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세리가 앉아 있는 소리오닌의 어깨를 꽉 잡았다. 밑도 끝도 없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니…….
물론 자신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나갈 방법이 도저히 없는걸.
“세리. 나도 얼른 돌아가고 싶어. 그렇지만 지금은 마차도 없고 벌써 밤이 되어 버렸어. 이 캄캄한 시간에 우리 둘이 숲길을 걸어 갈 수는 없잖아.”
“사브만의 사람들이 저희를 속였어요!”
“……뭐?”
눈도 깜빡하지 않고 자신들을 속인 그들의 행태를 생각하니 점점 분통이 올라왔다. 얼굴을 와그작 구긴 세리가 주먹을 쥐었다. 빽 소리를 지르는 세리를 쳐다보던 소리오닌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그녀를 다시 자신의 옆에 앉혔다.
“침착하게 차근히 얘기해 봐. 뭘 제대로 알아야 당장 떠나던지 하지. 응?”
“그러니까! 가트 왕자님이 린셀 공주님이 아니라 소리오닌 님과 결혼할 거래요!”
너무 놀라 뭐라 대꾸도 못하고 있는 소리오닌에게 세리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잘은 모르겠는데, 사브만에서는 이미 가트 왕자님이랑 소리오닌 님이 결혼한다는 걸 다 알고 있던데요? 저희가 그런 얘기가 나오기 전에 더 빨리 여기를 벗어났었어야 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주구장창 마차가 없던 것도 소리오닌 님을 못 나가게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요?”
“마, 말도 안 돼…….”
“저도 처음에는 안 믿었어요, 소리오닌 님은 에리한 님이랑 좋아하는 사이인데……. 근데 진짜인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얼른 나가요, 소리오닌 님. 여기서 나가는 걸 친구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착실히 고개를 끄덕인 소리오닌은 세리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세리는 얼른 자신도 짐을 꾸려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세리가 나간 사이. 적막이 내려앉은 방에 소리오닌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제야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거였나, 굳이 2주 동안 사브만에 머물러야 한다는 게. 그동안 몰래 결혼식을 준비하려고?
보기 좋게 속았다. 그때 에리한 님과 같이 떠났어야 했는데, 그를 위한다는 마음에 어리석은 선택을 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토톡.
소리오닌의 뒤쪽에 나 있는 창문에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크게 움찔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창가 쪽으로 다가가 덜컹이는 창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가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이미 주변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빛나는 그의 은발 머리카락은 바람에 살랑였다.
평소라면 또 왔냐며 구박했을 소리오닌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자, 의아함을 느낀 가트가 창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얼굴이 안 좋아. 어디 아파?”
“너…….”
거짓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 말간 얼굴. 저 얼굴로 뻔뻔하게 나를 속였다 이거지……?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다. 어쨌든 오늘 여기를 벗어나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저 뻔뻔한 얼굴을 보니 속에서부터 열이 훅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 응, 왜?”
“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무슨 말이야?”
소리오닌의 흔들리는 눈을 본 가트는 본능적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았다.
“네가 날 속였어? 2주 동안 놀아달라고? 어쩜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그리고 내가 너랑 결혼을 해?! 미쳤니?”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오닌을 본 가트는 아주 잠시였지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알았지? 끝까지 모를 줄 알았더니.”
“뭐?”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짧게 숨을 내뱉은 가트는 성큼성큼 걸어 와 창을 막아섰다. 정말 아깝다는 듯한 가트의 미소에 소리오닌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진짜 모습인건가. 처음에 자신을 협박했던 가트가 떠올랐다. 원하는 걸 얻으려고 심술을 부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비열한 거였어!
“맞아, 난 너와 결혼할 거야. 친절하게도 바론에서 너와 결혼하라는 전령이 왔더라고.”
“저, 전령이라면……!”
“응. 맞아. 네가 봤던 그 전령. 바론의 왕이 아프다고 한 거, 사실이 아니었어. 내가 너한테서 에리한 좀 떨어뜨리려고 살짝 내용을 바꿨지. 그러게 꼼꼼히 확인을 해봤어야지. 에리한 그놈도 참 어설퍼.”
가트가 악동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귀엽게 코끝을 찡그렸다. 그의 손에는 파란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전령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날조한 내용으로 에리한을 바론으로 보냈던 것이었다.
“미쳤어…… 어떻게 그런 걸 속일 수 있어?”
“과정이야 어떻던, 결과가 해피엔딩이면 되는 거 아니겠어?”
“해피엔딩?”
“응, 나한테 해피엔딩.”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 소름끼치는 행동에 소리오닌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의외로 별 말없이 밀려난 가트는 그녀가 자신을 밀어낸 손 반대쪽에 가방을 들려 있는 걸 발견했다.
“가방? 왜? 사실을 알았으니, 도망치려고?”
“이, 이건……!”
“그렇게는 안 되지.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있으라고.”
빙긋 웃은 가트는 소리오닌을 똑바로 쳐다보며 뒤로 걸어갔다. 뭐, 뭘 하려고! 소리오닌이 멀어지는 그를 막으려 급히 팔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잡힐 뿐이었다.
가트는 소리오닌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한 다음 딱,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러자 활짝 열려있었던 창문이 큰 소리를 내면서 닫혀버렸다.
쾅! 소리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이 닫힌 창문을 열기 위해 창틀을 잡고 힘을 줬다. 세게 밀어 봐도, 몇 번을 흔들어도 굳게 닫힌 창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혹시 하는 마음에 그녀는 바로 뒤 돌아 방문을 당기기 시작했다.
“안 돼!”
아무리 당겨도 방문은 미동조차 없었다. 갇혀 버렸어! 어떡하지? 머릿속이 하얘진 소리오닌이 창문 밖에 서 있는 가트를 향해 소리쳤다.
“어서 열어! 이건 범죄라고!”
저 멀리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씩씩대며 서 있는 소리오닌에게 어느새 바짝 다가온 가트는 창을 사이에 두고 얘기했다.
“범죄라니, 서운하게. 이건 범죄가 아니야. 나는 내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라고. 얼마나 낭만적이야, 그렇지? 문은 이틀 뒤 우리 결혼식 전에는 열어줄게. 머리 좀 식히고 있어.”
“가지 마! 야!”
자기 할 말만 쏙 해 놓고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은 가트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유리로 된 창문은 소리오닌이 가방을 이용해 세게 내리쳐도 깨지지 않았다.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런 건가?
너무나 비현실적인 감금 방식에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리오닌은 방에 홀로 갇혀 입술에 피가 나도록 씹을 수밖에 없었다.
“소, 소리오닌 님? 문이 안 열려요! 안에 계세요?”
그때, 방문이 덜컹거리며 당황한 듯한 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리! 나 여기 있어! 근데, 갇혀 버렸어! 가트 그 망할 자식이 마법을 걸어 놓은 거 같아, 어쩌지?”
“네에? 그, 그 분이 옆에 있는 건 아니고요?”
“모르겠어. 문만 잠가 놓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어!”
소리오닌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리는 온 힘을 다해 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몇 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은 꿈쩍이지도 않았다. 힘이 빠진 채 문 사이로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얼굴에 절망감이 가득했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세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소리오닌 님, 제가 덴타 님을 불러올게요. 덴타 님도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문을 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덴타 님’? 그게 누군데? 그 사람도 사브만 사람 아니야?”
“제가 만난다는 친구요! 저희를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믿을 수 있는 분이에요!”
세리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얼마 뒤 복도를 달려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다시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소리오닌은 손에 들려있는 머리핀을 꼭 쥐었다.
사랑이라니, 말도 안 돼!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고 협박하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가두기까지 했으면서…… 이런 건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진짜 자신에게만 해피엔딩이면 된다는 듯, 웃고 있다니. 이기적인 인간. 소리오닌은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
세리는 어떻게든 빨리 소리오닌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덴타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는 동안 몇몇 시종들의 잔소리가 스쳐지나갔지만 속도를 줄일 수는 없었다.
빨리, 빨리, 빨리!
턱턱 막히는 숨을 참으며 겨우 도착한 세리는 그제야 모자랐던 숨을 한꺼번에 들이마셨다.
아직 덴타는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건물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세리의 어깨를 누군가가 건드렸다.
“?”
아, 아무도 없었는데? 자신은 분명히 계속 두리번거리며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그때 동물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었는데…… 누구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뒤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세리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온 남자는 덴타도 아니었고, 사브만의 다른 왕자들도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얼굴에 세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누, 누구세요?”
“너. 바론에서 온 소리오닌 님의 시녀 맞지?”
네이드는 잔뜩 겁을 먹은 세리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똑같은 질문을 돌려주었다. 자신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남자에게 세리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뭐, 뭐지? 가트 왕자님이 또 눈치를 챈 걸까? 덴타 님도 그래서 안 오신 건가? 세리의 작은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나는 도이첸 전하께서 보내서 왔다. 소리오닌을 데려 오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