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00)

084.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에리한의 주먹이 백작의 얼굴을 향했다. 

“그만! 그만해라!”

모두 다 숨죽여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때 왕이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에리한의 손이 백작의 코앞에서 멈췄다. 

“오늘은 이만 해산하지. 여기서 이렇게 있어봤자 결론이 나지 않을 테니. 다들 돌아가시오.”

“저, 전하! 그럼 저 반역자는……!”

“그건 걱정 마시오. 지금부터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

왕은 짤막하게 말하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대신들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하나둘씩 회의장을 떠나갔다.

에리한을 향해 예의 바른 인사를 남긴 백작이 마지막으로 회의장을 떠나고, 안에는 에리한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괴로운 얼굴로 테이블을 노려봤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을 뿐.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회의장 안의 차디찬 공기가 에리한의 금발을 흐트러 뜨리며 지나갔다. 

***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왕자궁에서 일하던 세리와 민츠의 귀에도 소식이 들어갔다.

“세리! 얘기 들었어?”

“으응. 대체 무슨 일이지? 아니, 사실이 아닐 거야. 내가 아는 노미텐 님은 그런 일을 벌이실 분이 아니야!”

“맞다, 너는 초크센에서는 소리오닌 님의 집안에서 일했었지!”

세리는 민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초크센에 있을 때도 아가씨인 소리오닌보다 더 순하고 약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일을 계획했을 리가 없다.

“민츠. 저녁에 우리 할 일 없지?”

“응……. 시녀장님께서 우리 둘, 오늘은 점심 마무리까지 하고 별 일 없다고 하셨어.”

“좋아. 저녁에는 소리오닌 님께 가봐야겠어.”

세리는 재빨리 손을 놀려 하던 일을 처리했다. 세리의 옆에서 민츠도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낼 수 있게 힘껏 도와주었다.

몇 번을 사정해서 시녀장에게 외출 허락을 받은 두 사람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궁에서 빠져나왔다. 이미 소리오닌도 노미텐의 동생이란 이유로 잡혀갔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소리오닌의 집을 향하는 세리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탕탕탕!

큰 소리로 울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거친 숨을 내쉬는 세리와 민츠가 눈에 보였다.

“세리,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소, 소리오닌 님! 큰일이에요!”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세리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진 소리오닌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안절부절못하는 세리를 보던 소리오닌이 옆에 서 있는 민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 세리가 왜 이러는 거야?”

“아, 저…… 그러니까…… 오늘 아가씨와 왕자님의 결혼 문제로 궁에서 회의가 있었는데요.”

“회의?”

“네……. 근데…….”

민츠는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세리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세리가 소리오닌의 두 손을 꽉 잡아왔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최악의 경우 회의에서 자신과의 결혼이 통과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이미 예상해 놨다.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고민까지 했는데……. 설마 진짜 그렇게 된 건가? 덩달아 초조해진 소리오닌이 세리를 쳐다봤다.

“소리오닌 님, 그게……. 사실 노미텐 님이…… 붙잡혔어요. 바, 반역죄로……!”

심장이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반역죄? 노미텐? 소리오닌은 자신의 집에 찾아왔던 젊은 남자를 떠올렸다. 

분명 외모는 소리오닌과 많이 닮아 있었다. 자신과 한 핏줄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반역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세리. 그럴 리 없잖아! 그 사람…… 아니, 노미텐 오라버니는 수도를 벗어나서 조용히 산다고 했어! 그런 엄청난 일을……!”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미 성 안에는 소문이 파다해요! 그것 때문에 회의도 금방 끝내버렸다고 했어요!”

소리오닌의 손을 잡은 세리의 팔이 덜덜 떨려왔다. 소리오닌 역시 입술이 부들거렸다.

“소리오닌 님! 사람들이 소리오닌 님까지 잡아가면 어떡해요? 이제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소리오닌 님의 목숨이 위험해졌다고요!”

세리가 와앙, 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옆에 서 있던 민츠 또한 세리를 위로하며 훌쩍였다. 소리오닌 역시 정신이 없었지만 서둘러 두 사람을 위로했다.

“세리. 괜찮아. 아직 완벽하게 밝혀진 것도 아닐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그리고 에리한 님한테 나는 괜찮다고 전해 줘. 알았지? 뭔가 수상해. 절대로 노미텐 오라버니가 그랬을 리 없을 거야.”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믿어 줄까요?”

“우선 기다려봐야겠지…….”

소리오닌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렇게 큰일이 터지다니. 에리한이 요 근래 회의에 올 대신들을 설득하러 다니느라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 아는데, 자신 때문에 또…….

세 사람은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들 모두 이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밖은 어둠이 깊이 내려앉았다.

“세리. 이제 가 봐. 너무 늦었다.”

“소리오닌 님, 어떡해요…….”

“괜찮을 거야. 궁에 돌아가면 에리한 님을 잘 챙겨 줘. 혹시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알려주고. 알았지?”

“네, 네……!”

억지로 웃어 보인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쥐었다 놓았다. 

세리와 민츠를 보내고 혼자 남고서야 소리오닌은 머리를 감싸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어리버리하게 생겼던 자신의 오빠가 떠올랐다. 절대 그럴 리 없어. 근데……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진범을 찾을 수 있을까?

***

같은 시각. 자하만 백작은 왕비의 궁에서 승리에 도취되어 크게 웃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백작의 최측근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왕비의 눈앞에서 이미 축제 분위기로 떠들고 있었다.

“왕비마마, 축하드리옵니다! 이제 왕비마마에게 거슬릴 것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하만 백작이 글라스에 담긴 술을 내밀며 왕비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얼굴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벌게져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백작의 잔을 받지 않았다.

“자하만 백작.”

“네, 왕비마마.”

“어째서 제게 미리 언질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왕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의 말에 기분이 살짝 상한 백작은 탁, 소리가 나게 글라스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아니, 뭐 워낙 긴박한 상황이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하자는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중요한 일을 말해줄 생각을 않았다면 대체 그동안 뭐 하러 궁에 오신 겁니까?”

왕비 또한 백작의 뻔뻔한 태도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제가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왕비님은 그냥 가만히 앉아 계시면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결국 백작이 큰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모두들 둘의 눈치만 보는 와중에, 왕비가 우아하게 물었다.

“그래서…… 그 서류에 나와 있던 무기와 용병들은 찾아냈습니까?”

“아, 아까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놈이 절대 입을 열지 않아서…….”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서류 따위 종이 몇 장만 있으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증거를 가져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즈, 증거는 서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하만 백작의 변명에 왕비는 비웃음으로 답했다. 그녀의 명백한 무시에 백작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왕비마마……!”

“제 앞에 증거를 가져오셔야 할 겁니다.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데 가져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당장 증거를 찾아오세요! 저도 아직 납득을 못하는데, 에리한과 전하가 그런 종이쪼가리 가지고 쉽게 인정할 것 같습니까?”

서슬 퍼런 왕비의 외침에 딸꾹,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백작과 그 측근들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훑은 왕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축배를 들기에는 상당히 이른 것 같군요. 정신들 차리시길.”

쾅, 소리와 함께 왕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안에서는 커다란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백작을 바라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건넸다. 

“이 일을 어찌합니까?”

“아니, 자하만 백작께서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증거물을 가져오면 그 놈이 벌인 일이 아니라는 게 금방 들통날 텐데……. 아이고!”

아까의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다들 술잔을 내려놓고 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제가 말씀드릴 때는 다들 찬성해 놓으시고 이제 와서 제 탓을 하시는 겁니까?”

자하만 백작이 측근들을 노려봤다. 그의 살벌한 기세에 다들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왕비의 태도에 기분이 나빠진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들에게 경고했다.

“절대, 증거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될 겁니다. 이쪽에서도 찾지 못한 걸, 왕자가 찾아낼 리 없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들 격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절대로 증거에 대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백작은 후, 크게 숨을 뱉어내고 웃어 보였다.

“어쨌든 조만간 우리들의 세상이 오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그 전야제라고 생각하시죠. 자, 마셔봅시다!”

잔을 높이 든 백작을 따라 하나둘 잔을 높이 올렸다. 더 큰 부귀와 더 좋은 직책이 그들의 눈앞을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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