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00)

085.

“왕자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콧의 비늘을 사간 사람이 소리오닌 님의 친오빠라고요?”

페릴이 에리한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그의 외침에 한참 서류를 들여다보던 에리한과 바임의 시선이 문 쪽을 향했다.

“아, 페릴. 잘 왔네. 안 그래도 너에게 말할 게 있었어.”

“네!”

그제야 인사를 깜빡했다는 걸 깨달은 페릴이 상체를 숙여 인사를 하고 에리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것 좀 봐. 페릴. 네가 말한 하콧의 비늘 맞지?”

“음…… 네, 맞습니다. 여기 보니 크마엔에서 샀다는 것도 적혀 있네요. 이거라면 저희가 시찰 갔을 때와 비슷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역시…… 이 서류에 나와 있는 흔적들. 우리가 찾던 자들의 행방이랑 겹치는 게 분명해.”

에리한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서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이게 뭡니까?”

“자하만 백작이 노미텐 알몬느의 반역 증거라고 내 놓은 서류들이야. 이 서류들의 서명이랑 노미텐의 서명이 일치한다고 하더군.”

“네에?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래. 완전히 처벌할 수는 없지만 내 결혼을 막을 수단은 되겠지.”

페릴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이 용병의 신상을 적어둔 곳에 멈췄다. 

“여기. 이 사람들도 그렇게 얘기한 겁니까? 노미텐과 계약했다고?”

“아니. 사실 이 증거품들과 용병들의 행방은 밝혀내지 못했다고 하더군.”

“수상하네요…….”

“수상하지. 그것도 엄청. 분명히 자하만 백작이 관련되어 있을 게 뻔한데…….”

에리한이 테이블을 톡톡, 건드리며 고민했다. 사람을 찾는 것도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 지나다보면 노미텐은 반역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우선 제가 아는 사람들에게 더 자세히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궁에서의 신병 모집에 반응이 없었던 이유가…… 이렇게 많은 용병 모집 때문이었던 것 같네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우리가 아무런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 말에 대답한 건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던 바임이었다.

“아마 아래 말단에서부터 교묘하게 서류를 조작했겠죠. 병사들의 부족을 눈치채지 못하게요. 이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행정 쪽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겠군. 알았다.”

각자 해야 할 일을 확인한 세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에리한이 우선 해야 할 일은 회의장에서 들었던 얘기를 보다 정확하게 듣는 일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감옥 쪽으로 향했다. 

***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감옥을 지키는 병사들이 에리한을 보고 인사를 해왔다. 에리한은 그들에게 손을 들어 올려 답을 해주었다. 그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짐작한 병사들은 서로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노미텐을 보게 해줘도 되는지 막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중이리라. 

에리한은 그들의 반응에 피식, 짧은 웃음을 지었다.

“걱정 말게. 내가 그를 풀어주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그랬다가는 여기 병사들의 목숨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아, 아니……! 저희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란 병사들이 손사래를 쳤다. 그들을 보고 다시 한번 웃음을 보인 에리한이 양 손을 들어 보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몇 번인가 온 적은 있지만, 그때는 죄인들에게 자백을 받거나 협상을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렇게 도움이 되려고 달려온 적은 없었는데…….

에리한이 노미텐이 들어가 있는 감옥을 지키는 병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내게 몇 분만 시간을 주겠나?”

“하, 하지만 왕자님. 이 자는 반역죄로 잡혀있는 자입니다. 혹시나 왕자님께 해를 끼치면……!”

“그럴 리가, 그리고 나 역시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자신의 손목 안쪽을 보이며 말하는 에리한의 모습에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 5분 정도면 되시겠습니까?”

“음, 그거면 충분하지. 고맙네.”

에리한이 싱긋 웃어준 다음 감옥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컴컴한 공간, 그 구석에 쪼그려 앉은 노미텐의 뒤통수가 보였다.

“노미텐 알몬느?”

에리한의 부름에 노미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다. 노미텐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짧게 한숨을 내쉰 에리한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탁!

자신의 어깨를 잡는 손에 깜짝 놀란 노미텐이 크게 팔을 휘저었다. 그 바람에 손을 부딪친 에리한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

“노미텐 알몬느!”

“죄, 죄송합니다.”

좀 더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뒤돌아 선 노미텐이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를 해왔다. 그의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고개 들고 나 좀 보시죠.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까 말한 게 사실입니까?”

“어……? 어떻게 여길……?”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까 제게 말했던 게 다 사실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에리한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던 노미텐은 반복되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시골이나 다른 나라로 넘어가서 조용히 살 생각이었어요. 근데 빨간 머리 여자에게 붙잡히고, 그 아버지한테 협박받아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그 돈은?”

“그, 그건 정말 제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목걸이를 팔아서 받은 돈이에요! 아, 바론에 도착해서 팔았으니까 가게 주인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겁니다.”

노미텐이 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그의 말에 알겠다는 답을 한 에리한이 다른 질문을 시작했다.

“혹시 당신을 가둔 빨간 머리 여자와 그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건 없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제 앞에서는 특별히 한 말이 없으니까……. 그런데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긴 했습니다.”

에리한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노미텐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전혀 건질 게 없나 싶었는데 뭔가 있는 건가 싶어, 에리한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그게 뭡니까?”

“제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병의 숫자 치고는 너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 매일 하루에 몇 번씩이나 감옥을 지키는 사병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초크센에 있을 때 아버님이 공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사병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사병이 그렇게 많았습니까?”

“네. 아, 하지만 바론에서는 일반적인 숫자일수도…….”

086.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한 소리오닌은 에리한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 보러 와 줘서 고마워요.”

“제가 힘을 얻는 유일한 사람은 소리오닌 님이니까요. 요 며칠 못 보기도 했고.”

에리한이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저도요. 에리한 님을 보니까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조금만, 조금만 더 저를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물론이에요. 제 걱정은 마세요.”

소리오닌은 두 주먹을 꼭 쥐고 에리한에게 웃어보였다. 에리한도 소리오닌을 마주 보고 웃어준 뒤 그녀의 이마에 쪽, 하는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건넸다.

서로를 보고 다시 한번 입을 맞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오닌 님의 얼굴을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불안 했던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다 잘 해결될 거예요.”

“네. 그렇게 믿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에리한의 다짐에 소리오닌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품에 기댔다. 완전한 행복은 손에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그들을 애태우고만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소리오닌을 찾아 온 환자가 있었다.

“소리오닌 님,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손목 좀.”

나이가 지긋한 여자는 퉁퉁 부어 오른 손목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목을 본 소리오닌은 재빨리 집에 있는 부목과 붕대를 가져왔다.

“어디서 이렇게 다치셨어요? 당분간은 절대로 움직이시면 안 되는데, 일하시는 거 있으세요?”

“일을 쉴 수는 없어요. 이 손목도 제가 일하는 곳의 아가씨가 던진 찻잔에 맞은 거예요. 어제 밤부터 붓더니 오늘 아침에는 너무 아파서…….”

여자가 울상을 하고 얘기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꽤 큰 저택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요? 음, 그럼 우선 손목 움직임이 심하지 않게 고정해 드릴게요. 그나저나 어디서 일하시는데요?”

“아, 저는 자하만 백작님 댁에서 일하고 있어요. 요즘 주인님이랑 아가씨가 많이 예민해지셔서 일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는 사람들도 많아졌답니다.”

여자는 한숨을 푹 쉬며 소리오닌에게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그 순간 소리오닌의 귀에 꽂히는 단어가 있었다.

“자하만 백작님 저택에서 일하신다고요?”

“네! 일한 지는 5년 정도 되었어요. 처음에는 할만 했는데 요즘은 군식구들도 많아져서 아주…….”

“음? 군식구라니요?”

소리오닌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냥 뒷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을 본 여자는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시작했다.

“그게…… 백작님이 어느 날부터인가 젊은 남자들을 자꾸 데려 오시더라고요. 뭐, 워낙 큰 저택인데다가 뒤쪽 숲 안에 별채도 있으니까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밥하고 청소하는 저희는 아주 죽겠어요.”

“어머, 그렇구나! 젊은 남자들이니 밥은 또 얼마나 많이 먹겠어요!”

“그렇죠! 이러다 하루 종일 밥만 하게 생겼어요.”

여자는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을 마쳤다. 여자의 말을 곱씹어보던 소리오닌은 붕대에 매듭을 지으면서 당부했다.

“꼭, 이틀 뒤에 다시 오셔야 해요! 아셨죠? 이거 이대로 두면 손목 못 쓸 수도 있으니까.”

“정말요? 제가 이틀 뒤에 꼭 올게요! 아이고, 어쩌면 좋아.”

“꾸준히 치료 받으면 괜찮으니까 걱정 마시고, 이틀 뒤에 꼭! 오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오늘 너무 감사해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여자가 손목을 꼭 쥐고 돌아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소리오닌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런 기회가 오다니! 잘만 하면 자하만 백작의 저택에 들어갈 방법을 찾을지도 몰랐다. 이번에는 자신도 에리한을 도울 수 있게 되길 바랐다. 

***

페릴은 꽤나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쉬는 날을 이용해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자신이 부탁해 놓은 것들이 어제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내에 있는 광장으로 들어선 페릴은, 오른쪽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걸었다. 골목에서 다시 여러 번 꺾은 후에야 나오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딸랑, 하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오, 페릴. 어서 와!”

어두컴컴한 내부에 페릴의 분홍 머리가 등장하자 그 부분만 밝아지는 것 같았다. 가게 주인의 살가운 인사를 받은 페릴은 주인과 마찬가지로 살갑게 인사한 뒤 바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부켄 씨! 제가 부탁한 물건이 왔다고요?”

“그래. 딱, 어제 도착했지. 꽤 멀리서 오는 거라 힘 좀 들었다고.”

“감사합니다! 제가 그래서 여기만 이용하잖아요!”

페릴이 주인을 보고 윙크하며 답했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주인이 큰 소리로 웃으며 찬장에 있던 물건을 바 위에 꺼냈다. 그 커다란 송곳니를 보자 페릴의 눈이 반짝 반짝 빛났다.

“어때? 크기도 그렇고 날카로운 것도 그렇고. 만족할 만하지?”

“그럼요! 제가 봤던 것 중에 제일 크네요! 매끄러운 감촉도 너무 좋은데요?”

페릴은 두 손으로 들어야 할만큼 묵직한 송곳니를 보고 쉴 새 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참 주인과 함께 물건에 대해 토론을 하고 난 뒤, 페릴이 주인에게 바짝 다가갔다.

“근데, 이거 말고 제가 부탁한 거 하나 더 있잖아요? 그건 언제쯤이면…….”

“아아! 그 서류들 말이지? 그것도 여기 준비해뒀네!”

주인이 서랍에서 여러 장의 서류를 꺼내놓았다. 그 안에는 다양한 거래처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아래에는 거래 내역이 적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급하게 부탁한 건데도 이렇게 다 준비해 주셨네요!”

“뭐, 다행히 네가 부탁한 거래하는 곳이 우리 가게랑 협력하는 곳들이라서 빼내오기 쉬웠지!”

“역시 부켄 씨의 능력이란!”

페릴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의 계속되는 칭찬에 부켄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근데 그 서류들은 왜? 너도 그게 필요해?”

“아니요, 저는 필요 없는데……. 제 상관이 원하시거든요. 그래서 시장 조사 겸 부탁드린 거예요.”

“그렇구만? 그래도 그거 원본이니까 며칠 내로 다시 돌려줘야 해. 알았나?”

“물론이죠! 시세 좀 알아보고, 바로 돌려드릴게요!”

상큼하게 약속을 한 페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나. 그가 가져온 커다란 자루에 송곳니를 잘 넣어 놓고, 서류도 품 안에 넣은 뒤 가게를 나섰다.

오랜만에 얻은 휴일이니 좀 더 즐겨야 했다. 곧장 광장의 중앙으로 나온 페릴이 커다란 찻집 앞에 멈춰 섰다. 케이크가 맛있기로 소문난 가게였다.

그동안의 피로가 한 번에 풀릴 만큼 달달한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다. 흘러내리는 자루를 한 번 추켜 든 페릴이 찻집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대부분 여성들이 앉아 있었다. 남자들끼리 온 손님도 없는데, 더군다나 남자 혼자 온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가게 안을 휙, 둘러 본 페릴이 어깨를 으쓱거린 뒤에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에는 카페의 달콤한 향이 너무 좋았다.

꽃차와 달콤한 케이크를 주문한 페릴이 품 안에서 서류를 꺼내보았다. 일반 사람들은 이 서류를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니, 당당하게 꺼내 놓을 수 있었다.

서류 마지막에 적혀 있는 거래자들의 이름을 보았다. 전에 에리한이 보여준 서류와 같은 가명들이었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아래 서명까지 시선을 내리자 페릴의 입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찾았다!”

손에 있는 몇 장의 서류 모두 같은 서명이 적혀 있었다. 한 번 더 서명을 확인한 페릴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서류를 들고 창에 비춰보기까지 한 페릴은 만족스러운 듯 어깨까지 들썩였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는 여성들에게 이상한 시선을 받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하콧의 비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얼마 뒤 나온 꽃차와 케이크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운 페릴은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성으로 향했다. 

***

에리한은 밀려드는 결재 서류를 어느 정도 처리한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왕의 일을 승계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돌입한 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고 있었다.

휴, 짧게 한숨을 내쉰 에리한이 뻐근한 목을 돌릴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짧은 소리와 함께 시종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네, 왕자님. 페릴 부단장님께서 왕자님께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

에리한의 말에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단의 옷이 아닌, 정장을 한 페릴이 들어왔다.

“어서 와, 페릴. 오늘 쉬는 날이었나? 정복이 아니네?”

“네! 쉬는 날이었습니다. 그래도 왕자님을 뵙는 거라, 좋은 옷으로 입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작게 미소를 지은 에리한이 집무실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우선 앉지? 그래, 황금 같은 쉬는 날까지 나를 찾아 온 이유가 뭔가?”

“왕자님, 제가 찾은 것 같습니다.”

“찾아? 뭘?”

의아함에 눈이 커진 에리한을 본 페릴이 품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놓았다.

“소리오닌 님의 형제분께서 반역을 꾀했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페릴의 말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있던 에리한이 상체를 벌떡 들어올렸다. 

“정말인가?”

“네, 그럼요! 왕자님, 혹시 자하만 백작이 증거라고 내놓은 서류들 가지고 있으십니까?”

“응, 내가 가지고 있어.”

에리한이 재빨리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서류를 들고 왔다.

“여기.”

그가 내민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던 페릴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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