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00)

073.

노미텐은 잡초를 뽑느라 흙이 잔뜩 묻은 소리오닌의 손을 꼭 잡았다. 

“이런 일까지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평소 정원 근처도 안 가던 애가! 이리 내, 오빠가 해 줄게.”

“괘, 괜찮아요!”

소리오닌은 훌쩍 울타리를 넘어 와 텃밭을 엉망으로 헤집고 있는 노미텐을 말렸다. 하지만 그는 동생에게 잘못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풀을 뽑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오빠라는 사람. 역시나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다. 저 남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세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격이 변한 자신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지. 소리오닌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 오빠?”

“응, 왜 그래? 뭐 더 할 게 있어? 다 말해, 오빠가 해 줄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그러다 어렵게 싹 틔운 것들까지 다 뽑히겠네. 소리오닌은 이미 몇몇개 뽑혀버린 새싹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녀의 표정을 본 노미텐은 화들짝 놀라 텃밭에서 벗어났다.

“그, 그래. 내가 방해가 됐구나? 미안해! 나는 그냥 옆에 서 있을게. 미안…….”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또 금방 풀이 죽은 노미텐을 보며 소리오닌은 애써 상냥하게 말했다. 

“소리오닌.”

“네?”

“너, 성격이 엄청 순해졌네? 마치 다른 사람 같아.”

노미텐은 자신에게 상냥해진 동생의 태도에 기분이 좋아져 말했다. 허나 그 얘기를 들은 소리오닌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기, 노미텐 오빠? 오라버니?”

“응?”

노미텐은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로 마당에 서 있었다. 소리오닌은 그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그러니까, 이렇게 집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여도 지금 여기에 갇혀 있는 건데…….”

“뭐어?!”

“저기, 저기 보이는 병사들이 감시하고 있어요. 근데 오빠가 여기 온 걸 들키면 좋지 않을 거 같아서.”

소리오닌의 손가락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병사들을 가리켰다. 에리한의 당부로 예전처럼 심하게 감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병사들은 그녀의 집을 포함한 이 동네 사람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깐 치료를 하러 오는 동네 주민이면 몰라도 노미텐의 행동은 금방 눈에 띌 게 뻔했다.

“그, 그랬구나. 나 때문에……. 내가 못난 오빠라서, 네가 고생이 많았어…….”

또다시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노미텐이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가만 살펴보니 그는 유약한 모습이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소리오닌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고 노미텐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오빠도 잘 지내세요. 이왕 바론으로 붙잡혀 오지 않은 거, 다른 데로 가서 조용히 지내면 들키지 않을 거예요.”

“소리오닌……. 널 여기에 두고 내가 어떻게 혼자 가!”

“아니, 그게…….”

난 여기를 떠날 생각이 없어요! 소리오닌은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너한테서 오빠 소리를 듣는 것도 얼마나 오랜만인데, 나는 이제부터라도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빠가 될 거야!”

노미텐은 품 안에서 돈이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이것 봐, 내가 이렇게 돈도 준비해뒀어. 소리오닌, 같이 떠나자. 어디든 여기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살 수 있을 거야!”

노미텐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소리오닌을 바라봤다. 오빠라는 역할에 무척 심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소리오닌이 다시 한번 제발 혼자 돌아가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소리오닌 님? 이 남자는 누굽니까?”

에리한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 에리한 님! 그러니까 이 사람은…….”

소리오닌이 급하게 붙잡힌 손을 빼고 어색하게 웃었다. 들키기 전에 내보내려 했는데. 어째 일이 꼬여 버렸다.

“이 사람은?”

“제 오빠…… 입니다.”

차마 에리한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 오빠도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건가. 

“오빠? 소리오닌 님의 친오빠 말입니까?”

“네? 네. 친오빠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노미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봐도 남자는 고위 귀족 같은 차림새인데…… 왜 소리오닌에게? 

“흠…… 그때 도망친 귀족들이 있다고 하더니. 그 중 한 사람이었나 보군요.”

“히익!”

에리한이 노미텐을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노미텐이 얼굴이 하얘져서 뒷걸음질 쳤다.

그렇구나! 이 남자는 소리오닌을 감시하러 온 거였어! 어, 어쩌지? 여기서 붙잡히면 나는 감옥으로 갈지도 몰라!

“그렇긴 한데…… 에리한 님, 그럼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글쎄요. 어떻게 할까요?”

“저, 저한테 물으시면…… 저는 당연히……!”

소리오닌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에리한을 올려다봤다. 에리한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고 씨익, 미소 지었다.

“……에리한 님?”

“어차피 이 남자가 소리오닌 님과 남매라는 사실은 저밖에 모르니, 저만 조용히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저는 여기서 소리오닌 님의 오빠를 만났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할 생각이 없고, 이 사람은 곧 여기를 떠날 거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에리한이 노미텐을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못 본 척 해준다는 뜻인 것 같았다.

에리한의 파란 눈동자를 보고 노미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저는 곧 떠날 거예요!”

“곧, 이라뇨. 지금 당장이죠.”

“네? 하지만 동생이랑 제대로 말도 못해 봤는데……!”

노미텐이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소리오닌은 그를 설득했다.

소리오닌이야 에리한이 편의를 봐주고는 있었으나, 바론은 아직 초크센 공국의 사람들에게 위험한 곳이었다.

기억에도 없는 오빠지만, 그래도 에리한이 보내준다고 할 때 바론에서 멀리로 얼른 보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여기서 잘 지내니까 걱정 말아요. 오빠가 제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해요. 알았죠?”

“소리오닌……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이런 곳에서 감시를 받느니 차라리 나랑 같이 떠나는 건 어때?”

노미텐이 소리오닌 옆에서 버티고 있는 에리한의 눈치를 보면서 속삭였다. 

“아뇨, 저는 여기가 좋아요. 어서 가세요.”

소리오닌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여기에 다시 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다시는 바론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딱 부러지는 동생의 말에 노미텐의 어깨가 축 쳐졌다.

역시 난 믿음직스럽지 못하구나. 노미텐은 속으로 자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그럼. 잘 지내……. 정말 괜찮은 거지?”

“네, 괜찮아요. 오빠야말로 꼭 안전한 곳으로 가셔야 해요?”

“으, 으응!”

노미텐은 에리한을 보고 움찔움찔하다 동생을 한 번 더 꽉 껴안았다.

자신의 품에서 동생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하니 자꾸 아쉬움이 커졌다.

결국 자신은 또 동생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에리한은 노미텐과 소리오닌의 사이를 재빨리 떨어트렸다. 아무리 남매라지만 아까부터 자꾸 소리오닌에게 지나치게 친한 표현을 하려는 게 못마땅했다.

에리한에 의해 억지로 동생과 떨어진 노미텐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초크센에 있을 때보다 많이 수수해진 동생의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담았다.

“나 갈게, 소리오닌. 아무것도 못해 줘서 미안해.”

“아니에요.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만난 것만으로도 좋아요. 조심히 가세요.”

소리오닌이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의 공손한 인사에 노미텐은 동생이 정말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느끼며 소리오닌의 집을 등졌다.

“소리오닌 님.”

“네?”

“아직은 저 분이 들키면 곤란한 게 많아서 제가 다른 곳으로 보냈지만, 조만간 다시 바론으로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뺨을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소리오닌이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들으니 양심의 가책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근데, 뭘 하고 계셨습니까?”

“아! 디그롬에서 가져 온 씨앗의 새싹이 나서 옆에 있던 잡초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오빠가 와서 새싹이랑 잡초랑 구분 못하고 다 어질러 놨지 뭐에요!”

소리오닌이 절반 가까이 엉망이 된 텃밭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에리한은 그녀의 귀여운 투정에 크게 웃고 난 뒤, 텃밭에 쪼그려 앉았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앗, 안돼요!”

“왜요……?”

소리오닌은 에리한이 예전에 텃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던 걸 생각해냈다. 그가 손을 대면 남아 있는 절반의 밭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에리한 님한테 이런 일 시키고 싶지 않아요. 얼른 일어나세요, 안에 가서 차 마셔요!”

“아, 그래도 혼자 하시려면 힘들 텐데.”

“괜찮아요. 혼자 일하기 딱 좋은 밭이에요!”

억지로 에리한을 일으킨 소리오닌이 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곧 그녀의 집 안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

위나 자하만은 일찌감치 집에서 나와 소리오닌이 살고 있다는 마을로 향했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뭐라도 한마디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소리오닌이 살고 있다는 집 근처에서 그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편한 복장을 한 소리오닌이 집에서 나왔다.

“돌아왔다는 게 정말로 사실이었다니……!”

입술을 꾹 깨문 위나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을 때였다.

지저분한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소리오닌의 마당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여기 왔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남자는 소리오닌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다짜고짜 그녀를 껴안았다.

“허? 저 남자는 또 뭐야?”

에리한을 옆에 두고도 다른 남자를 또 만나는 거야?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위나가 그 두 사람을 자세히 관찰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리오닌을 껴안고 손을 만졌다. 꽤 친밀해 보이는 그의 행동에 위나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잘됐네. 이건 에리한 님이 모르시겠지?”

뒤통수를 아주 제대로 칠 생각인가 보네. 위나는 어느새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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