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역시. 이건 위조 서류가 맞는 것 같습니다.”
“뭐? 아, 그래. 물론 나도 이게 위조 서류일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티가 나지 않잖아?”
“여기. 이게 원본이에요.”
페릴이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그 서류들을 살펴보던 에리한은 두 서류 간 서명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 여기. 이 거래자들의 서명이 다르네?”
“네, 그렇죠. 제가 받아 온 서류에 적힌 사람들의 가명까지는 똑같지만, 서명이 달라요.”
“그렇군……. 하지만 이 서류가 원본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지?”
에리한이 다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명이 다른 것만으로 이 서류들이 원본이라는 걸 증명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백작 쪽에서 자신의 서류가 원본이라고 우기기 시작하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다 방법이 있지요.”
페릴이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가서 섰다. 갑자기 무슨 행동인가 싶은 에리한은 페릴을 지켜봤다.
“왕자님, 이쪽으로 와 보세요.”
페릴의 손짓에 에리한이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에 뭐가 있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지요.”
에리한의 말에 웃으며 답한 페릴은, 자신이 받아온 서류와 자하만 백작이 내어놓은 서류를 각각 한 장씩 손에 쥐었다. 그 후에 양 손을 햇빛 쪽으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페릴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서류 서명란 뒤쪽으로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지?”
“이건 저희같이 거래를 하는 사람들만 아는 건데요. 이렇게 그 물물교환 거래소의 문양이 서명란에 나타나야 원본이라는 거죠.”
페릴의 설명대로 자하만 백작이 준 서류에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단해. 어떻게 이런…….”
“물물교환이라는 게 워낙 사기도 많고 이래저래 안 좋은 일들이 많으니까요. 이 문양은 거래소에서 인증한 마법사가 직접 찍은 거라 위조 자체가 안 된답니다.”
“그렇군. 직접 거래를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내용이겠어.”
에리한이 커다랗게 웃었다. 그 동안 페릴이 물물교환 한다고 이상한 물건들을 가져올 때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들을 몽땅 가져와서 햇빛에 비춘 에리한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이걸로 증거 한 개는 완벽히 확보했군.”
“도움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도움 정도가 아니야, 이건 엄청난 거라고. 고마워, 페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좋아하는 에리한을 본 페릴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뭘. 근데 다른 증거들은 좀 찾아 내셨습니까?”
“음 , 안 그래도 바임이랑 나도 열심히 알아보는 중이야.”
“그렇습니까…….”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페릴이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소리오닌 님도 참 일이 많네요. 힘드시겠습니다.”
“그렇지. 씩씩한 것 같아 보여도, 답답할 거야. 자신의 핏줄이 모함 당해서 감옥에 가 있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요즘 전하와 다른 대신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바마마는 아직 중립이지만, 자하만 백작 쪽 사람들의 공세가 만만치 않아. 회의 때마다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혹시 들킬지도 모르니까 빨리 끝내 버리려는 것 같네요.”
“내 생각도 그래.”
에리한은 서랍에서 다른 종류의 서류를 가지고 왔다. 페릴의 앞에 놓인 서류에는 수많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건…… 뭡니까?”
“그동안 바임이랑 내가 조사해 놓은 거. 대신들의 재산 변동 상황이야. 아무래도 좀 이상한 거 같아서.”
“음, 저는…… 숫자에는 좀 약하지 말입니다.”
숫자들을 따라 읽어 내려가던 페릴이 어지러운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본 에리한이 피식, 소리내 웃었다.
“자, 봐봐. 여기 자하만 백작의 재산현황이야. 어느 순간부터 눈에 띄게 늘고 있지? 그리고 여기는 그의 측근들 재산현황. 같은 돈을 받아가는 데도 미묘하게 차이가 나고 있어.”
“그렇다는 건…… 다른 귀족들이 자하만 백작에게 돈을 주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근데 그 돈을 주는 이유가 뭐냐 이거야. 그저 어마마마의 가까운 친척이라 잘 보이려고 준다고 하기에는 액수도 그렇고 의심스러운 게 많아.”
이어지는 에리한의 설명에 페릴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페릴에게 설명을 해주면서 다시 서류를 살펴보던 에리한이 뭔가를 발견했다.
갑자기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에리한의 모습에 페릴이 의아함을 담아봤다.
“왜 그러십니까?”
“여기, 이거 좀 봐봐.”
“네?”
“측근들의 재산에서 빠져나가는 액수. 계산을 해 보니까…….”
에리한이 펜으로 빠져나간 액수를 빈 공간에 써 넣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던 페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건…….”
“역시, 자하만 백작이랑 그 측근들의 짓이었군.”
“그렇네요! 여기 빠져나간 액수들이랑 하콧의 비늘을 거래한 가격이 똑같습니다!”
“하, 이렇게 들킬 걸 몰랐을까?”
에리한은 어이가 없는 듯 혀를 차더니, 테이블을 한 번 내리쳤다.
“아마도 이렇게 자세히 볼 거라는 생각을 안 했겠죠. 뭐, 똑똑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페릴이 자신이 말하고도 웃긴지 키득거렸다. 그를 따라 웃은 에리한은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있는 서류들을 보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 바임이 돌아왔다는 걸 알리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습니다.”
에리한을 향해 짧게 목례를 한 바임은 그 옆에 앉아 있는 페릴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서류에 시선을 건넸다가 빈 자리에 앉았다.
“페릴에게도 저희가 조사한 내용을 알려주셨습니까?”
“으음. 다 함께 생각을 강구해 보는 게 좋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조사한 이 재산 현황이 페릴이 가져 온 증거와 이어지고 있었어.”
“네?”
에리한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한 바임이 페릴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거린 페릴이 거래서의 원본을 손에 쥐고 팔랑거렸다.
“이게 진짜 하콧의 비늘을 가져간 사람의 거래서란 말이지? 당연히 서명은 노미텐 알몬느의 것이 아니지.”
“결정적인 걸 구했군.”
“그럼! 이게 다 나의 인맥과, 좋은 성격 덕분이 아니겠느냐?”
신나서 떠드는 페릴읠 무시한 바임은 그 뒤에 어떻게 이어지게 된 일인지 물었다. 대신들의 재산과 하콧의 비늘. 숫자가 일치하는 점까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증거가 될 것 같았다.
거기에 자신이 가져 온 것까지 더하면 적어도 누명은 벗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자님. 저도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아, 맞네. 며칠 걸릴 것 같다더니…… 뭔가가 나왔어?”
“네. 아무래도 행정 말단부터 장난질을 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바임이 에리한에게 서류뭉치를 건넸다. 그 안에는 병사를 모집해야할 인원과, 실제 모집된 인원이 적혀 있었다. 비슷한 숫자를 적어 몇 명씩 적게 모집하고 있었다.
“각 지역마다 할당된 인원에서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십여 명이 빠져나가니까. 중앙에 모일 때는 꽤 많은 숫자가 비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숫자 역시 자하만 백작이 내 놓은 용병수와 비슷하게 일치합니다.”
“좋아. 이정도만 해도 노미텐 알몬느의 누명은 벗을 수 있을 거야. 한시름 놨군.”
에리한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했다. 바임은 그의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뭔가가 찜찜했다.
“하지만 왕자님. 이런 증거를 가지고 있어도 진범을 잡아내지 못한다면……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겁니다.”
“진범이라……. 잡고 싶어도 결정적인 단서가 없다는 게 아쉽군.”
“그러게요.”
바임과 에리한, 페릴 모두 누가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물증 없이 그를 몰아간다면 백작뿐만 아니라 왕비까지 나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보다 몇 배나 복잡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저 거래서의 원본을 찾을 수 있으면 그게 최고일 텐데 말이죠.”
페릴이 하콧의 비늘 거래서를 뒤적였다. 분명히 백작이 이 원본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것만 있으면 완전히 끝낼 수 있는데! 백작이 자신의 저택이나 집무실에 에리한이나 바임이 오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겠지.
커다란 한숨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에리한은 애써 그들을 보고 표정을 풀었다.
“그래도 우선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하지. 노미텐 알몬느의 처형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가 처형된다면 소리오닌 님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맞습니다! 누명을 벗는 게 어디에요! 안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잖습니까!”
페릴이 에리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바임은 계속 뭔가가 개운하지 않았지만, 백작에게 들키지 않고 이 이상 더 완벽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혹시 모르니 증거들을 서로 나누어 보관하기로 했다. 서랍에 서류를 넣은 에리한은 서둘러 나설 준비를 했다.
그를 본 바임이 슬쩍 웃음을 짓고 물었다.
“소리오닌 님에게 가십니까?”
“요 며칠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거든. 잠깐만 있다가 올게.”
“그렇게 하십시오.”
바임에게 손을 들어 답을 한 에리한이 말을 몰고 성을 나섰다.
***
소리오닌의 집 앞에 도착한 에리한은 말에서 내려 옷 매무새를 정돈했다.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이라고 심장이 또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큼!”
짧게 헛기침을 한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한 미소를 지은 소리오닌이 그를 맞이했다.
“자주 못 와서 죄송합니다. 요즘 일이 많아져서.”
“괜찮아요. 저번에 갈 때 미리 얘기해 줬잖아요!”
소리오닌은 꽃차를 내오면서 말했다. 그녀의 온화한 대답에 에리한 역시 슬며시 미소 지었다.
소리오닌이 차를 테이블 위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에리한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좋아요, 내가?”
“왜 당연한 걸 물으십니까?”
이제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꽤 진지하게 받아치는 에리한이었다. 그의 대답에 오히려 소리오닌의 귀가 빨개졌다. 한참 소리오닌의 손을 잡고 장난치던 에리한이 얘기를 시작했다.
“아, 소리오닌 님. 아마 곧 노미텐 알몬느가 풀려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