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도, 도이첸 전하라면…….”
“그래. 소리오닌은 바론으로 돌아가야 해. 아직 여기에 있는 게 확실한가?”
바론에서도 소리오닌이 사브만에 갇혀 있다는 걸 알게 됐나보다! 솔직히 둘만으로는 막막했던 탈출에 한줄기 빛이 내려온 듯 했다.
“네, 여기에 계세요! 근데 지금 가트 왕자님이 소리오닌 님을 가둬놨어요. 마법으로 문을 막아놔서 힘으로는 도저히 열리지가 않아요.”
“마법?”
세리의 말을 들은 네이드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자신도 마법은 공격에 관련 된 것만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고급 마법을 해제하는 것은 그와 비슷한 수준이거나, 그보다 더 고위급의 마법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선 소리오닌에게 가 보도록 하지.”
“잠시만요! 저, 여기서 만날 분이 있어요!”
세리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남자의 옷깃을 붙잡았다. 네이드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세리를 내려다봤다.
탁!
세리가 네이드에게 덴타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때였다. 마침 약속 장소에 도착한 덴타가 세리가 잡고 있는 그의 옷깃을 거칠게 떼어냈다.
“……뭐지?”
난데없이 기분 나쁘게 내팽개쳐진 자신의 손을 보던 네이드가, 덴타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덴타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잠깐만요! 여기 이분이 제가 만나려고 했던 분이에요! 덴타 님, 이분은 소리오닌 님을 구하러 바론에서 오신 분이고요!”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로 변한 둘 사이를 막아 선 세리가 빠르게 말했다. 세리의 말에 그제야 네이드의 눈에 또 다른 호기심이 떠올랐다.
“덴타? 히튼 왕세자의 아들?”
끄덕끄덕. 그의 물음에 덴타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다. 아직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얼굴, 반짝이는 은발.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의 기억 속에 있던 인물과 동일한 것 같았다.
‘그 일’이후로 말을 못하게 됐다는 소문이 맞나 보군. 네이드는 별 말없이 덴타의 앞에서 비켜섰다.
덴타는 그를 슬쩍 쳐다본 뒤 글을 써내려갔다.
[세리, 소리오닌 님은?]
“아, 오늘 저녁에라도 함께 탈출하려고 했는데 가트왕자님이 소리오닌 님을 방에 가둬 버렸어요. 마법을 사용했는데, 덴타 님도 마법능력이 있으니까 해제할 수 있을까요?”
세리의 설명을 들은 덴타가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도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가트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했다.
[가트 삼촌은 나보다 능력이 좋으니까, 내가 해제할 수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 그래도 우선 가 보자!]
확신이 없는 그의 글씨를 읽은 세리는 또다시 불안해져 왔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 자신이 믿을 수 있는 건 덴타뿐이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걱정을 털어낸 세리가 덴타의 뒤를 쫓았다.
“저, 어서 따라 오세요. 소리오닌 님을 구하러 오셨다면서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네이드를 본 세리가 손을 움직이며 재촉했다. 앞서가던 덴타도 그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까딱였다.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추진력이 대단하군. 아주 잠깐 입꼬리를 올린 네이드는 그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밤이 되어, 복도를 돌아다니는 시종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손님방이 있는 건물에서는 조심스럽게 움직인 세 사람은, 굳게 닫혀있는 소리오닌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에요!”
세리가 문고리를 가리켰다. 세리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아래로 내리자, 문고리 주위를 감싼 희미한 빛이 보였다. 덴타는 잠시 그 앞에서 문고리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소년을 방해하지 않으려 한 발자국 물러난 세리는 조금 큰 목소리로 소리오닌을 불렀다.
“소리오닌 님? 괜찮으셔요?”
“세리? 난 괜찮아! 너는?”
애써 괜찮다 말하고는 있었지만, 소리오닌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세리도 어느새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저는 당연히 괜찮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덴타 님을 모셔 왔어요. 문을 금방 열어 주실 거예요!”
세리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덴타는 집중해서 문고리에 걸린 마법을 해석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주 상급 마법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무릎을 꿇고 문고리 옆에 마법진을 새기는 소년을 힐끗 쳐다본 네이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를 강화했다.
마지막 한 글자까지 새겨 넣은 덴타는 눈을 감고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달칵, 문고리를 감싸고 있던 희미한 빛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세리는 신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네이드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문고리를 돌렸다.
덴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그때. 하얀 깃털 하나가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가려던 덴타는 그 유난히 하얀 깃털을 보고 주먹을 꾹 쥐었다.
이중 마법이었구나! 서로 얼싸 안고 기뻐하는 소리오닌과 세리를 본 덴타는, 재빨리 그녀들의 옆에 서 있는 네이드의 팔을 잡았다.
“?”
의문이 담긴 네이드의 눈앞에 급하게 쓴 듯, 가지런하지 못한 글씨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문고리에 이중 마법을 걸어놨어요! 누군가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알 수 있게요!]
“뭐?”
[지금쯤 이 방의 문이 열렸다는 걸 알게 됐을 거예요! 시간이 없습니다!]
글을 대충 훑어본 뒤 상황을 파악한 네이드는 소리오닌과 세리에게 소리쳤다.
“시간이 없습니다! 방의 문이 열렸다는 걸 가트 왕자가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오기 전에 얼른 나가셔야 해요! 성 문 밖에는 준비해 둔 마차가 있으니까, 전속력으로 달리는 겁니다!”
갑자기 나타나 자신에게 명령하는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물음조차 시간낭비인 것 같았다.
들고 있던 머리핀을 가방 안에 잘 넣어둔 소리오닌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 역시 소리오닌의 손을 꼭 잡았다 놓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덴타의 얼굴을 보면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이렇게 도망치는 게 미안했지만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는 없었다.
[제가 안내할게요. 따라오세요!]
성의 위치를 제일 잘 알고 있는 덴타가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소년의 바로 뒤에는 세리와 소리오닌이, 네이드는 제일 마지막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면서 그들을 따라 갔다.
덴타는 속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에 자책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유심히 봤더라면…… 금방 이중 마법이라는 걸 눈치챘을 텐데, 그랬으면 이렇게 불안에 떠는 것도 좀 덜했을 텐데!
만에 하나 이번 일로 가트와 대립하게 된다 해도 후회는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리는 자신에게 여동생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빠로서 자신이 그 애를 지켜야 했다.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세리, 근데 저 남자애. 머리가 은발인데…… 혹시?”
“아, 네…… 맞아요. 덴타 님도 왕족이세요.”
소리오닌이 덴타의 뒤를 쫓으며 세리에게 물었다. 소년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보자, 자연스럽게 가트의 모습이 떠올라 표정이 굳어 버렸다.
아까부터 말은 안 하고 허공에 글씨만 써대는 소년을 힐끗 쳐다본 소리오닌은, 찜찜한 기분을 숨길수가 없었다.
“하지만! 덴타 님은 가트 왕자님같이 그런 쓰레…… 아, 아니! 무례한 분은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셔요!”
소리오닌의 가늘어진 눈을 본 세리가 재빨리 덧붙였다. 자신 딴에는 목소리를 낮춘다고 했겠지만, 앞서 달리는 덴타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쓰레기. 가트 왕자를 그런 식으로 부를 줄이야.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세리의 귀여운 단어 선택에 풉, 웃음이 새어나왔다.
네 사람은 덴타의 안내를 따라 지름길로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성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나 보다!”
“와, 이제 금방이에요!”
세리와 소리오닌이 손을 꼭 붙잡고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을 그 시각.
소리오닌의 방 문고리에서 떨어져 나온 흰 깃털이 가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한참 자신과 심각하게 얘기를 하다 뜬금없이 웃는 동생의 모습에, 히튼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뭐냐? 왜 갑자기 실실거려?”
“아, 별 거 아닙니다. 제 신부님이 저 몰래 방에서 나왔나 봐요. 혹시나 길 잃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서. 근데 좀 이상하죠. 분명히 제가 문을 잘 잠갔는데…….”
갸웃, 고개를 기울인 채로 말하는 동생의 모습은 어딘가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트. 잠깐 앉아 봐.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다니까? 네가 할 말만 내뱉고 가면 어떻게 하냐?”
히튼은 깃털을 손에 쥐고 방을 나서려는 동생을 붙잡았다. 그의 말을 듣고 멈칫한 가트가 다시 고개를 돌려 히튼을 바라봤다.
“형님 얘기는 이따 들을게요.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가트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멋대로 찾아와서 멋대로 가버리다니. 아무래도 정말 버릇을 한 번 고쳐야 하는 건가. 히튼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아니, 버릇을 고치기 전에 가트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내가 먼저 죽는 거 아니야? 히튼은 동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아들인 덴타 뒤에 숨어야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종장이 들어왔다. 평소와는 달리 약간 상기되어 있는 시종장의 모습에 히튼의 얼굴에 의아함이 퍼졌다.
“히튼 왕세자님.”
“그래, 무슨 일인가?”
“저…… 덴타 님께서 방에서 사라지셨습니다.”
“뭐?!”
히튼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장에서 되물었다. 단번에 구겨진 히튼의 얼굴을 본 시종장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성 밖으로 나가신 건 아닙니다. 바론에서 오신 손님들과 함께 성문 쪽으로 가고 있다는 걸 목격한 시녀가 있습니다.”
“바론에서 온 손님이라면…… 소리오닌 양 말인가?”
“네. 시종들에게 언질도 없이 몰래 나가신 것 같습니다.”
“알았다. 나도 그 쪽으로 가지.”
“네,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시종장을 따랐다. 히튼은 걸어가면서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소리오닌이 몰래 방을 나갔다는 가트, 그런 그녀와 함께 성문 쪽으로 가고 있는 덴타?
오늘 밤에 조용히 잠들기는 어렵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