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소리오닌은 자꾸 말라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신이 보낸 증거로는 부족했나, 혹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미텐이 큰일을 당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하아…….”
역시 오늘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리로는 기다리지 말자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긴장감으로 차가워진 손을 꾹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곧바로 에리한의 모습이 보였다.
“소리오닌 님!”
에리한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와 소리오닌을 번쩍 안아 들었다. 소리오닌은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대답도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에리한은 그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뒤, 소리오닌을 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에, 에리한 님? 에리한 님, 어지러워요!”
한참 신나게 돌고 있던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비명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멈춰 섰다. 바닥에 내려와서도 빙글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소리오닌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괜찮으십니까? 너무 기뻐서 그만…….”
“아, 이제 좀 괜찮아요. 그런데 일이 잘 해결된 건가요?”
에리한이 소리오닌을 의자에 앉힌 뒤 그녀의 앞에서 손 부채질을 해주었다.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앞뒤 가리지 않았던 게 너무 미안했다.
“네, 잘 해결 되었습니다. 소리오닌 님이 주신 증거들이 정말 결정적이었습니다.”
“정말요? 다행이다! 사실 일이 잘못된 줄 알고 너무 걱정됐어요! 에리한 님이 내일 오셨다면 저 한숨도 못 잘 뻔했어요.”
“그럴 것 같아서 바로 달려왔습니다.”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오닌을 보며 에리한이 싱긋 웃었다. 에리한의 웃음에 소리오닌도 이제야 맘 편히 그와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럼, 소리오닌 님. 얼른 가시죠.”
“네? 어디를요?”
“어디긴요, 제 궁으로 가셔야죠.”
에리한은 소리오닌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소리오닌은 의아한 얼굴로 에리한에게 물었다.
“아니. 제가 왜…….”
“이제 제 부인이 되실 텐데, 언제까지 여기에 있으실 생각이셨습니까? 결혼하기 전까지?”
짓궂은 웃음을 달고 말하는 에리한 때문에 소리오닌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리 큰일이 해결됐다고 해도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었다.
소리오닌이 좀처럼 따라올 생각을 하지 않자, 에리한은 그녀를 번쩍 안아 데리고 나갔다. 결국 소리오닌은 성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품에 꼭 안겨 있게 되었다.
“어, 왔다!”
에리한의 궁에 도착하자 세리와 린셀, 바임이 그녀를 맞이했다. 서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기쁜 마음에 함박웃음이 퍼져나갔다.
“소리오닌 님!”
“세리, 린셀 공주님도! 어떻게…….”
“아까 있었던 일을 다 들었죠! 그리고 에리한 오라버니라면 무조건 소리오닌 님을 바로 데려올 줄 알았고요.”
팔꿈치로 에리한의 옆구리를 툭, 친 린셀이 말했다. 그녀의 발언에 주위에 있는 모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소리오닌이 키득거렸다.
“그나저나, 소리오닌 님. 그런 위험한 일 다시는 하지 마셔요!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아, 세리. 미안해. 하지만 나도 돕고 싶었는걸.”
“그래도요. 정말 무모하셨어요! 정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줄 알았어요.”
한참 이어지는 세리의 잔소리가 끝나고 나서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은 사람들은, 내일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에리한의 궁에 남은 소리오닌은 어색한 느낌에 그저 주위만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 궁에는 처음이시죠?”
“네. 처음이네요.”
“어떻습니까?”
“음, 딱 에리한 님 같아요. 멋있어요.”
소리오닌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귀여운 대답에 마주 웃어준 에리한이 그녀를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2층에 위치한 큰 방으로 안내한 에리한은 소리오닌을 꼬옥 안아주었다.
“같이 있고 싶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조금만 더 참겠습니다. 오늘 피곤하셨을 텐데 이만 쉬세요.”
그의 말에 또 얼굴이 빨개진 소리오닌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짧은 입맞춤을 한 에리한이 방을 나가고, 커다란 방에 소리오닌 혼자 남았다.
한쪽 벽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큰 창문을 통해 환한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예쁜 밤하늘을 올려다 본 소리오닌은 요 며칠 동안 피곤했던 마음이 이제야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푹 쉴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푹신한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
아침부터 소집된 회의에서 에리한은 대뜸 자신의 결혼 계획에 대해 말했다.
그의 독단적인 발언에도 대신들은 반대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에리한의 치밀함과 집요함을 원 없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대신들의 반 이상이 감옥에 갇혀 있는 이상, 자신들의 힘은 지푸라기처럼 하잘 것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는 대신들을 본 에리한은 기분 좋은 얼굴로 회의를 이어나갔다.
그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의를 마치고 바로 소리오닌에게 달려갔다. 소리오닌은 일찍부터 자신을 찾아온 린셀과 티타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어머, 오라버니. 일은 안 하시고!”
“걱정 마라. 일 다 끝내고 왔으니. 소리오닌 님,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불편한 것 하나도 없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소리오닌이 웃으며 답했다. 에리한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소리오닌을 찾아온 용건을 얘기했다.
“소리오닌 님, 노미텐 알몬느를 만나 보셔야지요.”
“아, 네!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그의 말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소리오닌이 물었다. 에리한은 소리오닌을 데리고 별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있던 노미텐은 살은 좀 빠졌지만, 특별히 건강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소리오닌!”
“오라버니! 괜찮으신 거예요? 저 때문에 죄송해요!”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너한테 폐만 끼쳤다. 이제 다 해결된 거지?”
노미텐의 물음에 에리한이 옆에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에 안심한 노미텐은 소리오닌의 손을 꼭 잡고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런 말 마세요.”
“아니야. 저, 왕자님.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노미텐은 둘을 바라보고 있던 에리한을 불렀다.
“음, 말씀해 보십시오.”
“저…… 몸을 추스르는 대로 바론을 떠나고 싶습니다. 저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있어봤자 이번 같은 일이 또 언제 벌어질지 모르고……. 소리오닌에게 폐만 될 거예요.”
“아, 그런 생각은…….”
“제발 부탁드립니다! 초크센에서 온 주제에 이런 말하기 너무 어려웠지만……. 제발.”
노미텐의 간곡한 부탁에 난감한 표정을 한 에리한이 소리오닌을 쳐다보았다. 소리오닌은 노미텐이 어떤 심정으로 이렇게 부탁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울컥하는 심정을 꾹, 눌러 참은 그녀는 자신 역시 에리한에게 부탁했다. 결국 두 남매의 간곡한 부탁에 에리한은 노미텐이 떠나게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다시 만나자마자 헤어지지만, 노미텐도 소리오닌도 이 편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노미텐은 가뿐한 마음으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서둘러 바론을 떠났다.
그리고 그 헤어짐에 아쉬워할 새도 없이, 소리오닌은 코앞에 닥친 결혼 준비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
“소리오닌 님, 정말 이걸로 괜찮으시겠어요?”
드레스를 함께 고르던 린셀이 말했다. 린셀은 고맙게도 자신의 결혼을 미루고 에리한과 소리오닌의 결혼 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네. 저는 이게 제일 예쁜데…….”
“왜 이렇게 소박하실까? 여기 붉은색 원단도 예쁘고, 저기 금색 원단은 몇 달이나 기다려서 받은 거라고요!”
“물론 저것들도 예쁘지만 너무 부담스러워요. 저는 이걸로 할래요.”
린셀의 계속되는 설득에도 소리오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린셀이었다.
“그럼, 드레스는 제가 양보했으니 장식은 제가 원하는 걸로 해야 해요! 알았죠?”
“네에…….”
소리오닌의 대답에 신나서 그녀를 여기저기 끌고 다닌 린셀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장신구들을 사들인 후에야 만족한 듯 성으로 향했다.
하루 만에 온갖 빛나는 것들을 보고 돌아온 덕분에 소리오닌은 침대에 누워서도 눈앞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때 똑똑,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열리며 에리한이 들어왔다. 에리한도 요즘 꽤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둘은 아침 일찍 얼굴을 보고 한밤중에야 서로 마주하게 되었다.
“소리오닌 님. 오늘 린셀에게 끌려 다녔다면서요?”
“네, 말도 마세요. 혹시 애기가 잘못될까 봐 걱정될 정도였어요. 린셀 님 체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하하, 이럴 때의 린셀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에리한이 웃으며 소리오닌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움츠린 소리오닌이 소리내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실 요즘은 하루하루가 꿈같아요.”
“저도요. 아, 그런데 역시 왕비님은…….”
소리오닌이 걱정스런 얼굴로 에리한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권력을 지탱해 주었던 자하만 백작 외 다른 측근들이 떨어져 나가자, 왕비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며칠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아마 어마마마의 자존심이 버티질 못하시는 거겠죠. 몇 십 년 동안 최고의 자리에만 있으시던 분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받으면서 살 수 없다 느끼셨을 겁니다.”
“그래도 에리한 님이나 린셀 공주님도 여기에 다 있는데…….”
“어마마마에게 저희는 그 정도로 큰 영향력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최선일지도 몰라요.”
에리한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보다 더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소리오닌의 머리를 쓰다듬은 에리한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시간이 지나면 좀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때가 빨리 오기만을 바라는 수밖에요.”
“네, 그렇겠죠?”
“그렇죠. 걱정 마세요. 강한 분이니.”
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소리오닌이 뭔가가 생각난 듯 에리한에게 물었다.
“맞다, 에리한 님. 낮에 드레스를 보러 갔는데, 린셀 공주님이 제가 고른 드레스가 너무 밋밋하다면서 화려한 걸 고르라고 했는데…… 역시 다시 골라야 할까요? 에리한 님은 왕자님이니까, 거기에 맞는 복식이 따로 있나요?”
“네? 아, 아닙니다. 소리오닌 님의 맘에 드는 걸로 고르시면 됩니다. 린셀이 한 말은 신경쓰지 마세요. 그 녀석은 원래 최고로 화려하고 비싼 것만 찾으니까요.”
“그런가요? 근데 사람들이 뭐라 할까 봐…….”
처음보다 더 조심성이 많아진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은 심각한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에리한을 보고 어이가 없어진 소리오닌이 볼을 부풀렸다.
“에리한 님, 저는 지금 심각하단 말이에요!”
“심각해 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소리오닌 님은 소리오닌 님이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뒷말 같은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점점 소심해 지시는 것 같습니다?”
놀리는 게 분명한 에리한의 말에 소리오닌은 그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그것도 좋다고 크게 웃은 에리한은 그녀를 꼭 안아준 다음 말했다.
“소리오닌 님은 바론의 왕자의 사람이 아니라, 에리한이라는 한 남자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요. 그저 저한테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그의 간지러운 말에 소리오닌은 슬며시 에리한의 어깨에 기댔다. 사랑스러운 연인의 시간이 점점 깊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