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00)

080.

“자하만 백작…….”

백작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의 궁에 찾아와 무례하게 굴었던 위나 자하만이 떠올랐다.

에리한은 그 붉은 머리를 생각하자 다시 그때의 불쾌했던 기분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왕비도 왕비지만, 그녀의 힘을 등에 업고 있는 백작도 가만히 있지 않을게다. 아마 자신들의 측근을 통해 어떻게든 반대를 하려고 하겠지.”

“그렇겠군요.”

“물론 너의 결혼을 반대하는 대신들만 있는 건 아니야. 자하만 세력을 경계하는 사람들은 너의 결혼을 찬성하겠지.”

더군다나 초크센의 공녀라 하면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자신들이 더 힘이 세질 거라는 생각도 밑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걸 해결하는 것 또한 에리한이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일들 중에 하나가 될 것이고. 도이첸은 뒤에 할 말은 속으로 삼킨 채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저희 쪽 세력을 어떻게든 더 설득하는 게 중요하겠군요.”

“우선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에리한이 깊게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왕은 아들의 인사에 그저 진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마침 내일 아침에 대신들과 조찬 회의가 있으니, 그때 너의 결혼에 대해 말해보겠다. 그러면 조만간 다시 회의가 열리지 않겠느냐. 그때는 참석해서 네 의견을 말하도록 해라.”

“그러겠습니다. 어마마마께는…….”

“그건 내가 오후에 따로 전하마. 네가 얘기해봤자 서로 큰 소리만 날 뿐이지.”

에리한은 이어지는 왕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서류를 다시 아버지에게 넘긴 에리한이 바임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본 도이첸은 서류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이 짧은 한 줄의 글을 얻기 위해서 아들은 참 많은 고생을 겪었다. 앞으로는 좀 순탄하게 넘어갔으면 하는데 말이지. 그보다 더 큰 난관들이 버티고 있으니…….

“쯧.”

혀를 짧게 찬 도이첸이 사브만에서 보낸 서류를 다시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내일 있을 회의가 얼마나 아수라장일지 안 봐도 뻔한 느낌에 미간에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났다.

***

“왕자님, 잘 되셨습니다.”

왕의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바임이 축하를 해왔다. 그의 말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에리한이 바임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이제 내가 하기에 달린 거지. 자하만 쪽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 거지?”

“현재의 상황은 자세히 알아봐야겠지만…… 만만치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위나 자하만과 내가 혼인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더 많아졌을 거야.”

에리한이 며칠 전 대신들과 회의를 가졌을 때 자하만 옆을 지키던 귀족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꽤 다양한 직책을 가진 귀족들은 앞 다투어 자하만 백작에게 붙어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럼 저는 그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조사해 보겠습니다.”

“응, 부탁해.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네.”

바임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각자의 생각에 빠진 채 왕자의 궁으로 돌아왔다.

“왕자님.”

시종이 열어주는 문을 통과해 로비로 들어갔을 때였다. 아침부터 와서 에리한을 기다리고 있던 페릴이 후다닥 뛰어왔다. 여전히 곱슬거리는 분홍머리가 눈에 띄는 남자였다.

“아, 페릴. 오래 기다렸나? 아바마마께 다녀오느라.”

“아닙니다. 저도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서 얘기하지.”

에리한이 두 사람을 데리고 집무실로 향했다. 바임은 그들을 따르는 시종들과 시녀들에게 당분간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하고 문을 닫았다. 

집무실에 모인 세 사람은 중앙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페릴 오늘 내가 부른 이유는, 하콧의 비늘 때문이야.”

“아, 네. 왠지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요 근래 다시 생각나서 조사를 해봤는데 말입니다.”

페릴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그 안에는 뭔가가 적혀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이게 뭔가?”

종이를 훑어 내려가던 에리한이 의아함을 담아 페릴을 바라보았다. 바임 역시 처음 보는 단어 조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게 하콧의 비늘을 사간 사람들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음?”

[밝은 그림자, 하늘을 나는 물고기, 달리는 나무, 솟아오르는 빗방울]

사람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기괴했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에리한과 바임 두 사람의 의문이 더해갔다.

“아, 저희는 물물교환을 하거나 물건을 살 때 재미로 가명을 씁니다.”

“가명을?”

“네, 저희들끼리 거래하는 것들 중에는 가끔가다 불법적인 것들도 섞여들어올 때가 있으니까 신원 보호 차원이죠. 거기다 재밌잖아요.”

페릴이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이 이상한 단어들이? 뭐가 재미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한참 대꾸가 없는 에리한과 바임을 보던 페릴이 입을 삐죽인 후에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재밌지 않습니까? 아니, 우선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가명들 좀 이상하다는 겁니다.”

“응. 이상해.”

에리한이 즉각 반응하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모순되는 단어들을 쓰는 건가?”

“아, 그거는 만든 사람 마음이니까요. 단어 자체에 크게 위화감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여전히 감을 못 잡고 있는 에리한의 물음에 페릴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 가명을 쓰는 사람들. 모두 처음 보는 사람들이에요. 더군다나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알아봤는데, 모두 복면을 쓰고 얼굴을 가렸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듣는 가명에, 복면까지? 수상한데…….”

“수상하죠! 그것도 엄청 수상합니다!”

페릴이 종이를 펄럭이며 소리쳤다. 딱 봐도 바론 왕국에 불만이 가득한 놈들인 게 분명했다. 

“이 가명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짐작 가는 건 없고?”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좀 더 알아보려고 했는데…….”

“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페릴의 태도에 에리한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또 뭐가 있는 건가?

“요즘 너무 바빠서 말입니다. 이상하게 요 몇 달 간 새로운 병사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뭐?”

“병사에 지원하는 남자들 수가 확 줄었어요. 이거 때문에 군에서도 문제가 많습니다.”

페릴이 자신의 볼을 가리키며 다크서클이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울먹였다. 그의 귀여운 투정에 피식, 짧은 웃음을 내뱉은 에리한이 종이를 바임에게 넘겼다.

“바임. 이 가명들 다른 종이에 옮겨 적어나 봐.”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지?”

“네. 최대한 빨리 알아봐야겠습니다.”

바임의 답에 에리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론은 왕과 왕비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다. 근데 왕과 왕비 쪽에서 따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수상한 행보가 보인다는 것은 어디선가 또 다른 세력이 힘을 키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왕자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시간 나는 대로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네!”

고개를 숙여 인사한 페릴이 집무실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아, 맞다. 페릴?”

“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소리오닌 님이 베개가 너무 좋다고 하더군. 푹신푹신해서 잠자기 딱 좋대.”

에리한의 말이 끝나자 페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져 나왔다. 진심으로 뿌듯해 하는 페릴의 표정에 에리한 또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페릴이 나가려던 몸을 돌려 다시 에리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선물이 칭찬을 받았다는 게 좋은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소리오닌 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깃털을 드리겠습니다! 아, 그럼 혹시 왕자님도 깃털이 필요하십니까?”

페릴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기대감으로 잔뜩 반짝이는 페릴을 향해 고개를 흔들어 보인 에리한은 정색을 하고 답했다.

“난 절대로 원하지 않으니 혹여 나중에라도 줄 생각은 하지 말도록.”

“……네…….”

시무룩한 얼굴을 한 페릴이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갔다. 

둘의 대화를 듣던 바임이 궁금한 듯한 얼굴로 에리한을 쳐다봤다. 그의 눈빛을 읽은 에리한이 웃으며 말했다.

“페릴 취미가 물물교환이라고 하더군. 저번에 오하로칸의 깃털을 얻어서 소리오닌 님의 베개를 만들어줬거든.”

“오하로칸? 그 몬스터의 깃털을 베고 잔다고요? 소리오닌 님 생각보다 대단하시네요.”

“내 생각에는 오하로칸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거 같아.”

“아아, 그럴 가능성이 더 크겠군요.”

대화를 나누던 바임은 오하로칸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다음에 깃털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페릴에게 부탁해볼게.”

“아뇨. 저도 그닥…….”

“아무래도 그렇지?”

두 사람 모두 떨떠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페릴의 취미 덕분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알아채서 다행일지도.”

에리한은 진지한 눈으로 종이를 내려다봤다. 대체 누가 사들인 걸까? 

***

소리오닌은 오랜만에 놀러 온 세리와 함께 마주 앉아 있었다. 에리한은 세리만 데려다 준 뒤에 할 일이 있다며 다시 돌아갔다. 

“소리오닌 님, 이 쿠키 맛있지 않아요? 요즘 제가 새로 배운 레시피로 만들었어요.”

“음, 그래? 맛있어!”

“확실히 초크센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배우고 있어요. 초크센에서는 청소만 했는데, 여기는 며칠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담당이 바뀌니까 더 재미있어요!”

세리가 즐거운 얼굴로 쿠키를 집어 들었다. 소리오닌도 세리와 똑같은 쿠키를 집어 들고 웃음 지었다. 

“린셀 님이 돌아오셨잖아요. 그런데 아기를 가지셨다는 걸 듣고 엄청 놀랐잖아요! 참, 민츠라고, 바임 님의 동생도 이제 왕자궁에서 일하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둘이 나이도 비슷하지 않아?”

“네, 맞아요! 동갑이에요.”

“잘 됐네, 같이 얘기할 사람이 더 늘었구나.”

소리오닌의 말에 세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츠와는 꽤 친해졌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소리오닌의 집에 같이 놀러오고 싶었다. 그때, 귀여운 민츠를 생각하던 세리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어, 그러고 보니 소리오닌 님. 여기에 오고 나서 야옹이가 한 번도 안 오네요?”

“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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