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00)

099. 외전3

“오랜만에 와 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안으로 들어 온 덴타를 본 학장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덴타 역시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로 대답했다.

“졸업한 지 시간이 꽤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변한 게 없어서 놀랐습니다. 마치 어제 본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하하.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몇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니까요. 함부로 바꿀 수도 없지요.”

“학장님, 말씀 낮추십시오. 듣는 제자가 민망합니다.”

덴타가 학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귀 끝이 빨개져 있었다. 

“이제 덴타 님은 아카데미를 졸업하여 학생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본래 사브만의 왕자님이신 분께 제가 어떻게 함부로 말을 낮추겠습니까.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덴타의 귀여운 투정에 학장은 허허, 짧은 웃음을 짓고는 완강히 거절했다. 그리고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덴타를 바라보았다. 

“졸업하고 연락 한 번 없으셨던 분이 여기에 직접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려워 말고 말씀해 보십시오.”

“먼저 말씀해 주셨으니 바로 얘기하겠습니다.”

덴타는 꽤나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을 경청하던 학장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니.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제 생각도 금전적인 지원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아바마마의 허락도 받았고 실행하는 일만 남았으니 부디 학장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오는 학장의 대답에 덴타는 다시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 인사에 크게 웃은 학장은 금세 짓궂은 표정으로 덴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나가보려던 덴타는 학장이 다가오자 자세를 바로 했다.

“덴타 님. 며칠 뒤에 마지막 학년을 보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파티가 열리는 걸 알고 계십니까?”

“아… 파티.”

“그 파티에 참석해 주신다면 제가 저뿐만 아니라 제 모든 연줄을 통하여 도와 드릴 것을 약속 드리겠습니다.”

학장이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물론 자신이 거절한다고 해서 그가 손을 놓을 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덴타는 기분 좋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새로운 일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겠지. 

“좋습니다. 저도 그 날을 즐기도록 하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덴타 님이 오신다는 걸 알면 여학생들이 엄청 좋아할 겁니다. 여학생들 중에는 어여쁘고 착한 아이들이 많습니다. 혹시 압니까? 왕자님의 인연이 있을 지요.”

덴타는 그의 말에 그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런 덴타의 모습을 보는 학장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이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저 능력이 뛰어난 소년이었는데. 몇 년 만에 누구나 탐낼만한 남자로 자라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가르쳤다는 것은 자신의 생에서 제일 커다란 자랑이었다.

***

세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 기울였다. 자신이 있는 곳은 별관의 화원. 파티가 열리는 본관과는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바람에 음악 소리가 실려 오고 있었다. 

“으음, 음음.”

소리오닌과 함께 들었던 음악이 나오자 허밍으로 따라 부르며, 세리는 혼자만의 파티를 즐겼다. 세리는 마지막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파티에 갈 수 없었다. 화려하게 열리는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를 사기에는 가지고 있는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물론 소리오닌과 에리한이 세리에게 보내는 용돈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꽤나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없어지는 전공 책들과, 망가지는 필기구들, 더러워지는 교복을 사느라 세리에게 남는 돈은 겨우 밥을 사먹을 정도였다. 

혹여 드레스나 장신구를 살 돈이 있다고 해도 그녀가 파티를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을 게 뻔한 탓이었다. 만약에 파티에 갔다면 거기서 얼마나 큰 망신을 당할지 상상만으로도 오싹해져 왔다. 

세리는 살짝 고개를 털어내고 다시 음악에 집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그녀와 함께 해 주는 흰 새의 이마를 살살 쓰다듬었다.

“이제 며칠 뒤면 방학인데. 나랑 같이 갈래? 소리오닌 님도 내가 너를 데려오는 걸 반대하시지 않을 거야. 그리고 로엘 님은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실걸.”

대답 없는 새를 향해 혼잣말을 하는 세리의 얼굴에는 어느새 설렘이 가득 내려앉았다. 거의 1년 만에 돌아가는 바론이었다. 로엘 님이 얼마나 컸을지 소리오닌 님은 여전히 잘 계시는지 너무 궁금했다.

“아직까지 주인이 안 나타나는 거 보니까. 너를 내가 데려가도 되는 거겠지? 그동안 정들까 봐 일부러 이름도 안 지어 줬는데…. 좋아! 이제 이름을 지어 줄게!”

세리는 한참동안 고민에 빠졌다. 흰색의 빛나는 깃털과 매력적인 붉은 눈동자. 생긴 걸로 봐서는 정말 고급스러운 이름을 지어 줘야 할 것 같은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아, 진짜 어렵네? 고급스럽고 하얗고 붉은 게 뭐가 있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세리의 머릿속에 순간 덴타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칠 동안 그와 꽤 많이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그 빛나는 머리칼과 눈동자에 한참 시선을 뺏겼었다.

“덴타 님….”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그 이름에 세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덴타는 기억도 못하는데 혼자 그를 생각하며 얼굴을 붉히다니. 주책이었다. 세리는 다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관찰하는 듯, 흰 새는 세리의 맞은편에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안 되겠다! 네 이름은 바론에 가면 소리오닌 님이나 로엘 님께 부탁해야겠어.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 줘.”

세리는 귀엽게 눈을 찡긋거리며 새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이 다가오는데도 흰 새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 반응에 다시 한번 기분이 좋아진 세리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까지 손을 올렸다. 

“아무튼 오늘도 네 덕분에 외롭지 않았어. 고마워.”

세리의 입술 끝이 손 안에 안긴 새의 부리에 살짝 닿았다. 그저 고마움의 표시로 친근함을 담은 인사였다. 그러나 그 순간.

쿵.

작은 울림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세리의 앞에는 흰 새가 아닌 덴타가 서 있었다. 그것도 온 얼굴이 빨개진 채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세리의 얼굴 또한 당혹감이 가득했다. 어, 어떻게 여기에 오셨지…? 내 새는…?

“아, 저…. 그러니까….”

세리는 저도 모르게 덴타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다 혹시 그가 나타남으로 인해 새가 날아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진짜 놀라서 날아갔나? 새가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 세리의 얼굴에 점점 울음기가 번져갔다.

“세리.”

덴타는 이러다 세리가 울어버릴까 봐 얼른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세리가 놀란 눈으로 덴타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손가락은 그를 가리킨 채였다. 

덴타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정신을 못 차리는 세리 몰래 얕은 한숨을 쉬었다. 우선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세리의 손가락을 잡고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 다음에는 작게 박수를 쳤다. 

짝, 작은 소리가 공중에 울리고 그 소리에 놀란 세리가 덴타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세리. 오랜만이야. 나 기억해?”

“데, 덴타 님.”

“응. 맞아.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워.”

어렸을 때 그 미소 그대로였다. 덴타의 인사에 세리 역시 미소로 답했다. 입 끝이 바들바들 떨려 제대로 된 미소가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덴타 님, 저 어떻게 여기까지! 아니… 저를 기억하고 계셨어요?”

“물론이지. 내가 널 어떻게 잊겠어.”

덴타의 답에 세리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무시한다고 생각했는데, 시선 한번 마주치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감사합니다. 저도, 저도 잊은 적 없어요. 제 은인이자 소리오닌 님의 은인이신걸요.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오고 있었어요.”

“그런 말 마. 은인이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그래도, 저는 덴타 님을 만나서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걸요. 저… 근데 제가 지금 찾아야 할 게 있어서….”

세리는 덴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순식간에 없어진 새에 대한 걱정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러한 세리의 반응에 덴타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필 입술이 닿다니. 너무 놀라서 변신 마법이 풀려 버렸다. 

“세리. 사실 그, 그 새 말이지.”

“네? 덴타 님, 보셨어요? 덴타 님이 여기에 나타나자마자 사라졌어요. 아마 놀라서 날아간 것 같은데. 어느 쪽으로 갔나요?!”

덴타의 말에 세리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덴타가 자신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세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셨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그거 나야.”

“…?”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자신의 답을 전혀 이해를 못하는 세리를 위해 덴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새로 변한 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반복이 계속될수록 세리의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럼 제가 그, 여태껏 덴타 님한테 온갖 얘기를…?! 죄, 죄송해요!”

“아냐. 내가 더 미안해. 사실 숲에서 너를 보고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던 두 사람은 한참만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그 뒤로는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본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끊어지고,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둘의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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