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바임은 담담한 얼굴로 감옥을 향하는 에리한을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왕자님, 뭐 하러 가십니까?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텐데.”
“나도 좋은 소리 하러 가는 거 아니니까 괜찮아.”
바임의 잔소리에 에리한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의 태연한 대꾸에 질린 얼굴을 한 바임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꽤 많은 계단을 내려가야 보이는 독방 안에 자하만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본 에리한은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자하만 백작. 아니, 이제는 백작이 아니지.”
공간을 울리는 에리한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작의 고개가 들렸다. 그는 에리한의 얼굴을 보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무슨 일인가.”
“이제는 존대도 안 하시는 건가?”
“어차피 곧 죽을 몸. 죄목 몇 개 더 추가된다고 바뀔 건 없지.”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에리한이 백작을 바라봤다. 그의 집요한 시선에 백작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봐도 더 이상 나한테서 나올 건 없네.”
“뭐, 그거 때문은 아니고. 당신의 측근들이 모두 당신의 이름을 팔고 빠져나가려고 해. 그런 쓰레기들을 믿었나?”
“서로의 이익을 위해 모였을 뿐 처음부터 의리 같은 건 없었지. 흐음, 그래서 그들은?”
“뭐, 반은 감옥에 갇혀 있고 반은 수도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내쫓았다.”
에리한의 대답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백작이 잠시 고개를 들어 에리한과 눈을 맞추었다.
역시 백작이 궁금한 건 그런 것들의 안위 따위가 아니겠지. 에리한은 웬일로 성의 있는 말투로 말을 마저 이어갔다.
“위나 자하만은 귀족의 지위를 빼앗고 다른 도시로 떠나보냈다. 아마 평생 시녀로 살게 되겠지. 그녀가 너에게 가담한 것이 적지 않으니, 이 정도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 그나마 어마마마의 얼굴을 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군. 다행이야.”
위나 자하만이 목숨은 건졌다는 소식을 들은 백작은 그제야 좀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에리한은 그를 보다가 몸을 돌려 감옥을 벗어났다.
“위나 자하만에 대해 말해주려고 오셨습니까? 왕자님답지 않게 너무 친절한 거 아닙니까?”
“시끄러워.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뒤에서 들려오는 바임의 작은 웃음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에리한은 걸음을 빨리했다. 혼자 올걸 그랬어. 속으로 투덜거린 에리한이 고개를 돌려 정원을 바라봤다. 시녀들과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 있을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모습이었다.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보던 에리한은 서둘러 소리오닌을 만나러 가기 시작했다.
***
“소리오닌 님, 너무 예쁘셔요!”
세리는 드레스를 입고, 장식을 끝낸 소리오닌을 보고 울먹였다. 흰색의 풍성한 드레스는 곳곳이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되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환하게 빛났다.
“세리, 나 어때? 괘, 괜찮아?”
“괜찮고말고요! 제가 봤던 모든 신부님들 중에 최고예요! 그렇죠, 린셀 공주님?”
“음, 그렇네. 뭐…… 생각보다 괜찮네요.”
아직까지 화려한 색의 드레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린셀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소리오닌과 잘 어울리는 드레스에 얼굴이 스르르 풀려가고 있었다.
그런 린셀에게 마주 보고 웃어 준 소리오닌은 거울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와 함께 거울을 보던 린셀과 세리는 마지막으로 소리오닌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꼼꼼하게 봐 주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왔다. 소리오닌은 아까부터 터질 것 같은 심장 때문에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에리한을 만나고 난 뒤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힘든 일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에리한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소리오닌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에리한이 자신을 마중하러 오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왕자님이 오셨습니다.”
시녀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린 뒤, 문이 열리고 흰색의 정복을 갖춰 입은 에리한이 나타났다.
눈부신 그의 모습에 소리오닌은 잠시 진정되었던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는 것을 느꼈다. 에리한 역시 순백색으로 빛나는 소리오닌의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던 린셀이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놀란 두 사람이 민망한 듯 웃음을 띄었다.
“소리오닌 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에리한 님도 너무 멋있어요. 지금 제 심장이 너무 뛰어서 큰일이에요. 이따 실수하면 어쩌죠?”
“하하, 걱정 말라는 말은 못하겠네요. 저도 지금 소리오닌 님이랑 마찬가지로 심장이 엄청 쿵쾅거리고 있습니다.”
둘은 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손 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소리오닌 님, 드레스는 왜 흰색으로 고르셨습니까?”
“네? 아, 안 예쁜가요?”
“아뇨! 너무 아름다운데, 바론에서 결혼식에 흰색 의복을 입으신 분은 처음이라서요.”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 동안 화려한 색의 드레스만 보다가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정말 천사가 내려 온 것 같았다.
“음, 제가 어디서 들었는데…… 흰색은 신부의 순수한 사랑을 뜻한대요. 그리고 행복을 뜻하기도 하고요.”
“그렇습니까? 정말 멋진 선택입니다.”
에리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오닌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았다.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런 기분을 느껴볼 수 없었겠지. 한없이 솟아오르는 사랑스러운 마음을 숨길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두 사람은 햇살이 가득한 정원으로 들어섰다. 붉은 꽃잎이 바닥 가득 깔려 있었고, 분홍빛의 꽃송이들이 공중에서 휘날렸다.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은 하객 사이를 걸었다.
에리한의 주도로 딱딱한 격식을 생략한 결혼식은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서로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언약을 나누고, 반지를 나눠 끼웠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겠습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겠습니다.”
에리한과 소리오닌은 서로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리고 결혼식에 와 주신 분들을 향해 인사를 할 때였다.
“키스해, 키스해!”
어디선가 키스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구석에 있던 페릴이 범인이었다. 그러자 모두들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객들의 어이없는 요구에도 에리한은 기분 좋은 듯한 웃음을 지었다. 소리오닌은 얼굴이 빨개져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객들의 끊이지 않는 요구에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양 볼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입술이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지는 정원의 분위기에 더 창피해진 소리오닌이 눈을 꾹 감았다. 바르르 떨리는 소리오닌의 입술에 에리한의 입술이 닿고, 그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간단한 식이 끝나자 모두들 에리한과 소리오닌에게 들러 둘의 결혼을 축하해줬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끝없는 축하를 받던 두 사람의 앞에 왕이 다가왔다.
“축하한다, 아들.”
“아바마마.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뜻대로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너도 성인이지 않느냐. 이런 결혼식도 정말 좋군! 소리오닌 양. 앞으로 에리한을 잘 부탁하네.”
“가, 감사합니다! 저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소리오닌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전히 자신을 어려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껄껄, 웃어 버린 왕이 곧 에리한을 따로 불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에리한. 결혼하자마자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빠른 시일 내에 왕위를 계승해 줬으면 싶다.”
“……네?”
“물론 아직 이르다는 걸 알지만, 나도 이 이상은 도저히 못하겠거든. 왕위를 너에게 넘기고 여행이나 다니고 싶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에리한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아버지의 선언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대답도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 크게 웃음을 내뱉은 도이첸은 다시금 강조했다.
“너도 결혼을 했으니, 이제 책임감도 더 커졌을 거고. 전에 하는 걸 보니 내가 없어도 충분할 것 같더구나. 당장 내일부터 착실히 준비하도록 하자.”
“아, 아바마마. 말도 안 됩니다!”
“돼. 내가 하라면 하는 거지 말이 많구나. 우선 오늘은 즐겨라. 그렇다는 것만 알아두라고. 그럼 나는 술이나 더 마시러 가 봐야겠다.”
여전히 얼이 빠진 듯한 에리한을 두고 왕은 손을 휘휘 저으며 사라졌다. 곧 그의 곁에 온 소리오닌이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에리한은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저, 왕자님.”
이번에는 바임이 에리한을 불렀다. 순간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표정이 굳었을 뻔했다. 하지만, 애써 잘 갈무리한 에리한이 바임을 바라봤다.
“지금 성 앞 광장에 국민들이 모여 있습니다.”
“뭐? 왜?”
“에리한 님과 소리오닌 님의 결혼을 축하해 주러 왔다고 합니다. 광장에 나가시는 것까지는 무리지만, 본성 발코니에 한 번 가 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아, 그렇군. 그래, 알았어.”
소리오닌에게 바임의 말을 전한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손을 잡고 본성으로 향했다. 다시금 긴장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에리한은 작게 미소 지었다.
“소리오닌 님, 잘 봐두십시오. 앞으로 소리오닌 님이 돌봐야 할 국민들입니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소리오닌 님을 따르고, 소리오닌 님을 위할 것입니다.
“에, 에리한 님.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저분들이 정말 저를 다 축하해 주시는 건가요?”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광장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불편해 보이는 모습에도 모두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에리한과 소리오닌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마치 축제처럼 신나는 분위기였다.
에리한은 소리오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리오닌도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더 커진 함성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꽃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느껴지는 국민들의 에너지에 소리오닌은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상기되어가는 걸 본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의 입맞춤에 배시시, 웃음을 지은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에리한 님. 저 하나바톰에 맹세했던 거 이뤄졌어요.”
“네?”
“그때, 하나바톰에 빌었던 소원이 이뤄지면 서로 얘기해 주기로 했잖아요. 저 에리한 님과 평생 함께 하게 해달라고 빌었거든요. 정말 이뤄졌어요.”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웃은 소리오닌이 쑥스러운 듯 얘기했다. 에리한의 입꼬리가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에리한 님은 하나바톰에 빌었던 소원 아직인가요?”
“음, 네. 아직이긴 합니다만…… 곧 이뤄질 것 같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무슨 내용이었어요?”
속으로는 자신과 같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한 소리오닌이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에리한은 씨익, 웃었다. 그 역시 좀 전의 그녀처럼 소리오닌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 소원은 저와 소리오닌 님을 닮은 딸이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소원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곧 이뤄질 것 같지 않습니까?”
“네에?!”
그의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녀의 너무나 귀여운 반응에 크게 웃어 버린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 모습을 보는 국민들의 함성이 점점 커지고, 그들의 입맞춤의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