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00)

071.

하나같이 입을 모아 자신을 걱정했다는 그녀들의 말에 위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여러분, 제 걱정을 왜 이리 해 주시는 건가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위나의 말에 하이린의 입에서 결국 우아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용한 응접실을 울리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하이린에게 향했다. 

“뭐가, 그렇게 웃기신가요?”

표정을 굳힌 위나가 하이린을 쏘아봤다. 

“아, 죄송합니다. 웃을 상황은 아닌데……. 혹시 위나 양은 요즘 바깥 상황을 전혀 모르나 해서.”

“뭐라고요?”

“아니, 알고도 이렇게 괜찮으신 거면 저희가 괜한 걱정을 한 거지만요.”

정확한 내용 없이 빙빙 돌려 말하는 하이린의 태도에 짜증이 난 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멀쩡한 얼굴 보셨으니 됐겠죠? 이제 그만 가 주세요.”

응접실을 나서려는 위나를 붙잡은 하이린이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정말 모르시나 봐요. 지금 에리한 왕자님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

“네……?”

하이린이 어리둥절한 위나의 손을 잡고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른 여자들도 하이린의 말에 더해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지금 수도에는 소문이 쫙 났잖아요.”

“요새 집에서 안 나오시니, 모를 것 같았다니까요.”

“어쩜……. 충격 받으시면 안 되는데…….”

위나는 정신 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입을 꾹 다문 위나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하이린이 쐐기를 박았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초크센의 공녀가 다시 돌아왔대요. 그리고 그 공녀랑 함께 있는 왕자님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완전 연인 같았다는데……. 역시 모르고 계셨나 봐요.”

하이린이 위나의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자신의 손등 위에 있는 하이린의 손을 탁, 털어낸 위나가 말했다. 

“아, 그 얘기 말인가요? 저는 또 뭐라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몰려 오셨던 거예요? 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왕자님과 그 여자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어쨌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들의 예상과 달리 침착한 표정을 한 위나를 보고 여자들이 당황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이린을 비롯한 멍한 표정의 여자들을 둘러본 위나는 싱긋 웃으며 일어났다.

“저는 결혼 전 잠깐의 유희조차 이해 못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랍니다. 하지만 저를 걱정해 주셔서 한 걸음에 달려와 주신 여러분의 노고는 잊지 않겠어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위나가 응접실을 나갔다.

그녀가 사라진 응접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여자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하이린 양, 어떻게 보세요? 위나 양이 한 말이 다 진짜일까요? 정말 왕자님과 그 공녀 사이를 알고 있었을까요?”

하이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그녀의 물음을 곰곰이 곱씹어보던 하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요. 말은 저렇게 했어도 저희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랐을 걸요? 위나양 은 자존심이 세니까 차마 몰랐다는 말을 할 수 없었겠죠.”

“역시 그렇죠? 근데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해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 공녀를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이린은 지금쯤 분노로 가득 차 있을 위나를 생각하며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늘따라 차의 향긋한 내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이린을 따라 차를 마신 여자들이 미련 없이 일어난 그녀의 뒤를 쫓아 자하만 백작의 저택을 나섰다. 

***

자신의 측근들과 머리를 맞대어 봐도 별다른 수를 생각해내지 못한 백작이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다. 

해는 한참 전에 졌고 로비에는 몇몇 시녀들과 시종들만 나와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던 백작을 시녀장이 불러 세웠다.

“저, 주인님.”

“음? 뭔가?”

백작과 눈이 마주친 시녀장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갔다.

“저, 위나 아가씨께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위나한테?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위나 자하만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란 백작이 시녀장을 다그쳤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점심 즈음에 하이린 아가씨를 비롯해 위나 아가씨와 같이 티타임 모임을 갖는 영애들이 우르르 몰려 왔었습니다. 그 뒤로 방에서 나오시지도 않으시고 뭔가가 깨지는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뭐? 아니, 애가 다쳤으면 어떡하려고! 그걸 보고만 있었나?!”

“저, 저희도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안에서 굳게 잠가 두셔서……. 주인님이라면 아가씨도 나오실 겁니다. 방금 전까지도 소리가 났으니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시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작은 서둘러 자신의 딸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사이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위, 위나? 아버지다! 얼른 문 좀 열어 보거라! 어디 다친 건 아니지?”

굳게 닫히 문을 두드리며 백작이 다급하게 말했다. 답답한 백작이 연속으로 몇 번을 두드리자 그제야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엉망이 된 방 안에 위나 자하만이 붉어진 눈가를 하고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아니, 위나! 이게 무슨 일이냐!”

백작은 깨진 화장품과 찢어진 옷가지 사이에서 자신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시녀들에게 방을 치울 것을 명령하고 그의 방으로 위나를 이끌었다.

아버지를 따라오면서도 위나의 얼굴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녀를 보던 백작은 단단히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위나. 어디 다치진 않았느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심하게 화를 낸 게야.”

“아버님.”

겨우 입을 뗀 위나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져 있었다. 평소 딸의 고운 목소리를 사랑하던 백작의 눈빛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 그래. 무슨 일이니?”

“에리한 님이 그 공녀와 다시 만난다는 게 사실인가요?”

역시……! 그 하이린을 비롯한 요망한 계집들이 몰려올 일이 뭐가 있겠는가! 위나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 작정한 게지! 백작은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위나. 그 일은 신경 쓸 것 없다. 그까짓 계집 한 명이 무슨 대수라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다 해결할 게야!”

“아버님도 알고 계셨군요?”

“으응……?”

백작의 반응에 위나의 눈에 다시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의 입술도 분함에 떨리기 시작했다.

“저만 몰랐어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바보같이 드레스를 입을 생각에 기뻐하고만 있었다고요!”

“위나!”

“하이린 그 계집애와 함께 온 것들이 저를 보던 눈빛이 잊히지가 않아요!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여자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어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딸의 모습에 당황한 백작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진정시켰다.

“위나, 이제 그만 진정하거라! 그런 것들은 네가 왕자비가 되는 순간, 네 얼굴을 쳐다도 못 볼 것들이야! 일일이 신경 쓸 것 없다!”

“하지만, 에리한 님이 정말로 그 공녀와 결혼하게 되면요!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럴 일 없다 하지 않았느냐! 내가 다 알아서 한다!”

아버지의 강력한 말에 겨우 진정한 위나는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냈다. 

“어떻게 왕자님은 두 번이나 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시는 거죠? 무도회에서도, 지금도…… 저를 배려해 주시지 않으셔요. 저는 그게 제일 서운해요, 아버님.”

“그래. 나도 안다. 하지만 왕자님도 곧 깨달을 게야. 너 만한 신붓감이 없다는 걸. 지금은 그저 그동안 접하지 않았던 여자라 신기해서 함께 있는 걸 거다.”

“그런 걸까요?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속상해요.”

자하만 백작이 딸의 등을 쓰다듬었다. 가늘게 떨리는 몸을 보는 그의 얼굴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더욱 더 에리한이 괘씸해졌다. 자신이 얼마나 애지중지 키운 딸인데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그것도 두 번이나!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좀 더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저번에 사들인 것도 시험해 보고 싶고……. 문제는 그 망할 초크센의 공녀를 어떻게 끌어들이는가, 인데.

백작은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소리오닌 덕분에 차근히 계획하던 것들을 뒤집어엎어 버리게 생겼다.

아무 말 없는 백작의 옆에서 위나 역시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동안 자신의 아버지와 왕비만 믿고 조용히 있었는데,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버님.”

“응?”

“초크센에서 온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 어디죠?”

“왜 그러느냐! 설마 직접 가 보려고?”

놀라서 묻는 자하만 백작에게 고개를 끄덕인 위나가 말을 이어갔다.

“네, 제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요.”

“그 동네는 위험할 텐데, 가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걱정스러운 마음에 백작이 자신의 딸을 말렸다. 하지만 이미 자존심이 마구 구겨져 버린 위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호위랑 같이 가면 돼요. 그냥 정말인지 얼굴만 보고 오려는 거니까 걱정 마세요. 아버님.”

“위나…… 그래 알았다. 그래야 네 마음이 풀린다면…… 하지만 위험한 일은 하면 안 된다. 알았지?”

“물론이지요, 아버님. 그러면 저는 이제 올라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위나가 인사를 하고 백작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새 깔끔해진 자신의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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