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00)

074.

친밀감이 가득한 행동으로도 모자라 그는 품 안에서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까지 꺼내서 보여주고 있었다.

“하, 돈도 있겠다. 같이 튀려고 하는 건가?”

그때 에리한이 갑자기 나타났다. 위나는 깜짝 놀라 몸을 더 움츠렸다. 서로 마주치게 된 두 남자가 주먹다짐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시시하게 물러났다.

“뭐야, 대체?”

남자를 보내고, 소리오닌과 에리한은 사이좋게 집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을 보던 위나는 분한 마음에 주먹을 꼭 쥐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망해 버린 나라의 공녀 주제에……! 

결국 자신은 두 사람의 변하지 않은 애정을 확인하러 왔나 싶었다. 몰려오는 허탈감에 이제 집으로 가려 하는 위나의 눈에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분명히 소리오닌과 무슨 관계가 있어 보였지? 위나는 남자 몰래 그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을에서 벗어났을 때 호위를 시켜 남자를 붙잡아왔다.

난데없이 커다란 덩치의 사내들에게 붙잡혀 온 노미텐은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왕국의 병사들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이유로 자신을 잡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쉿, 너는 내가 하는 말에 대답이나 해.”

위나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눈을 보고 말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한마디 말만 했을 뿐인데 알 수 없는 압박감에 노미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 저 소리오닌이랑 무슨 관계지? 둘이 사귀는 사이?”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대답.”

그녀의 기세에 노미텐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래? 그럼 왜 서로 껴안고, 손도 잡고…… 그런 거야?”

그녀의 말을 들은 노미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초크센에서 도망친 사람이라는 걸 들킨 게 분명했다. 소리오닌과 사귀는 게 아니라도 밀접한 관계라는 걸 알고 묻는 것 같았다.

“저는…… 노미텐 알몬느. 소리오닌과 남매입니다.”

“어머?”

노미텐의 대답에 위나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걸 낚았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겁먹고 있는 노미텐을 바라봤다. 남매라더니 성격은 완전 딴판이었다.

소리오닌이 이 멍청해 보이는 남자 같았다면 자신이 예전에 치워 버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초크센의 귀족이란 소리잖아? 아하, 너 도망쳤구나? 그러면 안 되지. 그래도 귀족인데, 혼자 살겠다고 나라를 버리고 도망이나 가다니.”

쯧, 짧게 혀를 찬 위나는 호위를 시켜 노미텐의 몸을 뒤져 보라 명령했다. 노미텐은 저항했지만, 그의 자그마한 체격으로 건장한 호위들을 떼어 놓는 건 불가능했다. 

“아가씨. 다른 건 없었고 이 돈주머니만 나왔습니다.”

호위 중 한 명이 위나에게 돈주머니를 건넸다. 꽤 묵직한 주머니를 본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이 돈으로 뭘 하려고? 우선 끌고 가.”

노미텐은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질렀지만, 곧 호위들의 손에 막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호위들에게 끌려가는 그를 보는 위나의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걸려있었다.

***

“아버님. 다녀왔습니다.”

“위나 왔느냐.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겠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위나를 맞이하며 백작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위나는 뭔가 속 시원한 얼굴로 백작을 이끌었다.

“아버님, 제가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응? 뭔데 그러냐? 기분은 왜 이리 좋아 보이는 게야?”

백작은 위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말했다. 위나는 그에게 별다른 대답 없이 지하로 내려갔다. 몇 계단을 내려갔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퀘퀘한 냄새와 함께 어두컴컴한 감옥이 나타났다. 

“위나?”

자신의 딸이 평소 제대로 사용하지도 않던 지하 감옥에 오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위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백작을 지하 감옥 제일 구석으로 데려갔다. 위나가 가리킨 곳에는 감옥에 갇혀 있는 노미텐이 있었다.

멀쩡한 얼굴을 한 청년의 모습에 백작은 더더욱 의아함이 커졌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위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이 남자는 소리오닌의 친오라버니라고 합니다.”

“뭐, 뭐? 소리오닌 그 계집애의 오빠?”

“네! 거기다, 초크센에서 바론으로 도망쳐 온 것을 제가 잡아왔죠.”

“호오……? 이놈이 초크센에서 도망쳤다 그거냐?”

백작은 위나의 설명을 듣자마자 눈을 번뜩이며 노미텐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 와 감옥에 갇힌 노미텐은 두 부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소리오닌을 알고 있는지, 자신이 소리오닌의 오빠라서 뭐가 문제인 건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청년을 본 자하만 백작은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이전부터 차근히 준비해 놓은 계획이 있었다. 다만 그 계획을 위한 미끼를 찾는 게 골치 아팠는데, 제 발로 걸어 들어오다니.

“하하, 이거 참! 역시 하늘은 우리 편이구나!”

“어떤가요, 아버님? 이걸로 다시 왕자님이 제게 올 기회가 생길까요?”

“물론이지! 위나, 우선 이놈은 여기에 가둬두고 여기에 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백작은 딸의 어깨를 잡고 당부했다. 이미 뭔가를 준비한 듯한 그의 태도에 위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걱정 마세요. 제가 잡아 온 이 배신자가 아버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 기뻐요.”

“도움이 되다마다! 이놈이 여기 있다는 건 초크센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거기에 더해 바론에 해를 끼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죠! 이렇게 나쁜 사람을 오빠로 둔 소리오닌은 왕자님 곁에 있을 수 없어요.”

서로 맞장구치며 말하는 두 부녀를 보는 노미텐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아, 아닙니다! 저는 바론에 해를 끼치려 한 게 아니에요! 저를 내보내 주세요!”

노미텐이 감옥 창살에 매달려 소리쳤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는지,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탕! 큰 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을 보는 노미텐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

“소리오닌 님, 오늘 궁으로 오시지 않겠습니까?”

소리오닌의 집에 온 에리한이 그녀에게 말했다.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찻잔을 든 소리오닌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오, 오늘요? 갑자기 왜요?”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소리오닌은 의아함이 깃든 눈으로 에리한을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깃든 의문과 불안감을 알아챈 에리한이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 어제 린셀과 바임이 돌아왔습니다.”

“네? 린셀 공주님이요? 어머나, 잘 됐네요!”

브리온에서 헤어진 지 꽤 많은 날이 지났다. 두 사람이 사랑의 도피를 한 다음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별 일 없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네. 린셀과 바임 모두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린셀이 소리오닌 님을 보고 싶어 하더군요. 그래서 자신의 궁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제가 가도 될지. 괜히 가서 왕비님께 책잡히는 건 아닐지 걱정이에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의 집으로 오는 에리한이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두는 것도 엄청 참고 있는 것일 텐데, 궁으로 갔다가 왕비님이랑 마주치기라도 하면……. 소리오닌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저 역시, 그런 문제 때문에 신중해야하지 않나 싶었는데…… 린셀이 워낙 막무가내라서. 자신의 손님으로 초대하는 거니 꼭 데려오라 난리입니다.”

에리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동생은 한 번 고집을 부리면 못 말렸다.

그래서 아예 상대를 안했던 것도 있었는데, 어제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덜컥 걸려 버린 것이다. 

“으음, 어쩌죠. 공주님 궁에만 있다 오면 왕비님과 안 마주칠까요?”

“괜찮을 겁니다. 지금 어마마마는 궁에서 전혀 안 나오시거든요.”

그의 말을 들은 소리오닌은 미안한 표정으로 에리한을 바라봤다. 아마도 자신과 만나는 것 때문에 어머니와 계속 냉전 중이겠지. 금세 어두워지는 그녀의 얼굴을 본 에리한이 소리오닌을 살며시 안아주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 괜찮아요.”

“네, 알아요…….”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에리한은 자신의 어깨에 기댄 소리오닌의 이마에 쪽, 짧은 입맞춤을 건넸다. 그래도 아무 미동이 없자 쪽쪽,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나 입술을 맞췄다. 

결국 간지러운 느낌에 소리오닌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녀의 작은 웃음소리를 들은 에리한이 그녀의 두 뺨을 살며시 감싼 채 마주봤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긴 입맞춤으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결국 소리오닌은 에리한과 함께 궁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린셀 공주의 거처가 있는 궁은 성의 정문에서 멀지 않았다.

무도회가 열렸던 본성이나, 화려했던 왕비의 궁과는 달리 린셀 공주의 궁은 아기자기한 분위기였다. 

힐끗 힐끗, 공주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에리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걷고 있는 소리오닌을 한 번씩 쳐다봤다.

대놓고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소문이 퍼져 있는지 그녀의 얼굴을 한 번씩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소리오닌은 머리를 만지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에리한과 아무런 사이가 아닐 때는 신경이 안 쓰였는데, 에리한과 사귀는 사이가 되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걱정이었다. 

깨끗한 옷을 입고 올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치마 끝단에 아주 조금 묻어 있는 흙도 신경에 거슬렸다. 

에리한은 안절부절못하는 소리오닌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새삼스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게 귀여웠다.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어깨를 감싸며 걸었다. 왠지 그녀와 자신이 이런 사이라는 걸 남들이 더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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