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이렇게까지 하는데 자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고집을 부릴 수 없어, 결국 소리오닌도 에리한을 먼저 보내기로 했다.
“그래요, 에리한 님. 먼저 가 보세요. 저는 세리와 천천히 갈게요.”
“소리오닌 님, 저는 괜찮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에리한이 소리오닌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는 가트의 눈이 다시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슬쩍 막내 동생의 기분이 안 좋아지는 걸 눈치챈 히튼이 에리한에게 얼른 말의 고삐를 내밀었다.
“에리한 왕자님, 여기서 이렇게 지체하시면 정말 늦겠습니다. 부디 저를 믿으시고 먼저 출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맞아요. 제 걱정 마시고 최대한 빨리 바론으로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세요.”
소리오닌마저 자신을 보내려 하자, 에리한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에 올라탔다.
“소리오닌 님,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조심히 오십시오.”
“네, 에리한 님도요. 저도 바로 출발할게요! 페릴 님, 에리한 님을 잘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소리오닌 님, 그럼 바론에서 뵙겠습니다.”
어느새 환해진 하늘에 페릴이 재촉했다. 에리한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페릴과 에리한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성 밖으로 사라져갔다. 소리오닌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들이 향한 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들어가서 쉬어.”
소리오닌의 어깨를 툭, 친 가트가 말했다. 그 바람에 퍼뜩 놀란 그녀가 가트를 노려봤다.
“저기요. 근데 왜 자꾸 반말이세요?”
“뭐?”
‘뭐어’? 이 자식이 진짜!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구만! 가트를 보는 소리오닌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렇잖아도 가트가 어제부터 에리한한테 은근 시비를 거는 것 같아 맘에 안 들었는데. 잘 됐다 싶어 뭐라 쏘아붙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가트, 너 자꾸 손님한테 예의 없이 말투가 그게 뭐냐!”
그러나 점점 얼굴을 찌푸리는 소리오닌을 지켜보던 히튼이 재빨리 가트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얼른 소리오닌을 달랬다.
“흠, 그래요, 그래요!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쉬고 계세요.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게 어떻습니까?”
얄미운 가트의 얼굴 대신 친절한 왕세자의 얼굴이 나타나자, 소리오닌도 소리치려던 마음을 다시 한번 꾸욱 눌러 담았다.
“아녜요. 죄송하지만 바로 마차를 준비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걱정이 돼서 최대한 빨리 가고 싶은데.”
“지, 지금 당장 말입니까?”
“네. 지금 당장 가능하다면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차를 준비하지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니 방에 가서 계시면 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리오닌은 세리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가트를 지나칠 때는 그를 살짝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트는 쌩하니 찬바람이 부는 소리오닌의 태도에 살짝 침울해졌다. 그를 본 히튼이 가트의 등을 퍽,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갑자기 등으로 느껴지는 충격에 가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가트, 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내가 언제까지 네 장단에 맞춰 줘야 하는 거야?”
“어제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둘을 떨어트려 놓을 거라고. 지금 계획대로 되었는데요.”
“지금 소리오닌 양도 가겠다고 난리인 거 안 보여? 뭐 몇 시간 떨어트려 놓는 걸 말한 거야?”
히튼이 씩씩거리는 걸 보면서도 가트는 동요 없이 평온했다. 오히려 히튼을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히튼은 아들 뻘인 막내 동생의 불순한 눈빛에 속에서 다시 욱하는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러나 가트가 입을 열자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마차를 없애면 되는 거죠?”
“……뭐?”
“소리오닌이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건 간단합니다.”
“그래서 성에 있는 멀쩡한 마차를…….”
“없애야죠.”
아이고, 두야. 이 미친 녀석.
“마차로 데려다 준다고 한 지 한 시간도 안 지났거든? 근데 뭔 마차를 없애?”
“원래 마차 없어지는 건 순식간 아닙니까? 이상하네.”
“그렇게 고개 갸웃거려도 하나도 안 귀여워. 아, 몰라! 이제 네 맘대로 해라. 난 안 도와줄 거야!”
“정말 안 도와주실 겁니까?”
순식간에 차게 식는 동생의 빨간 눈동자를 본 히튼의 어깨가 움찔했다. 으, 아버지! 언제 오십니까? 요양 중인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이 망나니를 맡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했다.
“아, 어제 네가 그랬잖아! 그냥 가만히 있으라며?”
“하지만 큰 형님은 이미 개입을 하셨으니 끝까지 책임지셔야죠.”
히튼은 동생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오늘 저녁, 예정대로 환영 연회를 여는 건 어떻습니까? 너무 화려하면 부담스러우니까 소박하게.”
“환영 연회? 소리오닌 양이 잘도 오겠다!”
“안 올 건 또 뭡니까? 먹는 거 좋아하니까 올 거예요.”
가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웃으며 말했다. 대체 소리오닌 양과 이 망나니가 어떻게 엮인 건지. 알 수 없는 동생의 행동에 히튼의 머릿속만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
“왕자님, 잠시 쉬고 가시죠? 말들도 물을 한 번 마시게 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렇게 하자.”
사브만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린 지 반나절. 페릴이 한참 앞서나간 에리한을 겨우 따라잡으며 말했다.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숲의 안쪽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오래 달려 커다란 숨소리를 내는 말들에게 물을 준 다음, 편편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꽤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뻐근해진 어깨를 한 번 움직인 페릴이 심각한 표정을 지은 에리한을 쳐다봤다.
“왕자님, 소리오닌 님이 걱정 되십니까?”
“흠, 그것도 그렇고.”
“소리오닌 님도 바로 따라 오신다고 하셨고, 전하도 괜찮으실 겁니다. 워낭 건강한 체질이시니까요.”
“그래. 괜찮으실 거야.”
대답을 한 다음에도 풀리지 않는 에리한의 굳은 표정에 페릴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그것 말고도 뭔가 더 걱정되는 게 있으십니까?”
“……응?”
“아니, 아까부터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이셔서.”
“사브만 말이야.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네? 뭐가요?”
페릴은 생각보다 호의적인 사브만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자신의 일처럼 걱정해 주고, 말도 빌려주기까지 했는데.
이상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브만에 대한 편견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어제랑 오늘 아침까지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뭔가 다 준비되어 있는 듯한 각본 같은 느낌이 들었어.”
“네? 그게…….”
“너무 미묘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왔단 말이지. 그 넷째 왕자.”
에리한은 페릴에게 말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 가트라는 넷째 왕자가 상당히 거슬렸다.
어제 혼인 서약서를 받자마자 바람의 전령의 내용을 말한 것도 넷째 왕자였고, 오늘 아침 소리오닌을 놓고 가라고 한 것도 넷째 왕자였다.
그것도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논리적인 이유까지 대면서.
곰곰히 생각하던 페릴은 혹시 이것도 사브만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아닐까 싶어,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설마요! 그 왕자가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요? 어제 처음 본 사람들인데.”
“그런가……? 흐음.”
“왕자님이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예민하신 걸 거예요.”
페릴은 에리한에게 괜한 기우라며 웃어넘겼다.
다시 출발하려 움직이면서도 에리한은 자꾸 그 넷째 왕자의 얼굴이 떠올라 찜찜했다. 그 붉은 눈동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Chapter 3.
가트는 성문을 벗어나 마구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 안에 있는 마차가 몇 대더라? 성 밖으로 나가 있는 것을 빼도 꽤 많은 수의 마차가 있을 텐데.
마차 부수는 건 일도 아니지만, 둘째 셋째 형님들의 잔소리가 좀 귀찮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깔끔하게 없애야지.
가트는 손을 뻗었다. 그가 마법을 걸자 마구간의 모든 마차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가, 가트 왕자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갑자기 나타나 일렬로 정렬되어 있는 마차를 싹 다 가루로 만든 가트의 행동에 관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당분간 사브만 성 안에 마차는 없는 거다.”
“네? 아니 그럼 마마님들은 어떻게 다니시라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관리자가 바닥에 떨어진 마차의 가루들을 손으로 주워들었다.
내가 매일 아침마다 얼마나 쓸고 닦았는데, 이 근처의 모든 마차보다 더 빛나는 몸체를 유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관리자는 가트를 향한 원망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어서 마음속으로만 소리쳤다.
“아, 그래. 그 문제가 있었군.”
“그, 그렇습니다! 당장 왕세자비 마마님도 오전에 나가실 일이 있으시다고 했습니다!”
“흐음, 알았어. 한 대는 만들어 주지.”
가트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손끝에서 노란빛이 흘러나오며 바닥에 흩어진 가루들을 쓸어 모았다. 노란빛을 따라 가루들이 동그랗게 모이더니, 부서지기 전의 마차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관리자는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뒤돌아 선 가트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아아, 한 대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왕자님! 두, 두 대는 더 있어야 할 거 같은데요!”
“더 이상은 안 돼.”
“가, 가트 왕자님!”
가트는 관리자의 절절한 외침에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사라졌다.
내 자식 같던 마차들이…… 관리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한 대만 남아 버린 마차를 쓰다듬었다. 당분간이라고 했으니까 그동안 이거라도 잘 지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