀리잖아. 마치, 누군가 판을 짜 놓은 것처럼.’
‘정말로 그런 거 아니야.’
노아가 몇 번이나 아니라고 말하고 나서야 의심의 눈초리를 지운 카일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대신 너 살게 됐다는 그 집, 내가 한번 봐야겠어. 정리 끝나면 나 초대해 줘.’라고 강하게 말했다.
안 된다고 말하면 카일의 의심이 다시 시작될 게 뻔해서 노아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카일이 너무 의심하는 바람에 결혼 얘긴 꺼내지도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면 분명 화낼 텐데.
짐 정리가 끝나고 침대에 걸터앉은 노아는 방을 훑어보았다. 카일 때문에 빼 놨던 결혼반지도 다시 꼈다.
좁긴 해도 그동안 제 안식처가 되어 줬던 곳이었다.
노아가 페인트칠을 했던 작은 벽장과 다 낡아서 여닫을 때마다 삐걱 소리를 내던 창문. 사용한 지 오래되어 가운데가 푹 꺼져 버린 매트리스도 왠지 그리워질 것 같았다.
가만히 방안을 둘러보던 노아는 울리는 전화에 정신을 차렸다.
-노아 씨. 지금 도착했어요. 짐 정리는 다 끝났어요?
“네. 지금 나갈게요.”
미련 없이 일어난 노아는 가장 큰 상자를 들고 방을 나섰다. 현관을 나서자 조엘이 세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를 들고 있던 노아는 멈칫했다. 조엘의 곁에 알렉스가 서 있었다.
“상자 이리 주세요. 급한 짐만 우선 가져가고 나머지는 사람 시키면 돼요.”
“아니에요, 안에 두 개 더 있는데 그게 끝이에요.”
나머지 상자를 밖으로 들고 나올 때까지도 알렉스는 자리에서 꼼짝도 안 했다.
“짐이 이것밖에 안 돼요? 정말… 단출하네요.”
트렁크에 상자 두 개를 넣고 나자 더는 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남은 상자 하나는 노아가 안고 타기로 했다.
알렉스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낡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노아를 훑어보고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나마 봐줄 만하던 꼴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저 거지 같은 꼴은 뭐야, 대체.
“그럼 출발합니다.”
조수석에는 조엘이, 노아는 상자를 안은 채로 뒷좌석. 그리고 그 옆에는 알렉스가 탔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은 상자를 끌어안은 모습이 보물상자라도 되는 듯 구는 노아를 보니 알렉스는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꼴은 그게 뭐야?”
대체 얘는 왜 이런 꼴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드를 받으면 곧장 백화점이라도 달려가 이것저것 지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쇼핑한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무는 노아에게 알렉스는 참지 못하고 몇 마디 더 쏘아붙였다.
“길거리에 갖다 버려도 주워 가지도 않을 낡은 누더기는 뭐야? 그 꼴로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라면 사람들이 잘도 믿겠네. 아니면 일부러 검소한 척하는 건가? 할아버지가 그러라고 했나? 아니면 이건 네 작전이야? 일부러 불쌍하게 굴면서 내 관심을 끌려고?”
“아니, 저기 대표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조엘이 말려고 했지만, 알렉스는 시작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준 카드 받았잖아.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길래 흥청망청 써 댈 줄 알았더니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대체 왜 이딴 궁상을 떠는지 모르겠군.”
왜 갑자기 그가 비난을 쏟아 내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노아는 상자를 끌어안은 채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하아.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매디슨.”
조수석에 앉은 조엘을 갑자기 부른 그는 턱 끝으로 노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딴 거지 같은 꼴로 나다니는 거 창피하니까 네가 알아서 사람답게 만들어.”
“대표님, 꼭 그렇게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그냥 입고 있는 게 좀 낡은 거뿐이지 얼굴은 어디 가서도 안 꿀리는데….”
“그래서?”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조엘이 냉큼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들의 대화에 노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노아의 시선 끝에 밑창이 다 닳은 스니커즈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 고급스러운 정장 구두가 보였다. 먼지 하나 없는 그 구두는 알렉스처럼 완벽해 보였다.
노아는 초라한 제 모습이 부끄러웠다. 더럽고 닳은 스니커즈를 숨기듯이 발을 몸 쪽으로 당겼다.
알렉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저따윈 평생토록 마주치지 않았을 상류층 사람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심한 관리를 받고, 당연한 듯 기사가 운전하는 세단을 타며, 이십오만 달러 정도는 한 시간 만에 턱턱 준비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에다가 심지어 외모 또한 완벽하다. 저따위는 언감생심 꿈꾸지도 못할, 그런 알파.
그가 저를 무시하고 면박 주는 건 당연했다. 저렇게 완벽한 사람의 인생에 저라는 오점이 남았으니까. 조엘은 알렉스가 오메가를 싫어하니까 그런 거라 했지만, 이렇게 볼품없는 오메가라서 더 싫어하는 게 아닐까.
알렉스가 화내는 이유를 깨닫고 나니 울적해졌다.
* * *
알렉스의 면박 때문인지 조엘은 노아의 이사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사람을 불렀다. 노아는 부자들의 쇼핑 방법에 깜짝 놀랐다.
매장 직원이 옷과 액세서리를 가지고 직접 방문을 하다니.
노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는 사이, 조엘은 퍼스널 쇼퍼가 가져온 것들을 대충 눈으로 훑었다. 빼곡하게 옷이 걸린 이동식 행거 총 세 개와 액세서리를 담은 커다란 백이 응접실에 정렬되어 있었다.
“물건은 준비가 다 됐나요?”
“시간이 좀 촉박해서 가능한 브랜드가 많지 않았습니다만 요청하신 것들은 거의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확인해 볼까요? 노아 씨. 이쪽으로 오세요.”
응접실 입구에 가만히 서 있던 노아는 제 이름이 불리자 눈을 깜빡거렸다.
머뭇거리는 노아를 손짓으로 부른 조엘은 퍼스널 쇼퍼가 행거에서 꺼내는 옷들을 신중하게 살폈다.
조엘이 요청한 목록은 일상복, 캐주얼한 느낌의 정장, 윈드 브레이커 점퍼와 가죽 재킷 같은 거였다. 노아가 가진 옷은 알렉스의 심미안에 맞지 않을뿐더러 상류층에서도 먹히지 않을 것들이었기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바꿔야 했다.
노아는 적극적인 퍼스널 쇼퍼의 권유에 눈동자를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노아 씨. 어울리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입어 보세요. 그리고 사이즈도 맞는지 봐야 하잖아요. 오늘은 급한 것들만 우선 구하고 나머지는 천천히 사요.”
“이걸 다요…?”
엄청나게 많은 옷이었다. 이걸 다 입어 봐야 하는 건가. 노아의 두 눈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럼요. 우선 오늘은 어떤 게 당신한테 어울리는 보려는 겁니다. 그리고 필요한 파티복이랑 슈트는 대표님 옷 짓는 테일러에게 부탁할 겁니다.”
거기도 한번 방문해야겠네요. 라며 조엘은 열심히 제 핸드폰에 필요한 목록을 메모했다.
단호한 그의 태도에 노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그들의 요구대로 거기 있는 옷을 모조리 다 갈아입었다.
퍼스널 쇼퍼가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돌아갔을 때, 노아에겐 총 여섯 벌의 티셔츠와 청바지 네 벌. 면바지 세 벌. 드레스 셔츠 두 벌. 그리고 캐주얼 정장 두 벌과 함께 선글라스 세 개. 부드러운 소가죽의 머니클립. 가죽 재킷 하나. 윈드 브레이커 점퍼 하나. 러닝화와 로퍼, 그리고 새 스니커즈도 생겼다.
오늘 하루 동안 노아가 산 물품의 가격이 오만 달러가 넘는 걸 알았다면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세요. 알렉스 헌트의 배우자로 언제 노출이 될지 알 수 없으니 늘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해요.”
퇴근하기 전, 조엘은 노아에게 마지막 당부를 끝내고 상쾌한 얼굴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텅 비다시피 한 노아의 클로짓이 어느 정도 채워졌다.
노아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쇼핑이 이렇게 피곤한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쉴 새 없이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고, 남의 시선에 평가당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자들은 모두 이렇게 사는 걸까.
무거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빠르게 샤워를 끝낸 노아는 그대로 침대에 털썩 엎어졌다.
놀랍도록 부드러운 감촉에 기분이 이상했다. 여기가 정말 제가 있던 그 작은 방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카일 보고 싶다….”
나직이 중얼거린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노아는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왼손에 낀 반지가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곧 이것도 익숙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