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자하만 백작. 그건…….”
“전하. 전하께서도 제가 내놓은 증거를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백작의 물음에 왕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백작이 한쪽 입꼬리만 올린 뒤 말했다.
“중립을 지켜야할 분께서 설마 그럴 일은 없으시겠죠. 그러니 전하. 내일 당장이라도 처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의견을 표하는 자하만 백작 때문에 에리한의 얼굴이 구겨졌다. 바로 앞에서 그런 에리한을 보던 백작은 속으로 실컷 비웃었다.
애송이. 자신의 감정 하나 갈무리할 줄 모르는군! 내일이면 무조건 자신이 이기게 될 거라며 승리감에 한껏 도취된 백작이 다시 한번 의견을 건넸다.
“지금까지 유예 기간을 준 것만 해도 반역자에게 충분히 특별대우를 해줬습니다. 전하. 결단을 내리시지요.”
자하만 백작의 측근들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 다투어 그래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 옆에서 반박할만한 증거는커녕, 기 싸움에서 밀린 반대파 대신들은 얼굴만 구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왕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켰다.
“좋소. 자하만 백작과 대신들의 말을 들어 보니 다 맞는 말이군. 백작의 증거를 반박할만한 것들이 발견된 것이 없으니…… 그의 말을 믿는 수밖에. 그럼, 내일 오후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을 거행하겠소.”
왕이 낮은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그의 확정에 자하만 백작과 측근들은 얼굴이 환해졌고, 반대파들은 죽을상이 되었다. 왕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자리를 비웠다.
왕이 없는 자리. 자신의 측근들과 한참 덕담을 주고받던 자하만 백작이 여전히 앉아 있는 에리한과 눈을 마주쳤다.
“왕자님. 내일 오후 뵙겠습니다.”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리한에게 웃어 보인 자하만 백작이 당당한 걸음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와, 왕자님. 이 일을 어찌하실 겁니까?”
“이대로 자하만 백작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면 큰일입니다!”
“저희는 왕자님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회의장에 남은 자하만 반대파들이 에리한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거슬리는 말을 듣던 에리한이 테이블을 쾅,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대신들이 그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내일 오후에 뵙겠습니다.”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사라져가는 에리한을 보던 대신들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들이 잡은 줄이 썩어빠진 밧줄이었던 것이다. 이제 목숨 붙어 있을 걱정부터 해야 하다니!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지…….
서로 얼굴을 보던 대신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
회의장을 빠져나온 에리한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앞서 나간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야했다. 급하게 복도를 걸어가던 에리한을 갑자기 누군가가 팔을 잡아채는 바람에 빈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바로 경계하는 자세를 잡는 에리한의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웃음소리에 어깨에 힘을 푼 에리한이 뒤를 돌아봤다.
“아바마마.”
“그래. 아주 잔뜩 털을 세운 동물 같구나. 하긴 예민해질 만도 하지.”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왕에게 에리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왕은 인자한 얼굴로 에리한을 보았다.
“음, 그래. 증거들은 잘 찾았고?”
“아……?”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냐는 듯한 에리한의 얼굴에 다시 한번 크게 웃은 왕, 도이첸이 에리한의 머리를 헝클었다.
“아니, 아들이 하는 일을 아버지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분명히 어마마마나 백작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들이 너를 얕본 거라 그렇지.”
확실히 그런 듯했다. 왕비는 노미텐 알몬느가 감옥에 갇힌 후 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에리한을 찾던 것을 멈췄다. 백작은 거기에 더해 슬슬 국정에 간섭하려는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제가 어떤 말을 드릴 지도 알고 계십니까?”
“확신은 못하지만…… 대강 알 것 같구나.”
“대강이라도 알고 계신다면 다행입니다.”
에리한은 왕에게 자신이 모아 놓은 증거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던 왕이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흐음, 자신들의 돈이야 그렇다 쳐도. 나라의 기사단에까지 장난질을 쳤다 이거지? 거참, 내가 그렇게 물러 보였나?”
에리한은 긍정도 부정도 못한 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들의 솔직한 반응에 크게 웃은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찾은 증거만 하더라도 꽤나 흥미진진한 내용이야.”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그래. 결정적인 단서가 없는 게 조금 아쉽군. 정확하게 자하만 백작을 지목해서 끌어넣을 명분이 없어.”
왕의 말을 끝으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따가운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를 보던 왕이 에리한을 바라봤다. 왕의 시선을 느낀 에리한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봤다.
“에리한.”
“네.”
“그래도 내일 노미텐 알몬느를 구할 건가?”
“물론입니다. 소리오닌 님의 가족을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에리한의 단호한 대답에 왕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에리한은 아마 그의 할아버지를 닮은 게 아닐까 싶었다. 점점 커갈수록 자신과 다른 길을 가는 에리한을 보고 있으면 부럽기도, 질투가 나기도 했다.
“그래, 알았다. 내일 오후 처형 전에 잠시 시간을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사실 그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화색이 도는 아들의 얼굴을 본 도이첸은 껄껄 웃어 버렸다. 아이같이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거 참 부럽구만! 다시 한번 속으로 부러움을 표한 왕이 먼저 방을 나섰다.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에리한은 창가에 기대어 서서 머리를 쓸어내렸다. 우선 내일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좀 전 회의에서 모두 다 말해 버리고 싶었다. 자하만 백작의 얼굴에 증거들을 집어던지며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백작이 빠져나갈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참았다. 내일 처형장에서 노미텐 알몬느가 아닌 자하만 백작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증거나 힘으로 그를 완전히 무너뜨리기는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언젠가 자신만만하게 웃는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꼭 보겠어.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던 자하만 백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리한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선 내일 처형장에서 형편없이 일그러질 그의 얼굴을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에리한 님.”
“아, 바임. 기다리고 있었나?”
“네. 얘기 들었습니다. 내일로 정해졌다고…….”
복도에서 기다리던 바임이 바로 에리한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평소답지 않게 걱정이 서려 있는 목소리에 에리한이 고개를 돌려 바임을 힐끗 쳐다봤다.
“뭐야, 그 말투는?”
“아닙니다. 그냥 좀…….”
“걱정 마. 아바마마께 시간을 좀 달라고 부탁했어. 어떻게든 처형은 막을 수 있을 거야.”
“그거 다행이네요.”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백작의 목을 댕강해 버리고 싶지만.”
전혀 조심성 없는 에리한의 발언에 깜짝 놀란 바임이 급하게 에리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왕자님!”
“왜, 들으라고 한 말이야.”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선 소리오닌 님 좀 만나고 와야겠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
무슨 말을 해도 끝은 소리오닌이었다. 이젠 이골이 난 바임이 두 손을 들어 졌다는 표시를 했다.
“너무 늦게만 오지 마십시오. 밀린 일들이 꽤 많습니다.”
“알았어. 정 급한 거 있으면 네가 대신 해도 돼.”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야말로 잡혀갑니다.”
진지하게 대답하는 바임을 보고 크게 웃은 에리한이 바임에게 손을 흔들었다. 왕자가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바임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배웅 인사를 건넸다.
***
왕비는 기분 좋은 얼굴로 앉아 있는 자하만 백작을 한 번 훑어보았다. 방금 끝난 회의에서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신나서 달려온 것 같았다.
“왕비님.”
“말씀하십시오.”
왕비가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답했다. 그 동작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우아해서 백작은 잠시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백작?”
“아, 네! 그…… 왕비님도 들으셨다시피 노미텐 알몬느가 내일이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 그 소리오닌 계집애도 끝 아니겠습니까?”
“네. 저도 소식 들었습니다. 헌데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하던데요.”
왕비는 여전히 뭔가 찜찜한 듯했다. 그녀의 의심에 백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니, 방금 전 회의에서까지 아무도 반박을 못했습니다. 그렇다는 건 뭐겠습니까? 제가 내 놓은 증거가 진실이라는 것이지요.”
“흐음…….”
“왕비님. 왕비님은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제가 잘 되고, 제 딸이 잘 되어야 왕비님께서 별 탈이 없으시지 않겠습니까?”
백작의 말투가 은근슬쩍 왕비를 협박하듯이 바뀌었다. 그 뉘앙스에 왕비는 백작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본 백작이 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제가 드리려던 말씀은 내일 오셔서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을 봐주십사 하고…….”
“안 그래도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 그렇지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만간 위나와 함께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백작은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 버렸다. 뭔가 이상했다. 왕비가 왠지 자신의 계획을 다 눈치채고 있을 것 같아서 점점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하기만 했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백작을 본 왕비는 짧게 혀를 찼다.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확실한데, 아직 실체를 잡지 못하였다.
“그나저나…….”
내려놓았던 찻잔을 손에 쥔 왕비는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무능한 대신들은 아니더라도 에리한이 가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소리오닌의 친오빠인데. 분명히 다른 증거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최후의 반론 기회였던 오늘 회의에서 아무 말도 없었지? 자신의 아들이야말로 뭔가를 꾸미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교묘하게도 자신이 눈치채지 못할 수를 생각해 둔 게 분명했다. 왕비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한 채 찻잔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