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가트는 빠르게 달리면서도 머릿속에는 소리오닌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했다. 대충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하지만 그 겁쟁이가 왜?
똑똑하고 능력은 좋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아 자신의 뒤만 쫓아다니는 조카를 떠올렸다. 그녀석이 주도적으로 소리오닌의 탈출을 도와줄 거라는 생각까진 못했지만, 그러면 뭐하나 나한테 잡힐 텐데. 이렇게.
가트의 눈이 자신의 앞에 뛰어가고 있는 네 사람을 훑었다. 제일 앞서가는 덴타, 그 뒤에는 소리오닌과 세리. 그들의 마지막에는 전혀 모르는 새로운 인물이 있는 게 좀 걸렸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니까.
그들을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은 가트는 발을 놀려 좀 더 속도를 올렸다.
가트가 어느새 네 사람을 앞질러 그들의 앞에 섰다.
덴타를 비롯한 소리오닌과 세리, 네이드는 크게 놀라 앞을 쳐다봤다. 점점 가까워지는 성문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나타났다. 그가 오고 있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던 네이드는 가트의 얼굴을 보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소리오닌. 어딜 가려는 거야? 아직 2주가 되지 않았다니까.”
가트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소리오닌은 더욱 얼굴을 구겼다.
“웃기지 마! 2주 뒤에 결혼하겠다는 미친 소리를 듣고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게 왜 미친 소리야? 나라 간의 약속인데?”
“나라간 약속이니 뭐니 해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거야.”
“아주 조금 거짓말을 한 건데 그게 그렇게 나빠?”
가트는 이 상황을 보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어 보였다.
소리오닌은 말이 통하지 않는 그와의 대화에 지쳐갔다. 이제 야옹이고 뭐고 저 얼굴을 계속 봤다가는 화병 나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쫓아왔으니 이 일을 어째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자신들을 막아선 가트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만 떠 있었다.
한편,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왕족들의 모습에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가트가 소리오닌과 대화를 하며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사이, 덴타가 손끝으로 마법진을 그려 성문을 열기 시작했다.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성문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의 공간이 생겨났다.
아직 가트가 성문이 열린 걸 눈치 채지 못한 걸 안 덴타는 자신의 뒤에 있는 세리에게 다가갔다. 세리 역시 덴타의 손에 마법진이 생기는 걸 보고 슬쩍 앞으로 한 발을 내밀었다.
손끝에 세리의 손이 닿은 걸 느낀 덴타는 허공이 아닌 세리의 손바닥에 글을 적었다.
[세리, 5초 후에 뛰어.]
빠르게 쓰인 글자를 본 세리는 알겠다는 뜻으로 덴타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뒤에서 조용히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던 네이드는, 잠시 뒤에 있을 상황에 대비해 손목 안쪽의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1, 2, 3, 4, 5!
속으로 천천히 다섯까지 센 세리는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소리오닌의 손을 잡고 성문을 향해 달렸다. 옆에서 소리오닌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작은 틈새만을 보고 발을 굴렀다.
갑작스럽게 달려가는 두 사람을 보고 가트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마주한 조카의 얼굴을 본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건방진 놈.”
가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하지만 겁을 잔뜩 먹을 줄 알았던 소년은 의외로 강단 있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봤다.
그 모습에 피식, 비웃음을 지은 가트가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까지 열심일 줄은 몰랐는걸? 근데…… 성문만 나간다고 해서 끝은 아니지. 그렇게 쉽게 보내주면 재미없잖아.”
병사들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열린 성문으로 뛰어나간 소리오닌의 일행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오는 넷째 왕자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 가트 왕자님!”
“그래. 눈앞에서 내 신부를 놓친 소감이 어때?”
“네?”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가트 왕자님의 신부라니? 저분이 그러면 바론의 공주님이야? 저들끼리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은 그들은 이마가 땅에 닿을 듯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당장 모셔오겠습니다!”
“됐어. 모셔오는 건 내가 하지. 지금부터라도 문 잘 지키라고.”
“네, 시정하겠습니다!”
병사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가트는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유유히 성 밖을 나섰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뛰었는지 자신과 꽤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가트는 그 자리에 서서 성을 둘러싼 숲을 바라봤다. 그 뒤 그의 입에서 긴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문을 외우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고요했던 숲이 서서히 술렁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나무와 거세지는 바람을 보는 가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긴장된 얼굴로 그의 옆에 서 있던 덴타는 가트가 외우는 주문을 듣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급히 가트를 말리려 그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그는 싸늘한 얼굴로 덴타의 손을 쳐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을 보며 덴타는 고민에 빠졌다.
***
로센 공작은 마부와 함께 사브만의 숲 가장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자신도 사브만 성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네이드의 만류로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낌새를 못느꼈기에 얼른 그들의 모습이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공작님, 저기 오시는 것 같습니다!”
밖에 있던 마부가 소리쳤다. 그 말에 로센 공작이 마차에서 튀어나왔다. 아주 작게 보였지만 사람의 형상이 공작의 눈에도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급변하는 숲의 기운에 공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차를 끄는 말들도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심하게 요동쳤다. 마부가 당황해 말들을 진정시키는 사이, 공작은 손에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흠…….”
느리게 몸을 움직이며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순간, 숲 속에서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이게 무슨 일이지?”
“공작님, 위험합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내 걱정은 말고, 말이나 잘 보고 있게!”
공작은 오랜만에 만나는 몬스터들을 보며 크게 기합을 넣었다. 지금 있는 곳은 사브만과 바론을 이어주는 숲이었다. 요즘 자신의 영지에서 보이지 않던 몬스터들이 다 사브만 쪽으로 넘어와 있었던 듯,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뭉쳐져 있었다.
몇 번을 베어내도 끝나지 않는 몬스터들의 등장에 로센 공작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소리오닌 쪽 사정도 마찬가지인지 간간히 보이는 남자의 모습도 공작과 별만 다르지 않았다.
네이드는 어떤 신호를 받고 튀어나온 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성 안이 아닌 밖에서 이런 장애물을 만날 줄이야. 몬스터들은 로센 공작이 있는 마차와 자신들 사이에 벽을 세우듯이 가득 찼다. 꼭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것처럼.
“소, 소리오닌 님!”
“세리, 이리 와! 나한테 딱 붙어 있어!”
네이드가 정신없이 몬스터들을 처치하는 동안 소리오닌과 세리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마차에 도착하기 바로 전 네이드는 나무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고, 그와 동시에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에리한과 사브만에 올 때 한두 마리의 몬스터들을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여기서 있는 게 나았다. 그래도 남자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 몬스터 떼는 다 뭐야?”
“그러게요. 저는 몬스터가 이렇게까지 많이 나온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게…… 잠깐, 혹시 이것도? 가트 그 자식이 한 거 아니야?”
“가트 왕자님이요?”
눈이 휘둥그레진 세리의 물음에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이 곱게 보내줄 리가 없지. 처음부터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지금도 역시 숲 어딘가에서 쉴 새 없이 나오고 있었다.
“윽!”
혼자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네이드가 결국 팔에 큰 상처를 입고 주춤거렸다. 그때다 싶어 그를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보고 소리오닌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팔을 움켜 쥔 네이드는 겨우겨우 몰려든 몬스터들을 베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아지는 몬스터들의 숫자에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세리와 소리오닌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어때? 이제 한계인 것 같지 않아?”
소리오닌의 어깨를 쥔 가트가 뒤에서 속삭였다. 언제 왔는지 나무 뒤에 서서 몬스터들에 둘러싸인 네이드를 보며 웃은 그는 그녀의 어깨를 꼭 쥐었다.
“그래도 저 남자, 꽤 하네? 나도 이렇게 많은 몬스터들을 불러낸 건 처음이야.”
“역시 네 짓이었구나!”
가트의 손을 쳐낸 소리오닌이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소리오닌에게 맞은 손을 보던 가트는 웃고 있던 입을 꾹 다물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이 짓까지 하게 만든 건 너잖아.”
그의 눈동자가 더욱 새빨갛게 일렁이고 있었다.
“……뭐?”
자신을 탓하는 가트의 말에 소리오닌의 얼굴에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소리오닌의 손목을 잡고 소리쳤다.
“그깟 에리한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너……!”
“널 먼저 본 것도 나고, 네가 혼자 그 작은 집에 갇혀 있을 때 함께 있어준 것도 나야! 그 멍청한 에리한이 아니라 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