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00)

044.

“소리오닌 님, 잘하셨어요! 저희도 오늘 출발하면 금방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네! 바로 마차를 준비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너무 걱정 마셔요!”

세리는 소리오닌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함께 들어왔다.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에리한을 먼저 보냈다는 생각에 소리오닌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나저나 정신이 없어서 혼인에 대한 내용은 제대로 말을 못했네요. 오히려 다행인 거 같아요, 그렇죠?”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사브만에서도 당분간은 혼인 얘기를 못 하겠다.”

“그렇죠. 바론의 전하가 아프시다는데, 혼인이라뇨.”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이렇게 흐지부지되어서 혼인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제일 좋은 일일 텐데. 방금 전 가트의 행동에 발끈했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은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이었다. 화를 낼 입장이 아니었구나. 이 찜찜한 마음도 그렇고 얼른 사브만을 벗어나고 싶었다. 

똑똑,

소리오닌과 세리가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갈 수 있겠다! 한 걸음에 방문으로 달려간 소리오닌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어……?”

그녀의 방문 밖에는 마차를 준비해주겠다고 한 히튼이 아닌 가트가 서 있었다. 

“마차.”

“네, 마차요! 준비되었나요? 지금 나가면 되는 건가요?”

‘마차’라는 단어만 듣고 다급하게 물어오는 소리오닌을 본 가트는 고개를 저었다.

세리 역시 가방을 들고 나오는 길에 그의 행동을 본 뒤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알리러 온 게 아닌 건가?

“마차 없어.”

“……네?”

이게 무슨?! 세리와 소리오닌은 어이없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마차 부서졌어.”

“부서져요? 마차가?”

“응, 방금.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부서졌어.”

하, 짧게 숨을 내뱉은 소리오닌이 가트를 노려봤다. 소리오닌의 짜증이 가득한 눈빛을 보면서도 가트는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비켜 봐요! 마차 있는 데가 어디에요? 제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소, 소리오닌 님!”

가트를 지나쳐 복도로 나가는 소리오닌을 부르며 세리도 황급히 방을 벗어났다. 가트 또한 빠른 걸음으로 소리오닌의 뒤를 따라갔다.

자신보다 머리 몇 개는 작은 그녀가 동동 거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이 귀여웠다. 야옹이일 때는 소리오닌이 귀여워 해줬는데, 이제 반대가 되었네.

가트는 그녀가 마구간을 찾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소리오닌에게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세리와 흩어져서 넓은 성을 일일이 뒤져가며 겨우 마구간을 발견한 소리오닌은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뛰어갔다. 

“안녕하세요! 여기 마차 좀 하나 빌려주시겠어요?”

다짜고짜 마차를 내놓으라며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여자를 본 관리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오늘따라 다들 왜 이렇게 마차에 관심이 많은 건가! 

“아니, 근데 누구십니까? 갑자기 마차라니요?”

“저는 바론에서 왕자님의 혼인 서약서를 가져온 사람인데요, 다시 바론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히튼 왕세자님께서 마차를 빌려주시기로 했답니다! 그러니 마차 좀 부탁드립니다.”

속사포처럼 내뱉는 소리오닌의 말을 듣던 관리자는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가트를 발견했다.

다행히 형수님이 하나 남은 마차를 타고 나갔는지, 휑한 마구간을 보던 가트의 얼굴에 만족스런 웃음이 떠올랐다.

“저, 마…… 마차는 없습니다.”

“네?”

“그, 그게……!”

어쩌지 가트 왕자님이 다 부쉈다고 말해야 하나? 근데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어서 대놓고 고자질하는 것도 좀 그런데. 관리자는 입은 있으나 말을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몬스터가 부쉈어.”

관리자가 우물쭈물하는 걸 본 가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네? 몬스터요?”

“네?”

관리자와 소리오닌이 동시에 소리쳤다. 가트의 사나운 눈빛을 받은 관리자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막았다.

관리자의 행동에 수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깨끗하게 비어 있는 마구간을 보니 최소한 마차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응, 아침에 몬스터가 나왔어.”

“저, 저렇게 성벽이 높은데 몬스터가 나왔다고요?”

“점프 잘하는 몬스터 많아.”

의심이 가득한 소리오닌의 눈빛에도 가트는 태연히 답했다. 

“근데, 몬스터가 마차만 부수고 갔어요?”

“그런가 봐, 이상한 몬스터지.”

가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어색한 연기에 관리자는 자신이 더 초조해지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저런 얼굴로 하는 거짓말을 누가 믿겠다 싶었다.

그러나 가트를 보는 소리오닌의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몬스터를 본 게 겨우 며칠 전이었다.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 아직 부족한 소리오닌은 이런 몬스터도 있나, 하며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 진짜에요?”

그녀의 시선이 다시 관리자에게 향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는 사람이 있구나! 여기에 있네?

하지만 아까부터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가트 때문에 관리자는 양심이 콕콕 찔렸지만, 아래위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네에. 순식간에 마차들이 부서졌습니다.”

“하하, 말도 안 돼…… 근데 어디 안 다치셨어요?”

“네?”

뜬금없는 소리오닌의 질문에 관리자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마차 부서질 때 저기, 멀리 있었대.”

또다시 가트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결국 소리오닌은 이상한 몬스터 때문에 마차가 사라졌다는 것만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아까와는 달리 힘없이 걸어가는 소리오닌의 뒤에서 가트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갔다. 

“저기요. 가트 왕자님?”

자꾸 신경에 거슬리는 이상한 노래를 불러대는 가트 때문에 안 그래도 나쁜 기분이 더 나빠진 소리오닌이 뒤돌아 그를 쳐다봤다.

소리오닌의 초록 눈동자를 본 가트는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띠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왜?”

“저 그만 따라오시고, 갈 길 가시죠?”

“나? 왜? 따라가면 안 돼?”

“아니, 저 따라와서 뭐하시려고요?”

“그냥. 좋아서.”

뭐래? 소리오닌의 얼굴이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 모습도 귀여워 가트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길을 가던 소리오닌이 갑자기 뒤돌아 가트에게 말했다.

“저 화장실 가는 거예요. 따라오지 마요. 확!”

순간 멈칫한 가트를 본 소리오닌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시야를 벗어났다. 

저렇게 질색하니 지금은 이정도만 할까. 어쨌든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테니. 가트는 기지개를 켜며 소리오닌이 간 방향과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

소리오닌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세리를 만났다. 소리오닌에게 마구간에서 있었던 얘기를 전해들은 세리의 얼굴도 난감해졌다.

“정말 한 대도 없었어요?”

“응, 그렇다니까? 어디 다른 데 숨겨뒀나?”

“그 큰 마차가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일 텐데, 어디다 숨겼겠어요. 그럼 이제 어떡하죠?”

“그러게 말이야.”

소리오닌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둘은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 당장 출발해야 그나마 2주 안에 도착할 텐데…….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소리오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리, 우리 그냥 걸어갈까?”

“네에? 말도 안돼요! 그냥 길도 아니고 숲길을요? 숲에 들어가자마자 큰일 날 거예요!”

“그치만……. 그래, 맞아. 그럼 디그롬까지만이라도 가면 되지 않을까? 로센 공작님이 마차를 빌려주실 거야.”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소리오닌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신난 그녀를 보던 세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 디그롬까지 가는 길이 마차로 가도 반나절이었는데, 무턱대고 걸어갈 만한 거리가 아니잖아요.”

“하아, 그런가? 마차를 괜히 돌려보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순식간에 우울한 얼굴로 돌아온 소리오닌이 힘없이 발만 굴러댔다. 세리 역시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 사람들도 마차는 필요할 테니까 금방 만들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히튼 왕세자님께 잘 말씀드리면 빨리 준비해 주실 거 같아요.”

“그렇겠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축 처진 분위기를 끌어올려보는 두 사람이었다. 

“좋아, 말 나온 김에 히튼 왕세자님을 만나고 와야겠다.”

“네? 지금 당장이요?”

갑자기 일어난 소리오닌 때문에 놀란 눈을 한 세리가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응,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고 다시 말씀드려야지.”

아침부터 계속 재촉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한시가 급한 소리오닌은 얼굴에 철판 좀 두르기로 했다. 

똑똑.

막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소리오닌은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재빨리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앞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짓고 있는 히튼 크리티잔이 서 있었다.

“아, 히튼 님.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어쩐 일이세요?”

“그…… 마차가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 온 참입니다. 이거 너무 미안해서 어떡해야 할지.”

“아닙니다, 저희는 부탁하는 입장인 걸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마차를 구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시원하게 울리는 대답을 들은 소리오닌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히튼은 그 모습에 다시 양심이 찔려왔지만 막내 동생의 결혼이 더 중요했기에, 슬슬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어제 말했던 연회를 취소하지 말고 열까 합니다.”

“네? 하지만, 에리한 님도 없는데……”

연회라니. 그냥 조용히 있다 떠나고 싶은데. 히튼의 부담스러운 제안에 소리오닌이 조심스럽게 거절하려고 했다. 

“저희 사브만에 온 모든 분들은 소중한 손님이 아니십니까? 에리한 님이 없다고 소홀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마차에 대한 사과도 겸한 것이니, 부디 오늘 저녁에 함께 해 주십시오.”

소리오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걸 알았다는 듯, 히튼은 미리 준비해 놓은 이유를 구구절절 이어갔다.

계속해서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미안해져 소리오닌은 결국 저녁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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