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00)

056.

“음…….”

요리사의 뒤에서 같이 뒷정리를 하던 시녀 한 명이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요리사가 별 말없이 계속 그릇을 정리하자, 시녀는 한숨을 쉬고 중얼거렸다.

“하긴, 우리들도 아직 그 얘기만 들으면 소름끼치는데. 직접 눈앞에서 본 덴타 님은 어떻겠어요. 그 일 이후로 말도 못하시…….”

“아, 거참! 이제 입은 그만 놀리고 설거지나 해!”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요리사 때문에 깜짝 놀란 시녀는,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쯧!”

시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본 요리사가 혀를 크게 찼다. 그리고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쿵쾅거리며 식당을 나갔다. 

***

세리가 나갈 때와 다르게 통통하게 불러온 배를 문지르며 손님방이 있는 건물로 돌아왔을 때였다. 소리오닌의 방문이 열리며 그녀가 튀어나왔다.

“세리!”

“아, 소리오닌 님! 점심 드셨어요? 대체 어디 가셨던 거예요!”

“미안, 갑자기 히튼 님이 부르셔서…… 세리, 너 점심은 어떻게 했어?”

“지금 막 먹고 오는 길이에요.” 

혹시나 세리가 자신을 기다리다 점심을 굶었을까 봐 걱정했던 소리오닌은, 세리의 대답에 안심했다. 

“소리오닌 님,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무슨 말? 그럼 들어 와. 앉아서 얘기하자.”

“네.”

세리는 아까 덴타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소리오닌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는 몇 개의 주머니가 올려져 있었다. 세리는 주머니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이 주머니는 뭐예요?”

“아아, 그거. 씨앗이야.”

“네?”

“여기, 사브만에서만 나는 작물이라고 하던데. 바론에서도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받아왔어. 우리 집 밭에 심어 보려고.”

소리오닌이 가트가 전해 준 씨앗 주머니를 보면서 답했다. 

또 채소 씨앗을 받아온 거야? 세리는 바론에 돌아가면 농부라도 할 생각인지 여기저기서 씨앗을 받아오는 소리오닌이 못마땅해 입술을 삐죽였다. 

세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머니를 챙겨 배낭에 넣은 소리오닌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맞다, 세리.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소리오닌의 물음에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세리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음…… 저…… 점심은 따로 먹어도 되나 해서요.”

“점심을? 왜? 오늘 내가 말없이 사라져서 화났어?”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며칠 전에 알게 된 분이 점심을 같이 하고 싶다고 하셔서.”

“그래? 누군데 같이 밥도 먹을 만큼 친해진 거야?”

잠시 고민했지만, 소리오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알았어. 점심 정도야 뭐. 그렇게 하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소리오닌의 허락에 환한 웃음을 보낸 세리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탁 쳤다.

“소리오닌 님, 그러고 보니 컨디션은 어떠세요? 저희 언제 바론으로 돌아가나요?”

“으, 으응?”

갑작스런 세리의 물음에 뜨끔한 소리오닌이 눈을 크게 떴다. 

“소리오닌 님 몸이 좋아지면 바로 출발해야지요. 사브만에 머문 지 벌써 일주일이 됐는걸요. 에리한 님은 이미 바론에 도착하셨겠어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고요.”

“어어, 그렇지. 그래. 근데 아직은 가끔 머리가 아파서. 며칠만 더 있다가 가자.”

“으음, 그래요? 진짜 의사선생님을 만나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걱정이 가득한 세리의 말에 소리오닌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내 몸은 내가 잘 알지! 나도 여기에 계속 머무는 것도 미안한데,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싫어.”

“그건 그렇죠, 그래도 많이 안 좋으면 꼭 얘기하셔야 해요!”

“알았어.”

미안, 세리.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협상 카드가 소용이 없었어. 앞으로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할 것 같아. 세리 몰래 한숨을 내쉰 소리오닌은 얼른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

로센 공작의 하루 일과는 대부분 새벽같이 일어나 검술을 연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늘같이 특별한 손님이 방문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공작은 자신의 침실에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기척에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음?”

이 느낌은……?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시종들도 깨지 않은 시간이라 불빛이 없는 복도는 아직도 깊은 밤처럼 캄캄하기만 했다. 그러나, 순간 복도를 울리는 미묘한 소리에 공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거, 우리 아드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가?”

복도를 크게 울리는 공작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공작이 말을 끝내고 속으로 몇 초가 지났는지 세고 있을 때였다. 공작의 옆에 긴 그림자가 지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공작님.”

“공작님은 무슨. 아빠라고 불러보아라.”

공작은 웃음기 없는 무표정한 남자의 말에도 기분이 좋은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그럼, 그럼. 나야 언제나 건강하지. 너는?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게냐?”

“네, 걱정 마십시오.”

이미 그런 걱정을 받을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도, 공작의 눈에 남자는 그저 어리고 안쓰러운 존재였다. 

짧은 안부 인사가 끝난 뒤, 남자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짐짓 모른 척한 공작은 그를 계단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왔으니, 며칠 동안 쉬다 가는 게 어떠냐?”

“죄송합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네이드. 네 얼굴을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아는 게냐? 거 참. 섭섭하구나.”

공작이 일부러 더 크게 서운한 듯한 목소리를 내자, 네이드의 얼굴에 아주 잠시였지만, 죄송스러운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서툴군.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1층까지 함께 내려갔다. 주방에서 일하는 시종들이 먼저 깨어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공작이 말했다.

“이르지만 아침 먼저 먹을까?”

“저, 아침은 괜찮습니다. 그보다 말씀 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래? 근데 나는 밥을 먹어야 뇌가 돌아간단 말이지. 그러니 우선 밥을 먹고 듣도록 하마.”

공작은 휙 등을 돌려 식당으로 향했다. 네이드는 공작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한숨을 쉬고 그를 따랐다. 

로센 공작의 주방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평소보다 이른 공작의 아침식사에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면서도, 공작과 함께 있는 젊은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 했다.

“처음 보는 얼굴 아니에요?”

“맞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수도에 있을 때 함께 있었던 기사단의 병사일까?”

시녀 두 명은 빵을 구우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을 힐끔거리며 속닥거렸다. 그때 그녀들의 옆에 있던 요리사가 은근슬쩍 다가와 말했다.

“공작님 아드님이셔.”

“네에?”

깜짝 놀라 큰 소리를 낸 시녀들이 재빨리 입을 막고 요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녀들의 소리에 같이 놀란 요리사가 얼른 공작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살폈다.

그리고 ‘쉿!’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시녀들은 고개를 끄덕인 뒤 조심스럽게 입에서 손을 떼고 물었다.

“공작님께 아드님이 있으셨어요? 제가 알기로는…….”

“친아들은 아니고, 어렸을 때 데려오셨어. 꽤 애지중지하셨는데 요즘은 수도에서 지낸다고 하더라고.”

“그렇구나! 어쩐지 너무 안 닮았다 했어요. 물론 안주인님께서 엄청난 미인이셨다고 듣긴 했어. 공작님의 핏줄에서는 저런 얼굴이 나올 수가 없죠.”

시녀들은 작게 키득거리며 다 구운 빵을 접시에 담았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공작은,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공작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결국 네이드의 입에서 이런 물음이 나왔다.

“으음, 아니다. 그냥 수도의 물이 좋은지 어째 더 잘생겨졌다 싶어서.”

“…….”

공작이 인자한 얼굴로 팔불출 같은 소리를 했다. 그러자 네이드의 귀 끝이 살짝 빨개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도 안 날 정도로 작은 반응에도 신나는지 공작은 다시 껄껄 웃었다.

“공작님, 요리 나왔습니다.”

“아, 그래! 평소보다 많이 이른 시간인데도, 이렇게 준비해 주다니 고맙네.”

“아닙니다.”

요리사는 두 사람의 앞에 각각 요리가 담겨 있는 접시를 놓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접시를 내려놓은 요리사가 네이드에게 인사했다. 네이드 또한 낯이 익은 얼굴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찾아오십시오. 공작님이 외로워하십니다.”

“그래, 자주 좀 오거라. 내가 이 녀석 기저귀도 다 갈아주고, 밥도 먹여 주고 했는데. 순식간에 도이첸 님한테 홀라당 넘어가 수도에서 나오질 않으니.”

요리사의 말에 로센 공작까지 합세해 네이드를 몰아세웠다. 덕분에 상당히 불편했던 식사 시간이 끝나자, 네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침치고는 거한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1층 끝에 위치한 응접실로 향했다.

네이드는 로센 공작의 성품처럼 소박하게 꾸며진 응접실을 한번 둘러보았다가, 공작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시녀가 그 뒤를 이어 차를 내왔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냐? 웬만하면 도이첸 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군.”

차를 마시는 로센 공작은 어느새 장난기 없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네이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다 곧 입을 열었다. 

“에리한 왕자님과 소리오닌 양에 대한 일입니다.”

“음? 에리한 왕자님? 그 두 사람이 왜?”

얼마 전에 자신의 저택에 다녀간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왕을 보필하는 사람이 왕의 곁을 비우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사브만으로 가는 건 알고 계셨겠죠?”

“그래. 내가 사브만으로 가는 길에 마차까지 빌려 드렸는데.”

“왕자님이 사브만에 가신 이유가 린셀 공주님의 혼인 서약서 때문이었습니다. 근데 중간에 일이 꼬이게 되어서 공주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왕자님이 직접 혼인서약서를 가져간다는 것도 놀라운데, 린셀 공주님이 없어지기까지 했다니. 로센 공작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서?”

“왕비님이 그 사실을 아시고 사브만에 전령을 보냈습니다. 공주님 대신 소리오닌 님을 신부로 보내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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