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00)

092.

“호오, 이런 고급 정보까지. 이것도 소리오닌 님이 알려주신 겁니까?”

“응.”

“소리오닌 님 능력이 대단하시네요. 이런 결정적인 증거를…….”

신나서 수다 떨 준비를 하는 듯한 페릴의 모습에 에리한은 얼른 그를 내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바임이 들어왔다.

“아직까지 자하만 백작 쪽에서 큰 움직임은 없습니다. 서류가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는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날도 늦었으니 내일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그래. 잘 됐군. 가장 행복할 때 밑바닥으로 떨어져 봐야지.”

상큼하게 웃은 에리한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결재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 모습을 본 바임 역시 슬며시 미소를 띠고 에리한을 도와 업무를 마쳤다.

***

노미텐 알몬느는 갑자기 열린 문에 화들짝 놀랐다. 여기에 갇힌 후부터 한 번도 열렸던 적이 없었던 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이 잘 풀린 건가?

“노미텐 알몬느!”

온몸을 갑옷으로 감싼 병사가 이름을 불렀다. 병사의 옆에는 여러 명의 다른 병사들도 함께 있었다.

“네, 네!”

노미텐은 힘이 없는 다리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요즘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어서 몸은 한계에 다다랐다. 휘청거리며 나오는 노미텐의 어깨를 꽉 잡은 병사가 그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저,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지금 풀려나고 있는 건가요?”

노미텐이 병사에게 끌려가면서 소리쳤다. 그의 절박한 물음에도 병사들은 별 말이 없었다. 노미텐은 자신을 무시하는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제발!”

그의 끈질김에 욕을 한 번 내뱉은 병사 중 한 명이 결국 답을 해줬다.

“풀려나기는 개뿔! 너는 지금 처형당하러 가는 거다.”

“이봐, 아무 말도 하지 말랬잖아.”

“아, 그치만 너무 시끄럽잖아. 그리고 알면 뭐할 건데? 지가 여기서 우릴 따돌릴 수나 있겠어?”

병사들은 저들끼리 목청을 높여 대화하고 있었지만, 노미텐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귓가에는 그저 좀 전에 들었던 ‘처형’ 이라는 말만 맴돌 뿐이었다.

“내, 내가 죽는다고? 이렇게? 하…… 말도 안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노미텐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에도 별 관심이 없는 병사들은 오히려 그를 윽박질렀다.

“빨리 빨리 걸어! 네가 뭘 잘했다고 울어? 감히 바론을 없앨 생각을 하다니.”

“아, 아닙니다. 저는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됐고, 이젠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병사들은 가지 않으려고 힘을 주는 노미텐을 강제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걸까. 분명히 갇히는 날에 그 왕자가 찾아와서 구해 준다고 했는데.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문득 소리오닌이 떠올랐다.

“저, 저기!”

“아, 또 왜.”

병사가 잔뜩 짜증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제 동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뭐?”

“제 동생이요! 지금 볼모로 잡혀 있습니다.”

노미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병사 중 한 명이 답했다.

“볼모로 잡혀 있으면…… 같이 처형당하려나? 아니면 뭐 조만간 결정되겠지.”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자신 때문에 소리오닌까지! 지금까지 충분히 민폐였지만, 마지막까지 이런 꼴이라니……. 노미텐은 이 상황에서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병사들은 노미텐의 팔을 꺾어 뒤에서 밧줄로 손을 묶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 같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자신의 모습이 나타나자 술렁이는 사람들을 본 노미텐은 어깨가 잔뜩 굳어졌다. 그 중에서도 자신을 모함해 가둬 놓은 빨간 머리의 백작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그를 노려보고 있었을까. 한참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던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보고도 일말의 죄책감 따위는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를 가리키며 더 신나게 얘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이었다.

빠득,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노미텐이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현실이고 자신은 얼마 뒤에 죽게 된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소리오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같이 오늘 처형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동생도 잘못될 것이 분명한데 이게 과연 좋은 건가 싶어서 쓴 웃음이 나왔다.

“노미텐 알몬느?”

백작의 목소리였다. 잠이 들 때마다 그가 자신을 속이던 장면이 떠올라 몇 번이고 깨어나게 만들었던……. 갑자기 울컥한 노미텐이 백작은 노려보았다.

“아이고, 눈빛이 아주 무섭구만. 그래, 억울한가?”

“이 자식…….”

“어허, 곧 죽을 거라고 막말하는군!”

백작은 한쪽 입꼬리만 올려 노미텐을 비웃었다. 그 여동생은 잔머리라도 있어 보이더니, 오라비라는 놈은 완전 멍청하기만 해서…… 하긴 그러니까 이렇게 잡혀왔지. 나에겐 다행인 거야.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내가 왜 버러지보다 못한 너의 용서를 바라야하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군.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나 좀 해 주려 했더니…… 쯧!”

“인사? 하…… 그래. 그럼 내 인사도 받아라!”

퉤, 하는 소리와 함께 노미텐이 백작을 향해 침을 뱉었다. 옷을 흐르는 끈적끈적한 물질을 본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검붉어졌다.

짜악!

순간 술렁이던 사람들의 고막을 가르는 마찰음이 들렸다. 백작이 노미텐의 뺨을 쳐 버린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다들 눈이 동그래져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도이첸 왕과 에리한도 섞여 있었다. 왕은 소란이 맘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백작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

왕의 날카로운 시선에 백작은 순간 이성을 잃은 자신의 행동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듯 답을 늘어놓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자식이 바론을 욕 보이기에 그만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백작은 깍듯하게 상체를 숙였다. 그 모습에 잠시 생각을 하던 왕이 에리한을 불렀다.

“에리한.”

“네.”

“한 번 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에리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걸었다. 그의 움직임에 백작의 어깨가 바짝 긴장 되었다. 에리한이 그들에게 다다르자 백작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별 일 아닌데 여기까지 오시고 그러십니까?”

“그건 이 사람 얘기도 들어봐야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백작의 말을 자른 에리한이 무릎을 꿇고 있는 노미텐에게 다가갔다. 노미텐은 한쪽 볼이 새빨개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노미텐 알몬느.”

에리한의 부름에 노미텐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노미텐의 눈빛에는 에리한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다.

“이제 됐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

“구해 준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이러다 제 동생까지 잘못 되면 어떻게 합니까? 으윽, 흑!”

마지막으로 절규한 노미텐이 크게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에리한이 안타까운 얼굴을 했지만, 지금 당장 증거를 말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짧게 한마디를 마친 에리한이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작이 다시 노미텐에게 다가갔다.

“너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구나. 그래도 외롭지는 않을게다. 곧 네가 죽고 못 사는 동생이 따라갈 테니.”

노미텐을 보고 크게 웃은 백작이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가벼운 소란이 지나가자 사람들의 눈은 커다란 시계로 향했다. 노미텐의 처형 시간인 세 시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하만과 측근들은 축배를 들이킬 생각에, 그들의 반대파는 이대로 끝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모두 시계바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댕, 댕, 댕.

세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움찔한 사람들이 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한 사람뿐만 아니라 바론의 미래가 바뀌게 되는 것이었다.

“흠, 시간이 됐군.”

자리에서 일어난 왕이 무릎을 꿇고 있는 노미텐과 자신의 옆에 있는 에리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미텐은 이미 모두 다 포기한 듯 아무 미동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에리한과 눈을 마주쳤다. 에리한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모두들 알다시피, 지금 바론을 해치려는 반역자가 있는 게 사실이네. 그리고 증거는 저기 있는 노미텐 알몬느를 가리키고 있지. 그래서 지금부터 그의 죄를 묻고 그에 합당한 결론을 내리려고 하네.”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을 울리는 왕의 목소리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허나. 그 전에.”

왕이 한 번 좌중을 훑어본 후 말했다.

“혹시 노미텐 알몬느의 죄에 대해 반론을 할 사람이 있는가?”

모두들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 반론을 할 사람이었으면 이때까지 조용히 있을 리 없었다. 자하만 백작의 반대파들 역시 아주 작은 증거라도 찾았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분위기에 만족한 자하만 백작이 앞으로 나왔다.

“전하. 아무래도 더 이상의 의견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꽤 많은 시간을 유예시켜 주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집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화려한 언변을 뽐내며 고개를 숙인 자하만 백작이 뒤돌아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모두들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저에게 노미텐 알몬느는 죄가 없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에리한이 일어나서 종이봉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흐트러졌다. 모두들 휘둥그레 뜬 눈으로 에리한을 주목했다. 자하만 백작도 갑작스런 에리한의 선언에 깜짝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상 위로 올라간 에리한이 아래에 있는 자하만 백작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정말 반역을 저지르려고 했던 진범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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