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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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1.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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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

7.

1.

거대한 창고 가득 차 있는 물건을 눈으로 훑으며 노아는 품목 번호를 중얼거렸다.

“TW137… TW137…, 여기가 1

니까….”

노아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노아가 끌고 있는 카트에는 포장해야 할 물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 품목만 찾아서 전달하면 오늘 일은 끝이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모자챙이 벗겨지지 않도록 한 번 더 눌러 쓴 노아는 드디어 마지막 물품을 찾았다.

PDA로 빠진 물건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 뒤 노아는 1층으로 물건들을 내려보냈다.

10시간 가까이 중간 휴식시간을 제외하곤 내내 돌아다녔던 탓에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노아! 이제 작업 끝났니?”

“응….”

“이번 주 내내 추가 근무 했지? 너 그러다 병나서 쓰러져. 적당히 해. 여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퇴근하려고 짐을 챙기던 와중에 4층 근무자인 사라와 마주쳤다. 그녀는 노아가 지나치게 일을 많이 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적당히 하라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사라졌다.

그녀 때문에 시간이 약간 지체되어 노아는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 서둘러 탑승했다.

말수가 적고 늘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노아와 친하게 지내는 이는 없었다. 근무시간이 겹치는 사라만이 가끔 이렇게 아는 척 말을 걸어올 뿐이었다.

사라의 걱정이 아주 잠시 노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노아는 뻣뻣한 어깨를 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체력적으로 이제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는 게 느껴졌다. 쉬는 날 없이 매일 10시간 넘게 돌아다니며 물건을 나르는 게 힘들지 않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노아는 또다시 깊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애써 눌러 삼켰다.

노아가 이렇게 피곤함을 무릅쓰고 추가 근무를 자처하는 이유는 지난주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찔끔찔끔 갚을 거야? 응? 우리도 더는 못 기다린다고 했지?’

이자와 원금 일부를 빠짐없이 입금했다. 평소와 똑같이 했는데, 어째서인지 지난달부터 채권단이 원금상환 비율을 50%씩 올리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노아 처지엔 지금 갚아 나가는 이자와 원금만으로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일만 죽어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원금 상환을 50%씩 올리겠다니, 그냥 노아더러 죽으라는 것밖에 안 되었다.

채권팀에 사정 설명도 하고 매달려도 봤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도저히 그 조건은 맞출 수가 없어서 노아는 기존에 내던 대로 원금과 이자를 냈다.

그 직후 돈이 덜 입금되었다면서 채권팀이 지난주 집으로 찾아왔다.

룸메이트인 카일이 퇴근 전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몸집이 노아의 두 배쯤 되는 두 남자가 위협하듯이 노아를 압박하며 원금이 덜 들어왔다고 한바탕 난리를 부려 댔다.

겁에 질린 노아는 어떻게든 그들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네 사정을 봐줘야 해? 지금까지 우리가 기다려 준 건 그래도 네가 성실한 채무자여서 그랬어. 그런데 어쩌겠어? 사장님이 원금상환율을 확 올리라는데, 우리 같은 말단이 별수 있어?’

‘제가 당장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어떡할 건데? 뭐, 원금 50%는 상환이 되나?’

‘다음 주까지 천, 천 달러…. 천 달러는 추가로 입금할게요.’

‘뭐? 천 달러?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 가지고 뭐 하겠다는 거야? 우리가 지금 장난하는 거 같아?’

덩치 중 한 명이 코웃음을 치며 당장이라도 노아를 칠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린 노아를 보더니 그들은 한참을 낄낄거리고 웃어 댔다.

‘야. 너 그 머리로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 너 지금 하는 일로는 십 년이 걸려도 이 돈 못 갚아. 불어나는 이자만 갚다가 죽을걸?’

남자가 노아의 머리를 툭툭 장난처럼 쳐 댔다. 밀려나지 않으려고 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 댔고, 눈시울은 금세 뜨거워졌다.

부평초처럼 흔들거리던 노아의 팔을 잡아챈 다른 남자가 노아가 쓴 모자를 휙 벗겨 냈다.

‘도, 돌려주세요.’

노아의 두려움이 한층 커졌다. 남자의 투박하고 거친 손이 노아의 턱을 움켜쥐었다.

‘하. 시발. 역시 네 말이 맞네.’

‘그치? 만날 모자를 푹 눌러써서 하마터면 이 얼굴을 못 볼 뻔했잖아.’

‘놔, 놔주세요….’

남자에게 잡힌 턱이 아팠다. 노아는 팔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네가 너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인데…, 한 달이면 빚 따위 싹 다 청산할 얼굴로 뭐 하러 이 고생하는 거야?’

‘아, 안 해요. 저, 그, 그런 건 안 해요.’

‘야. 아직 말도 안 꺼냈어.’

‘불, 불법적인 일은… 안 합니다. 그, 그런 거 안 해요.’

‘야. 누가 불법이래? 영화야, 영화. 너 배우 한번 안 할래? 너 정도면 오디션도 없이 바로 통과야. 너 유명해지고 싶지 않아? 딱 주연감인데….’

‘맞아. 안 그래도 나 아는 감독이 새 얼굴을 찾고 있거든. 우리가 소개해 줄게. 어때?’

‘시, 싫어요.’

노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두 덩치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뜩였다.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노아의 본능은 위험하다고 외쳐 댔다.

영화라고 말은 하지만, 그들이 소개하는 자리가 평범한 영화일 리가 없었다.

노아의 격렬한 거부로 남자들의 얼굴은 점점 흉악해졌고, 다음 주까지 추가금을 상환하든가, 그게 아니면 소개받는 자리에 나가라고 협박을 해대다가 돌아갔다.

노아의 시름은 한층 더 깊어졌다.

쉬는 날도 없이 추가 근무를 모두 다 당겨 일했지만, 노아가 모은 돈은 오백 달러가 다였다.

그들이 언제 다시 밀어닥칠지 알 수 없었다.

다음번에도 제대로 거절할 수 있을까.

노아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불안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어떡하지. 제대로 쉬지 못해 갈라지고 터진 입술을 꽉 물었다.

초조하게 밖을 살피던 노아는 집 근처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 순간 강하게 불어닥친 바람에 낡은 재킷을 꽉 여미고 바람에 모자가 날려가지 않도록 머리를 눌렀다.

자전거를 가지러 집에 들렀다가 근처 식당 보조 일을 가야 한다. 식당 주인인 알베르토는 1분만 늦어도 내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러 대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되도록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바삐 움직였다.

오십여 년 전에 주택가로 형성된 거리는 낡아 빠진 연립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곳이었다. 자동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기에는 다소 비좁은 도로 양쪽으로 여유 공간이라곤 없이 옆집과 바로 맞붙은 붉은 지붕의 낡은 주택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칠이 다 벗겨진 우편함이 차 한 대도 대기 어려운 작은 정원 앞에 덩그러니 놓여 그나마 현관이 어딘지 구분해 주었다.

노아는 그 길을 쭉 따라가 자신이 거주하는 로테 거리 7번째 집에 도착했다.

카일이 퇴근하기 전이라 현관은 깜깜했다. 노아는 현관 계단 옆의 작은 화분을 들어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자기 방문을 열었다. 노아는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으로 손을 넣어 자물쇠가 달린 철제 상자를 끄집어냈다.

목에 걸고 있던 열쇠로 상자를 열어 일당을 모조리 그 안에 넣고 다시 잠갔다.

몇 개월 전에 받은 일당을 넣고 다니다가 그대로 강도를 당한 적이 있어 이후로는 무조건 집에 들러서 돈을 놔두고 다시 나갔다.

“아, 맞다!”

자전거를 가지러 차고에 가려던 노아는 서랍장을 뒤져 억제제를 꺼냈다. 페로몬 조절에 문제가 있어서 약을 먹지 않으면 오메가 페로몬이 언제 새어 나올지 모른다.

노아는 물 없이 억제제를 그대로 꿀꺽 삼켰다. 쓴맛이 목구멍에 달라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차고와 연결된 주방 뒷문을 열어 자전거를 꺼낸 노아는 차고에 걸린 벽시계를 확인했다.

다행히 아직 출근까진 십 분이 남아 있었다. 자전거로 빠르게 달리면 오 분 안에 도착하는 거리라서 늦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지금 움직이면 되겠지. 자전거를 끌고 막 밖으로 나가려던 노아는 멈칫했다.

딩동―.

희미하게 울리는 초인종.

설마…, 그 사람들이 오늘 온 건가?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전거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가만히 있으면 그냥 가지 않을까? 숨을 죽인 채로 노아는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멈춰 섰다.

딩동, 딩동, 딩동.

망설이는 노아를 재촉하듯이 초인종은 재차 울렸다.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노아의 심장 박동도 높아졌다. 딩동. 딩동. 딩동.

잠시의 틈도 없이 초인종은 계속 울렸다. 누군가 대답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초인종 소리가 노아의 귓가를 때려 댔다.

어, 어떡하지…?

출근도 해야 한다. 알베르토 씨는 파트타임의 사정 따위 봐주지 않는다. 지금 못 나간다고 전화할 수도 없다. 사정이 생겼다고 전화하는 순간, 어렵게 구한 파트타임 자리에서 잘릴 게 뻔하니까.

노아는 어떻게든 용기를 끌어모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현관까지 걸어갔다.

“계십니까?”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노아는 주저앉을 뻔했다.

지난번에 방문했던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혹시 그들이 다른 사람을 보낸 걸까? 만약 그들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면 빨리 대답하고 식당으로 출근할 수가 있다.

어쩌지? 노아의 망설임을 비웃듯이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어쩌지…?”

숨을 죽인 채 노아는 밖의 동태에 귀를 세웠다. 이대로 남자가 조용히 돌아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행여라도 새어 나갈까 봐 노아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문 앞인데 인기척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밖의 남자는 누군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알아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대표라는 말에 노아는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들이 직접 왔나 봐. 저 문밖의 사람이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리 식당 앞에서 기다릴까요?”

식당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노아는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자전거를 그만 놓쳤다.

찰그랑―. 자전거가 쓰러지며 큰소리를 내었다.

“앗! 누가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잠깐만요.”

밖의 남자가 서둘러 전화를 끊고는 똑똑 문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공포로 질린 노아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 도망가야 해. 도망….

불안과 공포로 노아의 눈동자는 어지럽게 흔들렸다.

“저기요. 노아 칼튼 씨? 문 좀 열어 주세요.”

똑똑. 똑똑똑. 쉬지 않고 상대는 문을 두드리며 노아의 이름을 몇 번이고 외쳤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노아는 필사적으로 현관과 멀어졌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지? 어지러울 정도로 다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겁에 질린 노아의 시야는 흔들렸다.

차고! 그, 그래! 차고로, 차고로 가면…!

노아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줘 일어났다. 부엌 쪽문을 벌컥 열었다. 차고를 열면 우편함이 있는 현관이 아닌 뒤쪽 도로로 빠질 수 있다. 거기로 도망치면 돼!

노아는 정신없이 차고 문을 손으로 밀어 올렸다. 드르륵, 패널이 반쯤 위로 열린 것을 확인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노아가 마주한 것은….

“뭐야? 역시 있었네. 노아 칼튼이지?”

노아의 눈앞에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검푸른 색 정장을 입은 남자의 어깨는 노아가 이제까지 봤던 어떤 이보다 넓었다. 상의 안에 받쳐 입은 조끼가 탄탄한 가슴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검은색 세단에 반쯤 몸을 기대고선 남자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로 노아를 향해 눈썹을 찌푸렸다.

알파다. 노아의 심장 박동이 단숨에 높아졌다.

눈앞에 선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파 페로몬이 대기 중에 뒤섞여 노아를 감쌌다.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인 노아는 휘청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안 돼….

긴 다리로 두어 번 만에 거리를 좁힌 남자의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 오지 마요…. 저, 못해요…, 그, 그런 거 안 해요…….”

공포에 질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부들부들 몸을 떨며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치기만 했다.

“말도 안 했는데 역시 알고 있었나?”

“안 돼요…. 제, 제발, 기다려 주세요. 돈은… 제가, 어떻게든 마, 마련할게요.”

노아의 손바닥이 아스팔트에 긁혀 점점 피가 맺혔다.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빌었다.

“조,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발…, 봐, 주세요. 지, 지금까지 날짜 잘… 지, 켰잖아요.”

노아는 필사적이었다. 이대로 이들 손에 끌려가 싫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뭔가 오해가…. 너…! 피가 나잖아!”

남자는 짜증이 난 얼굴로 바닥을 기는 노아의 손을 휙 낚아챘다.

“놔, 놔요! 안, 가요! 못 가요! 제발, 제발 놔주세요…! 돈 갚을게요! 제발……!”

노아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렸다. 잡혀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공포심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봐. 진정해! 아무래도 오해가….”

“싫어―! 이거 놔! 놔! 안 해! 안 한다고!”

“나 참. 미치겠네. 시발, 이게 무슨 일이야.”

남자는 결국 자신의 페로몬을 개방했다. 겁에 질려 날뛰는 오메가를 진정시키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남자의 페로몬이 그대로 노아에게 쏟아졌다. 공포심에 절어 있던 오메가를 기절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페로몬이었다.

알렉스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던 노아의 몸이 그 순간 축 늘어졌다.

짧은 사이 노아가 발광하는 바람에 깔끔하게 뒤로 넘긴 알렉스의 머리는 흐트러졌고, 슈트 상의도 구겨진 상태였다.

“하아….”

알렉스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노아 칼튼이 차고로 도망친 걸 알면 당장 여기로 튀어 와야지. 앞문과 뒷문 거리가 태평양이라도 돼? 아니면 거기서 여기까지 기어 오나?”

-앗! 대표님, 저 지금 바로 뒤에….

전화가 끊기는 동시에 “어?! 칼튼 씨가 왜 쓰러져 있습니까? 그리고 대표님 옷차림은 왜….” 하더니 조엘이 갑자기 펄쩍 뛰었다.

“대표님! 설마, 칼튼 씨를 협박하셨습니까?!”

큰일이라며 조엘이 허둥지둥 쓰러진 노아를 일으켰다.

“페로몬으로 잠깐 기절시킨 거야.”

“그런 짓을…!”

조엘은 잠시 천하의 나쁜 놈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알렉스의 싸늘한 눈과 마주하고는, “아니, 이분 손은 왜 또 다 까졌습니까? 병원으로 가야겠습니다!” 하며 말을 돌렸다.

비서의 호들갑에 알렉스는 짜증이 서린 얼굴로 휙 몸을 돌려 차에 타 버렸다. 쓰러진 저 오메가를 챙기는 건 비서가 알아서 할 일이고 알렉스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 상황 자체가 짜증 나 미칠 것 같으니까.

비서가 노아를 챙기는 동안, 알렉스는 죽은 사람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했다.

웅얼대는 목소리에 천천히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지?

노아는 눈동자를 찔러 대는 밝은 빛에 이마를 한껏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 불안정한 형질 때문에 병원을 자주 들르는 노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챘다. 그리고 동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아, 깨셨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헉!”

노아는 경기하듯이 후다닥 침대 밖으로 나와 구석진 곳으로 도망갔다. 정신없이 주변을 살피며 어떻게든 도망갈 곳을 찾았다.

그 모습은 흡사 코너에 몰린 연약한 초식동물 같아서 조엘은 그를 안심시키려 말을 꺼냈다.

“저기…, 노아 칼튼 씨.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먼저 말씀 드릴게요. 저는 채권자가 아닙니다. 저희 대표님이 칼튼 씨께 제대로 설명을 안 드린 모양이더라고요.”

“보내 주세요…. 돈, 돈은 어떻게든 갚을게요. 시간만 좀 주시면….”

“저기, 칼튼 씨? 우선 진정하시고….”

겁에 질린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조엘을 피하려고 우왕좌왕했다.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걸려는 조엘의 뒤로 문이 보였다.

저기로 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노아는 자기 앞에 선 조엘을 살폈다.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를 악물었다. 보기엔 평범한 사람 같았다. 은테 안경을 쓰고 구김 하나 없는 슈트를 입고 있는 모습은 인텔리 같았다.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노아는 이미 오래전에 깨달은 상태였다.

“저기, 칼튼 씨. 저는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닙니다. 우선 제 얘기를….”

그때였다. 가까이 접근하는 조엘을 밀치고 노아는 문으로 내달렸다. 문고리를 잡고 벌컥, 문을 여는 순간 단단한 벽에 그대로 쿡, 하고 얼굴이 부딪쳤다.

“윽!”

“뭐야.”

단단한 벽이 아니라 머리 위에서 울린 건 남자의 목소리였다. 아찔하리만큼 농후하고 진한 페로몬이 뇌리를 강타했다. 노아는 상대의 가슴을 밀쳐 내려다 오히려 팔이 붙잡혔다.

“놔, 놔주세요! 제발…!”

“매디슨. 제대로 설명 안 했어? 얘 왜 이래?”

“아, 그게 제가 설명할 틈도 없이 달려 나가셔서….”

잡힌 팔을 떼어 내려 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발….”

달달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상대를 올려다본 노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서릿발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는 창백한 노아를 선명하게 비추었다. 남자의 눈동자 속에 그대로 비추어진 자신이 너무도 생소하고 낯설었다.

노아는 그 순간 숨을 들이마셨다. 갑자기 목구멍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뒷덜미가 오싹오싹 저렸다.

상처가 난 손바닥이 뜨끈뜨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오므렸다.

“대표님! 제가 설명을 하려고 했는데요…, 칼튼 씨가 너무 놀라셔서 제대로 설명을 못 드린….”

숨죽인 채 남자를 올려다보던 노아는 타인의 목소리에 그제야 탄식처럼 숨을 내뱉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잘 다듬어진 검은 눈썹이 꿈틀, 하고 움직이는 걸 보자마자 노아는 화들짝 놀라서 남자에게서 물러났다.

“칼튼 씨.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노아는 자신이 위기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뒤에는 인텔리 남자가 서 있었고, 앞에는 인상을 찌푸린 알파가 서 있었다.

빠져나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절망이 바로 코앞이었다.

“칼튼 씨. 우선 좀 앉으시는 게 어떠세요? 엄청 낯빛이 안 좋으세요. 자, 이쪽으로….”

이대로 끝인가.

노아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조엘이 이끄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칼튼 씨. 물이라도 한잔 드실래요?”

조엘이 병실에 비치된 생수병을 따서 노아에게 내밀었다.

노아는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도 지난주의 그 덩치들에 비하면 이 사람들은 자신을 거칠게 다루지는 않았다는 것에 작은 위안이 들었다.

노아가 멍하니 생수병만 바라보고 있자 조엘은 그걸 탁자에 내려놓고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우선 제 명함부터 받으세요. 그리고 다시 설명해 드리자면, 저는 채권자가 아니고요, 헌트 인더스트리 경영지원팀의 조엘 매디슨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대표님 수행비서입니다.”

조엘은 일부러 회사명이 정확하게 보이게 명함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노아는 조엘이 건넨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 채권단이 아니야…?

두툼한 종이에 세련된 로고가 박힌 명함은 얼핏 보아도 고급스러웠다. 남자의 소개대로 거기에는 이름과 회사명이 빠짐없이 기재되어 있었다.

“헌트… 인더스트리요?”

헌트 인더스트리면 노아도 알고 있는 회사였다. 노아가 근무하는 물류센터도 헌트사의 수많은 계열사 중 하나였다.

“네. 저쪽 분은 저희 대표님이시고요. 대표님께서 칼튼 씨께 무례를 범한 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무례요?”

“네. 알파가 페로몬으로 오메가를 제어하는 건 안 되잖아요. 물론, 대표님께서도 너무 급하셔서 그렇게 하셨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조엘이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노아는 문가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비서가 한 말이 신경을 거스르기라도 한 듯 남자의 눈썹이 또 한 번 꿈틀했다.

노아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목을 움츠리며 시선을 내렸다.

“손은 괜찮으세요? 바닥에 쓸려서 급한 대로 치료는 했습니다.”

조엘의 말에 노아는 제 손에 감긴 붕대를 그제야 인지했다. 그다지 아프지 않아서 몰랐다.

“괜찮아요. 저…그런데 헌트 인더스트리에서 절 왜……. 혹시 저 물류센터에서 일하는데 그게 잘못된 건가요? 추가 근무는 작업반장 승인하에 한 건데….”

“아니요, 아니요. 추가 근무 때문이 아닙니다.”

조엘이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면 뭣 때문인지 아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 채권자들이 보낸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노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왜…?”

노아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순간,

“에드워드 헌트를 어떻게 아는 거지?”

문 가까이 서 있던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슬금슬금 번지는 알파 페로몬에 노아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왜 대답을 안 해?”

“저… 그 사람이 누군지… 몰라서….”

에드워드 헌트? 나직이 이름을 중얼거리던 노아는 불현듯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 혹시… 에디 할아버지 말씀하시는 거예요? 할아버지를 아세요?”

할아버지라니…. 조엘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그와 동시에 알렉스의 표정은 한층 험악해졌다.

“에디? 아, 그렇게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인가 보군?”

어이가 없다는 듯 그가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와 아는 사이예요? 할아버지는 잘 계세요? 요즘 통 공원에 오시지 않아서 못 뵌 지 벌써 2주나 됐네요….”

“모른 척하는 얼굴이 보통이 아니네.”

남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딘지 불쾌해하는 기색이었다. 제가 할아버지와 친한 사이면 안 되는 건가요? 노아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칼튼 씨. 혹시 헌트 회장님이 돌아가신 걸 모르시는 겁니까?”

“네? 회장님은 돌아가셨다고 소식 들었는데요, 그게 왜요?”

헌트 그룹을 굴지의 대기업을 키워낸 헌트사의 회장이 지난주에 심장마비로 급작스레 사망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노아가 일하는 물류센터도 헌트 그룹의 계열사라 그날은 종일 승계 얘기로 시끌벅적했었다.

에디 할아버지 얘기하다 왜 갑자기 회장님 얘기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노아는 자신에게 시선을 모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저, 칼튼 씨. 아무래도 모르시는 것 같은데…, 에디 할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이 헌트 회장님이십니다.”

“네? 그게 무슨…. 에디 할아버지는 평범한 분이세요. 은퇴하시고 가끔 공원 산책하시는 게 취미고요, 손자를 혼자 키우는 분이신데요?”

“그분 맞습니다.”

“아니에요…. 이름만 같은 다른 분이신가 봐요. 에디 할아버지는 그냥 회사 다녔다고 하셨어요.”

이를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조엘은 알렉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찾아오셨나 봐요. 그, 그럼 전 가도 되죠?”

가도 되냐고 물을 때 슬쩍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왠지 남자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게 불안했다.

다른 사람으로 오해한 게 분명한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에디 할아버지를 2주나 못 만난 게 마음에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처라도 받아둘걸.

연락처를 알려주겠다는 에디의 말을 흘려들은 게 지금 와서 후회되었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아를 가로막은 건 남자였다. 그가 갑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걸 왜…?”

노아는 고개를 숙였다. 남의 핸드폰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일부러 보라고 내민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본 것에 가까웠다.

핸드폰을 가만히 보던 노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헌트 그룹의 사주이자 지금의 헌트 그룹을 일구어낸 에드워드 C. 헌트, 87세로 별세]

“이거…, 진짜예요?”

포털의 메인 기사 타이틀 아래, 노아가 잘 알고 있는 에디 할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노아가 알고 있는 것보단 훨씬 무표정하고 매우 무서운 얼굴이긴 했지만 그래도 에디 할아버지가 맞았다.

노아는 혹시나 하고 눈을 비비고 다시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옆에 작은 글씨로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에드워드 헌트가, 에디 할아버지가 맞았다.

노아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에디 할아버지가…. 그 순간 가슴이 턱하고 막혔다.

노아의 커다랗고 푸른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 정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겨우 2주 못 뵈었을 뿐이었다. 다음 주에는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노아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랬는데, 돌아가셨다니….

그의 사망을 노아는 알지 못했다. 뉴스에서 떠들어 대던 에드워드 헌트가 자신이 아는 에디 할아버지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 어떻게…….”

슬픔이 온몸을 감쌌다. 노아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윽윽, 울음을 삼키려고 하면 할수록 눈물은 더더욱 노아의 뺨을 타고 목덜미를 적셨다.

숨죽인 채 울고 있는 노아를 알렉스는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얼굴로 울고 있는 오메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선에는 감정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한층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연기하는 얼굴이 아주 일품이군.

조부가 헌트 그룹의 회장이라는 걸 몰랐다는 저 오메가의 말을 알렉스는 믿지 않았다. 에드워드 헌트의 사망 소식은 일주일 내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아무리 TV 볼 시간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각종 언론사에 자주 노출되었던 조부 얼굴을 몰랐다는 건 너무 진부한 변명이었다.

에드워드 헌트의 하나뿐인 후계자로 자란 알렉스는 오메가가 얼마나 영악하게 구는지 숱하게 겪었다. 저딴 눈물에 속아 넘어갈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알렉스는 오메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건 진짜로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곧 제 생각을 비웃었다.

어차피 저렇게 눈물을 쏟고 나면 자기가 뭘 얻었는지 확인하려 들 게 뻔하다.

알렉스가 냉정하게 노아를 평가하는 동안 조엘은 손수건을 건네야 할지 그냥 울게 두어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그저 노아만 바라보았다.

행색이 초라하고 덥수룩한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볼 순 없지만, 매끈한 피부 하며 저 도톰한 입술이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도발적으로 느껴졌다.

이 정도면, 미인인 거 같은데…. 회장님이 노아 칼튼을 왜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엘은 베타라 노아의 페로몬 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설탕 과자처럼 달콤한 향이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남자치고는 가녀린 체구조차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아무래도 회장님이 저 미모에 반하신 것 같은데….

알렉스 앞에선 절대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 조엘은 여전히 미동 없이 싸늘한 얼굴을 한 자신의 고용주를 힐끗거렸다.

알파인 고용주가 저런 미인 오메가를 앞에 두고도 표정 하나 안 변하는 거에 조엘은 혀를 내둘렀다.

하긴 고용주의 오메가 혐오는 업계에서 아주 유명하지. 회장님도 참 대단하셔. 자기 손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런 유언을 남기다니….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조엘은 노아의 눈물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자 잽싸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자요, 닦으세요. 물 좀 드시겠어요? 아니면 뭔가 마실 거라도 준비할까요? 아, 우선 앉으세요.”

조엘은 노아를 다독여 다시 소파에 앉히고 물을 건넸다. 일련의 행동은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익숙해 보였다.

수발드는 게 일상인 조엘에겐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얌전하게 울어 주는 사람이 다루기는 더 쉬웠다.

“조금 진정이 되셨습니까?”

노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조엘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얼음장 같은 고용주가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하는 게 묘하게 불안해졌다.

조엘은 얘기를 빨리 끝내고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다.

존재 자체가 위협인 고용주를 올려다보며 조엘이 말했다.

“대표님도 계속 서 계실 겁니까?”

“어쩌라고?”

“아닙니다. 그냥 제가 설명할게요.”

싸늘한 고용주의 반응에 조엘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노아는 코를 훌쩍거리며 웅얼거렸다. 눈물은 잦아들었으나 슬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사실에 노아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어둡고 우울했다.

할아버지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그랬어. 아니면 연락처라도 제대로 받아 둘걸. 그랬더라면 그의 사망 소식을 늦게 듣진 않았을 텐데….

수없이 많은 후회가 휘몰아쳤다. 다시금 비죽비죽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노아는 애써 삼켰다.

“장례식은… 이미 끝난 거죠?”

혹시나 해서 물었으나 역시나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아는 손수건을 쥐어뜯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괜찮다면… 할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의 묘에 꽃을 놓고 싶었다.

무덤 앞에서 원망이라도 늘어놓고 싶었다. 건강은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었는데 왜 저한테 거짓말하셨어요.

얼핏 들었던 뉴스에선 헌트 회장이 오랜 지병의 악화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언제까지 그럴 거지?”

알렉스의 물음에 노아는 코를 훌쩍거리며 네? 하고 반문했다.

“슬퍼하는 척 그만하라는 말이야. 네가 궁금한 건 조부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가 아니라 그분이 네게 뭘 남겼는지 아닌가?”

노아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여전히 눈물로 젖은 속눈썹이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저… 죄송한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무덤에 꽃을 놓고 싶은데… 그럼 안 되는 건가요?”

하. 남자가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짧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알렉스는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한텐 멍청한 척, 순진한 척할 필요 없어. 이미 다 알고 있잖아. 꼬장꼬장한 노인네를 어떻게 꿴 건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넌 성공했어.”

남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이죽거렸다. 노골적인 적대감에 노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대표님!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일을 그르칠 게 뻔한 고용주를 잽싸게 조엘이 말렸으나 이미 늦었다.

“설명하긴 뭘 설명해? 이 오메가가 무슨 수작 부리는지 다 보았으면서.”

창백한 안색의 노아에게 불쑥 다가간 알렉스가 상체를 숙였다. 뻗은 그의 손이 노아의 턱을 잡아 얼굴을 치켜들었다.

“오메가들 수작을 내가 한두 번 보아 온 줄 아나? 같잖지도 않은 그 연기 따윈 안 속으니까 헛짓거리할 필요 없어. 얼마나 남겨 줬는지 궁금해 죽겠지, 안 그래?”

겨우 멈춘 눈물이 또다시 노아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서운 알파가 무슨 소리 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처음 본 사람이 자신을 경멸하는지도 몰랐다.

어깨를 움츠리며 노아가 잘게 몸을 떨었다. 손에 쥔 손수건이 다 구겨질 정도로 꽉 쥐었다.

“저, 저는…, 당신이 무, 무슨 소리 하시는지….”

노아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그가 움켜쥔 턱이 아팠다.

“그딴 연기 집어치우라고 했지! 반반한 낯짝이 할아버지한텐 먹혔는지 몰라도 내겐 안 먹혀.”

“대표님! 그만 하세요!”

조엘이 서둘러 알렉스의 팔을 잡았다. 겁에 질린 노아가 온몸을 떠는데도 알렉스는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돈만 달라고 하지 그랬어? 왜 그딴 수작을 부렸지? 어떻게 감히 그딴 생각을 할 수 있어?”

“대표님!”

탁!

조엘이 벌떡 일어나 말리려던 찰나, 알렉스가 노아를 밀쳤다.

털썩, 노아의 마른 몸이 소파에 내동댕이쳐졌다.

“대표님, 이러시면 안 됩….”

조엘이 소파에 널브러진 노아를 살피며 알렉스를 불렀으나, 성질 나쁜 고용주는 이미 밖으로 나가 버린 후였다.

겁에 질린 오메가를 달래는 일은 결국 조엘의 몫이었다.

곤란한 듯 조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 * *

“진정 좀 됐어요?”

한동안 덜덜 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노아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한 건 알렉스가 나가고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조엘은 신중하게 노아의 안색을 살폈다. 정말 중요한 얘기는 시작도 못 했는데 빌어먹을 고용주가 분위기만 험악하게 만들고 사라지는 바람에 수습은 결국 자기가 해야 했다.

조엘은 집에선 대충 자른 듯한 덥수룩한 금발 사이로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미동도 없는 노아를 탐색했다. 남성 오메가라 치더라도 선이 가는 사람이었다.

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고, 곧게 뻗은 콧날은 얼굴 정중앙에 완벽한 모양새로 자리 잡았다. 도톰한 입술은 마치 붉은색 물감을 깨끗한 물에 한 방울 떨어트린 것처럼 옅었다. 손수건을 움켜쥔 손은 예쁜 얼굴과는 달리 손끝이 뭉텅한 것이 꽤 고생을 많이 한 티가 났다.

“집, 집에 가고 싶어요….”

조용히 마음을 추스르던 노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조엘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칼튼 씨. 대표님이 좀 성질이 더럽…, 아니, 욱하셔서 많이 놀라셨죠? 하지만 그래도 정말 칼튼 씨를 어쩌려고 하신 건 아니에요. 성질은 저래도 정말 사람을 해치는 분은 아니시거든요.”

거짓말을 하자니 양심이 지끈거렸다. 접근하는 오메가에게 고용주가 어떻게 구는지 지겹도록 지켜봤던 조엘이었다.

위법행위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게 상대의 자존심을 박살 내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고용주였다.

“저, 저한테 왜 이러는지 정말 전 몰라요….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거 같아요.”

노아는 카일이 있는 집으로 빨리 가고 싶었다. 파트타임 일은 잘렸을 거다. 빨리 새 일을 구해야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카일의 위로를 받고 싶었다.

노아는 이유도 모른 채 알파의 경멸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 그냥 갈게요.”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엘은 또다시 속으로 제 고용주를 욕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정말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요.”

“저는 할 얘기 없어요….”

“회장님께서 칼튼 씨에게 유산을 남기셨습니다!”

밖으로 나가려던 노아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유산이라니? 노아는 의아했다. 에디 할아버지와 가까이 지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유산을 받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노아는 그대로 무시하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조엘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그대로 노아의 곁으로 다가온 조엘은 제발 얘기만 듣고 가시라고 붙잡았다.

“칼튼 씨에게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빚 때문에 힘들지 않으신가요?”

“네? 그, 그걸 어떻게….”

“저희를 채권단으로 오해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그것도 매우 악질적인 놈들인 거 같던데…. 급하게 갚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노아는 조엘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빚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회장님의 유산이면 그 빚, 단번에 갚을 수 있습니다.”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노아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조엘을 바라보았다.

“자, 우선 얘기 좀 들어 보세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조엘은 멍하니 서 있는 노아를 다시 소파에 앉혔다.

이제 겨우 제대로 얘기하겠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엘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대표님이 좀 과격하게 반응한 것은 회장님의 유언이 대표님을 화나게 해서 그렇습니다.”

“그, 그게 저한테 화를 낸 이유라고요?”

“네. 그 유언이 칼튼 씨와 관련이 있으니까요.”

노아의 의아한 표정에 조엘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그러나 조엘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말을 이었다.

“회장님은 칼튼 씨에게 집과 현금을 남기셨습니다. 하지만 이 유산을 받으시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집과 현금이요…?”

노아는 할아버지가 왜 제게 유산을 남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가끔 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으로 족했다.

에디 할아버지가 벌써 그리워졌다. 그냥 제 곁에 있어 주시면 되는데…. 이런 건 필요 없는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노아는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 또 울고 싶지 않았다.

“네. 집과 현금이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대표님이 화가 나신 건 이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노아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조엘에게 되물었다.

“조건이 뭔가요?”

“그게….”

조엘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오메가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대표의 말처럼 앞에 앉은 노아 칼튼이 고의로 회장님께 접근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조엘의 짐작이 맞다면 눈앞의 미인은 조건을 듣는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갈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도 아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이 오메가는 현재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으니 그 부분을 잘 어필하면 조건을 수락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뒷말을 기다리는 노아를 살피며 조엘은 폭탄을 던지듯이 빠르게 내뱉었다.

“칼튼 씨가 대표님과 결혼하는 것이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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