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00)

058.

왕비는 며칠 동안 조용히 지내던 에리한이 곧 크마엔으로 시찰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을 구겼다. 

사브만에서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른 곳으로 간다는 건지. 그렇게 알아듣게 얘기했건만! 크게 혀를 찬 왕비는 에리한의 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리한 왕자님. 와, 왕비님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에서 시찰을 위한 자료를 보고 있던 에리한은, 시종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기도 하지. 자신이 크마엔으로 간다는 걸 듣고 난 뒤 바로 온 것 같았다. 

“알았다. 응접실로 모셔. 곧 가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시종이 물러나는 걸 확인한 에리한은 뻐근해진 눈을 감았다. 자신이 바론으로 혼자 돌아와 사브만에게 속았다는 걸 알게 된 날 이후, 에리한은 하루에 한 시간조차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그저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에 후회하는 나날들이었다. 눈을 감으면 소리오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면 이제 다시는 그녀를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포감이 몰려왔다.

밤이 되면 되풀이 되는 악몽에, 에리한은 차라리 눈을 뜨고 있는 게 더 나았다. 

눈을 감고 있자, 다시 떠오르는 소리오닌의 얼굴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 통증에 억지로 눈을 뜬 에리한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왕비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로 안내 받아 앉아 있던 왕비는 잠시 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리한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서로 소리를 지르며 큰 다툼을 하고 난 뒤, 두 사람은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했다.

그래도 사브만으로 간다는 말이 없어 정신 좀 차렸나 했더니, 결국 또 다른 곳으로 가 버려? 왕비는 친아들이지만 좀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에리한에게 또 다른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앉아라.”

에리한 역시 왕비 못지않게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에리한이 왕비가 가리킨 자리에 앉은 후에도 두 사람은 딱히 말이 없었다. 팽팽하게 긴장 된 분위기의 응접실에는 시종이 찻잔을 놓는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에리한.”

“……”

결국 답답한 마음에 왕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크마엔으로 떠난다는 게 정말이니?”

“네, 이번 분기에 해야 하는 시찰입니다.”

“그걸 꼭 지금 해야 하는 거냐?”

딱딱하게 떨어지는 왕비의 물음에 에리한이 픽, 한쪽 입술을 올려 웃었다. 

“제가 매년 해 오던 일입니다. 꼭 지금 해야 하다니요. 지금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몰라서 묻는 게야?”

“제가 언제는 어마마마의 큰 뜻을 다 알고 있었나요.”

비꼬는 게 분명한 에리한의 말에 왕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흥분하려는 스스로를 가라앉힌 왕비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곧 혼인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때에 시찰이라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시키도록 해라.”

왕비의 입에서 혼인 이야기가 나오자, 에리한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 사브만으로 달려가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걸 보니 속 안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왔다. 

쾅!

화를 참지 못한 에리한이 오른손으로 응접실의 티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고 왕비의 앞에 한 단어씩 씹어뱉으며 말했다. 

“제가 사브만에 가지 않은 이유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바론의 왕자라는 걸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자의 본분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니 말리지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끝까지 이 일을 막는다면, 그때는 제가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사브만에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에리한이 벌게진 눈으로 왕비의 코앞에서 으르렁거렸다. 아들의 서슬 퍼런 기세에 잠시 주춤한 왕비가, 떨리는 주먹에 힘을 주고 말했다.

“아주 어미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내가 너를 어떻게 믿겠느냐! 크마엔을 간다고 한 뒤, 사브만으로 갈지 알 수 없지 않나?!”

“……하!”

왕비가 불신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에리한을 째려봤다. 그러자 에리한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피를 나눈 모자지간에 벌어지는 이 상황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에리한의 웃음을 슬쩍 흘겨본 왕비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크마엔에 가는 걸 허락하마. 단, 내가 보내는 사람과 함께 가야한다. 미안하지만 난 널 완전히 믿을 수가 없거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크마엔에는 언제 가지? 빠른 시일 내에 사람을 보내마.”

“알겠습니다.”

왕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뒤 응접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해졌다. 의자에 늘어진 에리한은 뻐근해진 어깨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졌다. 

“보고 싶습니다…….”

사랑스러운 소리오닌의 초록색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깨를 만져주던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소리오닌을 구해 오겠다는 아바마마가 했던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혹시나 사브만의 왕자와 좋은 감정이 생긴 건 아닐까, 그곳이 바론보다 더 좋아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퍼져나가고는 했다. 

다시 시작된 부정적인 생각들을 고개를 저어 털어낸 에리한이, 집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크마엔의 시찰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소리오닌이 바론으로 돌아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휴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던 소리오닌의 입에서 큰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차가 없어진 걸 눈치챘을 때만해도 당장 돌아갈 수 있을 거라 큰 소리 뻥뻥 쳤는데. 아니, 가트가 사실은 야옹이라는 걸 알게 됐던 때만 해도 바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이틀 뒤면 사브만에 온 지 2주를 꽉 채우게 되는 날이었다.

며칠 전에는 새벽부터 마차를 선점해 놓으려고 마구간에 갔는데도, 말의 코빼기조차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이틀을 기다리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걸 알면서도, 에리한이 걱정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리오닌.”

역시나 오늘도 가트는 창 너머에서 소리오닌을 부르고 있었다. 요새 아침마다 찾아와 하루 종일 소리오닌을 끌고 성 곳곳을 돌아다니는 게 그의 하루 일과였다. 

“안녕, 설마 오늘도 업무가 없는 거야?”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나는 막내라서 행정에 관련된 일은 딱히 하는 게 없다고.”

“그래, 그랬었지. 근데 혹시나 하고. 팔자 좋네, 흥!”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해도 맛있는 음식 먹고, 좋은 침대에서 자고, 이렇게 성 안을 구경시켜 줄 가이드까지 있는데.”

열려 있는 창문을 훌쩍 넘어 소리오닌의 방으로 들어온 가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덮치는 그림자에도 딱히 놀라지 않은 소리오닌이 그를 올려다봤다.

“난 여기서 노는 것보다 바론에서 텃밭 가꾸는 게 더 좋아. 그리고 웬만하면 방문으로 걸어 들어올래? 너 이러다 나중에 무릎 나간다?”

자신의 무릎 한 번 쳐다보고, 방문 한 번 쳐다보고.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자신보다 겨우 한 살 많으면서, 어린애 걱정하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트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쓸데없는 걱정을 매일 듣고 싶을 만큼 그녀가 좋아져 버린 가트였다.

이렇게 별 말 없이 그녀 옆에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가 꽤 오래 소리오닌의 옆에 자리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세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소리오닌 님, 좋은 아침입니다!”

“응. 세리도 좋은 아침!”

“흠, 나는 안 보이나?”

가트가 사이좋게 인사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세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가트 왕자님.”

“흐음.”

정작 세리의 인사를 받은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인사를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속으로 삐쭉거린 세리였지만, 겉으로는 어색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애한테 심술이야? 얼른 나가!”

“같이 나가기로 했잖아.”

“알았어. 근데 세리랑 얘기 좀 하다가 갈게. 우선 나가 있어!”

소리오닌은 투덜거리는 가트의 등을 밀어 밖으로 내보냈다. 

“세리, 쟤 저러는 거 한두 번이 아닌 거 알지?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 완전 초딩이야, 초딩.”

“초딩? 그게 뭐에요?”

“어? 아, 그런 게 있어.”

세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저런 단어는 어디에서 배우신 거지? 의문이 가득한 세리의 눈을 보던 소리오닌은 뭔가 생각난 듯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맞다! 세리, 나 이제 몸이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 우리 이틀 뒤쯤에 바론으로 돌아갈까? 그때는 꼭 마차를 달라고 하자.”

“정말요? 다행이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어?”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지는 세리를 본 소리오닌이 물었다. 

그 물음에 예상외로 고개를 저은 세리가 답했다. 

“저는 돌아가는 것보다 소리오닌 님 건강이 좋아졌다는 게 다행이라는 거예요. 저야 어딜 가나 똑같은 걸요!”

“그래? 역시! 내 걱정해 주는 건 세리밖에 없어! 아, 세리는 오늘 점심도 그 친구랑 먹는 거지?”

“네? 네에.”

세리의 말이 늘어졌다. 친구라고 하기엔 소년은 자신과 너무 차이나는 사람이었다. 어쩌다보니 소리오닌 님한테는 친구라고 말해버렸지만. 

“그럼 미리 인사해 둬, 이제 다시 보기 어려울 텐데 갑자기 가면 섭섭하잖아.”

“음, 그렇겠네요. 알겠습니다! 오늘 잘 얘기할게요!”

“응!”

“근데 소리오닌 님도 바론으로 돌아간다고 가트 왕자님께 잘 얘기하셔야겠네요?”

뜬금없는 세리의 말에 소리오닌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내가? 가트한테? 왜?”

“왜냐니요! 딱 봐도 가트 왕자님이 소리오닌 님께 호감이 있어 보이시는데. 말도 안 하고 가 버리시려고요?”

“호감?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

“엥?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세리는 가트가 야옹이인 줄 모르는구나! 그러면 착각할만한가? 어쨌든 그는 자신이 느끼기에 사람이라기보다는 동물에 가까웠다. 야옹이로 먼저 만나서 그런 것 같았다.

“응, 아니야! 그런 생각하지도 마!”

펄쩍 뛰는 소리오닌을 본 세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오닌 님이 아니면 아닌 거겠지. 

“그럼 우리 이만 나갈까?”

“네! 소리오닌 님, 즐겁게 놀다 오세요!”

“응, 세리도!”

서로에게 비밀 한 가지씩을 간직한 두 사람은 찜찜한 마음을 숨긴 채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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