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00)

041.

혼인 서약서라 해서 당연히 소리오닌과의 서약서일 거라 철썩 같이 믿고 있던 히튼은 적잖이 당황했다.

형님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 걸 눈치챈 가트가 재빨리 혼인 서약서를 낚아챘다. 순식간에 동생의 손으로 넘어간 서약서를 보던 히튼이 가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냥 조용히 계세요.’

살벌하게 빛나는 눈빛만으로도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히튼은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고 에리한 쪽을 쳐다봤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잘 받았습니다. 저희도 곧 혼인 서약서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희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에리한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의 옆에 있는 소리오닌과 세리, 페릴은 들킬까 봐 두근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형님!”

다시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타만과 카민이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들 역시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트만큼 새빨간 눈동자는 아니었다. 

털썩, 커다란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은 타만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바론에서 온 일행들을 훑어봤다. 대체 몇 번이나 관찰당하는 건지, 만날 때마다 똑같은 행동을 하는 형제들 때문에 어색한 공기는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타만, 그만 쳐다 봐. 실례다.”

“아, 그렇습니까? 이거 참. 습관이 돼서. 죄송합니다. 저는 타만 크리타잔. 사브만의 둘째 왕자이자, 황실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바론에서 온 일행들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눈빛을 보다 못한 히튼이 타만을 조용히 질책했다. 그제야 타만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했다. 카민은 타만이 소개를 끝낸 후에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브만의 셋째 왕자. 카민 크리타잔입니다. 오시는 길이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사근사근 얘기하는 셋째 왕자는 확실히 이 네 형제 중에 제일 차분해 보였다.

히튼은 자신의 동생들에게 다시 한번 바론의 왕자가 직접 혼인 서약서를 가져 왔다는 걸 강조 했다. 

“그렇습니까? 이런 영광이! 형님, 내일 연회를 연다고 하셨죠? 제가 제일 좋은 술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사브만에서만 나오는 최상급의 고기를 준비해두겠습니다. 우리 막내의 혼인을 위해 여기까지 오셨으니, 부디 천천히 즐기고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형제의 우애가 대단한 건지, 손님들에 대한 예의가 어마어마한 건지. 정작 결혼을 하게 될 막내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데, 형님들이 더 들떠 있었다. 사브만의 왕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시간을 끌면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에리한이 연회를 거절하려던 참이었다. 

“어제, 바론에서 바람의 전령이 왔습니다.”

지금까지 굳게 다물려 있던 가트의 입술이 움직였다. 낮게 퍼지는 목소리에 모두들 하던 말을 멈추고 그를 주목했다. 

바람의 전령? 최상급 마법으로 나라 간 중요한 일에서만 사용되는 전령인데. 바론에서 전령을 보냈단 말이야? 순간 린셀이 사라졌다는 걸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에리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소리오닌도 잘은 모르지만 분위기 상 좋은 얘기는 아닐 거란 생각에 침을 꿀꺽 삼켰다. 세리 역시 소리오닌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눈동자를 굴렸다.

가트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파란 공 모양을 한 바람의 전령을 올려놨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전혀 모르는 에리한과 일행들은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전령을 쳐다봤다.

뭔가 찔리는 게 있긴 한가 보네. 아까도 잔뜩 얼어 있었지만, 그들은 바론에서 바람의 전령을 보냈다는 말을 듣자마자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가트는 속으로 피식 웃은 뒤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바론의 전하께서 사냥에 가셨다 다치시는 바람에 많이 위독하시다는 전령이었습니다.”

사브만의 형제들은 놀란 눈으로 가트를 쳐다봤다. 자신들이 어제 본 바람의 전령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형님들의 눈빛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은 가트가 에리한을 위로했다. 

“바람의 전령은 바로 어제 도착해서 저만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용은 형님들도 모르셨던 겁니다. 어쩐지 전하의 일이 적혀 있어서 의아했는데, 에리한 님이 왕자님이라는 말을 듣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에리한 님은 아버님이 아프시다니 어서 가 보셔야겠습니다.”

“어, 어떻게……!”

가트의 말을 들은 에리한은 순간 온몸의 피가 다 밑으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아버님이? 하얗게 질린 에리한의 얼굴을 본 소리오닌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린 에리한은 마찬가지로 정신이 나간 듯한 페릴을 불렀다. 페릴은 잔뜩 당황하여 에리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 왕자님. 이게 무슨! 전하께서는 평소에 사냥도 잘 안 하시던 분인데…….”

“나도 잘 모르겠다. 우선 얼른 가 봐야겠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리한이 소리오닌과 세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늦었으니 주무시고 내일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가트는 소리오닌의 손을 잡은 에리한을 노려본 뒤에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한시가 급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에리한 역시 가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마주봤다. 

“아닙니다. 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 사브만을 나선다면, 숲에서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힐 겁니다.”

에리한에게 단호한 충고를 하는 가트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트를 보는 에리한의 눈에 의심이 피어났다. 그의 눈빛에 속으로 코웃음을 친 가트가 말을 이어갔다. 

“사브만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지요. 이곳을 벗어나려면 무조건 숲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 시간에는 상급 몬스터들이 활동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나가봤자 금방 다시 돌아오실 수밖에 없으실 겁니다.”

“그, 그런……!”

에리한이 입술을 깨문 뒤 고개를 숙였다. 에리한의 옆에서 가트의 설명을 들은 페릴도 그를 설득했다.

“왕자님. 우선 내일 날이 밝을 때까지만 여기에 계시죠. 반나절이면 사브만을 벗어날 테니 그 뒤로는 최대한 빨리 갈 수 있도록 루트를 짜겠습니다.”

“하아, 알았다. 그러도록 하지. 히튼 님, 정말 죄송한 부탁이지만, 제일 빠른 말을 빌릴 수 있을까요?”

형제들과 뭔가를 속닥거리던 히튼은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에리한과, 그의 옆에서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막내 동생을 번갈아 쳐다봤다.

결국 히튼은 에리한에게 말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에리한이라는 왕자가 동생의 계략에 넘어간 것 같은데, 가트가 대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가트의 청대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중이지만, 저렇게 힘들어하는 에리한을 보니 양심이 마구 찔려왔다. 그러니 히튼은 말 정도야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었다. 

에리한은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히튼은 얼른 시종을 시켜 에리한과 일행에게 제일 좋은 손님 방을 내주라고 명령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의 환영인사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그래요. 아침에 인사는 안 해도 되니 편할 때 가셔도 됩니다.”

히튼의 인자한 웃음에 다시 한번 인사한 에리한은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응접실을 나섰다. 

탁,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그동안 가트의 계략을 보면서도 한마디 말도 못 한 형님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가트! 이게 무슨 일이야?”

“그래, 무슨 일이길래 건강한 남의 나라 왕을 다 죽어가는 환자로 만들어?”

타만이 여전히 문 앞에서 서 있는 가트를 끌어다 앉히면서 소리쳤다. 그의 옆에서 카민도 조심히 거들었다. 

“어제 바람의 전령은 분명 신부가 바뀐다는 내용이었는데, 혼인 서약서도 바론의 공주 이름으로 들어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지막으로 히튼의 입에서도 나직하게 이유를 묻는 말이 나왔다. 혼인 서약서가 공주의 것으로 왔다는 걸 몰랐던 타만과 카민의 얼굴에 점점 더 혼란스러움이 차올랐다. 

“혼인 서약서가 왜 공주의 것으로 왔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에리한 왕자를 하루라도 빨리 사브만에서 내보내고 싶었습니다.”

“응? 대체 왜?”

형님들은 궁금함을 도저히 못 참겠는지, 가트를 향해 상체를 주욱 내밀었다. 그 부담스런 태도에 가트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천천히 답을 이어갔다.

“에리한 왕자의 옆에 있던 여자가 바로 소리오닌 공녀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제들은 에리한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를 기억해내려 저마다 열심히 눈을 굴렸다.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 특별히 엄청 예쁘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 에리한 왕자랑 손 잡고 나간 여자?!”

응접실이 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였다. 타만은 이미 턱이 빠질 만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히튼은 끙, 소리를 내고 머리를 짚었고 카민은 오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형님들의 격한 반응에 가트는 입술을 끌어 올려 웃은 뒤 말했다.

“네, 그 여자 맞습니다. 지금은 에리한 왕자와 좋은 감정인 건 분명하니까요. 우선 둘을 떨어트려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 잠깐! 근데 너는 왜 소리오닌 공녀한테 집착해? 보니까 그 공녀는 너 전혀 모르는 거 같던데?”

의외로 감이 좋은 타만이었다. 형님들은 그러고 보니 소리오닌과 가트는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일 텐데, 동생이 그녀와 에리한 왕자와의 관계까지 어떻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건 비밀입니다.”

자신이 사르그로 변해 놀러 다녔다는 걸 들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기에 가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 뭐야, 궁금하게!”

“맞아, 너는 소리오닌 공녀를 어떻게 아는 거야?”

형님들이 옷자락을 붙들면서 알려 달라 칭얼거렸지만, 한 번 닫힌 가트의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고집 센 동생에게 백기를 든 형님들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긴요, 소리오닌과 결혼할 생각입니다.”

“아, 그러니까! 소리오닌 공녀는 에리한 왕자랑 꽤나 깊은 관계인 거 같은데, 결혼을 어떻게 할 거냐는 말이지.”

타만이 그의 동생이 하는 모양이 답답한 듯 두툼한 손으로 가슴을 퉁퉁 내리쳤다. 가트는 자신의 은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소리오닌은 여기에 남고, 에리한 왕자가 다시 사브만에 오지 못하게 하면 되겠죠. 평생 얼굴 못 본다는 데 어쩌겠습니까?”

쟤 정말 야비하다.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어. 뭐야, 무서워. 저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형님들은 차마 입 밖으로 소리내지는 못했다. 

“아, 소리오닌한테는 절대 티내지 마세요. 만약 형님들의 입방정으로 일이 틀어지면 저도 제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트가 형님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를 남기고 응접실을 나갔다. 순식간에 휘몰아친 상황에 형님들만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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