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백작은 오히려 큰 소리로 노미텐을 향해 욕을 내뱉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은 노미텐은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고였다.
“제가 무슨 짓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네! 저는 여기에 붙잡혀 있지 않았습니까!”
노미텐의 처절한 외침에도 백작은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의 태도에 답답해진 노미텐이 자신을 묶은 밧줄을 풀려고 몸부림 칠 때였다. 노미텐의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니지, 노미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내가 결정하는 게다.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백작의 조용한 귓속말에 노미텐의 몸이 굳어졌다. 백작은 자신이 단순히 초크센의 도망친 귀족이라서 잡아온 게 아니었던 것이다.
절망감으로 천천히 물들어가는 노미텐을 본 백작은 숙였던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서 대기하던 사병들에게 명령했다.
“끌고 가. 시끄럽게 반항하면 재갈을 물려라.”
“네, 알겠습니다!”
사병들이 노미텐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결국 또 이렇게 속았다는 걸 알게 된 노미텐은 반항할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동생 생각뿐이었다.
“소리오닌……. 미안해…….”
마차로 끌려가는 길에 눈물자국이 뚝뚝 떨어졌다.
***
회의장은 아침부터 시끌시끌했다. 큰 소리는 내지 않고 있지만 서로 자신의 세력이 원하는 바를 주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탕탕!
시종장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한 박자 숨을 고른 시종장이 말했다.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전화와 왕비님, 그리고 왕자님께서 오시는 중이니 예를 갖춰 주십시오.”
그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요 근래에 들어 바론 최대의 공식회의이다 보니, 모두 한껏 격식을 차려 입고 온 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과 왕비, 왕자까지 차례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역시 모아놓고 보니 세 사람의 외모는 바론에서 제일가는 미모였다. 새삼 감탄한 대신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웃는 얼굴로 인사를 받은 왕이 제일 상석으로 자리를 잡고 그 아래 왕비와 왕자가 자리를 잡았다. 세 사람이 앉고 나서야 대신들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시녀들과 시종들은 다과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 이 날을 위해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부족한 아들이지만, 바론을 이끌어갈 미래의 왕이니. 부디 좋은 선택을 부탁드립니다.”
왕의 직접적인 당부에 대신들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대놓고 고르라니. 어지간히 급했나보다 싶었다.
에리한은 모여 있는 대신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요 며칠간 중립의 입장에 있는 대신들을 만나 설득하느라 힘이 들었다. 물론 다 넘어오지는 않았겠지만, 분명히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아바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앞으로 바론을 이끌어갈 사람입니다. 오늘의 선택이 저와 바론의 앞날을 결정지을 수 있으니 부디, 현명한 선택을 부탁드립니다.”
에리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여기저기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에리한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왕비 옆에 앉아 있는 자하만 백작을 슬쩍 쳐다보았다.
분명히 백작이 뭔가 방해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며칠 동안 잠잠했다.
지금 회의에서도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다. 오히려 왕비의 얼굴이 초조해 보였다.
백작이 포기했나? 아니,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찜찜한 기분이 마음 한구석에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에리한의 걱정과는 다르게 회의는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자하만 백작은 몇 마디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긴 회의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최종 결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최종 결정을 내려 볼까 합니다.”
더 이상 새로운 의견이 나타나지 않는 걸 확인한 왕이 회의 종료를 선언하고, 결정을 지으려 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전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동안 가만히 지켜만 보던 자하만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다들 의아한 얼굴로 백작을 주목했다.
“자하만 백작?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요?”
“그렇습니다, 전하. 제가 이 문제로 몇날 며칠을 고민했으나…… 이 이상 숨겨서는 안 될 것 같아 지금이라도 얘기하려 합니다.”
“음? 대체 어떤 일이기에?”
백작의 말에 왕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바로…… 반역자에 대한 일입니다.”
백작이 내뱉은 말의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들 굳어지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만 가득했다.
“바, 반역자라니요?”
대신 중에 한 사람이 소리쳤다. 그 말을 시작으로 회의장 전체에서 큰 소리가 오갔다. 모두들 당황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사고가 되지 않는 듯 했다. 그것은 자하만 백작의 바로 위에 앉아 있는 왕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반역자에 대한 얘기는 이 자리에서 처음 듣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자신의 사촌을 바라보는 왕비의 눈이 뭔가를 찾는 듯 번뜩였다.
쾅!
왕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회의장 테이블이 울렸다. 저마다 소리를 높이던 대신들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한 번 훑어 본 왕이 고개를 돌려 백작을 바라봤다.
“자하만 백작. 무슨 근거로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린 건가?”
왕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의 눈빛을 받은 백작이 움찔했지만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제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증거?”
“네. 저에게 틀림없는 증거가 있습니다.”
말을 마친 백작은 자신의 품에서 종이뭉치를 꺼내들었다. 오늘 아침 위나에게서 받아 온 위조 서류였다. 그 서류를 손에 든 백작이 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모두의 시선이 백작의 손에 들려 있는 서류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우러러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 백작은 짜릿함을 느끼며 말을 이어갔다.
“그 반역자가 준비한 무기들과 용병들에 관한 서류입니다. 제가 몇 번을 살펴봤지만, 어느 하나 의심할 것 없는 사실들이었습니다.”
자하만 백작은 손에 있던 서류를 왕에게 공손하게 넘겼다. 그에게서 받은 서류를 읽어보던 왕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게…… 사실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도 너무 놀라서 한동안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왕은 크게 숨을 내쉬고 서류를 에리한에게 넘겼다. 에리한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왕에게서 받은 서류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에리한의 눈에 ‘하콧의 비늘’ 이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페릴과 의심스럽다며 찾아보던 내용이었다. 이게 그 반역자의 손에 들어갔던 건가?
하지만 그 쪽 전문인 페릴조차 제대로 된 꼬리를 잡지 못했는데……? 에리한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하만을 바라봤다.
“자하만 백작. 이 증거가 되는 서류들은 어떻게 입수하셨습니까? 꽤나…… 비밀스러운 증거들 같은데.”
에리한의 물음에 백작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예리한 왕자라면 자신부터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자하만 백작은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위나에게 좀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어서, 일반 가게가 아닌 곳을 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우연찮게 위험해 보이는 거래를 목격했죠.”
“그 거래가…….”
“네, 하콧의 비늘을 비롯한 무기들의 재료를 거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거래한 자를 몰래 따라가서 잡게 된 것입니다.”
말을 마친 백작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말만 들으면 엄청나게 운이 좋은 발견이었다.
“그, 그럼 자하만 백작이 우리 바론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인가?”
증거 서류를 돌려 본 대신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기에 쓰인 무기들과 용병들의 숫자들만 보더라도 만약 반역이 일어났으면 꽤 큰 타격이 있을 뻔했다.
자하만 백작은 다시 한번 자신을 우러러 보는 시선에 만족감을 느끼며 서 있었다.
“아니, 근데 이렇게 엄청난 계획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정도의 준비는 웬만한 자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혹시…… 이 중에 있는 게 아닙니까?”
이미 한 번의 큰 충격을 받은 대신들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당연히 저희들 사이에서는 그런 배신자가 나타날 리 없지요. 저희는 전하의 충신들 아닙니까?”
“그, 그렇지요. 그럼 이런 반란을 일으키려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리한 또한 궁금했다. 자신도 그 사람을 찾으려고 꽤나 애썼는데, 증거조차 잡지 못했다. 그런데 자하만 백작이 이렇게 빨리 잡았다고? 뭔가 이상했지만 우선은 잠자코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네. 제가 여기서 더 기가 막힌 사실을 하나 더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갑자기 안타까운 얼굴을 한 자하만 백작이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있던 시종을 불러 정원에 있는 사병을 불러 오라 명령했다.
얼마 후 사병에게 붙잡혀 오는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 젊은 남자에 시선을 모았다. 그 장면을 본 자하만은 속으로 크게 웃었다. 승리는 내 것이지!
사병의 앞으로 간 백작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노미텐 알몬느. 이번 반역의 주동자이자, 소리오닌 알몬느의 오라버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