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에리한도 그날을 생각하며 물었다. 무도회에 늦어 버려서 자세히 묻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덤덤한 반응에 꽤 놀랐었다.
“설마요! 정말 몰랐어요. 근데, 저랑은 너무 동떨어진 위치라 실감이 나지 않다 보니까…… 아, 그렇구나. 라는 생각만 나더라고요.”
“아아. 너무 놀라서 오히려 반응이 그랬던 거군요.”
“맞아요, 그거예요!”
에리한의 맞장구에 소리오닌이 반색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자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어쨌든 그 이후에도 저에 대한 소리오닌 님의 태도가 변하지 않아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에리한 님은 에리한 님이잖아요. 지위가 변한다고 사람이 변하지는 않죠.”
“물론 그렇지만, 세상에는 소리오닌 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렇기에 소리오닌 님이 특별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 소리오닌은 다시 한번 얼굴이 붉어진 채로 미소를 머금었다.
“아, 여기!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이네요.”
소리오닌이 정원에 있는 작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에 에리한은 소리오닌과 함께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둘의 귓가에 음악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가락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에리한이 먼저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소리오닌도 그에 맞춰 천천히 테이블 위를 돌아다녔다. 한참 손가락으로 장난치듯 부딪히던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깜깜해진 하늘을 본 소리오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어서 가봐야겠어요!”
“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녀의 대답에 에리한은 오히려 굳어진 얼굴이 되었다.
“정말 염치없지만, 매번 기다리라는 말만 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소리오닌 님을 모셔오고 싶은데…….”
“제가 언제 이곳으로 오게 되는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에리한 님의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소리오닌은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에리한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가 너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힘든 사람은 에리한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녀의 따뜻한 위로에 에리한의 표정이 다시 풀어졌다. 소리오닌의 앞에서는 안 좋은 감정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녀와 함께라면 하루하루가 행복할 것만 같았다.
***
자하만 백작은 왕비 쪽에 서 있는 측근들에게 노미텐의 존재를 알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곳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당장 노미텐을 이용해 소리오닌을 잡아들이자는 말부터, 이 내용을 당장 왕비에게 보고해야한다는 말까지.
사람이 여러 명이다 보니 생각하는 것들도 가지각색이었다.
백작은 몇 번 책상을 내리친 후에야 그들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러고 나서 조심스럽게 자신과 함께 뜻을 모은 그들에게 제안을 건넸다.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까지 저희가 계획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네! 아주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곧 완성이 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나 양이 왕자님과 꼭 혼인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대신들의 탐탁지 않은 표정을 읽은 자하만이 울컥하고 차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 딸과 왕자님의 결혼이 꼭 필요하지요.”
백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러게 말이지요! 백작, 뭐 좋은 수가 없겠습니까? 왕자님이 저러고 버티는데 아주 죽겠습니다!”
“맞습니다! 전하는 왕자님을 방관하고 있고, 왕비님은 결국에는 저희 편이 되지 못하니……. 저희 속만 바짝 타들어갑니다!”
“이러다 저희만 뒤집어쓰는 건 아닌지……”
평소에는 한마디도 못하다가 이제와 옳다구나 하고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다 버려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들의 힘이 필요할 때였다. 자하만 백작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위나의 결혼을 위해서 그 계집의 오라버니를 잡아놓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놈을 어떻게 쓰자는 말입니까?!”
“흠, 밤새 고민을 해 봤는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백작의 길고 긴 설명이 끝나자, 자리에 앉아 있던 대신들은 모두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비밀스런 회의가 끝난 뒤 은밀하게 집으로 향했다.
대신들이 떠나고 텅 빈 회의실 안에는 백작만이 앉아 있었다. 저들도 한 배를 탄 이상 배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계집의 오라버니를 잡는 바람에 일이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이제 구체적인 증거들을 만들기만 하면 끝이었다. 백작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기해 있던 마차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음?”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눈에 에리한의 모습이 보였다. 이 시간에 왜 궁에 안 있고 밖에 나온 거지?
의아함에 그를 자세히 보니, 그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소리오닌의 얼굴도 보였다.
저러고 다니니 소문이 안 날 리가 있나. 격 떨어지게 무슨 짓이야! 못마땅한 표정을 한 백작이 짧게 혀를 찬 뒤에 고개를 돌렸다.
***
성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왔는데도 금세 도착한 것 같은 느낌에 에리한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소리오닌이 바론으로 돌아온 뒤부터 거의 매일 만나고 있지만, 매번 헤어질 때면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돌려보내는 게 아쉬운 건 소리오닌도 마찬가지라 두 사람은 그녀의 집 앞에서 한참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결국 소리오닌이 웃음을 터뜨리며 에리한의 등을 밀었다.
“이러다 여기서 날 새겠어요.”
그녀에게 등을 떠밀렸지만 정말 가고 싶지 않은지 에리한은 발에 힘을 줬다.
“어서요, 내일도 할 일이 많을 거 아니에요. 가서 좀 쉬세요.”
“괜찮습니다.”
“뭐만 물어보면 다 괜찮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괜찮은데.”
“제가 안 괜찮아요! 이러다 왕비님한테 또 책잡혀요.”
소리오닌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에리한은 두 손을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 얘기가 나오면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죠?”
“괜찮아요. 저기 병사들도 있잖아요.”
소리오닌이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을 가리켰다. 에리한은 그 곳을 보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병사들이 있으니 수상한 사람이 왔다 가면 알려주겠지.
“알겠습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오늘 궁에 다녀오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푹 쉬세요.”
“네, 알겠어요. 에리한 님도 푹 주무세요. 좋은 꿈 꾸시고요.”
소리오닌의 잘 자란 인사를 들은 에리한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꿈에서는 소리오닌 님을 놓지 않아야겠습니다. 설마 꿈에서까지 저를 문전박대 하는 건 아니겠지요?”
“네에? 이게 무슨 문전박대예요!”
“저는 충분히 그렇게 느꼈습니다. 헤어지기 싫은 건 저만 그런가 싶었어요.”
“그럴 리가요. 에리한 님, 이렇게 제 말꼬리 잡으면서 시간 끌어도 안 봐줄 거예요. 얼른 가요.”
“들켰습니까?”
“네, 빤히 보이거든요!”
소리오닌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 딴에는 무서운 표정이라고 지은 거겠지만, 솔직히 에리한은 소리오닌이 어떤 말을 해도 그저 귀여웠다.
자신의 친동생이랑 동갑인데, 귀여운 척을 해도 징그럽기만 한 린셀과는 천지차이였다.
에리한은 크게 소리 내 웃고는, 소리오닌을 꼭 껴안은 뒤 물러났다. 이러다 정말 새벽까지 문 앞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은 괜찮았지만, 소리오닌이 피곤해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 가겠습니다. 문 꼭 잠그고 주무세요.”
“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소리오닌은 천천히 걸으며 자꾸만 뒤돌아보는 에리한 때문에 또 한참을 밖에 서 있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몇 걸음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집. 하지만 에리한이 없는 것뿐인데 뭔가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에리한과 함께 있으면 따뜻했는데, 그가 없는 공간은 시린 느낌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이제 에리한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기다릴 것이다. 언제가 되더라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
“오라버니. 오셨어요?”
에리한은 업무가 끝나고, 오늘도 소리오닌의 집에서 저녁을 하고 오는 길이었다. 궁에 도착하자 생각지도 못한 두 사람, 린셀과 바임이 에리한을 마중 나와 있었다.
분명히 자신의 궁이 맞는데 두 사람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기다린 지 꽤 됐는지, 테이블 위에는 간식거리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너희가 여기는 웬일이야?”
“자꾸 바임 님이 오라버니 일을 도와야 한다고, 내일부터 여기로 업무를 보러 온다잖아요. 오라버니가 안 된다고 해 주세요!”
린셀이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이제 시중드는 일은 안 해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하고 많은 직책과 일들 중에 굳이 오라버니의 시중을 들고 싶다고 우기는지 에리한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하러 온 참이었다.
“바임, 괜찮아. 너는 여기 올 필요 없어. 좀 있으면 아바마마께서 더 높은 관직을 내려 주실 거야. 뭐 하러 고생을 해.”
에리한도 린셀의 의견에 동의했다. 공주의 남편이 될 텐데, 무슨 자신의 시중인가. 린셀이 달려올만했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일은 필요 없습니다. 불편합니다. 왕자님 옆에서 일을 하는 게 제일 편합니다.”
“뭐?”
“왕자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게 제일 편하다고 했습니다.”
바임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의 반응에 에리한도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나는 너 필요 없다니까?”
“분명히 필요하실 겁니다.”
“분명히 필요하다고?”
“물론이죠.”
둘의 대화에 린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째 에리한도 바임을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에리한이 린셀의 어깨를 툭 쳤다.
“들었지, 린셀? 바임이 자기가 나한테 꼭 필요할 거래.”
“오라버니, 그럴 리 없잖아요! 왜 처음이랑 반응이 달라지셨나요?”
“뭐, 이래봬도 나는 바임한테 약하다고. 바임이 꼭 일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내쫓아.”
에리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돌봐준 바임이 계속 있어주면 편하긴 할 터였다.
“오라버니!”
무책임한 에리한의 태도에 린셀이 소리를 빽, 내질렀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바임이 린셀의 손을 잡아 진정시켰다.
바임한테 손을 내준 린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반응을 보던 에리한이 코웃음을 쳤다.
“아주 죽고 못 사는구만.”
오빠의 얄미운 발언에 린셀도 같은 말로 받아쳤다.
“오라버니도 만만치 않으시면서, 누가 누굴 비웃는 건가요?”
“뭐?”
“오라버니야말로 소리오닌 님이 이름만 불러줘도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시던데.”
“흠, 흐흠! 내가 그 정도냐?”
“어머? 부정은 안 하시네요?”
“맞는 말이지, 뭐.”
에리한은 그 짧은 사이에 소리오닌이 생각났는지 어느새 부드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 극적인 변화에 린셀은 말다툼을 할 의욕도 없어졌다. 결국 크게 한숨을 쉰 린셀이 맘대로 하라는 말을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린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