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00)

091.

소리오닌은 식탁에 서류봉투를 올려놓고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음…….”

부끄럽지만 아직 바론의 글자를 다 외우지 못했다. 말하는 건 바로 나오는데, 어째 글자는 모르겠는지.

아까도 여자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다른 서류를 챙겨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띄엄띄엄 아는 글자를 짚어가며 보던 소리오닌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모르겠네!”

거래서라고 했으니까 제대로 된 거 가져온 게 맞겠지?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면 울어 버릴 거야. 도움도 안 되는 생각들이 이리 저리 튀었다. 

오늘이라도 에리한이 와 주면 좋겠는데, 딱히 언제 오겠다는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예전에는 매일 오는 게 당연했지만 요즘은 그도 바빠서 며칠에 한 번씩 오는 날이 많아졌다.

손에 쥔 서류들을 성의 없이 넘기고 있을 때였다.

똑똑.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리오닌이 얼른 서류를 침대에 감추고 일어났다. 

“누구세요?”

“접니다.”

“에리한 님?”

평소라면 이 시간에 올 리가 없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인데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방문에 소리오닌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오늘은 회의 끝나고 바로 왔습니다. 그래서 일찍 들어가 봐야 하지만요.”

“그랬구나. 낮에 보니까 더 좋아요!”

소리오닌이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에리한을 쳐다봤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에리한이 그녀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근데 머리 스타일이……?”

“어? 티 나요? 앞머리만 살짝 잘랐는데.”

“네, 귀여워요.”

에리한의 칭찬에 볼이 빨개진 소리오닌이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에리한 님은 오늘 무슨 회의했어요? 매일 주제가 바뀌나요?”

“아, 그게.”

소리오닌을 만나자 마자 이 말을 꺼내야하는 게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얘기해야 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오늘 회의는…….”

“네, 무슨 회의였는데 그러세요?”

에리한답지 않게 망설이는 듯한 표정에 소리오닌의 궁금증이 커져갔다.

“어, 혹시 제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에요? 그러면 굳이 설명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그건 아닙니다!”

에리한은 손사래를 치고 어렵게 말을 시작했다.

“방금 끝난 회의에서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이 결정되었습니다.”

“……뭐라고요?”

소리오닌의 눈동자가 잠시 초점을 잃었다. 순간 하얘지는 그녀의 얼굴을 본 에리한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소리오닌 님!”

“아, 안 죽는다면서요! 처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잠시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울먹이기 시작하는 소리오닌을 꼭 껴안은 에리한이 필사적으로 얘기했다. 

“제가 소리오닌 님께 했던 말들은 다 사실입니다. 물론 그의 처형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오늘 회의에서 제가 발언하지 않았던 건…… 백작에게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제가 맹세하겠습니다.”

“……정말이죠?”

“정말입니다. 내일 꼭 구하겠습니다.”

그의 다짐에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기억조차 하나도 없는 오빠라지만 자신 때문에 누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너무 괴로웠다.

이제 좀 진정한 듯한 소리오닌의 모습에 에리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먼저 잘 설명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다짜고짜 결론부터 얘기해 버려서……. 다시 한번 미안한 눈빛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네. 이제 괜찮아요. 아까는 너무 놀라서. 저 때문에 오라버니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요. 제가 그렇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에리한의 말에 소리오닌 역시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소리오닌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저 에리한 님한테 드릴 게 있어요!”

“저한테요?”

격했던 감정이 가라앉자 그제야 백작의 저택에서 가져 온 서류가 생각났다. 소리오닌은 침대 구석에 숨겨 놓은 서류를 가지고 식탁에 앉았다.

“여기요.”

“이게 뭡니까?”

그녀가 내민 서류 봉투를 본 에리한이 물었다. 소리오닌에게 부탁한 것도, 그녀가 자신에게 줄만한 것도 없었는데……. 뜬금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서류에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음, 제 선물이라고나 할까요?”

“선물……?”

더욱 더 의문이 드는 대답에 에리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나쁜 거 아니니까 얼른 열어 봐요.”

“아, 네. 그러면.”

천천히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서류를 꺼내보았다. 처음에는 별 변화 없던 그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바뀌어갔다.

시시각각 변하는 에리한의 얼굴을 보는 소리오닌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자신이 제대로 가져 온 게 분명해 보였다. 식탁 아래에서 주먹을 꾹 쥔 소리오닌은 속으로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잠깐, 잠깐만요. 소리오닌 님! 이거 어디서 나셨습니까?”

“네?”

“이 서류요! 누가 준 겁니까?”

에리한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음, 제가 가져왔어요.”

“무슨……?”

“제가 아까 아침에 자하만 백작 저택에 가서 가져왔어요.”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에 에리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리고 퍼뜩 페릴이 알려준 게 생각난 에리한은 서류를 불빛에 비춰보았다. 그러자 서명란에 희미한 그림이 떠올랐다. 

“이거, 진짜 원본입니다.”

“자하만 백작이 범인인 게 확실한 거죠?”

“네.”

“역시!”

소리오닌이 신나는 얼굴로 어깨를 들썩였다. 자신도 에리한을 도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걸로 오라버니의 누명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소리오닌 님. 대체 자하만 백작의 저택은 어떻게 가셨습니까?”

“음…… 그게…… 사실은요.”

소리오닌은 여자의 도움을 받아 변장해서 들어갔던 것부터, 머리핀으로 비밀 서랍을 열었던 것 까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그녀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에리한의 얼굴은 굳어져 갔다. 

마지막까지 말을 마친 소리오닌은 그제야 에리한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에리한 님, 왜 그러세요?”

“소리오닌 님.”

“네.”

에리한이 잠깐 한숨을 쉬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좋았던 기분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이런 위험한 일을 뭐 하러 하십니까.”

“위, 위험하지 않았어요!”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누군가에게 들켰다면 소리오닌 님은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치만…….”

에리한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말을 마친 소리오닌이 결국 사과를 건넸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경솔했어요.”

그녀의 사과에 금방 표정이 풀린 에리한이 소리오닌을 꼭 껴안았다. 

“제게는 소리오닌 님의 안전이 제일입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절대 하지 마세요. 아셨죠?”

“네. 절대 안 할게요. 바꿔 생각해 보니 에리한 님이 그런 위험한 일을 했다면 저도 똑같이 화가 났을 거예요.”

“제대로 알고 계시니까 다행입니다.”

소리오닌의 말에 에리한이 작게 웃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빠르고, 사과하는 것도 빠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부터 하라고 난리일 텐데. 다시 한번 소리오닌에게 반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요, 에리한 님.”

“네?”

“저 알려 드릴 게 또 하나 있는데……”

에리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한 건가 싶은 얼굴이었다.

“아, 아니! 이건 그냥 들은 얘기에요! 자하만 백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이 얘기해 줬어요!”

“……그렇습니까?”

“네, 진짜로!”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였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피식, 웃은 에리한이 물었다.

“어떤 내용을 들으셨습니까?”

“자하만 백작가 뒤에 있는 숲에 젊은 남자들이 엄청 많아졌대요.”

“젊은…… 남자들이요?”

“네. 말로는 자하만 백작이 고용한 사병이라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이상하다고 했어요. 혹시 이것도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요?”

에리한의 머릿속에서 사건의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증거를 코앞에 두고도 먼 곳만 찾아다녔다. 설마 당당하게 자신의 집에 용병들을 모아놓고 있을 줄이야.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소리오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별로 필요 없는 내용이었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소리오닌 님 덕분에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정말요? 다행이다. 이번에는 꼭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못해서…….”

소리오닌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반응에 에리한이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추었다. 

내일은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이 아니라, 자하만 백작이 몰락하는 날이 될 것이다. 에리한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크게 뛰기 시작했다.

***

연무장에서 한참 훈련을 하던 페릴은 에리한의 호출을 받고 급하게 왕자의 궁으로 향했다. 

“에리한 왕자님! 부르셨습니까?”

“응. 아, 땀 냄새.”

에리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에 크게 웃은 페릴이 머리를 긁적였다.

“훈련 도중에 급하게 연락을 받고 오는 길이라…… 씻고 올까요?”

“아니, 됐어. 길게 말할 것도 아니고.”

“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에리한은 페릴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소리오닌의 집에서 가져온 거래서의 원본과 용병 계약서들이었다.

“이게……?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내가 찾은 게 아니야. 소리오닌 님이 찾아왔어.”

“네? 소리오닌 님이요? 무슨 수로?”

“뭐, 말하자면 길고.”

손을 까딱이며 말을 돌린 에리한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하만 백작 저택 뒤쪽 숲에 젊은 남자들이 살기 시작했대. 아마 그 남자들이 용병일 것 같아. 내일 오전에 뒤져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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