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00)

075.

에리한에게 감싸여 정신없이 복도를 지나니, 응접실이 보였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앞에 있던 시종이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에게 고개를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한 소리오닌이 안으로 발을 옮겼다. 

“소리오닌 님!”

색색깔의 꽃이 가득 들어 있어 꼭 실내정원을 연상시키는 응접실이었다. 꽃들 사이에 앉아 있는 린셀과 그녀의 옆에는 바임이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건강해 보이는 얼굴이라서 소리오닌의 표정이 환해졌다. 

“린셀 공주님, 바임 님!”

한 걸음에 린셀 공주의 곁으로 다가간 소리오닌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공주와는 아주 잠깐 만났었지만, 특유의 밝은 분위기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린셀도 소리오닌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여기 앉아요.”

린셀이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소리오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 앉았다.

에리한도 소리오닌이 앉는 걸 보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소리오닌은 여전히 서 있는 바임을 보고 말했다.

“바임 님은 안 앉으세요?”

“아, 저는 이게 편합니다.”

그의 대답에 린셀이 입술을 삐죽였다. 

“바임 님은 아직도 자기가 신하인 줄 아나 봐요. 우리는 이제 진짜 부부인데.”

“린셀 님!”

“맞잖아요!”

“아, 아니!”

바임이 당황해서 린셀의 말을 막았지만, 린셀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 임신했거든요.”

린셀의 말을 끝으로 응접실에 적막이 흘렀다. 바임은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이마를 짚었고, 에리한과 소리오닌은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폭탄 발언을 한 린셀만이 생글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바임. 이게 무슨 말이냐?”

“와, 왕자님.”

한참동안 말이 없던 에리한이 바임을 보며 물었다. 분명 어제 돌아올 때만해도 이런 얘기는 없었다. 어제 저녁 바임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겠다며 궁을 발칵 뒤집어 놓기는 했어도, 이런 얘기는 전혀 없었다.

“사실이야? 린셀이…….”

“아이, 참! 맞다니까요?”

바임 대신에 린셀이 대답했다. 자신의 동생을 한 번 노려본 에리한이 바임을 추궁했다.

“이런 일이 있었으면 여기서 밝힐 게 아니라, 어제 어마마마와 아바마마 앞에서 얘기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거 같아서 좀 더 지켜보기로 했는데, 공주님이 말씀하실 줄은…….”

곧이곧대로 다 말해 버리는 바임이 맘에 들지 않는지 이번에는 린셀이 그를 흘겨보았다. 바임은 그 눈빛에 난감한 표정을 한 뒤 어깨를 으쓱였다. 

“린셀. 임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아니에요, 거의 확실하다고요!”

“린셀.”

에리한의 엄한 목소리에 린셀의 어깨가 축 쳐졌다.

“아직 며칠 더 지나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하아, 그래. 알았어. 며칠이 지나도 확실하면 그때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네에. 알겠어요.”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러 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린셀의 폭탄발언이라니.

그 때문에 소리오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린셀은 자신이 만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떨쳐낼 겸 소리오닌에게 대화를 걸었다.

“소리오닌 님. 중간에 큰일이 있었다면서요? 하마터면 사브만에서 못 올 뻔했다는데, 진짜에요?”

“네? 아, 네. 사브만 측이랑 오해가 있었어요.”

“그랬구나! 어떻게 보면 저 때문이잖아요. 원래 제가 사브만의 왕자와 결혼 했어야 한 건데. 괜히 소리오닌 님이 말려들어서 너무 미안했어요. 오늘 여기로 초대한 건 그 일에 대한 사과의 마음도 있으니까, 부디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아, 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다 알고 있던 일인걸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사히 바론으로 돌아왔잖아요.”

소리오닌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에리한의 옆에 다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소리오닌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에리한을 보고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에리한도 소리오닌을 마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소리오닌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순식간에 그들만의 세상으로 들어가버린 두 사람이었다. 눈앞에서 꽁냥거리는 둘을 보는 린셀의 눈이 반짝이며 빛나기 시작했다. 

“뭐야, 둘이! 이제 애정표현을 대놓고 엄청 하네요?”

“네?”

린셀의 짓궂은 말에 소리오닌이 깜짝 놀라 앞을 쳐다봤다.

“오라버니는 브리온에서 저한테 뭐라고 하시더니, 어째 저보다 더 하시는 거 같아요? 그렇게 좋으세요?”

“리, 린셀 님. 그만 하십시오.”

“왜요, 나는 그냥 보이는 대로 말하는 건데?”

바임이 옆에서 린셀을 말렸지만 그녀는 두 사람을 놀리는 재미에 푹 빠졌다. 소리오닌은 민망한 표정으로 에리한의 손을 놓았다.

에리한은 순식간에 빠져나간 온기에 아쉬움을 느끼며, 자신의 여동생을 쳐다봤다.

“좋다. 소리오닌 님이 좋아. 됐지? 이제 그만 해.”

“어머머? 웬일이야! 바임, 들었어요? 오라버니가 좋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어요!”

“린셀!”

“아, 알았어요! 두 분이 너무 보기 좋아서 장난 좀 쳤다고요. 미안해요, 소리오닌 님!”

린셀은 두 손을 들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표시를 했다. 하지만 웃음기로 씰룩거리는 입술을 감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시녀들이 가져 온 다과와 차를 마시면서 그들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너희 결혼은 언제 하려고?”

“저희야 아무 때나 상관없죠. 근데 저희보다는 오라버니가 더 문제 아닌가요?”

“흠, 솔직히 복잡해지기는 했지.”

며칠 전 왕비와 설전을 벌였던 일이 생각났는지 에리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니까요. 어마마마는 뭐라고 하셔요?”

린셀의 물음에 에리한은 소리오닌을 한 번 쳐다봤다. 그녀가 있는 곳에서 얘기를 꺼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듯 했다. 소리오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도 궁금해요! 왕비마마께서는 많이 화나셨어요?”

“소리오닌 님.”

“저는 괜찮으니까 얘기해 주세요! 해결책을 찾으려면 여러 명이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소리오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리한이 천천히 입을 뗐다.

“사브만에서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어서…… 그걸 핑계로 소리오닌 님과의 결혼은 생각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우선 사브만에서 뭔가 반응이 있어야 할 텐데.”

그의 말에 다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서류상으로 소리오닌은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전령으로라도 간단하게 알려주면 좋으련만, 사브만에서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에이, 근데 이미 신부가 그 나라에 없는데 어쩔거예요? 기다리면 분명히 취소하겠다는 연락이 올 거예요!”

“흠, 그럴까? 그쪽 사람들도 영 속을 모르겠더라고.”

에리한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거짓말을 지어낸 막내 왕자를 떠올렸다. 그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챈 소리오닌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왕세자님은 좋으신 분 같았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그렇습니까?”

“네, 그럼요!”

소리오닌은 그 정도로 난리를 치고 나왔는데,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브만에 있을 가트와 그 형제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하루 빨리 일이 잘 마무리되길 바랐다. 

어느정도 우울한 얘기가 끝났다. 린셀은 바임과 함께 다녔던 곳의 얘기를 전해 주었다. 공주님으로 이 궁 안에서만 지내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니 너무 좋았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녀의 얘기를 듣느라 생각보다 오랜 시간 머물렀던 바람에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린셀 공주님.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저도에요! 제 또래의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너무 좋았어요. 다음에도 또 놀러오세요, 제가 또 초대해도 괜찮은 거죠?”

“네, 그럼요! 얼마든지요.”

소리오닌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 린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바임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한 소리오닌은 에리한과 함께 린셀의 궁을 나섰다.

“소리오닌 님. 괜찮으시면 정원 좀 보다 가시겠습니까?”

“네? 정원이요?”

“네. 무도회 때와는 또 다른 꽃이 예쁘게 폈습니다.”

에리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오닌을 이끌었다. 주변 사람들이 의식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리한과 좀 더 있고 싶은 욕심에 소리오닌은 그를 따라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본성을 둘러싼 정원은, 아침저녁으로 조금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바람이 불어와 꽃향기로 가득했다. 각기 다른 꽃들이지만 서로의 향이 뒤섞여 새롭고, 황홀한 향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향이 너무 좋아요.”

“그렇습니까? 이 정원은 대대로 왕실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워낙 크고 화려해서 관리하는 게 힘들긴 해도 다른 나라의 귀빈들이 왔을 때도 꼭 들르는 곳이지요.”

에리한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들을 손으로 만지면서 얘기했다. 그의 눈에도 정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녹아 있었다.

“그럼, 이제 안쪽으로 가 보실까요?”

“아, 네.”

안쪽이라는 말에 소리오닌은 무도회 날을 떠올렸다. 에리한 역시 그녀와 같은 걸 떠올렸는지, 그에게서 작은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몇 걸음이나 더 걸었을까. 그녀의 눈앞에 작은 정원이 펼쳐졌다. 그때와 변하지 않은 구도와 꽃들이 소리오닌을 맞이했다.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무도회에 참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군다나 그날은 에리한이 왕자라는 걸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실감조차 나지 않았지만.

게다가 난생 처음 뺨도 맞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에리한을 막…… 더듬었었지, 그때는.

무도회에서 그의 어깨를 심하게 주물렀던 게 생각났다. 그 빨간 머리 여자가 너무 얄미워서 골탕 먹이려고 한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했다 싶었다.

이제 와서 얼굴이 붉어진 소리오닌이 혼자 키득거렸다.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를 들은 에리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음, 무도회가 생각나서요. 그때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아아, 그렇죠. 그러고 보니. 소리오닌 님은 무도회 전에 제가 왕자라는 걸 밝혔는데도 반응이 없었어요. 사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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