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00)

063.

악에 받친 가트의 고함에 몬스터들이 더 날뛰기 시작했다. 로센 공작과 네이드 모두 지금 상황이 계속 된다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힐끗, 그들을 본 가트는 소리 지르던 것을 멈추고 소리오닌을 보고 미소 지었다.

“것 봐. 너를 구하러 온 사람들보다 내가 강해. 설령 에리한이 왔다 해도 나한테는 안 될 걸? 나만이 너를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이런 걸로 내가 마음을 바꿀 것 같아?”

“안 바꾸면 어쩔 건데? 저 사람들 다 죽게 한 다음에 바꿀 거야? 시간만 늦을 뿐이라고.”

가트의 표정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소리오닌은 가트의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다. 이제 와서 그래봤자 상황만 악화될 뿐이라 겨우 참고 있는 중이었다. 평생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있나 싶었다. 분노 때문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는 다르게 싸늘히 얼굴을 굳힌 그녀가 가트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거 놔. 너야말로 내가 죽는 거 보고 싶어?”

“뭐?”

소리를 지르며 날뛸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이번에는 가트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나 죽어 버릴 거라고.”

“……하, 죽는다고?”

“그래. 너랑 결혼하느니 그냥 여기서 몬스터한테 죽는 게 낫다고.”

소리오닌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그에 충격을 받은 듯 가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다 곧 그녀의 손을 놓고 말했다.

“왜? 왜, 죽는 게 더 낫다는 그런 말을 해? 내가 그렇게 싫어?”

“네가 싫은 게 아니야. 나는 에리한 님을 사랑할 뿐이야.” 

“그러니까 왜 그 놈이냐고!”

퍽! 가트의 옆에 있던 나무가 터지며 파편이 휘날렸다. 세리는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지만, 소리오닌은 볼을 찌르는 파편에도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오히려 가트가 그녀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자 놀란 눈으로 소리오닌을 쳐다봤다.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에리한 님이 좋은 건데. 내가 이유가 있어서 처음에 너를 챙겨줬을 것 같아? 아니, 그냥 챙겨 주고 싶어서였어. 네가 나한테 해 준 게 많아서 내가 너를 사랑해야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

“너, 얼굴에……”

가트가 떨리는 손길로 소리오닌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의 손을 쳐낸 소리오닌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똑바로 봐. 네가 나를 지켜? 아니, 너는 지금도 나를 다치게 했잖아. 너는 네 감정 하나 다스리지도 못하는 어린애야.”

“소, 소리오닌 님……!”

소리오닌의 상처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걱정된 세리가 옆에서 그녀를 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오닌은 가트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여기에 남으면? 그래서 내가 또 네 맘에 안 들면? 그때도 이렇게 화낼래? 그때도 이렇게 남을 다치게 하면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소리오닌이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닦아냈다. 그리고 뒤돌아 나무를 벗어나려고 했다. 네이드와 공작을 향해 모여들었던 몬스터들도 꽤 많이 사라져 있었다.

제발 이 정도 했으면 그만 놓아주길……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쉰 소리오닌이 마차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었다. 

탁, 하고 손이 붙잡혔다. 

“그래도 안 돼.”

“……너 정말……!”

“앞으로 잘하면 되잖아. 너 안 다치게 하고, 남들한테도 잘하면 되잖아. 너야말로 왜 이렇게까지 해? 왜 나한테만 이렇게 모질게 굴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가트…….”

“가지 마. 가지 말라고!”

물기가 가득한 그의 눈을 본 소리오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꼬여 버렸는지…….

“가트, 네가 그랬지. 너의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나도 그래. 지금 난 내 사랑에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해.”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손을 치워낸 소리오닌이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가트는 차마 그녀의 손을 잡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나온다는 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에리한을 포기할 수 없다고……?

그래, 죽여 줄게. 내가 가지지 못하면, 에리한, 너도 안 돼.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린 가트는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잠시 소강 상태였던 몬스터 떼의 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숲은 더 커다란 울음소리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로 가득 찼고, 나무들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네이드와 공작에게 향하던 세리와 소리오닌은 갑자기 심해진 바람에 휘청거렸다. 

“소리오닌 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꽤나 깊게 상처가 났는지 소리오닌의 뺨에 흐르는 피는 멈출줄 몰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픔 따위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휘청거리면서도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세리 역시 소리오닌의 팔을 꼭 잡은 채 걸어갔다. 역시 사브만의 왕자는 많이 무서웠다. 세리가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눈도 못 뜨고 있을 때였다. 

“세리!”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바람 소리 사이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깜짝 놀란 세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 곳에는 덴타가 손을 흔들며 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덴타 님?”

소년이 성 밖으로 나온 것도 놀라운 일인데, 자신의 이름까지 불렀다. 바람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덴타가 분명했다. 세리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나오기 전까지 몇 번을 고민했다. 자신이 가트를 정말 막을 수 있을지,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건지.

하지만 그를 잠시나마 막을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세리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심을 하자 생각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얼른 성문 밖으로 나오자 예상대로 가트는 폭발하고 있었고, 세리는 그 안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동안 수많은 치료와 상담에도 열리지 않던 입이…… 세리와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세리가 깜짝 놀라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다. 덴타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세리 역시 작게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이거면 됐어. 소년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마법진을 쓰지 않고 주문만으로 마법능력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알고 있었다. 이 마법은 성공할 것이란 걸.

덴타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주문에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이 조금씩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그 물줄기는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보다 높이 올라갔다. 눈을 크게 뜨고 물줄기를 바라보던 덴타는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소년의 주문이 계속될수록 이리저리 움직이던 물줄기는 순식간에 가트를 향해 돌진했다. 

자신의 분노에 갇혀있던 가트는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물줄기에 흠칫했다. 다리를 휘감던 물줄기는 점점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까지 덮쳤다. 

귀를 가득 채우는 물소리와, 눈앞에서 움직이는 물을 본 순간 그의 숨이 턱 막혀왔다. 물에 빠진 것이 아닌 것은 알고 있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트는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덴타가 만든 물줄기 안에서 가트가 잠시 흔들리는 사이 몬스터들의 공격이 주춤했다. 그걸 눈치 챈 덴타는 소리 높여 외쳤다.

“세리, 뛰어!”

자신의 소리에 그녀들의 발걸음에 속력이 붙는 것을 본 덴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큰 마법을 시전한 건 처음이었다.

가트의 주위를 흐트러뜨린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결국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소년은 주저앉아 버렸다. 

어느새 사라져 버린 물줄기를 느끼며 호흡곤란으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가트가 밭은 숨을 내뱉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쳐다보자 소리오닌과 세리는 마차에 올라타 있었다.

막 출발하려는 마차를 본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리곤 뒤돌아 지쳐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조카를 노려보았다.

덴타는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다리뿐만 아니라 손까지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체력부터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마차는 다행히 출발했고, 이제 혼나는 일만 남은 건가. 앞으로 일어날 일이 눈앞에 선해, 덴타는 고개를 들어 흐릿한 앞을 주시했다.

역시나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한 가트가 소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이쪽입니다!”

로센 공작이 소리쳤다. 잠시 몬스터의 공격이 끊긴 틈을 타고 네이드와 소리오닌, 세리는 로센 공작 쪽으로 힘껏 뛰었다. 다행히 마부가 도망가려는 말들을 잘 붙잡고 있었는지 마차는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 

소리오닌과 세리가 먼저 올라타고, 마지막으로 네이드가 따라오던 몬스터를 베어낸 후 마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한 마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로센 공작과 네이드는 몬스터와 싸울 때 생긴, 꽤 커다란 부상으로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어보였다. 소리오닌 역시 피를 많이 흘려 얼굴과 목, 어깨까지 붉게 물들었다.

세리는 그런 그들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한 채 앉아 있었다. 제일 멀쩡한 자신이 그들을 챙겨야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지막에 들린 자신의 이름. 틀림없는 덴타의 목소리였다.

과연 어떤 목소리일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고 멋있었던. 이제는 다시 듣지 못할…….

평생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지막에라도 들어서 다행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주책 맞은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리오닌 님 말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관심을 준 사람이었다. 다정하게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정말 오빠가 생긴 것 같았다.

제대로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목소리를 들어서 너무 좋았다고 말도 못했는데…….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은 세리의 손등을 적셨다. 세리와 마주 앉아 있는 로센 공작과 네이드는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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