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00)

083.

덜컹!

갑작스럽게 일어난 에리한 때문에 의자가 나뒹굴었다. 넘어진 의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에리한이 빠른 걸음으로 백작 쪽을 향해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오닌 알몬느’라는 말을 정확하게 들었는지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과 왕비. 그 누구도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될 거라는 예상 하지 못한 듯 아무 말 없이 백작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자하만 백작.”

“네, 왕자님.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에리한의 떨리는 목소리를 감지한 자하만 백작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리한은 백작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노미텐의 앞에 자리했다.

아직 백작의 손에 얼굴이 붙들려 있는 노미텐 역시 앞에 선 에리한을 바라봤다.

“어……?”

노미텐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동생의 집에서 봤던 남자임을 알아챘다. 에리한도 그때 보았던 소리오닌의 오빠가 맞다는 걸 확인했다.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 겁이 많은 듯한 표정. 그가 분명했다. 노미텐 알몬느.

에리한의 입 안에서 끄응, 하는 신음이 새나왔다.

분명히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는데 어째서 여기에 붙잡혀 있는 거지? 정말 이 자가 하콧의 비늘을 사들였던 건가?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에 에리한은 제대로 인식조차 하기 어려웠다. 

초면이 아닌 듯한 두 사람의 관계에 백작은 살짝 움찔했지만, 곧 노미텐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것 좀 보십시오. 초크센의 귀족이면서, 바론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나라를 버리고 도망쳐서 생각한 것이 반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놈의 동생이 바로 왕자님과 결혼하겠다고 우기는 소리오닌입니다. 왕자님은 이 못된 남매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들은 대신들은 다시 한번 동요하며 웅성거렸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걸 알아챈 노미텐이 울먹이며 말했다.

“저, 저는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의 말에 다시 시선이 백작에게 향했다. 

“하, 증거도 다 있다! 어디서 거짓을 말하느냐? 그럼 너는 초크센에서 도망친 게 아니란 말이냐?”

“으…… 그…… 그건 맞는 말이지만…….”

“것 봐라! 바론에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면 왜 도망갔지?”

“무……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정말입니다!”

노미텐의 마지막 말을 무시한 백작이 왕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에리한 또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피식, 한쪽 입꼬리만 올려 에리한을 비웃은 백작이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분. 이제 확실히 아시겠습니까? 소리오닌은 바론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만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 여자와 에리한 님이 결혼을 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백작의 말을 듣던 노미텐의 고개가 바짝 올라갔다. 결혼? 소리오닌과 이 사람이 결혼을 한다는 건가? 이 사람은 왕자……?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또다시 자신은 소리오닌에게 폐를 끼쳤다.

아니, 폐뿐만이 아니다.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어쩌면 목숨이 없어질 수도 있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노미텐을 본 에리한이 주먹을 꾹 쥐었다. 이건 백작이 뭔가를 꾸민 게 분명했다. 

소리오닌의 집에서 봤던 청년은 이런 무섭고 치밀한 계획을 짤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사실을 알리기는 쉽지만, 그것을 뒤집기란 그 잘못된 사실의 몇 배가 넘는 증거들이 필요한 법이니까. 

“저, 근데. 초크센의 귀족이란 자가 이렇게 많은 자금이 어디서 났단 말입니까? 딱 봐도 웬만한 자금으로는 택도 없는 것 같습니다만…….”

회의실에 있던 대신 중 한 명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자하만 백작에게 물었다. 백작은 그의 물음에도 자신만만한 미소로 응답했다. 

“아, 안 그래도 이것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자하만 백작이 자신의 사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병이 백작의 손에 돈주머니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것 좀 보시죠. 제가 이놈을 잡았을 때 품에 들어 있었던 돈주머니입니다. 평소에도 이정도의 돈을 들고 다니는데, 어딘가에 더 많은 돈을 숨겨 두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차르륵, 주머니 안에 가득한 동전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노미텐은 억울했다. 저 돈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목걸이를 팔고 받은 돈이었다. 자신의 전 재산이었다. 백작의 뻔뻔한 거짓말에 울컥한 노미텐이 호소했다.

“아닙니다, 저 돈은 제 목걸이를 판 돈입니다! 저는 저 돈이 아니면 더 이상 가진 게 없습니다. 급하게 도망친 제가 어디서 돈을 가져온다는 말입니까?”

“흥. 네 말대로 급하게 도망쳤다면 바론에 도착도 하기 전에 굶어 죽었을 거다. 뻔뻔하긴.”

백작이 쾅, 소리가 나게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반동으로 주머니에서 금으로 된 동전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생각보다 큰 돈의 액수에, 노미텐을 보는 대신들의 눈빛 속에 점점 더 의심이 짙어졌다. 

“그렇다면 그가 사 모았다는 무기들과 용병들은 어디에 있는 건가?”

이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던 왕이 질문을 던졌다. 회의장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그게…… 이놈이 무기가 있는 장소라거나 용병을 모집했던 곳은 죽어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뭐라……?”

“제가 몇 번이나 회유도 해보고, 설득도 해봤지만. 입을 꾹 다물어서……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백작이 죄송하다는 듯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겉으로만 보면 엄청난 충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는 에리한의 눈빛에 살의가 가득 찼다.

이를 갈고 있는 에리한의 손목을 노미텐이 덥석 잡았다. 에리한이 백작을 보던 눈을 돌려 노미텐을 바라보았다. 

“저, 저는 아닙니다. 저는 아니에요. 그, 그때 소리오닌의 집에서 나올 때 어떤 여자에게 납치당했어요. 그러고 나서 감옥에 갇혀 있다 나온 게 다예요. 이 사람이 저를 풀어 준다고 했는데……! 여기로 데려와서 누명을 씌운 거예요, 정말입니다.”

노미텐은 백작이 대신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틈을 타서 에리한에게 빠른 귓속말로 자신의 상황을 전했다.

그의 말을 다 들은 에리한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노미텐 쪽으로 슬쩍 몸을 붙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물었다.

“혹시 그 여자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습니까?”

“네, 네! 빨간 머리였어요. 저기 저 사람이랑 부녀 관계인 거 같았어요.”

“……당신은 정말 아닙니까? 저 무기들…….”

“아, 아닙니다. 무기라니요……? 저는 초크센에 있을 때도 기본 검술조차 배운 적이 없습니다.”

노미텐이 다시 울먹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에리한은 슬쩍 손을 뒤로 뻗어 노미텐의 손바닥을 쓸었다. 검을 쥐는 사람의 손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손바닥이나 손가락 사이사이 굳은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소리오닌의 오빠라는 사람은 겁도 많고, 활동적인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중 누구도 노미텐의 말을 믿어 주지 않겠지……. 에리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였다.

“우선 저 반역자를 감옥에 가둔 뒤에 조사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자하만 백작의 측근이 일어나 노미텐을 가리켰다. 

“아직 반역자라고 하기에는……!”

에리한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백작의 미소는 더욱 더 진해졌다.

“반역자가 아니라도, 그는 초크센에서 도망친 귀족입니다. 감옥에 가둬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죠. 지금 왕자님은 법을 어기고, 바론에 위해를 가한 사람을 옹호하시려는 겁니까?”

“자하만 백작.”

“아니면…… 그 잘난 소리오닌이라는 여자 때문에, 법을 어기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왕자님이라도 그건 봐 드릴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 한 사람도 의견을 굽히지 않은 채 대립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대신들의 마음속에는 점점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그래요. 제 생각도 자하만 백작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왕자. 지금 왕자가 하는 말은 바론을 배신한 죄인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그런 발언은 좋지 않습니다.”

왕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과 노미텐, 그리고 에리한을 번갈아 쳐다본 뒤 명령했다.

“저 노미텐 알몬느를 지하 감옥에 가둬라. 자세한 얘기는 그 곳에서 들어도 충분하겠지.”

왕비의 말에 회의장 앞에 일렬로 서 있던 병사들이 노미텐을 끌고 갔다. 에리한이 깜짝 놀라 그것을 제지하려 했으나 백작이나 왕비가 가만히 두지 않았다. 

노미텐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회의장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대신들을 본 자하만 백작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저는 소리오닌과의 결혼은 절대 반대입니다. 자기 오빠와 바론을 무너뜨릴 계획을 짜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을지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조만간 그 여자도 불러서 철저하게 조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백작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에리한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에리한은 이미 분노로 두 눈에 핏줄이 빨갛게 서 있었다. 

“자하만 백작…… 두고 봅시다. 내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에리한에게 멱살을 잡히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진 백작은 그에 굴하지 않고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에리한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마음껏 해보시지요. 어차피 저놈과 소리오닌은 처형당하게 되어있고, 에리한 님은 위나와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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