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3)

2.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아는 방금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 못 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조엘은 노아의 반응을 살피느라 입을 다물었다.

멍하던 노아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 갔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조엘은 상대의 변화를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죄송한데요…, 누가, 누구랑 결혼한다고요?”

“칼튼 씨와 대표님이요.”

“저기, 그… 대표님이라는 게 조금 전에 여기서 나간 그분… 말씀하시는 거죠?”

노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네. 바로 그분이요. 작고하신 회장님의 유일한 손자이자, 차기 헌트 그룹을 이끌어 나갈 분이십니다.”

성질은 더럽지만 일은 잘해요. 라고 조엘이 속으로 중얼거릴 때, 노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 못 해요. 안 해요. 저, 돌아갈래요.”

노아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결혼이라니. 그 알파와 결혼….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노아는 겁에 질려 그대로 문으로 달려갔다.

“칼튼 씨! 현금으로 오백만 달러입니다.”

막 문으로 손을 뻗으려던 노아의 등 뒤로 조엘이 외쳤다.

“이 돈이면 무서운 채권단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에요.”

채권단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들이 찾아오는 걸 떠올리자, 발이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손만 뻗으면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겁을 먹을 필요는 없어요. 이 결혼은 형식적인 결혼이 될 거니까요.”

못 박힌 듯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던 노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회장님의 유언 때문에 두 분이 결혼하는 거지, 이 결혼이 진짜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회장님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서요.”

형식적인 결혼…?

노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소파에 앉은 조엘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대표님은 오메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대표님이 사귄 사람은 전부 베타고, 취향이 정말 확고한 분이시거든요. 회장님의 유언 때문에 결혼은 하지만 절대로 이 결혼을 진짜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이건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노아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조엘은 안도했다. 이쯤 되면 다 넘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대외적으로는 결혼으로 알려지지만, 실제로 부부생활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남들에게만 부부로 보이는 겁니다. 일종의 계약 결혼이랄까요? 이 정도면 칼튼 씨께도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머뭇거리는 노아에게 조엘은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이 계약 결혼은 딱 6개월만 유지하시면 됩니다. 6개월이 지나면 이혼하면 되고요. 물론 칼튼 씨께 위자료도 지급될 겁니다.”

조엘이 말하는 조건에 노아는 마음이 흔들렸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자꾸만 잘근잘근 씹어 댔다. 계약 결혼, 가짜 부부. 거기다 엄청난 유산까지.

믿기지 않는 제안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결혼 계약서에 동의하시면 칼튼 씨의 빚을 오늘이라도 당장 이쪽에서 먼저 갚아 줄 수 있습니다. 어떠세요?”

“오늘… 당장이요?”

“네. 물론입니다. 실례지만 빚이 얼마나 됩니까? 백만 달러 이상이면 이쪽에서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결재도 받아야 하고. 물론 대표님은 흔쾌히 지불하실 겁니다.”

“백, 백만 달러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백만 달러라는 말에 노아가 펄쩍 뛰었다.

“그럼 오십만 달러?”

“아, 아니요…. 이, 이십오만 달러요…”

3년 동안 어머니의 병원비로 쓴 금액이 십만 달러였는데 2년도 안 되어 두 배로 불어났다. 제대로 된 졸업장도 없고, 가진 재주도 없는 노아에겐 원금상환은커녕 이자만으로도 버거운 금액이었다.

“이십오만 달러요? 아…. 그 정도면 한 시간 안에 준비할 수 있어요.”

한 백만 달러쯤 되는 줄 알고 각오하던 조엘은 빚 액수에 다행이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당장 갚아 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노아는 빚을 당장 갚을 수 있다는 말에 한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어머니가 쓰러진 후 노아의 인생은 진창에 처박혔다.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여러 곳에서 빚을 졌다는 것도 노아는 그때 알았다. 어머니의 몸 상태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태였고 여러 차례 이어진 수술과 중환자실을 들락거리는 사이 병원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어쩔 수 없이 노아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팔았다. 본래도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다. 오메가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고, 주급이 센 일자리는 대부분 남성 베타와 알파의 차지였다.

대신 불법적이고 은밀한 유혹은 쏟아졌다. 그들의 검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제 몸으로 돈을 버는 그런 짓은.

그랬는데…, 죽을힘을 다해 버텼는데 조엘의 제안에 엄청나게 흔들렸다.

“좀 더 확신이 필요한가요? 칼튼 씨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계약서도 쓸 거고요.”

“아, 아니요! 아니에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노아는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이 에디 할아버지와 관련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신뢰할 순 없었다. 이런 기회가 다신 오지 않는다는 걸 노아도 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아…. 시간이 좀 필요하신가요?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당장 계약서를 꺼내려던 조엘은 노아의 대답에 실망했다. 성질 급한 고용주는 느긋하게 기다리지 않을 텐데….

“일… 주일 정도…, 괜찮을까요?”

“일주일이나요? 채권단이 그만큼 기다려 주실까요?”

조엘의 물음에 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조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3일. 3일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고용주가 그리 인내심이 깊은 분이 아니시라….”

“네…. 그렇게 할게요.”

“3일 뒤에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피하지 말아 주세요.”

첫 만남에 빗대어 조엘이 장난스레 농을 걸었지만, 노아는 그저 가볍게 인사하고는 그대로 병실을 나가 버렸다.

아…. 까탈스러운 고용주한텐 뭐라고 하지?

조엘은 땅이 꺼질세라 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제 인생을 무겁게 짓누르는 빚을 당장 갚아 줄 수 있다는 말은 달콤한 선악과와도 같았다.

노아는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 계약서든 뭐든 당장 서명하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이상한 일에 휘말린 기분이었다.

노아의 시선 끝에 익숙한 로테 거리의 붉은 지붕이 보였다. 겨우 꿈에서 깨어난 듯 현실감이 밀려왔다.

좁은 도롯가에 늘어선 쓰레기통에서 익숙한 악취가 풍겼다. 낡은 연립주택의 7번째 집 앞에 도착하자 응접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현관을 열려고 손을 뻗던 노아는 제 손에 감긴 붕대에 멈칫했다. …적당히 둘러대면 되겠지. 괜한 걱정은 하지 말자.

노아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방 안쪽에서 카일이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어? 오늘은 식당 일 안 했어? 일찍 왔네.”

“응…. 그렇게 됐어. 언제 왔어?”

“언제 오긴. 나야 늘 똑같은 시간에 오지. 잘됐다. 저녁…,”

파스타 집게를 손에 들고 몸을 돌리던 카일이 노아의 손을 보는 순간 소리쳤다.

“너, 손 다쳤어?!”

카일이 소리치자마자 노아는 제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하지만 집게를 집어 던지고 다가온 카일에게 도로 잡혔다.

“어? 으응….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양손을 다 다쳤잖아! 누가 너 괴롭혀?”

서슬 퍼런 눈빛은 당장이라도 쫓아 나갈 기세였다.

얼굴은 곱상하고 체구는 늘씬한 주제에 카일은 학창 시절 온갖 운동을 다 섭렵하고 다녔던 육체파였다. 오메가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질 불문하고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다녔던 인기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다정하고 약자에게 상냥해지는 친구였다.

“아, 아니야. 넘어진 거야. 아,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손, 바닥이 좀 쓸린 거야. 병원에서 치료도 받았고 별로 아프지도 않아.”

“왜 넘어졌는데? 누가 민 거 아니야? 어떤 놈이…!”

“아무도 나 안 괴롭혀…. 정말, 내 실수로 넘어진 거야.”

카일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노아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아름다운 청록색 눈동자가 진실을 말하라고 최면을 거는 것 같았다. 노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카일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애써 눌렀다.

“너 거짓말 엄청 못하는 거 알지?”

“거… 짓말 아닌데…….”

입술을 축이며 노아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됐어.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 그래도 나중에라도 말하고 싶으면 꼭 얘기해 줘. 알았지?”

“응….”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카일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지금 파스타 만드는 중인데 같이 먹을래?”

“아니, 난….”

“소스를 많이 만들어서 파스타만 더 삶으면 돼. 금방 되니까 같이 먹자. 얼굴 보아하니 뭘 먹은 거 같지 않네.”

괜찮다는 노아의 말에 카일이 “널 뭘 좀 먹어야 해. 얼굴이 그게 뭐야.” 하는 핀잔을 늘어놓았다.

저녁을 만들어 주는 게 고마워서 노아는 그가 요리하는 동안 주변 정리를 했다. 붕대 때문에 손을 움직이는 게 불편했다.

“손도 다친 주제에 뭘 하려고 해? 그냥 둬. 저녁 먹고 치워도 돼.”

“아니야,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뭘.”

노아의 부지런함을 익히 아는 카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카일은 추가 1인분의 요리를 뚝딱 만들었다. 노아는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의 파스타가 금세 식탁에 차려졌다.

“잘 먹을게.”

“얼른 먹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야.”

카일의 지적에 노아는 멋쩍게 웃었다.

토마토소스의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대로 뭘 먹은 기억이 없었다. 음식을 앞에 두자 강렬한 허기가 밀려왔다.

노아가 먹기 시작하자 카일도 대화를 멈추었다. 접시가 빌 때까지 두 사람은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요즘 무리하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어?”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자마자 카일이 접시를 치우려 일어서는 노아의 손목을 잡았다.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어. 이거 치울게. 잘 먹었어.”

“딴소리 말고 앉아 봐.”

날카로운 카일의 눈짓에 노아는 접시를 내려놓고 도로 앉았다.

“아무 일 없어. 진짜야.”

“아무 일도 없는데 일해야 할 시간에 네가 왜 와? 네가 그럴 사람 아니잖아.”

노아의 사정을 꿰고 있는 카일이 눈썹을 찌푸리면서 빨리 말하라고 종용했다.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집을 팔았을 때 여기 방 한 칸을 내어 준 게 카일이었다. 노아가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빚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걸 카일은 안다.

노아는 친구에게 제게 일어난 일을 말해야 할지, 말한다면 어디까지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제 사정을 다 아는 카일에겐 어설픈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에게 채권단이 갑자기 원금상환율 인상을 요구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상냥한 카일은 노아의 사정을 듣고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테니까.

입술을 달싹거리며 망설이던 노아는 카일의 눈초리가 점점 매서워지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에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대….”

말을 꺼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울컥, 밀려드는 슬픔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카일이 팔을 뻗어 노아의 손을 꽉 쥐었다.

“언제? 오늘 그분 장례식에 다녀왔니?”

다정한 카일의 말에 또다시 눈물이 터졌다. 자신은 에디 할아버지의 장례식조차 보지 못했다. 그분의 임종을 알지 못했던 것도 서러운데 심지어 낯선 알파의 경멸까지 받게 된 걸 떠올리자 꾹꾹 눌렀던 억울함과 슬픔이 한 번에 밀려왔다.

억눌렀던 슬픔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노아.”

카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아의 머리를 감싸 꼭 안아 주었다.

노아는 카일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에게 몸을 기대 마음껏 울었다. 이제까지의 서러움이 다 터져 버린 것처럼 마음 놓고 엉엉 울었다.

카일은 제 옷이 노아의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도 화내지 않았다. 노아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꾹꾹 눌러 참고 묵묵히 살던 노아의 눈물에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위로를 하는 게 아니라 가슴을 빌려 주는 거로 충분하니까.

한참 눈물을 쏟아 내던 노아가 진정하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흘렀다. 눈물 콧물 다 빼고 울던 노아는 눈물이 그치자 슬그머니 카일의 품에서 벗어났다.

민망해하는 게 보여 카일은 슬쩍 웃었다.

“자, 닦아. 너 얼굴 엉망이야, 지금.”

노아는 카일이 내민 수건을 받아 대충 얼굴을 닦았다. 코까지 풀고 나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이제 좀 진정됐어?”

“응…. 미안.”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울고 싶을 땐 울어야 해. 넌 너무 참기만 하니까.”

카일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를 쳐다보며 노아는 고맙다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얘기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얘기해. 오늘은 특별히 다 들어 줄게.”

관대하게 들어 주겠다며 거드름을 피우는 카일의 말에 노아는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 에디 할아버지의 가족을 만났어.”

노아는 오늘 제게 일어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가족을?”

“응…. 그게… 할아버지가 나한테 유산을 남겼대. 그것 때문에 찾아왔었어.”

“뭐? 유산? 그 영감님, 아니 그분이 너한테 유산을 남겼어?”

영감이라는 말에 노아의 눈매가 뾰족해지자 카일이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카일은 내내 에디 할아버지를 의심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냐고 노아에게 조심하라고 여러 번 충고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현금이랑 집을 남겼다는데…. 내가 그걸 받아야 한대….”

“현금이랑 집? 그 노인, 아니 그분 말이야, 그냥 은퇴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뭐야. 진짜 좋은 사람이네. 받아. 받아야지. 가족들이 받으라고 찾아온 거면 거절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네게 유산 못 준다고 그쪽에서 지랄하러 온 것도 아니면 오히려 더 잘된 거지.”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간에, 넌 그 유산 받을 자격 있어. 그 사람 목숨을 살려 줬잖아.”

“그건… 그냥 우연히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 그런 거야. 난 이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그곳에 다른 사람이 있었어도 나처럼 했을 거야.”

“그 자리에 있었던 건 너고, 다른 사람은 없었잖아. 애초에 그분이 너한테 보답하고 싶다고 한 걸 넌 거절했잖아. 뭐야…. 하여튼 엄청 좋은 일인데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잘됐네, 잘됐어.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순수하게 기뻐하는 카일을 바라보며 노아는 그 유산에 조건이 있다는 말까진 하지 못했다.

“오늘 파티다! 이런 건 진작 말해야지! 너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빚에서 벗어나는 거야!”

환호성을 내지르던 카일이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 유산으로 빚, 갚을 수 있는 거 맞지?” 하고.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일이 파티하자면서 거실로 달려갔다.

“나 맥주 사 올게!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는 거야. 알았지? 먼저 잠들면 안 된다!”

신이 나 달려 나간 카일을 말릴 새도 없었다. 노아는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디 할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야 할까. 차라리 구해 준 목숨값이라고 했다면 이리도 복잡하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그 목숨값은 이미 노아가 차고 넘치게 받은 후였다.

노아는 에디 할아버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노아가 다니는 물류센터 건물 뒤쪽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노아는 페로몬이 워낙 불규칙하고 스스로 조절을 잘 못했다. 그래서 알파가 많이 모인 공간은 되도록 피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점심시간만 되면 직원들이 많이 모인 식당을 피해 공원에서 3달러짜리 샌드위치 하나로 점심을 해결하곤 했었다.

에디를 만난 날에도 그랬다.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들고 공원에 갔을 때였다.

적당한 자리를 찾던 도중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너무 놀라 달려간 노아는 손을 떨며 핸드폰으로 구급차를 불렀다.

의식 없는 사람을 똑바로 눕히고 노아는 어머니 때문에 배웠던 심폐소생술을 했다. 팔이 후들거릴 정도로 강하게 노인의 가슴을 여러 차례 압박하며 눌렀다. 노인의 얼굴 위로 땀이 후드득 떨어졌다.

얼마나 했을까. 구급차가 공원으로 급히 들어섰고 구급대원이 노인을 맡는 순간 노아는 그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호자냐고 묻는 구급대원의 질문에 노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라 어느새 주변엔 구경꾼이 늘어났다.

가족이 아니라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노아는 구급대원의 부름도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급하게 도망쳐 나왔다.

노아는 그 후 노인이 제대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안심했다. 이 정도면 자기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아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제가 구해 준 노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구해 준 답례를 하고 싶다며 에디가 끈질기게 연락을 했고 노아는 수차례 거절했다. 하지만 에디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노아는 에디의 고집에 져 그를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났던 공원에서.

보답을 거절했더니 그럼 일주일에 한 번씩 자길 만나 달라고 에디가 말했다.

‘큰일을 겪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았는지 깨달았네.’

하얗게 센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에디가 쓸쓸하게 말했다.

‘내 주변엔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네. 손자 녀석은 오래전에 마음을 닫아 버렸고.’

일주일에 한 번만 외로운 노인과 친구가 되어 주지 않겠냐는 부탁에 노아는 승낙했다.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었다. 노아는 낯을 많이 가렸고, 낯선 사람과 관계 맺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이었으니까.

처음엔 부담이었지만, 만남 횟수가 거듭될수록 노아는 에디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노아의 좋은 조언자이자 친구였다.

가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일들을 노아는 에디에게 편하게 얘기했다. 에디도 은퇴 후의 삶과 말 안 듣는 손자 얘기를 꺼내며 노아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노아가 만난 에디는 가벼운 점퍼와 편안한 면바지를 입고, 손자와 사이가 틀어진 걸 안타까워하는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런 에디가 헌트 그룹의 사주라니.

거기다 할아버지를 꾀었다며 비난하던 남자가 에디가 말하던 안쓰러운 손자였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하루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이 노아에겐 현실감이 없었다.

노아는 제게 비난을 쏟아 내던 알파를 떠올렸다.

키가 작은 노아가 한참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와 기성복은 맞지 않을 듯한 넓은 어깨. 깊고 어두운 눈동자.

마치 눈앞에 맹수를 앞에 둔 것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에 노아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 사람과의 결혼을 떠올리는 순간, 노아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할아버지의 유산이면 빚을 바로 갚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뒷덜미가 오싹 저렸다.

노아는 고개를 저어 그를 머릿속에서 털어 냈다.

카일은 에디가 보답하는 거니 그냥 유산을 받으라고 했지만, 노아는 제안을 거절하려고 마음먹었다. 가짜 결혼이라고 해도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닐 테니까.

노아는 결정을 내렸다. 조엘이 기한을 주었지만, 굳이 그 기한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조엘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아…….”

그 사람이 건넨 명함을 미처 챙기지 못했다. 3일 후 찾아온다는 말만 듣고 그냥 돌아온 것이다.

멍하니 서 있던 노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쪽에서 먼저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엘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쩔 수 없어.”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해 놓고 노아는 괜히 시선을 움직였다.

손에 감긴 붕대를 만지작거리던 노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이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아직 안 오네. 그냥 같이 갈걸 그랬나?

현관 쪽으로 움직이던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카일. 생각보다 늦…….”

“야, 이거. 막 초인종을 누를 참이었는데. 우리 마음이 통한 건가?”

핏기가 싹 가셨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눈앞에는 며칠 전에 들렀던 채권단이 실실 웃으며 서 있었다.

“생각은 좀 해 봤어? 며칠 시간 줬잖아. 응?”

실실 웃으며 다가온 사내는 노아가 문을 닫을 수 없게 두툼한 팔뚝으로 문을 꽉 잡았다.

공포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노아는 집 안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이 남자를 집 안으로 들이는 순간,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알았다.

“내가 말이야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네가 무턱대고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영화 일 하는 감독님을 모시고 왔거든? 일단 만나 봐. 만나 보면 좋은 사람이란 걸 알 거야. 어때, 괜찮지?”

“싫…, 싫….”

“어허. 무작정 싫다고 하지 말고 응?”

비죽비죽 웃는 사내의 눈빛이 번뜩였다. 노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노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안 해요. 돈, 돈 마련할게요…. 진… 진짜….”

“야! 네가 무슨 수로 그 돈을 갚아?!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알아? 내가 이 감독님 모시려고 얼마나 힘썼는데, 이게 감히…!”

확, 이걸 그냥. 사내가 두툼한 팔뚝을 들어 올렸다. 움찔,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때였다.

“아, 얘야?”

사내의 등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몸을 돌려 이쪽으로 오는 남자를 맞이했다.

“네. 얘가 노압니다. 어때요? 내 말이 맞죠?”

짙은 보라색 정장을 입은 남자의 시선이 뱀처럼 노아를 훑었다. 사내보다 더 단단한 몸에 얼굴형이 뾰족하고 눈매는 가느다랬다. 코는 한 번 부러진 흔적이 남아 왼쪽으로 삐뚤어져 있고, 입가에 칼로 그은 듯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는데?”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가 노아를 잡아 문밖으로 끌어냈다. 모든 게 너무 순식간이었다. 사내는 노아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는 노아의 눈을 가린 앞머리를 확 젖혔다. 목이 뒤로 꺾일 정도로 사내가 머리를 잡아당겼다.

“놔, 놔….”

목소리를 덜덜 떨며 노아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사내는 두툼한 팔뚝으로 노아의 어깨를 꽉 짓눌러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최상급 아닌가요?”

“호오. 그렇네, 그래. 이 정도 얼굴은 흔치 않지. 아주 좋아.”

숨이 턱 막혔다. 노아는 두려움에 떨면서 목에 둘린 사내의 팔뚝을 손톱으로 긁었다.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내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노아의 두 눈엔 눈물이 고였다.

“우는 얼굴도 일품이고. 좋아, 오랜만에 딱 맘에 드는 애를 발견했네. 이봐, 너 노아라고 했지? 내가 너 완전 유명하게 만들어 줄게. 나랑 일하자.”

“안, 안 해요…. 제발 놔주세요. 돈, 갚을 수, 갚을 수 있어요.”

“나 나쁜 사람 아니야. 꽤 유명한 영화도 많이 찍었어. 너 정도면 금방 스타가 될 수 있다니까?”

노아는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감독이란 자가 쯧쯧 혀를 차더니 몸부림치는 노아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지금 기회가 왔을 때 잡아. 왜 그렇게 무서워해? 내가 나쁜 거 시킬까 봐 그래? 여기 이 녀석보다는 내가 너한테 더 잘해 줄걸?”

그들은 노아를 구슬리기 시작했지만, 겁에 질린 노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노아는 정신없이 사내의 팔을 긁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두려움에 반쯤 정신이 나갔다.

“이게 진짜!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기회라고!”

노아는 무조건 고개를 저었다. 저를 뒤에서 붙잡은 사내의 팔을 긁으며 울었다. 놔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울었다.

노아의 뺨이 눈물로 흠뻑 젖었다.

“야! 거기 뭐야?!”

쨍그랑. 어디선가 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장 카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노아!”

사내가 노아를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온 카일이 휘청거리는 노아를 등 뒤에 두고 두 사람을 노려보며 외쳤다.

“네놈들 뭐야! 내 집에서 뭐 하는 거야!”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뭘 하긴? 채무자와 채권자 간에 긴밀한 대화를 했을 뿐이야.”

“대화는 개뿔. 장난해? 경찰 부르기 전에 썩 꺼져!”

“어이. 룸메이트인지 애인인지 모르겠지만 우린 아무것도 안 했어.”

사내가 실실 웃는 얼굴로 그렇지? 하며 노아에게 윙크했다. 카일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덜덜 떠는 노아를 확인하곤 눈을 치켜떴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노아가 이래? 누굴 바보로 알아? 돈 갚으라고 집에 찾아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너무 날 세우지 말라고. 우린 이제 갈 거야. 얘기는 다 끝났거든.”

사내와 감독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헛소리 집어치워. 여기 다시 찾아오면 그땐 내가 가만 안 둔다.”

사내가 그러시든가. 하며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감독과 뭔가를 속닥거리더니 서슬 퍼런 카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쪽도 나쁘지 않은데? 아쉽네.’

입맛을 쩝쩝 다시는 감독의 노골적인 시선에 카일은 그대로 핸드폰으로 긴급통화를 눌렀다.

“카, 카일…. 들, 들어가자…. 나, 나 괜찮,”

경찰서와 전화 연결이 된 걸 확인했지만 카일은 벌벌 떨며 제 옷깃을 잡아당기는 노아의 말에 전화를 끊었다.

카일은 그들의 차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노아는 눈을 찌를 듯한 강한 햇살을 마주하며 높디높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빛이 너무 강해 눈이 시렸다.

어젯밤 난리를 겪고 나자 노아는 제 처지에 도덕적 윤리를 따지는 건 사치라는 걸 깨달았다.

저 때문에 카일에게 폐를 끼쳤다. 갈 곳 없는 저를 받아 준 친구였다. 그들에게 용감하게 대적하던 카일과는 달리 자신은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했다. 또다시 카일이 그런 일을 겪게 할 순 없었다.

카일은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 유산 말인데…, 당장 받을 순 없는 거야? 저 새끼들 보아하니, 이대로 포기할 거 같진 않아. 보나 마나 저 감독이라는 놈한테 저 새끼가 돈 받고 저러는 거야.’

‘알아….’

사정을 들은 카일은 단번에 유산 얘기부터 꺼냈다. 노아도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오늘은 내가 있어서 저러고 갔지만, 아마도 다음번엔 그냥 물러나지 않을 거야. 네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난 걱정돼.’

카일은 어차피 받을 유산이면 좀 빨리 받아서 빚부터 먼저 정리하라고 충고했다.

이건 노아에게 온 기회였다. 그 사내도 그렇게 말했다. 기회. 어쩌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뿐인 기회.

에디의 유산을 거절하겠다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자존심이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무언가를 선택할 처지가 아니었다.

조엘의 연락처를 따로 받지 않았던 탓에 노아는 헌트 인더스트리 본사 건물로 찾아갔다.

한 번도 일을 쉬어 본 적 없는 노아가 오늘 일을 쉬었다.

하지만 막상 위용이 대단한 빌딩 앞에 서자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빌딩을 오가는 사람들의 차림은 하나같이 깔끔한 정장이었다.

노아는 제 옷차림을 확인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흰색 티셔츠에 다 낡은 빛바랜 청바지, 너무 오래 신어 이미 밑창이 다 닳은 스니커즈. 그리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야구모자까지.

어디를 보나 저기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차림이었다.

노아는 섣불리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자기가 너무 초라해서 부끄러웠다.

머뭇거리며 근처를 배회한 시간이 어느덧 1시간이 넘어갈 때쯤, 노아는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지금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저 때문에 카일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서류뿐인 결혼이라도 유산을 받는 게 나았다. 그래도 진짜 결혼이 아니니까 그 알파와 함께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숨을 고른 노아는 느릿하게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먼지 한 점 없는 번쩍거리는 로비를 보자 다시금 주눅이 들었다.

쭈뼛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아는 조엘이 몇 층에 근무하는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어보기나 할걸.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거리는 노아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보안 팀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정장 차림의 회사원들 사이에서 격식 없는 복장이 눈에 띄었다.

이어 마이크를 착용한 보안 요원이 노아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체구가 큰 보안 요원의 질문에 노아는 쉽사리 겁을 먹었다.

노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보안 요원의 눈매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영혼까지 끌어모은 용기가 보안 요원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노아는 지금 당장 여기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노아를 잠시 기다리는 듯하더니 보안 요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여기는 노숙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만 나가 주시죠.”

“노, 노숙자 아니에요…. 만, 날 사람이 있어요…….”

노숙자로 오해받은 걸 알자마자 노아의 뺨은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대로는 쫓겨날 것 같아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달달 떨렸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어느 부서의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방문 약속은 미리 하신 겁니까.”

“그게…….”

조엘이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는지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났다. 노아는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분명, 무슨 부서라고 했는데…. 어쩌지….

곤란한 기색으로 노아가 망설이자마자 보안 요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그만 나가 주십시오.”

그는 노아가 아무렇게나 둘러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보안 요원은 머뭇거리는 노아의 팔을 잡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 저기요…. 진짜예요, 제가 그분 부서가 기억이 안 나서…. 어제 만났었는데요…, 대, 대표님 비서분이신 조엘 씨를 찾아왔어요. 노아 칼튼이라고 해요. 제, 제 이름을 얘기하시면 만나 주실 거예요.”

노아는 그에게 끌려 나가면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어제 만난 게 맞고, 자기가 찾아왔다고 하면 분명 만나 줄 거라고 더듬더듬 얘기했지만 보안 요원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아를 밖으로 내보내고 매서운 눈빛으로 ‘다신 오지 마십시오.’ 하고 말할 뿐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노아는 너무 창피해서 이대로 땅으로 꺼지고 싶었다.

어쩌지? 조엘 씨를 어떻게 만나야 하지? 도저히 제 쪽에선 그를 먼저 만날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초조함에 어쩔 줄 모르고 이틀 내내 그를 기다릴 것 같았다. 혹시라도 만약에 조엘이 오지 않으면? 만약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지 않겠다고 그 알파가 마음을 바꾸면 그때는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노아는 이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혹시 이 근처에 있다 보면 퇴근할 때 날 보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건물 근처 분수대에 자리 잡았다. 건물 입구가 바로 보이는 자리였다. 여기에 있으면 퇴근하는 조엘과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아의 시선은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참 많았다. 정장 차림의 사람을 이렇게 많이 본 건 처음이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뿐인데도 노아가 일하는 환경과 이곳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이 났다.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는 동안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배 속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오늘 한 끼도 못 먹고 나온 게 그제야 기억났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웠다가 그사이 조엘을 놓칠까 봐 움직일 수 없었다.

배가 찢기듯 아프던 배고픔도 어느 사이엔가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노아는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이렇게는 만나기 어렵구나….

시무룩한 얼굴로 노아는 챙을 꾹 눌러 썼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가 자꾸만 솟아났다.

머뭇거리며 빌딩 근처를 좀 더 서성거리던 노아는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돌리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조엘이 모레 방문한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오겠지? 아니, 올 거야. 온다고 했으니까, 기다리면 될 거야.

주제에 거절하겠다는 호기를 부린 결과로 노아는 불안과 초조함을 안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하겠다고 할걸.

노아는 다 지난 일을 곱씹고 되뇌며 후회했다.

버스정류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칼튼 씨? 저 조엘 매디슨입니다.

조엘?!

“네, 네. 노아입니다.”

-혹시 오늘 이쪽으로 오신 적이….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

행여라도 상대의 마음이 바뀔까 노아는 다급하게 외쳤다. 온종일 바랐던 일이었다.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쪽에서 연락을 줬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노아의 외침 후 상대방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 너무 성급했나? 잠시 후회하려던 찰나,

-지금 어디십니까? 혹시 댁에 계신 거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저 지금 회사 근처 버스정류장인데요….”

-아, 그래요? 그럼 회사로 다시 오시겠습니까? 제가 로비에 말해 놓겠습니다.

“네, 네. 그럴게요.”

노아는 곧바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자신은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못 된다. 이번마저 기회를 놓치면 저 때문에 카일에게까지 피해가 돌아갈지도 모른다.

느릿하게 걷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회사에 도착할 때쯤엔 거의 뛰다시피 했다.

내내 밖에서 지켜만 보던 입구에 멈춰 섰다. 차오른 숨을 고르며 노아는 제 옷차림을 점검했다.

각오를 다지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왠지 걸음이 떼어지질 않았다. 저를 쫓아냈던 그 보안 요원과 다시 마주칠까 봐 걱정되었다. 미리 말을 해 놨다고 했으니 오전처럼 쫓겨나진 않을 테지만 쉬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노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안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았다.

노아는 다시금 쪼그라든 기분이었다. 발끝까지 정장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초라한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노아는 챙을 푹 눌러 시야를 가렸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노아 칼튼 씹니까? 매디슨 씨께 전달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로비로 들어가자마자 안내인이 다가왔다. 쭈뼛거릴 새도 없이 노아는 안내인을 따라 로비 안쪽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종일 기다렸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연락이 닿자마자 조엘을 만나는 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이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착하고 복도로 나오자 안내인은 안쪽 사무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꾸벅 허리를 숙인 노아는 안내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복도 양쪽으로 불투명 유리로 내부가 가려진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는지 인기척이 있거나 사람 그림자가 보이진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사무실 앞에 도착한 노아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무조건 한다고 하는 거야. 어설픈 양심 따윈 버리는 거야. 나는 지금 거절할 수 없는 처지니까.

행여나 어설프게 굴다가 기회를 놓칠까 봐 노아는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각오를 다졌다.

긴장한 채로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칼튼 씨! 어서 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조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노아를 반겼다.

“이쪽으로 와요. 칼튼 씨가 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호들갑을 떨며 노아를 소파로 안내한 조엘이 한층 밝은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좀 더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심이 선 거예요? 칼튼 씨가 마음을 빨리 정해서 다행이긴 한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그, 그런 건 아니…….”

노아가 고개를 가로젓자, 조엘이 다행이라면서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어휴. 다행입니다. 칼튼 씨께 3일의 시간을 주기로 했지만 그 일로 대표님께 한소리 들었거든요. 그때 보셨다시피 워낙 성격도 불같고 귀찮은 일…, 아, 이 말은 못 들은 척하십시오.”

시간을 주긴 뭘 주냐, 분명 더 받아 내려는 수작이다, 지금 그 오메가와 협상이라도 할 셈이냐, 등. 하루 동안 온갖 싫은 소리 다 들었던 후라 저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온 조엘은 맞은편에 멍하니 앉은 노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제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연, 연락하려고 했는데 전화번호를 몰라서…….”

“아…. 이런. 제가 칼튼 씨께 명함을 안 드렸군요. 이런 실수를 하다니. 괜히 저 때문에 여기까지 걸음 하신 거네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전날 명함을 꺼냈다가 노아가 받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지만 조엘은 모르는 척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노아는 명함을 받아 손에 꼭 쥐었다.

얘길 어떻게 꺼내야 하나. 전화로 무조건 하겠다고 소리쳤던 그 용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말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머뭇대는 노아의 태도에 조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 대표님과 결혼, 승낙하시는 거죠?”

흠칫, 어깨를 떨며 노아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그리고… 그 유산이요… 결, 결혼 전에 먼저 받, 받을 수 있을까요?”

돈부터 달라는 말을 꺼내면서도 노아는 수치심에 얼굴이 불타올랐다.

시뻘건 얼굴을 감추듯이 노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조엘의 시선이 노아를 훑었다. 어제만 해도 망설이던 노아가 왜 마음을 바꾸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험악한 채권단이 어제 뭔갈 한 거겠지.

상황 파악이 끝난 조엘은 노아가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정리할 게 있다면 미리 해 놓는 게 이쪽에서도 일 처리 하기가 더 수월하지요. 그럼 칼튼 씨, 채무 내역을 좀 알려 주시겠어요? 이쪽에서 오늘 내로 처리해 드릴게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노아가 그 말에 번쩍 얼굴을 들었다.

“오늘 내로… 처리요? 가,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빚이 이십오만 달러라고 했나요? 돈 빌린 곳 정보를 주시면 됩니다.”

노아는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서 채권단 연락처와 상호가 찍힌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명함을 받아든 조엘은 그걸 확인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핸드폰을 꺼냈다.

조엘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명함에 찍힌 번호를 알려 주었고 채무 상황과 변제금액 등을 알아보라고 지시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제 직원이 확인하고 곧 처리할 거예요. 처리되면 즉시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엘은 서류 파일을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자, 이건 계약서에요.”

“계약서요……?”

계약 결혼에 필요한 서류는 미리 준비해 두었다. 고용주인 알렉스는 전 회장의 유언장이 공개되고, 도저히 그 유언을 피할 길이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빠르게 변호사에게 필요한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지시한 상태였다.

“네. 이 결혼은 처음부터 이혼을 전제로 한 거라 차후 이혼 처리를 보다 원활하게 하려고 작성된 문서입니다. 여기 나온 사항은 대표님께서 변호사와 함께 의논을 거쳐서 작성된 건데요, 혹시라도 칼튼 씨가 보기에 불확실하거나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물론 조정은 대표님과 하셔야 하고요. 지금 대표님께서 중요한 회의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라 우선 계약서 먼저 확인해 보시겠어요? 지금쯤이면 회의가 끝났을 시간이니 곧 대표님이 오실 겁니다.”

조엘의 설명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노아는 계약서를 펼쳤다.

혼전 계약서.

서류를 넘기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단어였다. 아, 이게 혼전 계약서라는 거구나.

말로만 듣던 혼전 계약서라는 걸 처음 본 노아는 서류 끝을 만지작거렸다.

서류의 맨 첫 장에는 이 결혼은 노아 칼튼과 알렉스 헌트의 합의로 인한 계약임을 명시하고 있었다.

“우려하시는 신체 접촉 부분도 살펴보세요.”

조엘이 손가락으로 해당 항목을 가리켰다. 부부간의 신체 접촉은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 아래 뭔가 줄줄이 부가적인 사안이 적혀 있었다.

“저기…, 이 아래 내용들은 뭔가요?”

“아, 그건 설명하겠습니다. 가짜 결혼이긴 합니다만, 남들에겐 진짜로 보여야 하거든요. 혹시라도 부부 동반으로 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부득이하게 두 분의 신체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설명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깨를 끌어안는다거나, 허리에 팔을 감는다거나, 가벼운 키스를 하는 등…,”

“네?! 키, 키스요?!”

“아, 물론 이런 일을 해야 할 때는 철저히 사전에 두 분이 범위를 정하시면 됩니다.”

“저, 전 그런 거… 해, 해야 하는 줄 몰랐어요….”

노아의 안색은 단번에 새파래졌다.

“아, 그거요? 계약서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성하는 거라서 적혀 있는 거고요. 그런 일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대표님은 오메가와 함께 공식 석상에 절대로 안 나가거든요. 신혼 핑계 대고 그런 자리는 아예 피할 겁니다.”

아무렴. 저 오메가 혐오증인 고용주가 부부 동반 모임에 갈 리가 없다. 혹시라도 오메가와 엮일까 봐, 최측근은 죄다 베타나 알파로만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6개월짜리 계약 결혼에 최선을 다할 리가 없지.

조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겁먹은 노아를 달랬다.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대표님은 오메가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 결혼도 전 회장님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행여나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정말요…?”

“네. 제가 장담하지요.”

“뭘 장담해?”

걱정하지 말라면서 큰소리치던 조엘은 뒤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등지고 앉아 있던 노아는 희미하게 코끝에 닿는 알파 페로몬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지금 칼튼 씨께 혼전 계약서 설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설명할 게 뭐가 있어? 왜? 돈이 적어? 더 달래?”

“그게 아니라… 신체 접촉 부분을 걱정하셔서….”

하. 그에게서 비웃음이 곧장 터져 나왔다.

“미리 돈부터 달라고 달려온 주제에 그걸 걱정해? 정말 뻔뻔하기 이를 데가 없군.”

대표님. 말리는 듯 조엘이 조용히 알렉스를 불렀다. 노아의 목덜미는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비웃음을 띤 얼굴로 알렉스가 성큼 걸어 노아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노아를 완전히 감쌀 정도로 푹신하고 커다란 소파는 그가 앉자 평범한 크기의 소파가 되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가 긴 다리를 꼬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노아를 보는 얼굴에는 조소가 어렸다.

“볼품없는 그 몸뚱이에는 관심 없어. 네 주제를 알아야지.”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혐오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오메가 따위가 그딴 걸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알렉스에겐 모욕이었다.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는 고용주가 겨우 용기를 낸 약혼자를 쫓아내기 전에 조엘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칼튼 씨! 계약서 다 보셨어요? 혹시 의문점이나 더 궁금한 점은 없으신가요?”

“없, 없어요….”

노아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렉스의 날 선 조롱에 주눅이 들어 계약서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말 확인 안 하셔도 되겠어요? 중요한 계약은 꼭 내용을 확인하시고 서명하셔야 해요. 나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매디슨. 계약서에 문제 있나?”

빨리 안 끝내고 너 뭐 해? 하는 고용주의 짜증에 조엘이 서둘러 부정했다.

“네? 아, 아니요. 이 계약서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그, 그냥 통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깁니다.”

잔뜩 움츠러든 노아가 안타까워 말 한번 꺼냈다가 찔러 죽일 듯한 날카로운 고용주의 시선을 받자 조엘은 잽싸게 한 발 뒤로 뺐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네, 네. 아무렴 그래야죠. 조엘은 성실한 비서의 자세로 돌아가 노아에게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혼전 계약이 끝나면 시청에서 약식으로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이건 내일 가능하도록 일정을 조정하겠습니다. 결혼 증명서가 나오면 헌트 회장님의 유언에 따라 칼튼 씨께는 유산 집행이 들어갈 겁니다. 결혼 기간 6개월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매달 20만 달러씩 지급될 거고, 6개월을 무사히 넘기면 오백만 달러 상당의 신탁기금이 칼튼 씨 앞으로 생길 겁니다. 펜트하우스의 명의 이전도 그때 끝날 거고요. 모든 법적인 처리는 저희 쪽에서 진행하니까 칼튼 씨가 따로 할 건 없습니다.”

조엘이 유산에 대해 줄줄이 읊는 걸 노아는 마치 남의 얘기 듣는 기분으로 들었다. 노아 평생 들을 일 없는 조건이다 보니 제대로 와 닿지 않았다.

“겉으로는 진짜 결혼으로 보여야 해서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대표님과 함께 사셔야 합니다. 신혼집은 상당히 넓어서 두 분이 서로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만, 알아 두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네?”

멍하니 듣고 있던 노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같이 산다니? 그런 얘기는 지금 처음 들었다.

“저… 같이 살아야 하나요?”

“네? 그건 당연히….”

알렉스가 설명하려던 조엘의 말을 딱 잘랐다.

“뭐가 걱정이야? 설마 같이 사니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길 기대하는 거야? 꿈 깨시지. 너하고 한집에 살아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 난 오메가 따위와 안 자. 설사 네가 내 앞에서 벌거벗고 지내도.”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노아는 무슨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는 게 아니라 벌어질까 봐 두려운 거지만, 알렉스는 노아가 수작을 부리는 거라고 마음대로 단정 지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조부에게 네가 무슨 소릴 지껄여서 이딴 유언을 남겼는지 모르지만, 절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어두운 눈동자가 노아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알파의 위협적인 발언에 노아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할아버지가 준다는 유산에 눈이 멀어 낯선 알파와 결혼하겠다고 찾아온 건 저니까.

노아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속물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자자. 대표님 진정하시고요. 어차피 두 분 이제 결혼은 기정사실이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험악한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달래던 조엘은 알렉스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는 이크,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때마침 전화가 울리자 조엘은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알아봤습니까? 아, 그래요? 채무 관련 서류 다 받으시고, 오늘 안에 처리하세요. 처리 끝나면 이쪽으로 완납 영수증 보내시고요.”

알아보라고 한 채무 관련 전화였다. 조엘은 후환이 남지 않도록 모든 걸 완벽하게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통화하는 동안 싸늘한 분위기를 풀풀 풍겨 대는 고용주를 힐끔거렸다. 팔짱을 끼고 위압적인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은 고용주는 한껏 풀이 죽은 노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오메가를 믿지 않는 고용주가 노아를 의심하는 건 알지만, 조엘이 봤을 때는 노아 칼튼이 고용주가 생각하는 것처럼 돈을 노리고 전 회장님께 고의로 접근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대체 두 분은 어떻게 만난 걸까?

조엘은 나중에라도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엘이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자 땅으로 꺼질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아가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채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직원이 곧 처리할 겁니다. 아, 그리고 계약서를 읽어 보셔서 아시겠지만 혼전 계약서에 관한 얘기는 비밀 엄수입니다.”

“아, 네, 그건 당연히….”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노아는 순간 멈칫했다.

“뭐야? 설마 누구한테 말했어? 그새? 아주 안 할 거라고 입으로만 떠들어 댔군, 그래?”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같이 사는 룸메이트한테 유산 얘기를 했어요. 결, 결혼이 조건이라는 말은 안 했어요…. 문제가 될까요?”

“아. 저런….”

조엘은 난감한 표정으로 알렉스를 힐끔거렸고, 시선을 받은 알렉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문제가 될까요? 라니.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나? 바보야? 당연히 문제가 되지!”

“다른 사람에겐 말 안 할 거예요. 믿을 수 있는 친구예요.”

“하! 그걸 어떻게 장담하지? 만약 그 친구라는 녀석이 언론에라도 말을 흘리면? 그땐 어찌할 거지?”

“그,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설마, 카일이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노아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지만, 알렉스는 콧방귀를 끼며 빈정거렸다.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하면 내가 그러냐고 넘어가야 하나? 만약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언론에서 우리를 가만히 둘 것 같아? 회사 주가에 어떤 변동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만약 그렇게 되면 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손해를 보게 돼. 그에 관해서 전부 책임질 수 있나?”

몰아치는 말에 노아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대표님, 뭘 그렇게까지 말씀하세요. 결혼이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얘기는 새어 나가지 않은 거죠. 유산을 받게 되었다는 것까진 알려져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두 분이 결혼하시게 되면 그 정도는 언론에서 파악할 테니까요.”

결국, 중재를 나선 건 조엘이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고용주가 노아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버릴 게 분명했다.

“칼튼 씨. 이미 말씀하신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결혼이 계약이라든가 6개월 후면 이혼한다든가, 하는 얘긴 절대로 안 됩니다. 아셨죠?”

“네. 말 안 해요. 절대로 안 해요.”

노아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앞으로 조심하시면 되죠. 아, 그리고 내일 결혼 말인데요…, 혹시 칼튼 씨 정장은 있습니까? 아무리 시청에서 올리는 결혼이라도 그 차림으로는 좀….”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내내 일만 하느라 정장을 입을 일이 없었던 노아에게 그게 있을 리가 없었다. 노아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 친구한테 있을지도 몰라요. 빌려서….”

“빌린다고?”

“네. 빌려서…. 안 되나요?”

안 되는 건가? 어떡하지? 없는데…. 모아 놓은 돈으로 내일 아침 일찍 사러 가야 하는 건가.

노아는 걱정 어린 얼굴로 제 수중에 얼마가 있는지 떠올렸다.

“정장을 빌려서 입는다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알렉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알렉스에겐 옷을 남에게 빌려 입는다는 게 문화 충격에 가까웠다.

“정장 한 벌 안 갖춘 사람 많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게 아니면 굳이 살 필요 없는 옷이긴 하죠.”

충격 받은 얼굴을 한 알렉스에게 조엘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설명했다. 이래서 부자들이란.

“그럼 내일 정장도 이쪽에서 준비할까요?”

“아, 아니요. 제가….”

“내일 집으로 적당한 옷 보내. 그거 입고 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알렉스는 혼전 계약서를 끌어다 서명했다. 그리고는 노아에게 서류를 넘겨 서명하게 했다.

“이제 다 됐지?”

자리에서 일어난 알렉스는 노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끝이 정해진 계약 결혼이야. 할아버지와 무슨 작당을 했는지 모르지만, 절대로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테니까 일찌감치 포기하도록 해.”

차가운 경고를 날린 남자는 자기 얘기가 끝나자 곧바로 안쪽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노아는 그가 말하는 작당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미 저 사람의 적의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칼튼 씨.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그쪽으로 옷이랑 차를 보낼 테니까 타고 오세요.”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노아라고 불러 주세요.”

“아, 그럴까요? 그럼 노아 씨. 바래다 드릴게요. 저도 어차피 퇴근해야 하고요.”

이곳에 제법 오랜 시간 있었다. 밖은 이미 어둠에 잠긴 지 오래였다. 노아는 조엘의 권유에 느릿하게 일어났다.

“계약서는 어쩔까요? 제가 보관할까요?”

서명이 끝난 혼전 계약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걸 제대로 보관할 자신이 없었다.

조엘은 자기가 따로 챙겨 둘 테니 혹 필요하면 달라고 하라면서 퇴근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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