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00)

068.

짓궂은 도이첸의 농담에 네이드는 입만 꾹 다물 뿐이었다. 도이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후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네이드는 그의 뒤에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에리한 녀석이 돌아오면 엄청 좋아할 걸세. 솔직히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건 처음 본 거라, 아버지로서 보기에 안타까웠거든.”

“예, 저도 에리한 님이 그렇게 힘들어하실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흠, 아무튼 얼른 에리한이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얘기를 하면서 옷을 다 갈아입은 왕이 방을 나섰다. 네이드 또한 그의 뒤에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에리한이 크마엔에서 돌아 온 것은 소리오닌이 수도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가까운 곳으로 시찰을 나갔던 것 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돌아온 것이라 그를 맞이하는 궁은 바삐 움직였다. 

“다녀왔습니다.”

에리한은 왕과 왕비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예전보다 수척해지기는 했지만, 사브만에서 왔을 때보다는 괜찮아진 얼굴에 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수고했다. 크마엔에 별 다른 징후는 없었고?”

“네. 예산 처리와 병력도 특별히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페릴에게 전해들은 수상쩍은 얘기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 건은 좀 더 알아보고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기본적인 것들만 보고했다.

에리한은 정리한 서류 몇 장을 시종장에게 건넸다. 시종장은 에리한에게 받은 서류를 왕에게 다시 전해줬다. 

받은 서류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도이첸이 에리한을 보며 말했다.

“에리한, 오후에 내 집무실에 들르거라. 부탁할 게 있다.”

“네.”

옆에서 그들의 얘기를 듣던 왕비가 왕을 말렸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아이에게 또 무슨 부탁을 한다는 말인가요?”

“아니,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왜 그럽니까?”

왕비의 말에 정색한 왕이 에리한에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오늘 오후에 꼭 와야한다.”

에리한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왕의 태도에 의문이 들었지만, 급한 일이 있나보다 생각했다. 어차피 소리오닌의 행방에 대해 물어야 했기에 겸사겸사 들르긴 해야 했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거기 앉거라.”

서류를 보고 있던 도이첸이 에리한이 들어오는 걸 보고 일어났다. 옆에 있던 시종장까지 물린 그가 아들을 보고 씨익 미소 지었다.

“무슨…… 부탁이시길래?”

“그게 말이다?”

왕은 에리한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말씀하십시오.”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체를 숙인 에리한의 귓가에 도이첸이 속삭였다.

“지금, 내 손목이 너무 뻐근해. 나 치료 좀 받아야겠는데…….”

“네……?”

“소리오닌 양 좀 데리고 올래?”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리한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귀신을 본듯 하얗게 질려있었다. 

“서, 설마?”

“맞아, 소리오닌 양은 지금 변두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 있을 거야.”

“아, 아바마마.”

너무 벅찬 감정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왕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무뚝뚝하던 아들답지 않은 반응에 왕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서 가거라. 일주일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 무슨 시찰을 이리 오래 한단 말이냐? 내가 다 애타서 죽는 줄 알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게 고개를 숙인 에리한이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시종들이 놀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마구간으로 달려간 에리한이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아직 말에 달고 온 깃털을 정리하던 페릴이 깜짝 놀라 에리한을 불렀지만,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얼마만에 보는 건가. 날짜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체감은 아주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없으면 멀쩡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웃음, 그녀의 손길, 그녀의 초록 눈동자. 제일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더 빨리 갈 수 없어서 초조했다.

어느새 소리오닌의 집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지는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둘씩 켜지는 불빛들을 보며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집을 바라봤지만, 안에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

혹시, 왕비가 자신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냈을까 하는 불안감에 에리한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낮게 세워져 있는 울타리를 넘어 소리오닌의 집 문 앞에 다다른 에리한은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똑똑,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림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

“…….”

두 사람 중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게 현실인지, 꿈이 아닌지 생각하느라 바빴다.

한참을 에리한의 얼굴을 보기만 하던 소리오닌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점점 흐려지는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를 본 에리한 역시 울컥하는 감정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에리한 님.”

“소리오닌 님.”

“다녀왔어요, 보고 싶었어요.”

결국 넘치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낸 소리오닌이 떨리는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에리한이 차가워진 손으로 그녀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자신의 뺨에 닿은 에리한의 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오닌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손바닥 가득한 소리오닌의 눈물을 느낀 에리한이 천천히 그녀를 껴안았다. 

서로의 심장이 맞닿아 누구의 두근거림인지도 모르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잠시 서로의 체온과 심장소릴 듣던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웃음 지었다.

그러다 아직 이곳에 있는 걸 다른 사람이 알면 불편할 수도 있을 거란 남자의 말이 생각났다. 소리오닌은 에리한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아, 우선 들어오세요.”

그녀를 따라 들어간 에리한은 촛불 하나 켜지 않고 있는 집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소리오닌 님. 왜 이렇게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해놓고 생활하십니까?”

“음…… 제가 돌아왔다는 왕비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먼저 알려지면, 좀……. 제가 제대로 부탁을 해결하고 온 것도 아니니까요.”

소리오닌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 동안 집에 혼자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왕비를 속였고, 사브만과의 관계도 좋지 않은 결말로 끝나 버렸다.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 해도 어쨌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신은 바론에 도움은커녕 사고만 치고 돌아온 것이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질 것이지만, 그 전에 에리한의 얼굴을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은 욕심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기적인 행동이라도 그가 건강히 잘 있는지 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건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어마마마께서 잘못하신 일이고, 사브만 측에도 제가 다시 정식 서류를 보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에리한은 소리오닌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에리한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웃어요?”

이 상황이 웃음이 나오는 상황인가? 엉뚱한 그의 행동에 소리오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제야 제 얼굴을 봐주시는 겁니까?”

“아…….”

“언제나 당당하고, 할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얘기하시던 분이 의기소침해 있는 걸 보니 이것도 나름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

황당한 얼굴을 한 그녀를 보면서도 에리한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결국 에리한을 따라 소리오닌도 짧은 웃음을 내보냈다. 

그녀의 풀어진 표정을 본 에리한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처음에 제가 사브만의 왕자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왜 좀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를 속인 그 사람들에게 분노했죠.”

에리한이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무서워졌어요. 소리오닌 님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를 많이 좋아해 주셨을까. 이대로 사브만의 왕자와 결혼을 해 버리는 건 아닐까, 소리오닌 님에게 나는 금방 잊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만 커졌습니다.”

“에리한 님…….”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처럼 상황을 수습하고 의연하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렇게 어린애처럼 불안해하고 있을 줄 알았다면…… 소리오닌의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와 주셨으니 괜찮습니다. 저를 선택해 주셨으니 괜찮아요.”

에리한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 안았다.

정말 소리오닌이 존재하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 몇 번이나 그녀의 손을 만졌다. 안쓰러운 그의 행동에 소리오닌이 두 손으로 에리한의 얼굴을 감쌌다. 

“그동안 불안했던 건 에리한 님만이 아니에요. 저도 얼른 돌아오고 싶었어요. 제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옆에서 있어주지 못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런 가슴 아픈 말 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에리한 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랑…….”

소리오닌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에리한 외의 사람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에리한은 자신의 뺨을 감싼 그녀의 손끝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소리오닌을 만나지 못하는 동안 텅 비었던 마음이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달빛이 내려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취한 에리한의 입술이 점점 소리오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언제 닿았는지도 모를 만큼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숨결까지 다 들릴 듯 조용한 방안.

에리한이 방금 입을 맞췄다는 걸 알게 된 소리오닌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놀란 얼굴에 당황한 에리한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뗐을 때였다.

“우웁!”

소리오닌이 에리한의 입술로 있는 힘껏 돌진했다. 적극적으로 그의 입술을 탐하는 그녀의 행동에,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던 에리한도 소리오닌을 끌어안고 긴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통하고 온전히 둘만 있게 된 시간. 서로를 바라온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소리오닌 님. 다시는 소리오닌 님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저도 다시는 에리한 님을 혼자 보내지 않을게요. 껌딱지처럼 꼭 붙어 있을게요.”

껌딱지? 에리한은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더 설명을 해주나 싶었지만 소리오닌은 그저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