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그렇죠. 아마 사브만이 개국된 이래 최초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능력은.”
“대, 대단하네요.”
“네. 그 덕분에 사브만도 많이 발전했어요. 그건 너무 고마운데, 애 성격이 좀…….”
카민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나한테만 그렇게 개차반이 아니었나 보네. 소리오닌은 다시 한번 어제의 그 비웃음을 떠올리며 주먹을 꾹 쥐었다.
마법을 잘 쓴다는 건 너무 유명한 거 같았다. 하긴 가트 왕자의 마법 능력은 세리까지 알고 있었으니,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그 외에 약점 같은 게 뭐가 없을까 고민하던 소리오닌은 가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묻기로 했다. 뭐라도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그렇군요. 혹시 가트 왕자님은 뭐 어려워 하는 건 없으세요?”
“음? 어려워하는 거요? 글쎄요? 왜요?”
“아! 마법을 잘 사용하니까, 힘든 거 없이 뭐든 다 잘할까 궁금해서요.”
“음, 아마도요. 걔가 난감해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카민은 소리오닌이 막내 동생에게 관심이 있나 싶어 최대한 좋은 말만 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반면 소리오닌은 난감해한 적이 없다는 말에 절망하고 있었다.
“역시, 안 그래도 제가 어제 저녁에 가트 왕자님을 우연히 봤는데, 화려한 마법을 사용하셔서 깜짝 놀랐어요. 갑자기 동물이 튀어나와서.”
“동물? 변신마법인가? 가트가 변신도 했어요?”
처음 듣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카민을 보며, 소리오닌이 속으로 ‘빙고!’를 외쳤다. 어쩐지, 나를 사람도 없는 구석으로 데려가서 변하더니만. 사람들은 아직 모르나 보네?
“네? 아, 아니! 어렴풋이 본 거라서.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가 마법을 잘 모르기도 하고.”
“그래요? 저도 마법을 잘 몰라요. 하하, 근데 소리오닌 양은 정말 공부를 많이 했나 봐요? 의사가 소리오닌 양에 대한 칭찬을 엄청 하더라고요. 그 짧은 시간에 근육도 잘 찾고 증상이 나타난 이유도 정확히 알아냈다고.”
“그 정도는 간단한 걸요. 어렵지 않았어요.”
어느새 다시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와 버렸다. 오늘의 수확은 변신마법에 대한 게 끝인 건가. 여기서 또 가트에 대해 물어보면 딱 봐도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하다.
결국 소리오닌은 그 뒤로 간간히 의학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사브만에 대한 얘기를 듣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예쁜 정원도 구경하고 즐거웠어요!”
“저야말로 소리오닌 양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도 가끔 시간 내 주시면 고맙겠네요.”
“물론이죠!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소리오닌이 카민에게 인사를 하고 뒤 돌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 소리오닌 양!”
“네?”
가만히 그 뒷모습을 보던 카민이 뭔가 생각난 듯 소리오닌을 불렀다.
“가트 녀석이요! 어려워하는 건 없는데, 엄청 싫어하는 건 있어요. 여기 이거요.”
카민의 손가락이 정원의 바닥을 돌아 흐르고 있는 도랑을 가리켰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소리오닌의 반응에 짓궂은 웃음을 지은 그가 얘기했다.
“어렸을 때 물에 빠져서 크게 다칠 뻔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인가, 물 자체를 싫어해요. 특히 이렇게 흐르는 물이요. 이거 보기 싫다고 이 실내 정원에 한 번도 안 왔다니까요?”
“하, 하하. 정말요? 흐르는 물이요……?”
“네! 그때보다 덩치가 몇 배는 커졌는데, 지금도 강이나, 작은 시냇가 근처에 가는 것도 싫어해요. 그런 건 귀엽다니까요. 누가 봐도 싫어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죽어도 아니라고 우기는 게요.”
강이나 시냇가 근처는 유일하게 막내 동생의 어린애 같은 면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평소에는 능글맞게 웃다가도, 시냇가 근처에 가면 뚱한 표정을 한 채 온몸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게 너무 귀여워서 타만 형님과 가트를 꼬여내서 근처로 많이 데려갔었는데.
카민은 정원의 도랑을 쳐다보며 가트의 귀여운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얘기를 들은 소리오닌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고 있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
도이첸이 대신들과 아침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병사 한 명이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장의 앞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그게, 에리한 왕자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뭐? 벌써?”
깜짝 놀란 시종장이 조심히 집무실 문을 열고 왕에게 보고했다.
“전하. 에리한 왕자님께서 지금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음? 생각보다 빨리 왔군?”
사브만에서 소리오닌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을 거라 예상했는데, 꽤나 빨리 도착하자 왕의 고개가 의문으로 기울어졌다.
“네. 우선 접견실에서 기다리시겠다고 전해달라 했답니다. 왕비님께도 알리겠습니다.”
“응. 그래. 내 바로 가 보겠네.”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제 에리한이 돌아왔으니 진짜 결혼 문제만 남았군. 모자가 서로 으르렁거릴 걸 볼 생각만으로도 도이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이 궁금해 왕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에리한이 도착했다는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에게도 전해졌다. 자신의 방에서 화장을 다시 고치고 있던 그녀는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에리한이 지금 왔다고? 이렇게 빨리?”
“네 그렇습니다. 이제 성문을 통과하셨을 겁니다.”
“그래?”
이렇게 빨리 올 리가 없는데. 왕비가 느끼기에도 예상보다 훨씬 빠른 귀환이었다. 설마 전령을 받기도 전에 도착해서 혼인 서약서만 주고 바로 돌아온 건가? 소리오닌 그 여자와 함께?
“알겠다. 곧 나가도록 하지.”
불안함으로 빠르게 뛰는 가슴을 한번 쥐어 잡은 왕비는 고치던 화장을 마무리하고 방을 나섰다.
***
에리한과 페릴은 그야말로 밤낮없이 달려서 바론에 도착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오는 도중 몬스터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아, 예상보다 하루는 더 빨리 올 수 있었다.
같이 오겠다는 페릴을 억지로 집으로 보내고 혼자 접견실에 앉아 있는 에리한의 얼굴은 초조해 보였다.
“왕자님!”
“시종장님!”
시종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부르는 에리한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나 깔끔하게 하고 다니던 왕자가 기름진 머리와 정리 안 된 수염, 까칠해 보이는 얼굴색까지.
오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이 될 정도로 엉망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엉망이십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괜찮으십니까?”
“네? 전하요?”
에리한은 자신을 보고 놀라는 시종장에게 아버님의 상황부터 물었다. 하지만 오히려 시종장은 에리한을 보고 무슨 뜻이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시종장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자세히 물어보지 않아서 일거라 생각한 에리한이 자세히 설명을 하려 했다.
“사브만에서 전령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아바마마께서…….”
“에리한?”
접견실의 문이 열리고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도이첸이 들어왔다. 앓았던 흔적이나 자그마한 상처 하나 없는 왕의 모습에 에리한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도이첸도 난생 처음 보는 망가진 아들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에리한? 대체 꼴이 그게 뭐냐!”
“아버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 지 알 수 없어서 에리한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버님,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 내 몸이 왜?”
“마, 많이 다치셨다고…….”
“내가?”
에리한의 말에 도이첸은 오히려 더 크게 놀랐다. 내가 다치다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두 사람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에리한? 상태가 왜 이리 엉망입니까? 전하를 보러 올 거였으면 단정히 하고 왔어야지요.”
“어, 어마마마.”
뒤이어 들어온 왕비는 에리한의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급하게 왔다 해도 기본 적인 몸가짐도 잊어버린 채 오다니. 그녀는 아들의 초췌한 모습에 다시 한번 혀를 찬 뒤 소파에 앉았다.
에리한과 왕 역시 왕비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요. 근데, 혼자 왔습니까?”
“우선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뭘 잘못 먹었나.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아들의 태도에 왕비는 속으로 의아해 했다. 분명 들어오자마자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당당하게 소리오닌의 손을 잡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왕비 역시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고민 중이었다.
“흠. 무엇이 얼마나 궁금해서 이런 몰골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물어보세요.”
“사브만으로 바람의 전령을 보낸 것이 사실입니까?”
에리한의 입에서 나온 바람의 전령 얘기에 왕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놓고 바로 물어보는 건가?
“네. 바람의 전령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질문에 왕비는 대답을 하지 않고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전령의 내용을 몰라? 어째서?
“그 전에, 소리오닌 양은 어디에 있나요?”
“어머님. 제 물음에 먼저 답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리한 답지 않게 다그치는 말투에 왕비는 본능적으로 뭔가가 꼬였다는 걸 눈치 챘다. 붉게 칠한 입술을 끌어올린 왕비가 천천히 에리한에게 물었다.
“아드님께서 알고 있는 전령의 내용은 어땠습니까?”
“……네?”
“분명히 전령을 보고 바로 달려온 것 같은데. 대체 무슨 내용을 들었기에 이렇게 헐레벌떡 왔나 하고요. 소리오닌 양도 사브만에 있는 것 같고.”
그 말이 정확했는지 에리한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런 즐거운 일이! 눈엣가시인 소리오닌을 두고 에리한이 혼자 오다니. 분명히 자신이 보낸 내용일 제대로 알았다면 절대로 혼자 왔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