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차를 한 모금 마시려던 소리오닌이 급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리오닌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세리가 한숨을 폭 쉬었다.
“야옹이요. 저희가 사브만에 가 있는 동안 다른 집을 찾은 걸까요?”
“그, 그러게…….”
“섭섭하다, 그래도 귀여웠는데.”
세리는 입술을 삐죽이고 괜히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섭섭해 하는 세리에게 소리오닌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한 번 정도는 찾아올 줄 알았다. 그 때문에 바론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꽤나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그의 흔적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오갈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안 오는 거 보면 아마 마음이 떠났다 생각해야겠지.
소리오닌은 속으로 짧은 한숨을 쉬고 차를 마저 마셨다. 그냥 야옹이로 남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그나 자신이나 서로에게 너무 많은 못된 말들을 주고받았다.
돌이킬 수 없는 거겠지.
“소리오닌 님?”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셔요? 저는 이만 가야 할 거 같아요. 저녁 시간이다 돼서요.”
“벌써?”
세리는 쿠키를 담아 온 그릇을 정리했다. 세리의 말에 화들짝 놀란 소리오닌도 그릇 정리를 거들었다.
“벌써라뇨. 원래 오늘 쉬는 날도 아닌데 에리한 님이 특별히 불러내 주신걸요! 저녁까지는 돌아가야죠.”
“아, 그래. 그렇구나……. 혼자 갈 수 있어?”
“네! 이제 여기서 성까지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어요.”
허세가 가득한 세리의 대답에 소리오닌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를 마주 보고 함박웃음을 지은 세리는 상체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소리오닌 님, 또 놀러 올게요. 저 3일 뒤에 쉬는 날이에요!”
“알았어. 힘들면 굳이 안 와도 돼. 쉬는 날 많지도 않은데…….”
“저는 소리오닌 님이랑 이렇게 맛있는 거 먹는 게 제일 힘나는 일인 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말만이라도 너무 고마웠다. 소리오닌은 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그래. 너랑 만나는 날만 기다리고 있어.”
“으음, 거짓말.”
“응?”
“소리오닌 님은 에리한 님이랑 만나는 게 제일 좋잖아요. 에리한 님 만나는 것만 기다리시는 거 아니에요?”
세리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또다시 놀리기 시작하는 세리를 무섭지 않게 흘겨본 소리오닌이 세리의 등을 밀었다.
“아니거든요! 너 얼른 가.”
“농담이었어요, 소리오닌 님! 그럼 문단속 잘하시고, 몸조심하시고요!”
“응, 세리, 너도. 해 떨어지기 전에 얼른 가야겠다.”
“네!”
세리는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들었다. 소리오닌도 세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크게 손을 흔들고 난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에리한이랑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많이 바쁜가 보다. 괜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매일 티 타임이나, 저녁은 함께 했으니까. 그것도 습관이 됐나보다.
소리 없이 식탁을 한번 쓰다듬은 소리오닌은 괜히 싸늘한 공기가 느껴져 팔뚝을 한 번 쓸어내렸다.
***
“위나! 위나!”
자하만 백작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급하게 문을 열었다. 오전 조찬 회의를 간다고 아침 일찍 나선 그는 점심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돌아왔다.
요즘 한 번 나가면 늦은 시간까지 소식이 없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오자 위나 자하만은 의아한 얼굴을 하고 그를 마중했다.
“아버님? 오늘은 일찍 돌아오셨네요?”
“그래.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중요한 일이요?”
한 손에 다 쥐어지는 위나의 가느다란 팔뚝을 잡아챈 백작이 그녀를 데리고 서재로 들어갔다.
“아, 아버님! 아파요!”
“미, 미안하다. 마음이 급해서……!”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자하만 백작이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다음 얘기했다.
“사브만에서 드디어 답변이 온 모양이야. 소리오닌의 혼인 문제 말이다.”
“네? 뭐라고 왔다던가요?”
“사브만 측에서 혼인을 취소한다고 했다더구나. 이제 에리한 측에서는 아무것도 걸릴 게 없다는 입장이야.”
“하! 그렇겠네요. 대놓고 소리오닌의 혼인이 취소됐다는 걸 공식화 한 걸 보니.”
정확한 딸의 지적에 백작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오늘 회의로 인해 확실히 패가 갈린 걸 알 수 있었다.
에리한과 소리오닌의 결혼 찬성과 반대. 그 수가 비등했다. 자신을 비롯해서, 에리한과 소리오닌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뒤에는 왕비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별 의견이 없었던 왕은 결혼을 찬성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 같았다.
며칠 뒤에 있을 회의에서 결정날 텐데……. 아무래도 에리한이 자신의 편을 늘리려고 동분서주하겠지.
“아버님!”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있던 백작이 위나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으, 으응?”
“아버님, 걱정 마세요. 지금 그쪽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붙어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래. 그렇지.”
위나는 백작의 손을 꼭 쥐었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만 잘 넘어가면 자신은 그 붉은 드레스를 입고 왕자의 옆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잘 됐네요. 지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멍청한 놈을 밝힐 때가 정해졌잖아요.”
위나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눈동자와 머리색에 맞춰 칠해 놓은 빨간 입술도 깊은 호선을 그렸다.
“위나?”
“그 회의에서 밝혀 버리죠.”
“회의에서?”
“네! 그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 앞에서 밝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그 계집애와의 결혼을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일사분란하게 이어지는 위나의 설명에 백작의 얼굴에도 점점 미소가 번져나갔다.
“하하핫!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힘들게 날짜를 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 증거들도 모여 있겠다, 놈도 준비되어 있겠다. 미룰 필요가 없구만!”
“그럼요, 저희는 바론을 위해 그 놈을 잡아 놓은 거잖아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자신의 딸이지만, 정말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비상했다. 자하만 백작은 뿌듯한 마음에 위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말이 맞다. 그 놈은 위험한 놈이야. 우리는 바론에 충성을 다한 거지.”
“제 말이 그 말이죠!”
“위나, 그럼 서류를 다시 한번 점검해 두어라.”
“네,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봐도 잘못된 점은 단 하나도 찾지 못할 거예요.”
위나는 완벽하게 위조되었던 서류를 떠올렸다. 그쪽 분야의 전문가가 오더라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위나는 얼른 그날이 왔으면 했다. 그 꼴 보기 싫은 계집애가 사라지는 걸 보는 순간. 생각만으로도 가슴 가득 충만함이 넘쳤다.
“하아, 그래. 에리한은 너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아버님.”
“그냥 성가신 벌레가 왔다 갔다고 생각하자꾸나. 조금 귀찮은…….”
자하만 백작이 위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어느 날 뚝 떨어진 것 같은 그 계집애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생도 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이렇게 고생 끝에 얻은 승리가 얼마나 달콤할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네, 이제 며칠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자하만 백작과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위나는 그림 뒤쪽에 있는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며칠 전 백작이 전해 준 종이뭉치가 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서류를 훑어보던 위나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몇 번을 확인해도 완벽했다. 이게 있으면 소리오닌은 그 놈의 동생이란 이유만으로 에리한과 결혼은 꿈도 못 꿀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더 좋을 텐데. 확 죽어 버려라.
위나는 차갑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곱게 접어 둔 서류를 다시 금고에 넣은 뒤 옷장을 열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붉은 드레스가 한 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쁘다. 살을 좀 더 빼야지. 그래야 이 드레스에 완벽하게 어울릴 거야.”
떨리는 손끝으로 드레스를 만졌다. 매끄럽게 미끄러지는 감촉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위나는 드레스의 장식까지 하나하나 손으로 매만졌다. 드레스 위를 돌아다니는 그녀의 손가락은 뼈가 튀어나올 만큼 말라 있었다.
***
자하만 백작은 콧노래를 부르며 지하 감옥으로 내려갔다. 드디어 왕자의 혼인이 결정되는 최종 회의가 있는 날. 에리한을 위한 깜짝 선물을 가지러 오는 길이었다.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사병에게 슬쩍 웃어 보인 백작이 문을 열라 명령했다.
노미텐은 감옥의 제일 깊숙한 곳, 그 안에서도 여전히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노미텐 알몬느?”
백작이 온화한 목소리로 노미텐을 불렀다. 노미텐은 그 소리에 바짝 고개를 세우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를 본 백작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밥을 잘 먹고 있으란 얘기를 어기지는 않았는지, 건강에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였다.
“자, 이제 나갈 시간이다.”
노미텐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백작은 감옥의 문을 열어 노미텐을 나오게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미텐은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다. 그런 그의 뒷덜미를 잡아챈 백작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을 결박해서 마차에 실어 놓아라!”
그의 명령에 몇 명의 덩치 좋은 사병들이 노미텐을 묶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손과 발이 묶여 버린 노미텐이 백작을 돌아보았다.
“푸, 풀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용히, 가만히 있으면 분명 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닥쳐라! 네가 한 짓을 알고도 내가 어찌 너를 풀어 주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