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00)

093.

웅성웅성, 에리한의 충격적인 발언에 저마다 의견을 내뱉느라 조용했던 처형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용!”

흥분한 사람들을 가라앉힌 왕이 에리한을 보고 물었다.

“지금 노미텐 알몬느가 무죄라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거기에 반역을 주도한 진범까지 알고 있다고?”

“물론입니다.”

당당한 에리한의 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반신반의한 얼굴로 그를 주목했다. 자하만 백작 역시 에리한을 보고 있었다. 

“백작, 지금 왕자님이 하는 말이 무엇이오? 혹시 들킨 게 아니오?”

“무, 무슨 소리! 그럴 리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려는 개수작입니다.”

“정말이오? 이것 참 괜히 불안해지네.”

“불안하기는. 걱정 마십시오!”

하나 둘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측근들이 걱정이 깃든 말들을 내뱉었다. 그들을 보고 큰소리친 백작이 불안하게 뛰어오는 심장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무슨 소리이십니까, 왕자님?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으시다가 이제 와서 증거를 찾으셨다니요. 그 증거라는 게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까?”

결국 측근들의 성화에 자하만 백작이 에리한을 도발했다. 백작의 말에 잠신 침묵했던 에리한이 곧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자하만 백작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반박할 증거를 가져오라고. 그래서 가져왔습니다. 증거를 모으느라 꽤 힘들었죠.”

“하, 그렇습니까? 그럼 어디 보여주십시오.”

자하만 백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에리한도 단상에서 내려와 백작을 마주 보고 섰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바마마, 그러면 제가 가져 온 증거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좋다. 우선 왕자의 반론을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왕은 다시 자리에 앉아 에리한의 손에 들려있는 봉투를 주시했다. 에리한은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둘러보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니, 흥분으로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짧게 눈을 깜빡인 후 봉투 안에 있는 서류 중 몇 장을 꺼냈다.

“이건, 여기에 있는 대신들의 재산 현황입니다.”

에리한의 말에 모두들 아까보다 더 눈이 커졌다. 노미텐 알몬느의 무죄를 밝힌다고 하더니……. 어째서 대신들의 재산을 가지고 온 건가? 그의 어이없는 행동에 다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니. 왕자님. 지금 여기서 저희들의 재산이 왜 나옵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몇 달 후에 있을 감사 기간에 밝혀도 충분한 내용 아닙니까?”

여기저기에서 불만 섞인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말을 듣고 피식, 하는 웃음을 지은 에리한이 설명을 이어갔다. 

“물론 대신들의 재산은 몇 달 후에 다시 한번 제대로 조사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지금 대강 보기에도 수상한 점이 몇 개 있어서.”

에리한의 시선이 자하만 백작의 측근들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측근들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급하게 에리한에게 뭔가를 말하려던 측근들의 행동보다 에리한이 한발 빨리 말을 이어갔다.

“여기 몇몇 대신들의 재산이 일정하게 빠져 나가더군요. 그리고 그 금액들은 저기 자하만 백작에게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

그 많은 대신들의 재산을 일일이 다 조사했다는 말인가! 그것도 모자라 변동 사항까지?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한 대신들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재빨리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측근들을 보고 혀를 찬 자하만 백작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에리한을 노려봤다.

“왕자님. 지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저들이 저에게 재산을 보낸 것은 저희들끼리의 약속이 있어서 입니다. 노미텐 알몬느의 일과는 무관합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정말로 하늘에 맹세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으십니까?”

“무슨 뜻이십니까?”

뭔가를 더 알고 있다는 건가? 점점 더 당당해지는 에리한의 표정에 자하만 백작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본 에리한이 다음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건 자하만 백작이 내민 증거입니다. 하콧의 비늘. 그 위험한 무기를 거래한 거래서지요.”

“흐음, 그래서?”

왕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에리한의 설명을 들으며 물었다. 그래도 몇 주 동안 꽤 많이 알아낸 것 같았다.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마음을 눌러 담은 도이첸이 자신의 아들을 계속해 주시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 비늘을 거래한 가격과 대신들이 자하만 백작에게 보낸 재산의 금액이 일치하더군요. 한두 명이 아니라 14명 모두 말입니다.”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미 몇몇 대신들은 얼굴이 하얘져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눈이 띄게 흔들리는 그들을 보던 에리한은 그 기세를 몰아 더욱 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이 정도면 합리적 의심이 아니겠습니까?”

“합리적 의심은 무슨, 그건 왕자님의 머릿속에서 나온 소설이 아닙니까? 어째서 저희들이 의심을 받아야 합니까!”

자하만 백작이 잔뜩 약이 올라서 발끈했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이미 땀이 송글송글 맺혀가고 있었다.

“뭐, 이 정도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시겠죠. 그래서 더 준비해 놓은 게 많습니다. 걱정 마시죠.”

“윽…….”

여유로운 표정의 에리한은 이번에도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이건, 특정 집단이 사용하는 거래서입니다. 하콧의 비늘 역시 이 집단에서 거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 보시면, 같은 표시가 보이십니까?”

에리한의 물음에 좌중들은 입만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착한 아이들 같은 모습에 잠시 웃음이 터진 에리한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이것은 자하만 백작이 내놓은 증거인 거래서. 이건 제가 직접 거래소에서 구해 온 거래서의 원본입니다.”

“뭐, 뭐라고?”

자하만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거래서의 원본이라니! 그걸 어떻게 구했지? 일반인들은 알지도 못하는 거래소들이었다!

자신 역시 그 정보를 얻기 위해 몇 달을 고생했는데, 겨우 몇 주 만에 그 거래소를 찾고 거기에 거래서의 원본까지 구해 왔을 리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한 자하만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농이 지나치십니다. 아무리 왕자님이라지만, 어디서 갑자기 원본이 나타났을 리도 없고. 무슨 수로 거래서를 구하셨습니까?”

“흐음, 이래봬도 한 나라의 왕자인데. 이 정도야 쉽지요.”

“하, 자신감이 대단하십니다. 근데 왕자님이 구하신 원본이야말로 진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하만 백작의 물음에 에리한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저 말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떠본 건데. 아주 착실하게 걸려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 보면 서로의 서명이 다른 것도 보이는데……. 과연 어떤 서명이 진짜일까요? 자하만 백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제가 내 놓은 서류가 진짜이지요! 왕자님이 가져온 증거는 믿을 수 없습니다.”

“흠, 그럴 줄 알고 제가 진짜 원본을 가리는 법을 알아왔습니다.”

에리한은 다시 한번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어느새 자하만 백작의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둘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거래서를 향했다. 모든 것이 다 똑같았다. 마지막에 적힌 서명만이 다를 뿐. 과연 어떤 것이 원본일까?

저마다 의견을 내느라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러분. 여기 서명이 있는 부분을 잘 보십시오.”

에리한이 짧게 말을 마치고 두 장을 빛이 들어오는 창 쪽으로 들어올렸다.

모두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에리한이 들고 있는 한 쪽의 서류에 빛이 비추자 서명란에 선명한 그림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자하만 백작이 내놓은 증거라는 서류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보이십니까? 서명란의 그림이. 그 그림은 각 거래소의 특징이 나타난 그림입니다. 서류 위쪽에 보이는 그림과 같습니다. 이 표식은 거래소에서 마법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그려 넣은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조작할 수 없습니다.”

“마, 말도 안 돼!”

“정 의심이 가신다면, 내일이라도 거래소에 알아봐도 좋습니다. 이제 자하만 백작이 내놓은 증거가 조작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미 백작의 측근들은 달아나려는 자세를 잡고 있었다. 에리한은 병사들에게 문을 지키라고 명령했다.

“아, 아니, 그게!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분명히 저놈이 서류를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자하만 백작이 노미텐 알몬느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미 에리한의 말을 듣느라 정신이 없던 노미텐은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아닙니다! 저에게는 그런 서류 같은 거 없었습니다!”

아까보다 당당한 소리를 내는 노미텐의 모습에 만족한 웃음을 지은 에리한이 백작의 눈을 쳐다봤다. 

“흐음. 그렇다면 과연 진범이 누구일까요? 저 노미텐 알몬느가 아니라면 누가 그 비싼 하콧의 비늘을 사 모으고, 용병을 모집해서 바론의 전하에게 반역을 저지를 생각을 했을까요?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자하만 백작?”

에리한의 물음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백작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 글쎄요. 대체 누가 그런 무엄한 짓을 했단 말입니까? 하, 어…… 어쨌든 제가 노미텐 알몬느를 오해하고 있었나봅니다.”

순식간에 저자세로 나오는 백작을 보고 코웃음을 친 에리한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금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의견을 내시던 분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십니까?”

“그, 그렇지 않습니다!”

백작의 얼굴에서 기어이 땀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백작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그래도 자신이 가진 원본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여기서 멈춰야했다. 

“그럼 오늘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은 없던 일로 하시지요. 진범을 잡을 때까지 저도 성심성의껏 왕자님을 돕겠습니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왕자님!”

“저도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재산은 오해이십니다! 정말 우연히 겹친 것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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