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00)

047.

잠시 고민을 하던 가트의 입에서 야옹이란 이름이 짓이기듯 튀어나왔다.

“야, 야옹이? 야옹이를 어떻게 아세요?”

소리오닌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이 반응 역시 그가 원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은빛 머리카락을 벅벅 긁은 가트가 결국 자신의 입으로 실토했다.

“하아, 나라고. 내가 야옹이라고.”

“응?”

터무니없는 말을 들은 소리오닌은 저도 모르게 반말을 내뱉었다. 

“야, 옹, 이, 가 나라고.”

가트가 다시 한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소리오닌의 머릿속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동물로 변할 수 있어? 영화나 만화책도 아닌데? 아무리 이 세계에는 마법이 있다지만 지금까지 사람이 동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머릿속이 멈춘 듯했다.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는 소리오닌이 답답해진 가트가 툭 그녀의 어깨를 쳤다. 그 덕분에 소리오닌의 멍한 눈동자에 퍼뜩 생기가 돌아왔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어, 어어, 어떻게 믿어요, 그 말을?”

뒤늦게 펄쩍 뛰며 삿대질을 하는 그녀의 반응에 가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야옹이라는 게 존재하고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 그야!”

“그야?”

“그…….”

“없지? 반박할 말이.”

결국 입을 꾹 다문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야옹이란 단어가 여기서 흔한 것도 아니고, 사브만에 와서 야옹이 얘기는 하지도 않았었다. 

“그, 그럼. 변신해 봐요.”

“……뭐?”

변신 못하기만 해 봐라. 소리오닌의 눈에 떠오른 생각을 읽은 가트는 짙은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야옹이가 맞으면? 뭐 해 줄 건데?”

“네?”

“변신 마법은 상당히 피곤하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변신하기에는 내가 너무 손해잖아.”

“하, 야옹이라고 주장하는 건 당신이라고요! 증명을 해야 믿어 줄 거 아니에요!”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그의 태도에 소리오닌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내가 변신해서 야옹이가 맞으면 부탁 하나만 들어 줘.”

“아니, 잠깐! 제가 왕자님이 야옹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래요?”

“상관없어?”

생각해보니 그랬다. 가트가 야옹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야옹이와 돈독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야옹이가 정말 동물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체가 이런 싸가지일 줄 알았으면 자신의 피 같은 빵을 나눠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심드렁해진 그녀의 반응에 가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끝까지 치사하게 나오게 만드네……?

“김희은.”

그의 입에서 ‘김희은’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리오닌의 눈이 커졌다. 

“그게 너의 진짜 이름이라고 했나? 대한민국? 분명 그런 나라에서 왔다고 했었지”

소리오닌의 어깨를 짚으며 가트가 환하게 웃었다.

자신에게 야옹이라는 이름을 지어 줄 때 직접 그녀의 입으로 말했었다. 원래 살던 동네에서 흔히 동물에게 붙여 주는 이름이라고.

그때는 이 여자가 미쳤나 했지만, 조금 전 하루나를 치료해 줄 때 확신했다. 이 대륙에서는 여자가 이런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소리오닌은 온몸의 피가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생각났다. 집에 갇힌 초반 가끔 놀러오는 야옹이에게 푸념했던 것이.

그때 자신은 이세계에 대해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했었고, 그런 자신에게 유일한 대화 상대는 야옹이뿐이었으니까. 

“정말…….”

“응, 정말 야옹이라니까? 어때? 변신해? 볼 마음이 생겼어?”

그의 손가락이 소리오닌의 어깨 위를 춤추듯이 돌아다녔다. 가트의 손가락이 지나가는 곳마다 차갑게 얼어가는 것 같았다.

“아,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 아니, 그런 곳에서 왔다는 거 자체도.”

“뭐, 안 믿어도 상관없어. 그래도 사람들은 네가 제정신은 아니란 걸 알겠지. 아니면 공녀를 흉내 내는 범죄자라거나? 이렇든 저렇든 미친 여자라는 소문이 나면 에리한 왕자님이 널 봐 주겠어?”

에리한의 이름이 나오자, 소리오닌이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맑은 초록색 눈이 가트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것보다 에리한의 이름에 제일 크게 반응하는 소리오닌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칼을 쥐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이제 내가 야옹이인 거 완전히 믿어지지? 그럼 부탁 하나 해도 돼?”

“뭐라고요?”

“내가 야옹이 맞으면 부탁 하나 들어달라고 했잖아.”

이런 상 미친놈!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입을 꿰매 버릴 거야. 아니, 야옹이를 만나지 말아야 하는 건가? 어쨌든 엎질러진 물이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벼, 변신하면 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그럼 변신해줄게.”

순식간이었다. 소리오닌을 다 가릴 만큼 커다란 키의 사내가 없어지고, 그녀가 너무나 좋아했던 야옹이가 잔디밭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뮤!”

사르르 붉은 눈을 접으며 야옹이가 울음소리를 냈다. 소리오닌은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장면에 손끝만 덜덜 떨고 있었다.

야옹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가락 끝을 핥았다. 까칠한 혓바닥이 느껴지자, 얼른 손을 뒤로 숨겼다. 그 움직임을 보던 야옹이가 작게 “뮤.” 울었다.

“이, 이제 됐어요. 믿어요. 야옹이가 가트 왕자님이라는 거.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요.”

“뮤우.”

야옹이의 간드러지는 울음소리를 끝으로, 그녀의 앞에는 다시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사브만의 왕자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여기로 떨어진 후에 제일 충격적인 일이라고 해야 하나. 에리한과 함께 있을 때 봤던 마법들은 모두 사랑스럽고 귀여운 마법들이었는데. 가트가 보여준 마법은 도저히 귀엽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부탁할 차례인가?”

“뭔데요?”

그의 말도 안 되는 고집에 대꾸하기를 포기한 소리오닌이 물었다. 

“2주만 여기에 있어.”

“……네?”

“2주만 사브만에 머물러 달라고.”

***

세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침부터 소리오닌의 상태가 이상하다.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몇 번을 불러야 겨우 한 번 대답하고. 생기 넘치던 얼굴은 어디 갔는지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와 있는 것 같았다. 

“소리오닌 님!”

“으, 응?”

방금도 마차가 있나 가 보자고 하는 자신의 말에 대답을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러셔요? 얼른 마차가 있나 가 보셔야지요!”

“마차?”

“네! 성에 사람이 몇 명인데, 마차 정도는 금방 들어올 것 같다고, 어제 저녁에 돌아오면서 아침이 되면 저희가 먼저 가서 맡아 놓자 하셨잖아요.”

세리가 침대에 걸터 앉아있는 소리오닌의 손을 잡아 당겼다. 세리를 따라 일어나려던 소리오닌이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소리오닌 님? 어디 아프셔요?”

“아, 아냐. 근데 세리,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소리오닌은 궁금해 하는 세리를 보고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우선 앉아 보라는 뜻이었다.

세리는 아무래도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있지, 전에 디그롬에서 올 때 말했잖아. 천재적인 마법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네, 그랬죠.”

“그 사람들, 혹시 막 변신 같은 것도 해?”

“변신이요……?”

세리의 물음이 소리오닌의 고개가 격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저도 잘은 모르는데……. 초크센이나 바론에는 현재 마법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없잖아요. 건너 건너 들은 거라 확실한 건 아니에요.”

“괜찮아. 그냥 그런 마법도 있는지 만이라도.”

“그런 마법이야 있죠!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도 많잖아요. 소리오닌 님, 공부하실 때 주무셨어요?”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 심각하게 물어보는 소리오닌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진짜 있구나, 그런 마법. 바론에 그런 대단한 마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어!

“참! 세리, 우리 조금만 있다가 돌아갈래?”

“네? 왜요? 어떻게든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아, 나 몸이 안 좋은 거 같아서. 몸 좀 추스른 다음 돌아가야 할 거 같아.”

소리오닌의 대답에 세리가 펄쩍 뛰어 올랐다. 역시 이상하다 했어. 이렇게 맥없이 늘어질 분이 아닌데! 세리는 당장 소리오닌의 이마를 짚었다. 뜨끈뜨끈하지는 않았지만 약간 미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네요! 소리오닌 님, 약간 열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가서 약 받아 올게요.”

“아, 아니 괜찮은데.”

“괜찮다뇨! 타지에 와서 아프면 그만큼 서러운 게 없다니까요? 기다려 보셔요, 어제 의사가 있었으니까 약도 있을 거예요. 얼른 누우세요.”

세리가 이불을 들어 올리며 베개를 팡팡 내리쳤다. 박력 넘치는 행동에 작게 웃은 소리오닌이 아무 말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세리는 그녀의 어깨까지 이불을 꼭꼭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소리오닌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혹시나 들키면 어쩌지, 내가 사실은 소리오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세리는 자신을 어떻게 볼까? 에리한에게도 세리에게도 절대로 들키기 싫었다. 

2주만 참자.

2주만 잘 지나면 다시 바론으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럼 에리한과도 다시 만나고, 세리와도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거야.

가트와 약속했던 걸 다시 상기하며 이불을 손에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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