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응접실을 나와 손님방으로 향하는 네 사람 주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여전히 에리한의 손을 꼭 잡은 소리오닌은 그에게 뭐라 위로를 할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에리한을 쏙 닮은 바론의 왕을 생각하던 소리오닌 표정도 점점 무너져갔다.
“에리한 님, 우선 푹 쉬세요.”
손님방을 안내해 준 시종이 돌아가고 각자 방으로 향하기 전 소리오닌이 에리한에게 겨우 한마디를 건넸다. 자신보다 더 속상해하는 소리오닌의 표정을 본 에리한이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고맙습니다. 소리오닌 님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푹 쉬세요.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아침 일찍 준비해서 가요. 괜찮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
에리한의 방문이 닫혔다. 그 앞에서 한참 서 있던 소리오닌은 세리의 손에 이끌려 옆방으로 들어갔다.
“어, 어쩌죠? 에리한 님께서 너무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네.”
“그러게. 여기는 그런 마법 없나? 순간 이동 같은 거. 다시 2주나 걸려서 돌아 갈 생각 하니까 너무 답답하다.”
소리오닌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전 같으면 세리와 함께 방을 둘러보며 신기해했을 텐데 지금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이동은 어려운 마법이잖아요. 저희들 중에 아무도 못할 걸요. 그래서 더 답답한 거 같아요.”
“괜찮으시겠지?”
“그럴 거예요! 에리한 님은 왕자님이니까, 혹시 몰라 서둘러 돌아오라고 전령을 보낸 걸 거예요.”
세리는 긴장으로 잔뜩 굳어있는 소리오닌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신을 위로해주는 세리의 기특함에 소리오닌은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이 정도로 뭘요. 소리오닌 님, 어서 쉬시어요. 내일 일찍 출발할 텐데.”
“그래, 그러자. 세리도 잘 자.”
세리는 소리오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가만히 앉아 있던 소리오닌은 신선한 공기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 침대 옆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북쪽에 위치한 곳이라 그런지 창문을 열자마자 꽤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소리오닌이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한쪽 손으로 정리한 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
사브만의 넷째 왕자, 가트가 창밖에 서 있었다. 커다란 키에 묘한 박력이 느껴지는 붉은 눈.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하게 보이는 은색 머리칼. 소리오닌은 순간적으로 짧게 숨을 들이 쉬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손님방이 모여 있는 건물 뒤로는 성벽만이 있을 뿐, 딱히 사람들이 올만한 장소가 보이지는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소리오닌은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가트는 그녀의 인사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소리오닌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음 좀 가라앉을까 해서 열어 놓은 창문인데, 밖에서 끊임없이 쏘아보는 가트의 미묘한 눈빛에 난감해진 소리오닌이 다시 창문을 닫기 위해 손을 올렸다.
“추운데, 문은 왜 열었어?”
응접실에서 들었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말투였다. 낮은 목소리에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더해지자, 지금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지 문을 열었다고 화를 내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 방이 좀 답답해서요.”
결국 창문을 닫을 타이밍을 놓친 소리오닌이 답했다.
“흠, 좀 비켜 서 봐.”
“네?”
“창문 옆으로 비키라고.”
가트는 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인지. 소리오닌의 얼굴에 순간 황당함이 떠올랐지만, 별 말없이 착실하게 한 쪽 벽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몸이 벽면으로 사라진 걸 확인한 가트는 그제야 작게 중얼거리며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부딪쳤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파랗게 빛나던 연기가 순식간에 소리오닌의 방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아직 방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소리오닌은 계속해서 벽에 붙어 있었다.
“이제 됐는데.”
응? 뭐가 된 거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창문 쪽으로 선 소리오닌이 의문이 담긴 눈으로 가트를 쳐다봤다.
“문 닫아.”
“……?”
참, 알아듣게 좀 말하지. 소리오닌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신도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맘이 없었기에 별 인사 없이 쿵, 소리가 나도록 세게 창문을 닫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날 언제 봤다고 저렇게 반말이야?”
다시 침대에 앉아 방금 전 가트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화가 났다. 그때는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별 말을 못했지만 점점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었었다. 손님한테 공손하게 대하는 예절은 밥 말아 먹었나!
아, 한 번 쏘아주기라도 할걸!
소리오닌은 침대를 팡팡 내리치며 분을 삭였다. 그 때문에 어느새 방의 공기가 숲 속에 온 것처럼 청량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
커다란 소리를 내며 창문이 닫혔다. 가트는 소리오닌이 잘 자고 있나 보러 온 참이었다. 그저 그녀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창문에 있으면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바람을 맞을까 봐 비키라고 한 건데. 야옹이로 있을 때는 말 한마디 못해도 용케 원하는 걸 다 알아채더니.
그때와는 사뭇 다른 그녀의 반응에 가트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거기다 자신도 모르게 야옹이 때부터 편한 모습을 봤던 터라 말이 짧게 나가버렸다.
뭐, 시간이 지나면 소리오닌도 예전처럼 편하게 말할 테니, 별로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며 등을 돌렸다.
그래도 얼마 안 있으면 자신의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겠지.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돌아가는 가트의 얼굴에 어느새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
밤새 깊은 잠을 못 잔 소리오닌은 동이 트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침구를 정리한 뒤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똑똑,
“소리오닌 님, 일어나셨습니까?”
“네, 일어났어요. 지금 나갈게요!”
복도에는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 간단하게 아침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성문 근처에는 왕세자인 히튼과 가트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부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히튼의 인자한 미소에 에리한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근데, 여성분들도 지금 함께 돌아가십니까?”
뚱한 표정으로 히튼의 옆에 서 있던 가트가 툭 내뱉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히튼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가트를 돌아봤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동생의 얼굴에 슬슬 웃음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제부터 가트의 말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던 에리한이 금세 얼굴을 굳혔다.
“바론으로 빨리 가야할 텐데 뒤에 숙녀분들을 태우고 숲을 통과하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유 있게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점이었다. 난감한 얼굴로 소리오닌을 본 에리한이 곧 표정을 풀고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다.
“최대한 안전한 길로 가면 됩니다. 염려 마십시오.”
“흠, 그럼 또 2주 넘게 돌아가실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바론에서는 한시가 급해서 전령까지 보냈는데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에리한은 자신의 말꼬리를 잡으며 약 올리는 듯한 가트의 태도에 결국 삐딱한 말이 튀어나갔다. 그렇게 물어보길 원했다는 듯이 가트는 재빨리 소리오닌의 어깨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니, 뭐에요?”
난데없이 끌려 온 소리오닌이 가트의 무례한 행동에 빽 소리쳤다. 에리한도 소리오닌의 손목을 잡으며 가트를 노려봤다.
“여성분들은 여기에 남게 하시죠. 괜히 고생시키지 말고.”
히튼은 그제야 자신의 동생이 무슨 생각으로 거짓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근데 어째 역효과인 거 같기도 한데?
잔뜩 경계하는 눈빛의 소리오닌을 보며 히튼은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군. 내가 나서는 수밖에.
“워낙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아이라, 자기 딴에는 숙녀분들이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시지 마십시오.”
히튼이 소리오닌의 어깨에 닿아 있는 가트의 팔을 떼어냈다. 도끼눈이 되어 자신을 째려보는 동생의 눈길을 피해 에리한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권했다.
“그리고 동생의 말대로 여성분들은 여기서 계시는 게 어떻습니까? 돌아가는 길이 험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에리한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저, 왕자님. 사브만 측의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페릴이 조심스럽게 에리한에게 말했다. 숲을 지나지 않으면 빠른 시간 안에 바론으로 돌아갈 수 없다.
혹시 돌아가는 그 며칠사이에 전하께서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에리한은 분명 크게 후회할 것이다.
“그, 그러셔요, 에리한 님. 소리오닌 님과 저는 천천히 돌아갈게요.”
“세리? 너까지 왜 이래!”
“소리오닌 님, 저희가 같이 가면 방해만 될 게 뻔한데…… 왕자님 먼저 가시라고 하면 안 될까요?”
세리가 소리오닌의 팔을 붙잡았다. 가만히 대화를 들어보니, 혹시 일이 잘못되면 바론에서는 만만한 소리오닌과 자신의 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리 역시도 에리한이 들을 수 없게 소리오닌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이 저희에게 올지도 모른단 말이어요! 한시가 급한 이런 상황에 저희와 같이 오느라 늦었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하, 하지만…….”
세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지? 낯선 곳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도 싫은데.
소리오닌이 갈등하고 있는 것을 느낀 히튼은 다시 한번 그녀를 꼬여내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저희가 책임지고 최상급 마차를 준비해 여성분들을 바론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에리한 왕자님은 급한 일이 있으니, 걱정 마시고 우선 먼저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