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우르르 에리한의 주위에 몰려든 대신들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그들의 행동에 진심으로 웃음이 터져 버린 에리한이 하나하나 힘을 쥐어 자신을 잡은 손들을 떨어트렸다.
“이렇게 바론을 사랑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바, 바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왕자님,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입에 발린 말을 듣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에리한은 봉투에서 마지막으로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사람들이 봉투에서 또 다른 서류가 나오자 반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반은 경악에 찬 얼굴을 한 채 서류로 시선을 집중했다.
“대신들의 충성심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 이렇게 진범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으니까요.”
에리한이 들고 있는 서류는 거래서의 또 다른 원본이었다.
“저, 저건!”
자하만 백작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은 백작을 보고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에리한은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짓고 설명을 마무리했다.
“이 원본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많은 분들 중에 딱 한 분만이 정확히 알고 계시나 봅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하만 백작?”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커져서 경악에 찬 비명으로 바뀌었다.
“서, 설마!”
“자하만 백작이?”
“말도 안 돼!”
아까까지는 여유로웠던 왕도 에리한이 내민 결정적인 증거에는 동요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작은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던 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다들 백작의 주위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하만 백작. 당신이 가지고 있던 원본과 제가 가지고 있는 원본의 서명, 날짜, 금액, 그리고 햇빛에 비추면 나타나는 그림까지 모두 똑같습니다. 어디 왜 그런지 설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에리한이 천천히 걸어가서 백작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류들을 내 보이며 다시 한번 그를 압박했다. 하지만 에리한의 앞에서 어깨만 움찔할 뿐, 자하만 백작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어떻게 찾았을까, 서재와 서랍 두 군데나 잠겨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저, 저는 아닙니다. 모함입니다!”
자라만 백작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 이제 와서 아무도 그의 말을 믿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필사적으로 외쳤다.
“저놈입니다! 저 노미텐 알몬느가 저에게 누명을 씌운 겁니다. 저놈을 죽여야 한다고요!”
백작의 악에 바친 외침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다 싶은 반대파 대신들은 대놓고 자하만 백작을 욕했다.
“저, 저! 왕비님을 등에 업고 거들먹거릴 때부터 알아봤지.”
“맞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나라를 다 차지할 작정이었나 봅니다!”
“어찌 사람 욕심이 저렇게 끝이 없습니까?”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본 백작은 눈을 희번뜩 떴다. 더 이상 그는 잃을 게 없었다.
“내가 뭐가 나빠, 뭐가! 저런 종이 쪼가리 따위!”
어린 아이가 떼쓰듯 소리를 지르던 백작이 갑자기 일어나 에리한의 멱살을 잡으려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달려 온 경비대에게 양쪽 팔을 붙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백작이 달려드는 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에리한이 경비병에게 붙잡힌 백작의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백작. 이런 종이 쪼가리로 사람을 죽이려 했던 게 당신입니다. 잊지는 않으셨겠죠? 그리고 저도 이정도로 백작이 순순히 인정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친절한 제가 다른 것도 준비해 뒀습니다.”
“무, 뭐?”
“보면 아실 겁니다.”
에리한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곧 문에 도착한 그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천진한 웃음을 짓고 있는 페릴과,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바임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래. 다 잡아왔나?”
“넵,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다 잡았습니다!”
“명단도 확인했고?”
“물론이지요!”
“그래, 수고했다. 힘들진 않았나?”
둘의 뒤로 꽤 많은 인원이 줄줄이 묶여 있는 것을 본 에리한이 슬쩍 물었다. 그의 물음에 페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오랜만에 실전 감각 좀 끌어올리고 좋았습니다. 제가 또 일당백 아닙니까?”
페릴이 신나서 얘기를 시작하려 하자, 그 옆에 있던 바임이 페릴을 밀치고 앞으로 나왔다.
“왕자님.”
“음?”
“그리고 이것도 찾았습니다. 이들이 있던 숲속 별채 안쪽에 숨겨놨더군요.”
바임이 품에서 까맣게 빛나는 물건 몇 개를 꺼내 놓았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하콧의 비늘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은 에리한이 뒤 돌아 다시 백작에게 돌아갔다.
“이거. 뭔지 아시겠지요?”
하콧의 비늘을 들이밀며 에리한이 물었다. 백작은 기어코 찾아낸 에리한의 집요함에 할 말을 잃었다.
“잘 모르시겠다면, 저 사람들을 보면 기억이 날까요? 페릴. 데리고 들어 와.”
“네!”
커다란 대답과 함께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줄줄이 엮여서 들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홀을 가득 채우는 남자들의 등장에 놀란 사람들이 한쪽 구석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에리한이 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바마마. 요즘 성의 병사들이 줄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음? 내게 올라오는 보고에는 그런 말은 없었다만.”
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에리한은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남자들은 용병으로 고용된 자들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바론의 병사들이 됐을지도 모르는 자들이죠. 자하만 백작과 그 측근들이 서류를 조작해 바론의 병사 수를 줄이고 자신들의 용병 숫자를 늘렸습니다.”
“그, 그런!”
너무 급변하는 상황에 놀랐던 사람들이 하나, 둘 언성을 높였다.
“저 자식들을 당장 처형해야 합니다!”
“은혜도 모르는 것들입니다!”
크게 소리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하만 백작의 측근들은 병사들에게 붙잡힌 상태에서 변명하기 급급했다.
“저, 저희는 자하만 백작이 하란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저는 절대로 전하를 배신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전하, 왕자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자하만 백작 때문입니다!”
늙은 대신들의 통곡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 역시 단상 위에서 그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명령했다.
“왕자가 제시한 증거에 거론 된 사람들 모두 잡아들여라.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두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잡혀가지 않으려는 대신들과 그들을 잡으려는 병사들의 추격전과, 사람들의 욕설이 섞이면서 혼란스러웠다.
“아바마마. 노미텐 알몬느는 어떻게 할까요?”
“음……. 우선 별궁에 두도록 하자꾸나. 기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으니 몸부터 회복하게 도와주거라.”
“네. 알겠습니다.”
에리한은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노미텐에게 다가갔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 혼자 멍한 표정으로 에리한을 바라볼 뿐이었다.
“고생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좀 더 빨리 밝힐까 싶었지만 혹여나 백작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둘까 싶어 마지막까지 숨겼어야 했습니다.”
“그, 그럼 저는 풀려나는 겁니까?”
“우선은 몸부터 추스르시고 결정하도록 하죠.”
노미텐을 포박하고 있던 밧줄을 풀어 준 에리한이 그를 별궁으로 모셔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에 옆에 있던 시종들이 신속하게 노미텐을 데리고 사라졌다.
“에리한.”
“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차나 한 잔 하자꾸나.”
“곧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바마마.”
왕은 피곤한 듯 머리를 감싸 쥐고 자신의 본성으로 향했다. 왕이 사라진 자리에서 에리한의 주도로 엉망이었던 자리가 점점 정리되기 시작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성에 자하만 백작이 반역을 저지르려 했다는 사실이 퍼져나갔다. 그 말은 왕비에게도 곧장 날아들었다.
“뭐?”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 왕비가 갑자기 밀려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왕비님!”
그녀를 부축하려는 시녀들의 손을 쳐 낸 왕비는 스스로 간신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왜 노미텐 알몬느가 아니라 자하만 백작이 반역죄를 뒤집어 써?”
“저, 저기 그게…….”
“어서 빨리 말하지 못할까!”
왕비가 날카롭게 소리를 높였다.
“그건 내가 말해주겠소.”
어느새 왕비의 곁으로 다가 온 왕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다들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전하……. 저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자하만 백작이 반역을 저질렀다 하시는 겁니까? 그의 충성심은 전하가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도 그렇게 믿었었지. 하지만 아니었소.”
왕비를 위해 차 한 잔을 부탁한 도이첸은 그녀에게 모든 일을 빠짐없이 얘기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왕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습니다!”
“당신의 아들인 에리한이 직접 증거를 찾았단 말이오! 거기에 있던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 완벽한 증거였지.”
“그,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왕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이 받게 될 처벌에 대해 물었다. 왕은 단호한 태도로 왕비에게 답해주었다.
“노미텐 알몬느에게 했던 그대로 받게 되겠지.”
구체적으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왕비는 눈앞이 아찔한 느낌에 눈을 꾹 감았다.
“우선 그렇게 알고 있으시오.”
도이첸은 끝내 대답하지 않는 왕비를 한 번 쳐다본 뒤 방을 나섰다. 자신의 응접실로 돌아가자, 에리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바마마.”
“그래. 수고했다. 생각보다 꽤 많이 알아냈더구나.”
“사실 저는 조금만 조사해보면 나오는 내용들만 알아냈을 뿐입니다.”
“음? 그럼 또 누군가가 도와줬다는 얘기인가?”
왕의 물음에 에리한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소리오닌 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소리오닌? 그 아이가 어떻게?”
“직접 자하만 백작이 숨겨 놓은 서류들을 찾아오고, 용병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 두셨더군요.”
“하하하! 아니, 대체 무슨 재주로! 대단하구만!”
유쾌한 웃음을 흘리던 왕은 조심스럽게 에리한에게 말했다.
“근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왕비와 관련은 없을 것 같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너도? 흐음, 너는 어째서?”
왕이 의아한 표정으로 에리한을 바라봤다. 에리한이라면 아무리 자신의 어머니라도 죄를 감춰주는 일은 하지 않을 텐데…….
“너무 허술했습니다. 물론 저도 결정적인 증거를 잡느라 힘들긴 했지만, 자하만 백작이 진범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어마마마께서 개입하셨다면 더 치밀하게 계획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에리한의 군더더기 없는 대답에 도이첸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똑같은 이유를 대며 말하는 아들을 보자 든든함이 느껴졌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왕비는 이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지.”
“그렇죠. 아마 어마마마도 모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하만 백작이 어떻게든 숨겼겠죠.”
“으음, 맞아. 그의 욕심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하만 백작이라는 큰 고비도 넘겼으니, 이제는 좋은 일이 돌아올 차례였다. 에리한은 도이첸에게 인사를 올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이첸은 흐뭇한 얼굴로 에리한을 보았다.
“바로 달려가는 거냐?”
“당연하지요. 제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하하, 그래. 어서 가 보거라.”
빨리 일어나고 싶어 몸을 들썩거리는 에리한을 보고 크게 웃은 왕은 어서 가 보라며 손짓했다. 그에 별다른 인사도 없이 에리한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이 또 재미있어서 도이첸은 다시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