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00)

072.

노미텐 알몬느는 눈앞에 나타난 바론의 수도를 멍하게 바라봤다. 

“여기가 바론.”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초크센의 병사들에 의해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자신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론과 내통한 초크센의 고위 귀족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던 것이었다.

분명히 집 안에 자신의 여동생 소리오닌이 있었을 텐데. 혹시 그 아이까지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너무 걱정이었다.

도망쳐 오면서 손에 잡히는 보석들을 가져온 덕에 여기까지 오는 여비가 됐다. 이따금 초크센의 귀족들이 수도로 잡혀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 동생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노미텐은 손에 잡히는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부모님이 생일에 선물해 줬던 것이었다. 이것만큼은 팔고 싶지 않았지만 당장 한 푼도 없는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우선 시내로 들어와 보석가게로 향했다.

맑은 종소리가 들리고 살가운 미소를 짓는 사장이 인사했다.

“어서 오십쇼!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저…….”

“네, 말만 하시죠! 온갖 종류의 보석이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장의 말에 고개를 살짝 저은 노미텐이 그의 손에 있던 목걸이를 내밀었다. 딱 봐도 값어치가 나가 보이는 목걸이에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

“이, 이게 뭡니까, 손님?”

“이 목걸이를 팔려고 하는데요. 여기서 매입은 안하십니까?”

갈색 더벅머리에 순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한 청년의 얼굴을 살펴보던 사장은 다시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매입 가능합니다요! 그나저나 이렇게 괜찮은 물건은 어디서 나셨습니까요?”

“제 것입니다.”

“호오, 참으로 멋진 목걸이를 가지고 계셨네요!”

사장은 노미텐의 손에서 목걸이를 빼앗아 이리저리 살펴본 다음, 돈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비싸게 쳐 준 겁니다요! 확인해 보시지요!”

“아, 네. 감사합니다.”

묵직한 주머니를 들어 본 노미텐은, 안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서둘러 보석 가게를 나섰다. 

사장은 가지고 있는 보석에 비해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손님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어쨌든 이렇게 좋은 보석을 싸게 얻었으니 오늘은 완전 횡재한 날이다!

주인은 손에 든 목걸이를 햇빛에 반사시켜 봤다. 영롱하게 금줄에 매달린 파란 보석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

노미텐은 지금까지 보석들을 팔고 받았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주머니를 흔들었다.

이제 바론에서 지낼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안도감과 함께 유일하게 남은 부모님의 유품까지 팔았다는 가책이 몰려왔다.

꼬르르륵, 하지만 그의 우울한 마음과는 달리 하루 종일 굶었던 배는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휴.”

짧게 한숨을 내뱉은 노미텐은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제일 저렴한 채소스프와 빵을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식당에는 노미텐을 제외하고 남자 두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간단한 식사답게 빨리 나온 스프와 빵을 먹고 있을 때였다. 노미텐의 귀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자네, 그 발목에 그건 뭔가?”

“아아, 이거. 그, 초크센에서 온 공녀한테 치료받았네.”

둘 중에 더 커다란 덩치를 한 남자가 다리를 흔들어보였다.

“그래? 한동안 안 보여서 도망갔다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게 아니었나보지?”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잠깐 어디 다녀왔다고 하더라고.”

“호오, 그렇구만. 잘됐네! 내 아들 녀석도 자꾸 무릎이 아프다고 하던데, 내일이라도 가 봐야겠어.”

초크센에서 온 공녀. 시시한 대화에서 노미텐이 주목한 것은 그 부분이었다. 어쩌면 저들이 말하는 공녀가 자신이 아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가게를 나서기 전에 얼른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노미텐은 아직 남아있는 음식들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신나게 얘기하던 남자 둘은 조용히 밥을 먹던 옆자리 청년이 다가온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한테?”

“네, 네!”

“뭘 물어보려고?”

남자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노미텐에게 되물었다. 

“저, 아까 얘기하신 초크센에서 온 공녀 이야기 말입니다.”

“왜? 자네도 어디가 아픈가?”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닌 것이란 걸 깨달은 그들이 누그러진 말투로 노미텐에게 대답했다.

“그건 아닌데…… 궁금해서요.”

“그래? 아픈 것도 아니면서, 뭐가 궁금해?”

“그 공녀의 이름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제발 자신이 아는 사람이길 바랐다. 남자들의 대답을 기다리는 노미텐의 손바닥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름이 뭐였지? 자네 알고 있는가?”

“그분의 이름도 몰랐단 말인가? 소리오닌 아닌가?”

“맞아, 맞아!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소리오닌, 이럴 수가!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이야. 노미텐에게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동생의 이름만이 귓가를 윙윙 떠돌 뿐이었다. 

“소, 소리오닌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소리오닌! 아주 씩씩하고 괜찮은 여자야, 그치?”

“아무렴, 친절하고 똑똑하더군! 아이들에게도 잘해 주고.”

어느새 소리오닌의 칭찬에 신이 난 두 사람은 노미텐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했다.

노미텐은 그들의 말을 듣고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우선 동생을 만나는 게 최우선이었다. 

“저, 그 소리오닌이라는 공녀가 사는 곳이 어디입니까? 제가 가도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럼, 그럼. 만나볼 수 있지! 거기가 어디냐면…….”

남자들은 주인장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 약도까지 상세하게 그려주었다. 그들이 그려준 약도를 손에 꼭 쥔 노미텐은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한 뒤에 식당을 빠져나왔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생각했다.

자신만 도망쳐온 게 마음에 걸려 잘 때마다 죄책감에 악몽을 꾸고는 했다. 눈만 감으면 초크센의 병사에게 살해를 당하는 부모님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래도 이렇게 동생이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그의 마음에 큰 돌덩어리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초크센에 있을 때처럼 부유하게 지내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는 바론에서 동생과 함께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약도를 따라 소리오닌의 집으로 향하는 노미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소리오닌은 텃밭에 난 새싹들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씨앗을 심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다행히 새싹들이 잘 자랐다.

바론의 기후는 언제나 온화해서 식물을 키우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게 제일 좋았다.

오후에는 에리한이 올 테니, 그 전에 밭의 잡초들을 다 뽑아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에리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집에 방문하고 있었다.

세리 역시 에리한과 함께 놀러오는 일이 잦았다. 에리한의 배려로 직장을 왕자궁으로 옮겨 소리오닌과 훨씬 가까워진 덕분이었다. 오기만 하면 크지도 않은 집을 정리한다고 부산스러웠지만…….

에리한과는 여전히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소리오닌을 궁으로 부르지 못하는 게 미안한 듯했지만, 그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내는 곳이 불편한 것도 아니었고, 정식으로 허락을 받은 교제도 아니었으니.

천천히 해결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에리한과 만나서 함께 지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에리한을 떠올리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굳이 내리고 싶은 생각도 없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텃밭에 쪼그려 앉았다.

한참 잡초와 새싹을 구분하며 시간을 보낼 때였다. 자신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걸 느낀 소리오닌이 고개를 들었다. 

“……소리오닌?”

“네?”

그녀는 어디가 아파서 온 사람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한 손에는 잡초를 가득 들고 일어났다. 눈앞에는 자신보다 한 뼘 정도 큰 청년이 서 있었다. 정작 자신을 부른 그 청년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저…….”

“소리오닌!”

소리오닌은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물어 보려고 했다. 갑자기 그 청년이 자신을 껴안으며 소리를 지르지만 않았다면.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난데없이 포옹을 하는 청년을 힘껏 밀어낸 소리오닌이 빽,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놈은 뭐야? 그녀에게 밀려나 뒷걸음질 친 남자는 충격 받은 얼굴로 소리오닌을 빤히 쳐다봤다. 

“소리오닌…….”

“하아, 네! 제가 소리오닌인데 무슨 짓이냐고요!”

다른 말을 할 줄 모르는지, 아까부터 자신의 이름만 주구장창 불러대는 남자에 짜증이 난 소리오닌이 톡 쏘며 말했다.

동생의 앙칼진 태도에 그녀가 꽤 많이 화가 났다고 생각한 노미텐은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그랬겠지. 오빠가 돼서 동생을 보호해주지는 못 할망정 혼자 도망치다니. 이런 오빠는 원하지 않겠지…….

“소리오닌, 많이 화났어? 아는 척하는 것도 싫어?”

“……네?”

“이제는 오빠라고 불러 주지도 않을 거니?”

헉. 소리오닌은 청년의 모습을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 얼굴 생김새도 자신과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잠깐, 잠깐만. 전에 세리가 뭐라고 했더라…… 이름이……! 세리가 알몬느 가에 대해 얘기했던 걸 필사적으로 떠올린 소리오닌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노…… 노미텐 오, 오빠?”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는 소리오닌을 본 노미텐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온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래, 소리오닌! 혼자 무서웠지? 이제 오빠가 왔으니까 둘이 함께 있자! 괜찮아, 오빠만 믿어.”

“어, 저…….”

“네가 얼마나 화났을지 알아. 배신감도 엄청 심했겠지. 너무 미안해……. 나도 정신없이 도망치고 나서야 네가 집에 남아 있던 게 생각났어. 그렇게 보면 오빠 자격도 없지만, 다시 한 번만 믿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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