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00)

100. 외전4

어젯밤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덴타 왕자님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의문이었다. 그 해답을 직접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의 눈에는 경악이 가득했다. 특히 덴타 왕자님의 눈에 한 번 들어볼까 한껏 꾸미고 왔던 여학생들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저… 저기, 지금 덴타 왕자님 옆에 그 세리 맞아?”

“덴타 왕자님이랑 지금 무슨!”

“저 기집애가 왜 저기에 있는 거야?”

덴타와 어깨를 마주하고 오는 사람은 그녀들이 그렇게 무시했던 세리였다. 홀에 가득하던 학생들은 그 두 사람이 지나는 자리마다 두 갈래로 갈라졌다. 

아침부터 둘을 둘러싸고 말하는 학생들의 말에는 특히나 세리를 향한 악감정이 가득했다. 평소라면 그 눈빛만으로도 고개를 숙였을 세리는 지금 그 악담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세리, 나는 사브만을 잊지 않았어. 언제나 내 마법과 의학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지.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이었는데, 이제 그 일을 실행하려고 해. 그래서 말인데… 세리, 나를 도와주지 않을래?’

간밤에 덴타는 세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면서 그녀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어렸을 때부터 혜택을 받지 못한 동네를 많이 도와줬다고 하더니, 덴타는 왕궁에서 화려하게 지내는 대신에 남들을 도울 수 있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 계획을 듣는 동시에 세리의 입에서는 존경과 감탄이 터져 나왔다. 사브만에서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거나 도와줬던 것도 그의 그 다정한 성격과 애타심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그가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할 때만 해도 고개를 끄덕였던 세리는, 덴타가 자신에게 함께하자고 말하자 크게 놀랐다.

아직 미숙한 자신을 필요로 해 준다는 게 감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리가 할 수 있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세리의 기숙사 방 앞까지 함께 온 덴타는 미소로 그녀를 배웅했다. 

“우선 좀 쉬도록 해. 내가 한 얘기는 천천히 생각해 봐도 좋으니까.”

“저, 덴타 님.”

“응?”

세리는 차마 덴타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왕자님의 말을 단번에 거절해야 하다니. 그 미안함에 눈 끝이 화끈해졌다. 

“저는… 소리오닌 님을 떠날 수 없어요. 소리오닌 님은 바론에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정말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어요. 지금부터라도 저는 소리오닌 님에게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 해요.”

“…세리.”

“물론 덴타 님의 제안은 정말, 정말 영광이었어요. 덴타 님이 그리는 미래에 작게나마 제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릴 만큼요. 하지만, 저는 도저히….”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세리의 목소리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덴타는 얼른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세리가 겨우 고개를 들어 덴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아, 세리. 미안해 할 일이 아니야.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한 내 잘못이야.”

“아, 아니에요! 제가…!”

“세리, 그럼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우선 쉬도록 해.”

덴타는 더 큰 미소를 짓고 세리를 위로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맘속에 가득 찬 실망감을 감출 수는 없었다. 서로에 대한 미안함을 가득 안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마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

“세리! 벌써 일어났어?”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지막 방학이 시작되고 세리는 곧바로 바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째 제일 먼저 일어나 성 곳곳의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새벽부터 달이 떠오르는 저녁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혹사시켰다. 주위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무리하고 있는 그녀를 걱정했다.

세리도 그런 사람들의 맘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헛된 생각이 떠오르려고 했다. 그리고 그 헛된 생각이 쌓이다 보면 분명 소리오닌의 은혜도 잊고 못된 말을 꺼낼 것 같았다.

세리는 청소를 하다 다시 한번 떠오르는 덴타의 얼굴을 털어냈다.

아마 자신이 아니라도 왕자님을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겠지. 그냥 한번 제의를 한 걸 수도 있어. 그래, 그런 걸 거야.

엉망진창으로 꼬여 있는 머릿속을 비우는 데는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세리가 아주 잠깐 멈췄던 손을 다시 놀리기 시작할 때였다. 

“세리, 왕비마마께서 부르셔.”

“저요? 어디 불편한 곳이 있으시대요?”

“글쎄? 그런 말은 없었는데… 혹시 모르니까 얼른 가 봐.”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리오닌은 세리가 청소를 하고 있는 곳과 반대쪽 궁에 머물고 있었다.

평소 그녀는 세리의 업무 시간이면 큰일이 아니고는 부른 적이 많지 않았다. 특히 오늘같이 반대편 건물에서 일을 할 때면.

그런데도 이렇게 사람까지 시켜서 부른 것을 보면 정말로 어디가 불편하신가 싶어 얼른 달려갔다. 

“왕비님!”

시종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세리가 튀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소리오닌 뿐만 아니라 에리한까지 앉아 세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녕.”

아카데미에서 서로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던 덴타가 환히 웃으며 세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데, 덴타님…!”

“미안, 아무래도 세리를 못 데려가면 너무 아쉬워서. 직접 전하와 왕비님께 부탁을 드리러 왔어.”

“네…?! 무슨 말씀이세요?!”

덴타의 말에 펄쩍 뛴 세리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모두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의 분위기에 더 당황한 세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세리, 우선 여기 앉아 봐.”

소리오닌이 멍하게 서 있는 세리를 불렀다. 세리는 소리오닌의 부름에도 그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 소리오닌의 옆에 앉을 자신이 없었다. 그냥 서서 있는 게 훨씬 편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소리오닌이 앉을 것을 권했다.

“얼른.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니, 왕비님. 그게….”

세리가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덴타와 있었던 일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는데, 이미 그간의 얘기를 모두 들은 듯했다.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는 세리를 보던 소리오닌은 말을 시작했다. 

“세리가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는지 알아.”

“….”

“그리고 세리, 너도 내 답이 어떤 건지 다 알고 있지?”

“왕비님….”

“세리도 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걸 거절하는 바보가 어디 있어?”

소리오닌의 웃음과 함께 나오는 말에 결국 세리가 한두 방울씩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 눈물을 닦아 주던 소리오닌의 코끝도 찡해졌다.

처음부터 소리오닌의 옆에 있어 준 세리였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 헌신해 주고 믿어주었다. 제일 친한 친구이자, 동생 같은 아이였다.

이제 소리오닌이 세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녀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그치만 저는 아직 소리오닌 님께 갚아야 할 것들이 많은걸요.”

“갚다니? 나는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야. 세리도 그동안 나에게 뭔가를 바라서 해준 게 아니잖아?”

“그건 당연한…!”

“세리. 네가 그렇듯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세리가 제일 행복하고 만족하는 날들을 보내길 바라.”

조근조근 흘러나오는 소리오닌의 말에 세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자신을 보내줄 게 분명하기에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던 건데. 그녀의 예상대로 소리오닌은 기쁜 마음으로 세리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에 덴타는 더욱 더 큰 미소를 지었고, 그 옆에 앉아있던 에리한 또한 인자한 표정으로 세리를 격려해 주었다.

“자, 이제 세리도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지? 그러면 우선 방학 동안은 즐겁게 지내자. 로엘도 세리가 일만 하느라 안 놀아준다고 엄청 화났다고.”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소리오닌의 장난스러운 말에 세리의 얼굴에 겨우 웃음이 돌아왔다. 로엘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제야 세리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

“세리. 화난 건 아니지?”

두 사람만이 있게 된 시간, 덴타가 세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자신이 너무 막무가내였던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기숙사 안, 그곳에서 세리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그 반짝이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그 눈부심을 두 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난 건 아니에요. 그냥, 덴타님이 이렇게 바론까지 찾아오실 줄 몰라서요. 제가 뭐라고….”

“왜 그렇게 말해. 세리가 뭐냐니, 그런 말 하지 마.”

세리의 자신감 없는 말투에 덴타가 얼굴을 굳혔다.

그에게 세리는 처음으로 사람과의 교류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어렸을 때의 우정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설렘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몰랐던 애틋한 감정들이 그녀를 다시 만난 뒤로 빠르게 단단해져갔다.

“덴타 님, 정말 제가 함께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책으로 배우기만 했을 뿐 실제로 다른 사람을 도와준 적도 없고, 덴타 님 옆에서 걸리적거리기만 할지도 몰라요.”

“괜찮아. 세리에게 바라는 건 완벽함이 아니니까.”

“그러면 왜….”

의문이 담긴 세리의 눈빛에 덴타는 그저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두 발자국 옆에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온기에 깜짝 놀란 세리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게 내가 세리를 데리러 온 이유야.”

덴타는 세리의 손바닥에 반짝이는 빛으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평생 함께 해 줘.’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부신 글자들이 세리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따라 읽어 내려가던 그녀가 깜짝 놀란 눈을 들어 덴타를 쳐다보았다.

세리의 시선이 닿은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짝이는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저 허공만 보던 덴타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지금부터 아바마마께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세리, 네가 여기에 있을 때보다 더 고생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함께 해 주지 않겠어? 그냥 동료로서가 아니라, 서로 같은 마음으로.”

“어… 저, 정말….”

“물론 정말이야.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일이고. 세리, 네가 허락해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덴타가 환하게 웃으며 세리의 볼을 쓰다듬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덴타를 보던 세리 역시 점점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답을 듣지 않아도 어떤 마음일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덴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세리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심장이 맞닿았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앞으로 두 사람이 함께 보내게 될 많은 날들의 시작이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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