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00)

057.

“잠깐, 소리오닌은 에리한 왕자님과…….”

분명히 둘 사이에는 핑크빛이 가득해 보였다. 근데 뜬금없이 공주 대신에 신부라니……? 점점 이해가 가지 않아 로센 공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평소 같으면 속국의 공녀를 신부로 보내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왕비님께서 왕자님과 소리오닌의 사이를 탐탁지 않아 하시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그랬군. 하긴 왕비님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만하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사브만에서 만약 신부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전했다면 왕자님은 어떻게 해서든 혼인을 취소시키고 소리오닌 님과 함께 돌아오셨을 겁니다.”

이렇게 꼬인 문제에 무언가가 더 있는 건가? 공작은 허탈한 웃음을 지은 후 말했다.

“그랬겠지. 근데 지금 네가 여기 왔다는 건, 왕자님이 예상과는 다르게 소리오닌과 함께 오지 못했다는 건가?”

“네. 근데 그 이유가 사브만에 있습니다.”

“사브만에? 아니, 사브만에서 왜?”

공작의 커다란 물음에 네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왕자님께 소리오닌으로 신부가 바뀌었다는 말 대신, 도이첸 님께서 위중하다는 거짓을 전했습니다. 그 때문에 놀란 왕자님이 혼자 바론으로 먼저 돌아오시는 바람에.”

“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무래도 사브만에서 둘을 떨어트려 놓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왕비님께서는 서둘러 왕자님을 자하만 공작의 딸과 혼인을 시키려 하고 있으시고…….”

네이드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그래서 자신이 빌려준 마차가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도, 소리오닌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던 거군! 

흐음, 커다란 숨을 내뱉은 공작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네이드가 말을 마저 이어갔다. 

“제 생각에는 사브만에서 두 분의 사이를 짐작했던 것 같습니다. 괜히 사실대로 말해서 사브만에 들어온 신부를 뺏기고 싶지 않았겠죠.” 

“그래. 그게 아니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그래서 소리오닌은 사브만에 있는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왕자님께 거짓말까지 한 걸 보면, 소리오닌이 빠져나가게 두지 않았을 겁니다.”

공작도 네이드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차를 한 번에 들이키며 말했다.

“아무튼 왕비만 연관이 되면 일이 이렇게 엉망이라니까.”

“……”

대놓고 왕비에 대해 욕을 하는 공작을 보며 네이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공작이 더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에 욕심만 가득해서 말이야! 아주 큰일이라고!”

공작의 말이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네이드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저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뭐?”

“사브만에서 소리오닌을 데려오는 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네이드가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어렸을 때부터 뭐든 혼자서 하기 좋아해서, 공작은 그의 양아들에게 부탁이란 걸 별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다 큰 성인이 되어서 자신에게 부탁을 하러 왔다니. 공작의 코가 괜히 찡해졌다. 

“그럼,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지!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의 부탁인데. 어떻게 도와줄까?”

“우선, 사브만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차도 함께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아, 좋아! 그 정도야 뭐!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아들의 부탁을 받은 후 기분이 좋아진 공작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무실로 향했다.

공작은 곧바로 자신의 책상 서랍 안쪽에 있던 종이 뭉치를 들고 나온 뒤, 앉아 있는 네이드의 앞에 종이를 내려놓고 말했다.

“내가 여기 처음 와서, 사브만에 인사차 방문했을 때 기록해 놓은 성 내부도다. 사브만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라 많은 정보는 없지만, 이건 내가 직접 보고 그려놓은 거니, 확실할 거다.”

몇 장에 거쳐 상세히 그려져 있는 내부 지도에 네이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현장에서 멀어진 지 오래 된 지금까지 공작의 기억력과 눈썰미는 변함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소리오닌은 아마 여기 손님방.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공작이 지도 중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째서 여기입니까?”

“내가 숲에서 만난 사브만 쪽 병사들을 보면 특별히 동향에 큰 변화가 없단 말이지? 그러니 아직 결혼식을 한 건 아닐 거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인데 덥석 중앙에 있는 방을 주기에는 좀 그렇지 않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 그러니 우선 이 지도를 잘 외워 두도록 해.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데려와야지.”

네이드는 지도를 찬찬히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늦는다면, 소리오닌이 바론에 도착도 하기 전에 왕자가 혼인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도를 쥔 네이드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무도회가 끝난 후부터 다과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위나 자하만의 등장에 여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위나는 붉은 머리를 한껏 올려, 기다란 목선을 드러냈다. 은사가 섞인 보라색 드레스 역시 그녀의 희고 빛나는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다.

당당한 걸음으로 티 테이블 제일 상석에 앉는 그녀를 본 다른 여자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저마다 말을 시작했다.

“저기는 하이린 영애의 자리 아닌가요? 집 주인도 아니면서 왜 저기에 앉았을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직도 자기 잘난 맛에 사나 봐요!”

“이미 소문 다 퍼졌잖아요? 불쌍하게도 초크센의 공녀에게 눈앞에서 왕자님을 뺏겼다고.”

“무도회 이후로 지금까지 다과회에 오지 않은 이유가 뭐겠어요. 쪽팔려서죠!”

기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자들은 부채로 입만 가렸을 뿐, 다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얘기하고 있었다. 여전히 도도한 척 하는 위나를 힐끗 흘겨보며 비웃는 것도 잊지 않고. 

평소의 위나라면 그녀들이 말을 시작하자마자, 째려보고 소리를 질렀을 텐데. 오늘은 어디 더 해 보라는 듯한 얼굴로 그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몇몇 여자들은 슬슬 입을 다물었다.

“위나 자하만. 거기는 제 자리가 아닌가요?”

아까보다는 작아진 웅성거림을 뚫고, 이번 다과회를 주최한 하이린이 들어왔다. 위나와 하이린은 둘 다 공작가의 영애였다. 하지만, 위나와 달리 조용하고 우아한 성품의 하이린을 사람들은 더 좋아했다. 정반대의 두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하이린과 비교 당했던 위나는 특히나 하이린을 싫어했다.

그렇기에 하이린이 주최하는 이번 다과회에 위나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무척 신기해 했었다. 

“아무데나 앉으면 어떤가요? 의자가 이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런가요? 그래요. 자하만 양이 편한 자리에 앉도록 하세요. 자하만 양의 말대로, 앉아 있는 위치는 상관없지요.”

톡 쏘아붙이는 위나를 보며 하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짓고 옆자리에 앉았다. 하이린은 평범한 자리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석에 앉은 위나보다 훨씬 더 고고해 보였다.

그 모습에 여자들은 다시 한번 위나의 못된 성격에 대해 수다를 떨어댔다. 그때 하이린이 위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나저나, 괜찮으신가요? 무도회가 끝난 뒤로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많이 아프신 건 아닌가 했습니다.”

그 순간 다과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역시 하이린 님이시네, 저렇게 직접적으로 묻다니!

사람들은 과연 위나가 저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 위나의 표정만 살폈다. 소리를 지르려나? 아니면 분해서 부르르 떨지도 모르지. 저마다 머릿속으로 반응을 예상하며 그녀를 주목했다.

“무도회가 끝난 뒤에 제가 많이 못 다녔죠. 너무 바빴어요. 한가하게 다과회나 즐길 시간이 없더라고요.”

“……네?”

위나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예상한 모습과 전혀 딴판인 그녀의 반응에, 오히려 더 벙찐 표정이 되었다.

하이린도 자신의 질문에 발끈하기는커녕 본 적 없는 미소로 답하는 위나를 보고 어색하게 굳어 버렸다. 

열댓 명이 넘는 여자들의 주목을 받은 위나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제가 곧 에리한 왕자님과 결혼을 하거든요. 지금 그 준비가 한창이에요.”

위나 자하만과 왕자님이 결혼이라니? 그건 무도회 이후로 끝난 이야기 아니었나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결혼 얘기는 없었는데!

사람들은 위나의 말에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분명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방 안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다 들었다. 이 다과회가 그동안 위나에게 무시당했던 것을 다 갚아줄 기회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위나는 왕자님과 결혼을 한다는 엄청난 소식을 들고 온 것이다. 

“그, 그럴 리가! 결혼이라는 게 위난 자하만 양 혼자만의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그러게요! 왕자님은 분명히 무도회에서 다른 여자와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위나의 말을 믿지 못하는 여자들이 저마다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자들의 웅성거림도 들리지 않는 듯, 우아하게 컵을 들고 차를 다 마신 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도회에서 어떤 여자랑 만났든, 결혼은 저와 합니다. 이미 왕비님께서 손수 재단사를 불러 드레스를 주문해주셨답니다.”

“그, 그런……!”

왕비님이 직접 드레스까지? 당당한 그녀의 말에 여자들은 그저 입만 벌리고 위나를 쳐다봤다.

하나같이 멍청해 보이는 표정들이군. 속으로 하이린을 비롯한 그녀들을 한껏 비웃은 위나는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이제 제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될 겁니다. 다음에 저와 만나는 장소는 이런 좁아 터진 집구석이 아니라, 저기 저. 성일 테니까요.”

위나의 빨간 손톱이 멀리 보이는 높이 솟아있는 성을 가리켰다. 그 손끝을 바라 본 여자들은 조금 전 자신들이 한 말을 떠올리고 얼굴이 하얘졌다. 

위나는 충격을 받은 듯, 굳은 표정의 하이린이 앉아 있는 의자의 다리를 발로 슬쩍 친 뒤 다과회장을 빠져 나왔다.

“아, 살 것 같다!”

그동안 무도회 일 때문에 창피해서 다과회에 참석 못했던 날들을 모두 다 보상 받고도 남는 하루였다. 오늘은 원단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얼마나 비싸고 고급스러운 원단들이 도착해 있을지 벌써부터 두근거렸다. 

그날 이후, 바론 전역에는 위나와 에리한 왕자가 곧 결혼을 올릴 거라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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