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00)

045.

“그럼, 점심 식사는 식당에서 편히 하시고. 연회 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히튼은 마지막까지 허허 웃는 얼굴로 인사한 뒤 돌아갔다. 소리오닌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전혀 다른 성격의 넷째 왕자를 떠올렸다. 

“생긴 건 완전 붕어빵인데, 어쩜 저렇게 다를까?”

“네? 뭐가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세리가 소리오닌의 혼잣말을 듣고 물어왔다. 

“아니, 그 넷째 왕자 있잖아. 말하는 것도 그렇고 좀 재수 없어서. 큰 형은 저렇게 사람이 좋은데 말이야.”

“아아, 그 공주님의 결혼상대라는 분 말이지요? 그래도 저는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던데……”

“익숙? 그런 성격이 뭐가 익숙해?”

사사건건 얄미운 행동만 골라하는 그런 사람은 여기서 단 한번도 못 봤는데. 소리오닌은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아, 아니요! 그 성격이 익숙하다는 게 아니고, 생긴 거요.”

“생긴 거? 생긴 게 왜?”

“그냥 묘하게 익숙해서요. 그 눈동자랑 은색 머리카락이…….”

어디서 봤지? 생각이 날듯 말듯한 기분에 세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에이, 익숙하기는. 저런 얼굴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으면 단번에 알아봤겠지. 생긴 건 잘생겼잖아.”

“그렇긴 한데…… 어라? 소리오닌 님, 지금 에리한 님 말고 다른 남자한테 잘생겼다고 칭찬한 거예요?”

“으응?”

세리가 은근슬쩍 소리오닌에게 다가갔다.

“솔직히 누가 더 잘생긴 것 같으셔요?”

“……당연히 에리한 님이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흐음? 가트 왕자님도 잘생겼다면서요?”

“객관적으로 잘생겼다는 말이야. 오해하지 마!”

새빨개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소리오닌이 세리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킥킥대며 소리오닌을 보던 세리는 그나마 그녀의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

점심 식사가 끝난 시간. 타만과 카민이 히튼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다.

“형님, 마차가 없어졌습니다. 부인이 다과회를 가야 한다는데 어쩝니까?”

“네, 저희 애도 책을 사러 나가야하는데 마차가 없어요!”

히튼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 행동에 타만과 카민은 조용히 형님을 바라봤다.

“좀만 기다려라, 가트가 곧 해결해 줄 거야.”

“가트가요?”

“왜요? 이것도 또 가트가 꾸민 일입니까?”

히튼이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타만은 차마 형님 앞이라 욕을 할 수 없어 애꿎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카민도 이번에는 가트가 너무했다 생각했는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히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오늘 저녁에 연회를 하도록 하지. 거창한 건 아니니, 그냥 식구들이랑 같이 밥 먹는다 생각해라.”

“연회요?”

“알겠습니다. 근데 마차는 대체…….”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이따 가트 만나면 직접 물어 봐.”

더 이상 가트에 관련된 얘기는 듣기도 싫어진 히튼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큰형님이 저렇게 나오면 더 이상 닦달할 수 없는 두 사람은 가트를 만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다짐을 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가트 그 자식 말이야! 버릇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한 거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휴, 따끔하게 말해야겠어요.”

“그래, 내가 검술로만 일대일로 싸우면 지지 않는데 말이지.”

“저도 학문으로는 지지 않습니다.”

씩씩대는 두 사람 앞에 거짓말처럼 가트가 나타났다. 

“제 욕하고 계셨습니까?”

조용히 가라앉은 동생의 붉은 눈을 본 두 사람은 뜨끔했지만,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래! 근데 네가 욕먹을 짓을 해서 그런 거잖아?”

“제가요?”

“그래! 너 마차 다 어쨌어?”

형님들이 마차 얘기를 하자, 가트는 이제 알겠다는 듯 얼굴에 얕은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의외로 순순히 그들에게 사과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형님들, 며칠만 참아주십시오. 혹시 정 필요하시거든 제게 오시면 마차를 바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뭐……? 너 지금 죄송하다고 했냐?”

“네. 아무래도 제가 너무 번거롭게 하는 거 같아서요.”

“큼, 큼! 잘 알고 있구만! 그래, 이번은 네가 사과하니까 넘어가기는 하는데…….”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막내 동생을 보는 두 형님들의 눈에 승리감이 차올랐다. 그런 둘의 변화를 놓치지 않은 가트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를 이해해 주신 형님들의 넓은 마음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

“앞으로도 저와 소리오닌의 결혼을 위해 형님들이 아량을 베풀어주신다니.”

“아니, 우리 그런 말한 적 없는데?”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야, 야!”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한 가트가 순식간에 자리를 벗어났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를 못한 두 사람만 멍하니 복도에 서 있었다. 

“저거, 미리 연막친 건가? 나중에라도 딴 말하지 말라는 거?”

“왠지 그런 거 같은데요? 근데 웬일로 형님이 가트의 말을 이해하셨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냥 본능적으로 느낀 거 같아.”

타만은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한 번 문질렀다. 

***

소리오닌은 하필 자신들을 데리러 온 게 가트라는 사실이 맘에 안 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 연회장으로 향하면서도 속으로 툴툴거리고 있었다. 긴 다리로 성큼 성큼 앞서 나가던 가트가 갑자기 멈춰 섰다. 별 생각 없이 걷다가 부딪힐 뻔한 소리오닌이 가까스로 뒤에 멈춰서며 그의 등을 노려봤다. 

“근데 왜.”

“네?”

천천히 뒤 돌아 선 가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고개가 기울어짐에 따라 은색 머리카락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반짝였다. 빛나는 은발에 잠시 시선을 줬던 소리오닌이 가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내 옆에서 안 걸어?”

“……옆에서 걸어야 해요?”

“응.”

“왜요?”

“나는 안내를 해 주는 거지, 끌고 가는 게 아니잖아. 뒤에서 졸졸 쫓아오는 거 같아서 기분 나빠.”

가지가지 하네, 진짜. 까탈스러운 막내 왕자의 말에 소리오닌은 세리와 함께 그의 옆에 섰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어가자, 한 사람조차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복도의 양 옆이 꽉 차 버렸다. 

“이게 뭐예요. 진짜 이렇게 가고 싶어요?”

“응, 좋은데. 연회장까지 이렇게 갈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난 뒤 그는 소리오닌과 딱 붙어가는 상황이 만족스러운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가트와는 정반대로 소리오닌의 표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아까처럼 가겠다고 말하고 싶은 걸 꾹꾹 참는 중이었다. 다행히 중간에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마주 오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난감할 뻔했다. 

그렇게 도착한 연회장은 가장 동쪽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한 채를 통째로 쓰는 듯 사방이 트여 있는 공간에 문 대신 커다란 기둥 사이사이를 커튼으로 막아 놓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은 움직일 때마다 여러 가지 색으로 오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회장 가운데 커다란 원형 식탁이 있었고 그 주위를 빙 둘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여성들은 여러 가지 머리색이었지만, 남자들은 대부분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이는 걸 느낀 소리오닌은 긴장된 얼굴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어서 와요.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 식구들뿐이니까 편하게 생각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히튼이 그녀를 빈 자리로 안내하면서 얘기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은 소리오닌은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바론과는 다르게 투박하게 담겨져 있지만, 한국에서 먹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의 음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빨갛게 양념된 것들이 몇 개 보여서 저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많이 먹어.”

소리도 없이 어느새 옆 자리에 앉았는지 가트가 소리오닌의 앞에 그릇을 밀어주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의 행동 중에 제일 맘에 드는 거라 소리오닌은 미소를 짓고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의 웃음에 가트의 손가락이 잠깐 멈칫했지만, 소리오닌은 음식들을 둘러보느라 눈치 채지 못했다. 

히튼의 주도로 간단하게 소개를 마친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소리오닌 양? 그래,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저요? 어, 23살이요!”

카민의 물음에 전에 왕비에게 들었던 걸 상기하며 소리오닌이 답했다. 23살. 가트가 22살이니까, 누나네?

은근슬쩍 소리오닌의 앞에 맛있는 음식을 가까이 가져다주는 가트를 보며 카민이 나직이 웃었다.

“가트랑 한 살 차이네요? 나이도 비슷한데 잘 지내요.”

“네에, 그럴게요.”

“카민 형님, 근데 형수님은 안 오셨습니까?”

가트는 카민이 쓸데없는 말을 할까 얼른 주제를 돌렸다. 카민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포크를 내려놨다.

“하루나가 며칠 전부터 열이 나고 몸이 불편해서, 아내가 옆에서 간호하느라 오늘 연회에 못 왔어.”

“하루나가요? 어디가 많이 안 좋습니까?”

“글쎄, 어린 아기들이 아픈 건 워낙 여러 이유가 있으니까.”

태어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은 자신의 조카를 위해 가트는 약이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리오닌 또한 아기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들의 핏줄이 워낙 튼튼하니까 괜찮을 거야.”

카민은 괜찮다는 뜻으로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의 옆에서 타만은 자신의 아들들과 고기반찬을 사이에 두고 서로 먹겠다며 싸우고 있었다. 

“아버님, 아까도 제가 먹으려던 고기를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아버님 포크 옆에 저 많은 뼈들은 그럼 뭡니까?”

“어어, 이게 왜 여기 있냐?”

두둑히 쌓여있는 뼈들을 보며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인 타만이 아들에게 고기를 주며 입맛을 다셨다. 타만의 아들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똑같이 두툼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부자 사이인 게 느껴져 그들을 힐끔 쳐다본 소리오닌이 풋,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소리오닌을 쳐다본 타만이 씨익 눈을 접으며 미소를 보냈다. 소리오닌도 그에게 마주 미소를 보낸 뒤, 매콤해 보이는 채소볶음을 먹으려고 포크를 움직일 때였다. 

“여보, 하루나가……!”

한 여자가 아기를 안아 들고 연회장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이 흘러내려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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