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00)

064.

“큼, 어디 다친 게냐?”

도리도리, 공작의 물음에 세리는 고개만 저었다. 평소 같으면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꾸짖었겠지만, 너무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에 그저 헛기침만 내뱉었다.

공작이 네이드의 옆구리를 툭 쳤다. 무슨 말 좀 해보라는 제스처였다. 네이드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세리…….”

그때 소리오닌이 세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이 작은 아이가 왜 이렇게 서럽게 우는지 알 것 같았다.

세리는 사브만에서 친구가 생겼다고 말한 날부터 유난히 생글거리면서 돌아다녔다.

아마 그 친구, 아니, 덴타에게 정을 많이 준 것이겠지. 소년 역시 세리에게 정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무슨 말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처음으로 많은 정을 주고 헤어짐을 겪은 아이가 느끼는 슬픔은 엄청날 테니까.

소리오닌의 어깨에 기댄 세리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생도 잃고 자신도 이렇게 떠나왔는데 델타는 괜찮을까. 또 입을 꾹 다물고 살아가는 건 아니었으면……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의 주위에 자신보다 더 좋은 동생이, 계속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기를. 세리의 마음 한 구석에 달빛처럼 반짝이는 상처 하나가 꽃처럼 피어났다. 

***

히튼이 덴타를 찾으러 가는 도중이었다. 숲에서부터 짐승과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곧 몬스터 떼로 하늘이 뒤덮여 금세 어두워졌다. 

그와 함께 나선 시종들과 시녀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생각 없이 거하게 사고를 치는 막내 동생의 행동에 히튼의 눈썹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형님!”

심상치 않은 공기와 몬스터들의 울음을 들었는지 타만과 카민이 멀리서부터 뛰어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가, 가트 짓이죠? 한동안 숲에 몬스터들을 쥐 잡듯 잡더니 갑자기 왜 불러 모은 겁니까?”

동생들은 히튼을 붙잡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닦달했다. 그 와중에도 하늘을 뒤덮은 몬스터 떼들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소리오닌 양이 알아 버린 것 같아.”

“네? 알아 버리다니, 설마…….”

“그래, 그 때문에 사브만에서 도망치는 중인 것 같구나.”

하아, 하고 누구의 입에서 나온 지 알 수 없는 한숨소리가 퍼졌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었죠. 혹여 결혼 당일에 알았다고 해서 소리오닌 양이 가만히 결혼할 것 같지도 않았고요!”

“네, 이번 일은 가트의 욕심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근데 소리오닌 양은 혼자서 저 성문을 탈출한 겁니까?”

동생들의 의문이 담긴 눈빛을 읽은 히튼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게…… 덴타가 도와줬어.”

이건 또 무슨? 소리오닌과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조카의 이름이 나오자 둘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덴타는 소리오닌 양의 시녀와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도와주지 않았을까 싶어.”

“그, 그렇습니까? 뭐 어쨌든, 혼자 가트를 상대하기에는 많이 힘들 텐데……?”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가 보려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네, 그러죠, 형님!”

히튼과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성문을 향했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히, 히튼 왕세자님! 지금 가트 왕자님과 덴타 님이 성 밖에 계십니다! 근데 몬스터 떼들이 출몰해서……!”

“그래, 나도 봤다. 우선 내가 가 볼 테니 너희는 성문을 잘 지켜라.”

“네, 조심하십시오!”

병사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성문을 열었다. 성문 밖의 상황은 생각보다 더 최악이었다.

가트와 소리오닌은 대치중이었고, 정체를 추가수 없는 남자는 몬스터 떼와 싸우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읍.”

비위가 약한 카민이 급하게 입을 막았다. 타만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밖의 상황을 보고 잠시 멍했던 히튼의 얼굴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내 이 자식을, 그냥!”

당장이라도 막내 동생의 뺨이라도 치지 않으면 화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막 가트를 향해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세리! 뛰어!”

덴타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솟아난 물줄기가 가트를 감싸고 그 틈을 타 소리오닌과 세리가 뛰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히튼과 두 동생들의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덴타가 말을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방금 전까지 가트를 손봐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머리가 새하얘졌다. 

히튼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아들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목소리였는데…… 찡해진 코를 찡긋거렸다.

그때 가트의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 이 새끼!”

히튼보다 빨리 덴타에게 다가 온 가트가 주저앉아 있는 덴타의 멱살을 잡았다. 힘없이 딸려 올라간 소년은 꽉 잡힌 멱살 때문에 숨쉬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덴타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컥, 하는 소리만 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도 가트의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네가 감히 나를 엿 먹여?”

그의 손이 높이 올라갔다. 덴타가 꼼짝없이 맞겠다는 생각에 두 눈을 꾹 감았을 때였다. 

“그만해!”

커다란 손이 가트의 손목을 잡았다. 그 힘 때문에 덴타를 때리지 못한 가트가 손의 주인을 노려봤다. 

“놓으십시오.”

“못 놓는다. 지금 네가 멱살을 잡고 있는 애가 내 아들인 건 알고 있나?”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사그라들지 모르는 동생의 흉흉한 기운에 히튼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대로 화가 났나 보군. 어깨를 으쓱한 히튼이 억지로 가트의 손을 꺾어 멱살을 풀어냈다. 

콜록거리며 숨을 들이마시는 아들의 모습에 미간을 좁힌 히튼이 가트와 마주 섰다. 그 둘을 본 덴타가 급히 히튼의 옷자락을 쥐었다. 

“아, 아버님…….”

몇 년 만인지 모를 아들의 목소리. 좀 더 오랫동안 감동하고 싶었지만 우선은 눈앞에 이 망나니부터 처리해야 했다. 히튼은 잔뜩 주눅 들어 있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네 이야기는 좀 이따 하자꾸나. 우선 이 일부터 해결해야지.”

“……네.”

덴타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튼은 시선을 돌려 가트와 마주봤다. 여전히 그의 눈은 분노로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해라.”

“뭘 그만 하라는 겁니까?”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항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히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사실을 알려야 하다니……. 하지만 당장이라도 소리오닌을 뒤쫓을 것 같은 동생의 모습에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벌렸다.

“이래봤자 소용없어.”

“왜 소용이 없습니까, 소리오닌은 제 신부입니다. 이틀 뒤면 저와 결혼할 사이란 말입니다!”

가트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숲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타만과 카민이 달려와 가트를 말렸다.

“가트, 진정해. 너 때문에 다시 몬스터들이 날뛴다고!”

“그래! 진정하고 얘기하자. 흥분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자신의 양쪽 팔을 하나씩 붙잡은 형님들의 간곡한 요청에 가트가 슬쩍 힘을 뺐을 때였다.

“소리오닌은 너의 신부가 아니야. 혼인 서약서는 보내지 않았다. 내가 보낸 건 혼인취소에 관한 내용증명서였어.”

천천히 흘러나오는 히튼의 낮은 목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형님? 혼인취소라뇨?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타만이 물었다. 오늘까지만 해도 결혼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해가 되지 않는 큰형님의 말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래. 나도 웬만하면 결혼을 시키려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소리오닌 양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어.”

히튼의 말이 끝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트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자신을 방해하는 것들뿐이었다.

“미치셨습니까? 소리오닌은 제 신부입니다. 형님이 무슨 권리로!”

“가트, 잘 생각해 봐라! 소리오닌 양이 너와 있을 때 한번이라도 너에게 애정을 보인 적이 있는지!”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가트는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상관없지 않아. 가트……. 사실 너에게 말은 안했지만 소리오닌 양은 나와 가끔 차를 마실 때도 바론의 왕자 얘기만 했어. 그건 분명히 사랑이었어.”

“그래, 가트. 소리오닌 양이 너를 친한 사람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카민과 타만이 차례대로 얘기했다. 

카민은 평소 에리한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끄러운 듯 볼을 붉히던 소리오닌을 떠올렸다.

그건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카민 또한 소리오닌을 보면서 맘이 무거웠었다. 하지만 가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바뀌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

히튼이 단호하게 말했다. 가트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 모두 히튼 때문이었다. 자신을 도와준다고 해 놓고 이렇게 배신하다니……! 다시 올라오는 분노로 가트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뇨, 그렇습니다! 금방 잊을 거예요. 서로를 볼 수 없으면 마음이란 것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겁니다!”

가트가 고함을 내질렀다.

“애정이니 마음이니 그까짓 게 뭐라고!”

철썩!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가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앞에서 히튼이 부릅뜬 눈으로 그의 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얼하게 번져오는 통증에 자신의 뺨을 감싼 가트가 히튼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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