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해열제, 해열제.”
세리는 끝없이 이어진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꽤나 당찬 걸음으로 서두르고 있었지만 왕궁의사가 있는 건물이 어떤 건지 물어봐야 하는데,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는 게 걱정이었다.
단층으로 되어 있어서 건물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러다 해열제는커녕 오히려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대체 어디에 있지?”
이제 슬슬 문 열린 곳이 있으면 무조건 들어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누군가의 뒷모습이 세리의 눈에 들어왔다. 기쁜 마음에 통통 뛰어 그를 앞질러 간 세리가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뒤에서 튀어나온 세리 때문에 깜짝 놀란 소년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세리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은발에 붉은 눈. 아무래도 소년 역시 이곳의 왕족인 것 같다는 촉이 왔다.
별 말없이 그녀를 빤히 보는 바람에 세리는 좀 민망했지만, 애써 웃는 낯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바론에서 온 소리오닌 공녀님의 시녀입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열이 나서 그러는데, 혹시 해열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
세리의 구구절절 설명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입을 열 생각이 없어보였다. 약방이 어디 있는지 모르나?
그게 아니면 시녀가 말 거는 게 기분 나빠서 그럴 수도 있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세리는 재빨리 사과를 건넸다.
“가시는 길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소년의 앞에서 벗어나 복도 끝으로 몸을 옮겼다. 그동안 소리오닌이 자신이 예의 없이 굴어도 다 받아주는 바람에 너무 편하게 생각했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세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비켜서면 당장 발걸음을 옮길 것 같았는데, 의외로 소년은 그 자리에서 세리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뭐지……? 이해가 안 가는 소년의 태도에 세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소년이 손목을 까딱거렸다. 다시 오라는 말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세리가 생각한 뜻이 맞았는지 작게 미소 지은 소년이 앞서 걸어갔다.
따라가도 되는 건가? 뒤에서 머뭇거리는 걸 느꼈는지 소년은 고개를 돌려 다시 손목을 까딱거렸다.
음, 과묵한 분이시네. 속으로 생각한 세리는 얼른 소년을 따라 걸어갔다. 꽤나 복잡한 길을 걸어서 도착한 약방에는 어제 연회장에서 봤던 의사를 포함해 여러 의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년을 보자마자 얼른 뛰어 나왔다.
“덴타 님,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여기, 이 여자애가 해열제를 찾고 있어요.]
걱정스런 의사의 물음에 덴타는 대답을 하는 대신 빠르게 공중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아, 말을 못하시는구나. 세리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이제야 소년이 말이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사이 소년과 의사는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륙에서는 대부분 글자를 공통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글을 배운 세리도 뜨문뜨문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소년이 허공에 쓴 글자는 너무 빠르게 사라져 버려서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었다.
“자, 여기 있다. 해열제를 찾고 있던 게 맞느냐?”
“네! 해열제를 찾고 있던 게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사가 내민 해열제를 받아 든 세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세리는 그 옆에 서 있던 소년에게도 인사를 한 뒤 약방을 나섰다.
소년을 따라온 길을 찬찬히 되짚으며 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짚는 게 느껴졌다.
“어? 아.”
덴타였다. 빨리 걸어왔는지 붉은 입술 사이로 조금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를 보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세리는 그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글씨 읽을 수 있어?]
세리의 눈앞에 반짝이는 글씨가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좀 전에 의사와 말할 때보다 귀여운 글씨체였다. 아까처럼 금방 사라지지 않는 글자들을 눈으로 읽은 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읽을 수 있어요! 어려운 단어들은 잘 모르지만…….”
세리의 솔직한 대답에 작게 미소 지은 덴타가 다시 글을 써내려갔다.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어?]
“네, 아까 오는 길을 다 외워놨어요.”
[똑똑하네.]
말이 아닌, 글로 듣는 칭찬은 생각보다 부끄러웠다. 얼굴이 발개진 세리의 앞에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내 이름은 덴타 크리타잔, 너는?]
크리타잔. 역시 그는 왕족이 맞았다. 세리는 다시 한번 소년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답했다.
“저는 세리라고 합니다, 덴타 님. 이름을 물어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응, 세리. 앞으로도 만나면 인사해 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만 소리오닌 님께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총총, 포니테일로 묶인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멀어져갔다. 세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덴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덴타 님!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어요? 왕세자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시종에게 알았다는 뜻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인 덴타는 본궁으로 향했다.
***
덴타에게 인사를 하고 소리오닌의 방으로 돌아온 세리의 가슴은 콩콩 뛰고 있었다.
내 또래의 왕족은 처음 봐! 연회에서 봤던 왕자님들과 같이 은발에 붉은 눈이었지만 아직 선이 곱고 얇아서, 어떻게 보면 중성적인 느낌이었다.
말은 못하지만 허공에 글씨를 쓰는 걸 보니 마법 능력은 뛰어날 거야! 바로 눈앞에서 마법을 보는 건 처음이라 촌스러운 티를 냈을까 생각하니, 그제야 부끄럼이 몰려들었다. 그나저나 어제 연회 때는 못 봤던 얼굴이어서 그 소년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의문의 왕족 소년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 새 방문 앞이었다.
“소리오닌 님, 여기 약 좀 드셔요!”
세리가 여전히 누워 있는 소리오닌을 일으키며 말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부여잡은 소리오닌이 힘없이 일어나 앉았다.
“정말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 이럴 게 아니라 의사한테 한 번 가 보실래요?”
“아니야, 우선 약 먹어보고. 가져다 줘서 고마워.”
“알겠어요. 약 먹고 한 숨 주무셔요.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우선 몸이 건강해야 가죠. 짧은 길이 아니잖아요!”
“응, 알았어.”
소리오닌이 약을 먹는 것을 확인 한 세리는 다시 이불을 덮어준 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소리오닌은 피곤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오히려 머릿속이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할까. 2주…… 버텨볼까, 아니면…… 잠깐, 까짓거 나도 그 망할 야옹이의 약점을 한 번 잡아 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맞아, 내가 뭐하러 그 놈 말을 듣고 있어야 해? 일 분 일 초도 아까운데!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겁먹었었어. 그게 무서우면 어떻게든 정체를 안 들키게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혹시 가트가 다 말해 버린다고 해도 에리한 님과 세리라면 나를 더 믿어줄 거야.
“이렇게 간단한 걸!”
휴, 살짝 한숨을 내뱉은 소리오닌이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우선 확인할 게 있지.
어디부터 가 볼까. 아직 사브만 궁의 위치를 다 외우지 못한 탓에, 기세 좋게 나온 것 치고 소리오닌은 여전히 손님방 근처에서만 빙빙 돌고 있었다. 시작부터 난관인가 싶어 눈썹을 찡그렸을 때였다.
“소리오닌 양?”
“안녕하세요, 카민 왕자님.”
카민은 그녀에게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연회 때는 너무 고마웠습니다. 안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혹시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아니에요, 잠시 산책하러 가려고 했어요.”
“그렇구나, 그럼 잠시 차라도 한 잔 할래요?”
“네, 좋아요.”
안 그래도 가트의 형제들을 찾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 발로 걸어왔구나! 속으로 ‘나이스!’ 를 외친 소리오닌이 환하게 웃은 뒤 앞서 걸어가는 카민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에요. 밖에서 먹기에는 쌀쌀할 것 같아서 실내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질까 하는데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어머, 정말 예쁜데요?”
“하하! 전혀 안 어울리지만 타만 형님의 취미가 정원 꾸미기랍니다. 이 정원의 설계도 타만 형님이 직접 했지요.”
실내정원은 연회장보다는 작았지만, 꽤 큰 공간이었다. 공간 가득 화려한 꽃나무부터 바닥에 자잘하게 깔린 들꽃까지.
웬만한 감각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완벽에 가까운 정원이었는데, 이걸 그 고기만 뜯어 드시던 타만 왕자가……?
오히려 앞에 있는 카민이 꾸몄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소리오닌은 정원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도 타만의 흔적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 괴, 굉장해요. 그냥 고기만 좋아하시는 줄…….”
“그렇죠? 나중에 꽃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요. 아마 밤새 설명해주실 거예요.”
하하, 밤새 꽃 얘기는 좀. 소리오닌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카민이 안내해 준 테이블에 앉았다. 카민이 미리 말해놨는지 테이블 위에는 이미 티타임에 필요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루나는 어떤가요?”
“아, 열은 많이 내렸어요. 아직 목은 비슷하지만, 치료를 하다 보면 괜찮아진다고 하니 꾸준히 치료해야겠죠.”
“네, 그래도 열은 내려서 다행이에요.”
따뜻한 차를 손에 쥔 소리오닌이 작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던 카민이 말을 이었다.
“가트. 상대하기 힘들죠?”
“흡!”
하루나에 대한 얘기를 하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이름에 차를 삼키던 소리오닌이 사레가 걸렸다. 그 모습에 더 놀란 카민이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괘, 괜찮아요?”
“큼! 아, 네. 괜찮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와서.”
“미안해요!”
“아녜요. 저, 가트 왕자님 얘기를 왜…….”
카민은 그제야 소리오닌은 아직 결혼에 관한 얘기를 모른다는 것이 생각났다. 말실수할 뻔 했다! 그는 재빨리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걔가 손님 앞에서도 버릇없게 구는 경우가 있어서. 혹시 소리오닌 양에게도 무례를 저질렀을까 봐요.”
“아아. 그렇군요.”
이미 뭔가를 저질렀구나. 심드렁한 소리오닌의 반응에 카민의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웬만하면 손님으로 온 이상 예의상 성격 좋다고 칭찬할 만도 했다. 하지만 소리오닌은 가트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굳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하아, 어렸을 때부터 워낙 오냐오냐 자랐어요. 아시다시피 저희랑 나이차가 많다보니 늦둥이인데다, 마법 능력도 독보적이라 특히.”
“마법 능력이…… 그렇게 엄청난가요?”
소리오닌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예상치 않게 빨리 가트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입이 바싹 말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