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00)

059.

세리를 방으로 돌려보내고 난 뒤, 소리오닌은 가트의 옆에 섰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가려고?”

“그림 좋아해?”

“그림?”

며칠 전에는 온통 조각상으로 되어 있는 방으로 데려가더니 이제는 그림인건가? 의외로 고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소리오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저쪽이야.”

가트가 소리오닌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워낙 성이 넓어서, 그녀는 가트를 따라 걸으면서도 여기 어딘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몇 분 정도 걸었을까, 가트는 하얗게 칠해진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그때 본 적 있지? 카민 형님의 아내.”

“아, 응! 알아.”

“그분이 다 그려 놓은 거야. 그림 그리는 걸 워낙 좋아하시고 잘 하시거든.”

방 안에는 벽면을 다 덮을 만큼 커다란 그림부터 손바닥만한 그림까지, 온갖 크기의 것들이 모여 있었다. 찬찬히 그림들을 살펴보던 소리오닌은 그림을 가득 채운 따뜻한 색감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예쁘네. 그림은 잘 모르지만. 따뜻한 느낌이야.”

“보는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흐음, 맞다! 나 이제 이틀 뒤면 떠나! 우리가 약속했던 2주 맞지?”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그림을 보고 있던 가트의 눈동자가 소리오닌을 향했다.

“뭐?”

“왜 그렇게 놀라! 나 이제 바론으로 간다고!”

“벌써 그렇게 됐나?”

“벌써라니! 물론 나랑 놀고 싶어 하는 너의 마음은 잘 알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바론으로 가고 싶었다고.”

소리오닌은 가트와 눈을 맞추며 답했다. 야옹이가 아닌 사람이 된 가트와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우선순위는 무조건 에리한이었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

“당연하지, 말이라고 해! 그리고 나랑 놀고 싶으면 바론으로 오면 되잖아! 야옹이로 변해서.”

별거 아니라는 듯한 소리오닌의 말투에 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나는 너랑 사람으로 만나고 싶어. 야옹이가 아니라.”

“그래서 지금 만나고 있잖아, 매일. 그것도 하루 종일!”

‘하루 종일’을 강조한 소리오닌이 휙 등을 돌려 다른 쪽에 있는 그림을 보러 갔다. 매정하게 등을 돌린 그녀의 모습을 보던 가트는 작게 중얼거렸다.

“서둘러야겠네.”

***

세리와 덴타는 점심 식사를 한 뒤, 당연하게 도서관 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글을 읽는 건 곧잘 하지만 쓰는 걸 어려워 하는 세리에게, 덴타는 글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

덴타가 세리의 글공부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둘은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세리는 덴타가 책을 고르러 가 있는 동안,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발을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뒤 책 몇 권을 들고 온 덴타는 세리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 감사합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책을 본 세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책의 표지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공주님이 그려져 있었다.

두께는 동화책 수준이지만 꽤 빽빽한 글씨 때문에 책 한 권을 다 따라 쓰면 어느새 해가 지고는 했었다. 덴타가 집은 책을 보자 세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덴타 님도 오늘은 책 읽으시는 거예요?”

덴타가 가져온 책은 무척 두꺼웠다. 글공부를 위한 교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책의 두께를 보고 세리가 물었다. 세리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덴타는 허공에 글을 써내려갔다.

[마법에 관한 책이야. 아직 공부할 게 많거든.]

“아아, 그렇구나. 어쨌든 대단하세요! 저는 이 동화책 따라 쓰는 것도 아직 제대로 못 하는데.”

[그렇지 않아. 책 읽는 건 꾸준히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럴까요? 저도 글공부 꾸준히 하면 어려운 것도 척척 쓸 수 있겠죠?”

[물론이지.]

덴타가 쓴 마지막 글씨는 세리에게 힘을 내라는 듯 평소보다 크게 반짝거렸다. 그 글씨를 본 세리는 작게 웃은 뒤, 조심스럽게 책을 폈다. 

꽤 오래 책을 보고 있던 덴타는 뻐근해진 눈을 비비며 반대편에 앉은 세리를 쳐다봤다. 자신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작은 얼굴을 들 생각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꽤나 집중한 것 같았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내뱉은 덴타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네?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톡톡,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든 세리가 멍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세리의 말에 고개를 저은 덴타가 창문을 가리켰다. 환했던 하늘이 어느새 붉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어머, 벌써 시간이!”

깜짝 놀란 세리가 황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다시 책을 제자리에 꽂아놓고 도서관을 나선 두 사람은, 조용한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참 말없이 걷던 세리가 문득 아침의 일이 생각나 덴타를 불렀다.

“저, 덴타 님!”

세리의 부름에 덴타가 고개를 돌려 세리를 쳐다봤다. 

“제, 제가 이틀 뒤면 바론으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그동안 잘 챙겨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돌아간다고?]

세리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놀란듯 휘갈겨 써진 덴타의 글씨를 보며 세리는 말을 이어갔다. 

“네. 그동안 여기 있던 이유가 모시고 있는 분의 건강이 안 좋아서 였는데, 이제 많이 나으셨어요. 그래서 바론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모시고 있는 분이라면, 소리오닌 님을 말하는 거지?]

“네? 네!”

세리의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덴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동안 소년의 은색 머리카락에 비쳐 붉게 빛나는 노을을 보던 세리는 용기를 냈다. 

“제, 제가 사브만을 떠나면서 제일 아쉬운 건 이제 덴타 님을 못 본다는 거예요. 저를 친동생처럼 아껴 주시고……. 언젠가 덴타 님의 목소리가 돌아온다면 꼭 듣고 싶었는데.”

우연히 덴타가 아예 말을 못했던 게 아니라, 쌍둥이 동생이 관련된 사건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세리는 덴타를 만날 때마다 덴타의 목소리를 상상했었다. 

[꼭 돌아가야 해?]

“아시다시피 저는 소리오닌 님의 시녀인걸요. 제가 있고 싶다고 해서 있을 수 없어요. 제 거취는 소리오닌 님이 결정하시는 거니까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대답하는 세리를 유심히 보던 덴타가 빠르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너도 소리오닌 님이랑 사브만에서 함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볼게!]

“네? 저는 소리오닌 님이랑 함께 돌아가는 건데요? 소리오닌 님이 왜 사브만에 계세요?”

세리는 다시 한번 글씨를 읽고도,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덴타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챈 덴타가 떨리는 손으로 글을 썼다.

[며칠 뒤에 가트 왕자님이랑 소리오닌 님이랑 결혼하는 거, 몰랐어?]

세리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내가 읽고 있는 게 맞는 말이야? 소리오닌 님이 가트 왕자님이랑 결혼을 한다고?

“마, 말도 안 돼요! 저희는 그런 말 들어본 적도 없어요! 거기다 소리오닌 님은 바론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세리가 소리를 질렀다. 세리의 입을 통해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들을 종합해 보니, 이 결혼은 아마도 사브만 쪽에서 소리오닌의 의사도 묻지 않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한테도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매일 세리를 만나는 걸 알고 있으니까, 혹시나 결혼에 관련된 말이 새어나갈까 봐. 

점점 심각해져 가는 덴타의 표정을 살펴본 세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떡하죠?! 소리오닌 님은 바론에 다시 갈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계시는데!”

[세리. 소리오닌 님이 따로 연인이 있다는 거, 그게 사실이야?]

“네, 물론이죠! 바론으로 돌아가면 결혼을 할지도 몰라요! 그만큼 두 분의 사이가 가깝다고요!”

하아,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한숨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안절부절 못하는 세리를 본 덴타는 곧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리, 우선 이 내용을 소리오닌 님께 말씀 드려. 그리고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고 하면 오늘 밤, 여기로 다시 와 줘. 내가 도와줄게.]

빠르게 써진 글을 눈으로 읽어 내려간 세리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덴타는 자신도 불안했지만, 웃으며 세리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지금은 이렇게 손을 잡고 있지만, 왠지 오늘이 지나면 세리와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감싼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한 번 쳐다본 세리는 덴타의 얼굴을 보고 억지로 웃어보였다. 

“감사합니다. 저 그럼, 이따 밤에 다시 올게요!”

덴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세리는 재빨리 소리오닌의 방으로 뛰어갔다. 

순식간에 손에서 사라진 온기와, 눈에서 멀어져 가는 세리의 모습을 본 덴타는 깊은 아쉬움에 표정을 찡그렸다.

하지만 잘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미련이 가득한 건 자신뿐이라는 걸. 

이제 존재하지 않는 여동생의 모습을 자신이 멋대로 세리에게 더해 놓고, 챙겨 주면서 그때의 일을 속죄하고 있다는 걸. 

***

소리오닌은 일찌감치 가트와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짐은 단출했지만, 혹시 이틀 뒤에 놓고 가는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 미리 짐을 꾸려놓고 있었다.

몇 벌 없는 옷을 접어 넣어놓은 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서랍을 열었다. 

방에 있는 아주 작은 불빛만으로도 환하게 빛나는 초록색 보석. 에리한이 브리온에서 선물해 준 머리핀이었다. 며칠 동안은 하고 다녔지만, 그 이후로는 아까워서 간직해두기만 했었다. 

이틀 뒤 출발한다고 해도 바론에 도착하는 건 또 시간이 걸릴 텐데, 그동안 그와 바론에 별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소리오닌이 에리한이 사 준 머리핀에 살며시 입을 맞춘 뒤 혼자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서부터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리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소리오닌 님!”

“세리?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뛰어 왔어?”

세리는 거친 숨을 삼킬 새도 없이, 정신없이 방을 두리번거렸다. 갑작스런 세리의 등장에 놀란 소리오닌이 힘들어 보이는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세리! 대체 왜 그래? 잠깐, 얼굴 하얀 것 좀 봐, 우선 앉아.”

“소리오닌 님. 시, 시간이 없어요!”

“시간? 무슨 시간이 없다는 거야?”

세리는 마침 자신의 옆에 있던 소리오닌의 가방을 보고 덥석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무슨 일인가 얼떨떨해 보이는 소리오닌을 보고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도 아직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꼭 전해야 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소리오닌 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셔야 해요.”

“알았어. 얘기해 봐. 어떤 얘기인데 이렇게 급한 거야?”

“저희는 오늘 밤이라도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