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00)

040.

에리한과 마주 앉은 소리오닌은 그녀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혼인 서약서를 떠올렸다. 중간에 일이 꼬여 버려서 어떻게 해야할지 궁금해진 소리오닌이 에리한에게 물었다.

“그런데 린셀 공주님의 혼인 서약서는 어떻게 해요? 그냥 사브만에 전달해 줘야 되는 걸까요?”

“음,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모른 척하기가 좀 마음에 걸리는 거 같아요.”

소리오닌은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말했다. 사브만에서는 아직 린셀이 없어진 걸 모르고 있을 텐데.

왕비가 이미 손을 썼다는 사실을 모르는 소리오닌은 그저 양심이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에리한은 소리오닌에게 왕비가 바임을 통해 소리오닌을 없앨 계획을 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왕비 역시 다른 건 몰라도 린셀이 바임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만은 몰라야 했다.

물론 민츠가 린셀과 함께 사라졌다는 걸 알겠지만, 그저 소리오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이 민츠까지 빼돌렸다는 걸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에리한 역시 린셀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가 소리오닌을 사브만에 신부로 넘겼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머리를 한 번 털어낸 에리한이 말을 이어갔다.

“어마마마도 아마 린셀이 사라졌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빼돌렸다는 생각도 하고 있으실 테고, 하지만 저희는 사브만에 서약서를 전달해야 합니다. 중간에 돌아간다면 어마마마의 의심을 대놓고 인정하게 되는 거죠. 더군다나 소리오닌 님에게 맡긴 일이니 끝까지 전달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하긴 그래요.”

그래도 소리오닌은 여전히 찝찝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소리오닌의 표정을 본 에리한이 덧붙였다.

“우선은 나중에라도 린셀이 돌아오기 전까지 어마마마께 몰랐었다고 할 명분이 생기니까요.”

“네에, 그렇긴 하죠.”

한숨을 폭 쉰 소리오닌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사브만은 어떤 나라에요? 그동안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소리오닌이 궁금한 표정으로 에리한을 쳐다봤다. 그녀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에리한이 답했다.

“사브만은 험한 협곡과 산에 둘러싸인 나라여서 원래 다른 곳과의 교류는 많지 않았습니다. 워낙 그 나라 주민들의 성정이 험하고 힘으로 상대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야만적이라 생각해 아예 상대를 안 하는 나라들이 많았죠.”

“아, 그렇구나.”

소리오닌은 사브만에 가까워질수록 숲이 빽빽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근데, 몇 년 전부터 사브만의 문화와 생활 수준이 가파르게 상승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천재적인 마법능력을 가진 자가 그의 능력으로 사브만 곳곳을 편리하게 바꿨다고 합니다.”

“어머, 그렇게 마법 능력이 좋은 사람도 있어요? 나라의 수준을 바꿀 정도로?”

“안타깝게도 초크센이나 바론에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지만요. 대륙을 통틀어 이름이 알려진 마법 능력자들이 있긴 합니다. 헌데, 사브만의 마법능력자는 누구인지 전혀 정보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에리한의 설명에 소리오닌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 집에 갇혀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역시 이곳은 이세계였다. 나라를 바꿀만한 마법이나 능력자들이 있는. 

“소리오닌 님, 저 들어본 적 있답니다. 그 능력자에 대해서요!”

“응? 세리, 네가?”

“네!”

둘의 이야기를 듣던 세리가 소리오닌의 옆에서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모두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제가 초크센에 있을 때 들었어요. 그 능력자가 사브만의 왕자라는 소문이 있었어요!”

“뭐어? 왕자?”

깜짝 놀란 소리오닌이 답했다. 세리의 말을 들은 에리한도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네, 왕자요! 그러니까 사브만에 그 사람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죠. 사브만에서 온 사람이 얘기해 줬으니까 맞는 얘기 아닐까요?”

“흐음, 잠깐. 사브만에 왕자가 몇 명이지?”

세리의 말을 들은 소리오닌이 물었다.

“아, 지금 사브만의 왕자는 모두 네 명입니다. 사브만의 왕은 병세가 심해 첫째 왕자가 모든 업무를 대신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혼인을 하지 않은 왕자는 넷째 왕자뿐입니다. 그 왕자가 린셀과 혼인을 약속한 왕자입니다. 그 외 다른 왕자들과 나이차가 많이 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왕자가 마법능력이 엄청난 왕자는 아니겠죠……?”

소리오닌의 말에 세리와 페릴, 에리한 모두 표정이 굳었다. 세리의 말대로 엄청난 마법 능력이 있는 왕자라면 린셀이 없어진 걸 알게 됐을 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최대한 빨리 주고 오자. 뒷일은…… 모르겠다.”

모두의 고개가 아래위로 끄덕여졌다. 린셀이 없어졌다는 걸 최대한 천천히 알게 되길. 그리고 제발 마법 능력자가 왕자라는 그 소문이 헛소문이길 바라면서. 

***

마차로 달리기를 며칠, 소리오닌과 사람들은 사브만에 도착했다. 언제 다시 돌아갈지 모르기에 에리한은 우선 마차를 디그롬으로 돌려보냈다. 

마차에서 내린 네 사람은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혼인 서약서를 보여줬다. 소리오닌이 들고 있는 혼인 서약서를 유심히 살펴보던 병사가 재빨리 그의 상관에게 보고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병사의 상관인 듯한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나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성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사브만의 성은 바론과는 다르게 단층으로 넓게 지어져 있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성의 모습에 세리와 소리오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엄청 멋있어요. 바론이나 초크센보다는 투박하지만 크기가 장난이 아니네요.”

“그러게, 성이 대체 몇 개로 이어져 있는 거지?”

소리오닌이 눈대중으로 셀 수 있는 지붕만 해도 열댓 개는 넘어 보였다. 지붕은 모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벽을 세우고 있는 붉은 벽돌과 함께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였다.

모두들 처음 보는 건축 양식에 정신이 팔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브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 안쪽에서부터 나이가 어느 정도 있어 보이는 남성이 나와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발, 검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딱 봐도 꽤 높은 지위를 가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바론에서 혼인 서약서를 가져왔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이 쪽으로 오시지요!”

직접 마중 나온 남자는 허허 웃으며 성의 안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은, 금색의 소파가 인상적인 응접실이었다.

남자는 넓은 소파를 가리키며 앉을 것을 권했다. 자신이 가리킨 소파에 바론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앉는 것을 본 뒤에야 그도 빈자리에 앉았다. 소리오닌은 여전히 웃는 낯을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대체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이거, 오늘 손님이 오실 줄 모르고 동생들이 각자 일을 하러 가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금 있으면 다들 모일 겁니다.”

“아, 네. 하지만 저희는 그저 혼인 서약서만 드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의 말에 에리한은 서둘러 서약서를 넘기고 가고 싶다는 뜻을 담아 답했다. 

“어찌 서약서만 받고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예의가 아니지요! 오늘은 늦었으니 인사만 하고, 내일 정식으로 손님들을 위한 연회를 열기로 하겠습니다!”

“네? 아, 아니……!”

에리한의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남자는 화통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은 그들을 둘러봤다. 

“그나저나,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의 이름은 히튼 크리타잔. 사브만의 왕세자입니다. 원래 아버님께서 직접 오셔야 했는데, 지금 병환으로 요양 중이셔서. 대신 제가 모시게 됐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한 히튼은 대답을 바라는 얼굴로 일행을 쳐다봤다. 어쩌다 자기소개 시간이 되었는지, 생각보다 과한 사브만 측의 친절에 에리한은 속으로 낭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 저는 에리한 바리아논이라고 합니다. 바론의 왕자입니다.”

“네? 바론의 왕자님이십니까?”

깜짝 놀란 히튼이 에리한을 다시 한번 위 아래로 훑어봤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다르다 했지. 흐음, 속으로 에리한에 대한 평가를 마친 히튼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소리오닌을 쳐다봤을 때였다.

“형님.”

응접실 문이 열리고 히튼의 막내 동생인 가트가 들어왔다. 새로운 등장인물에 바론에서 온 일행들은 재빨리 그를 쳐다봤다.

에리한 만큼 큰 키를 가진 남자가 성큼성큼 소파를 향해 걸어왔다. 짧은 은발, 하지만 히튼과는 다르게 검은색이라고는 섞이지 않은 새빨간 눈동자.

이 남자군……! 모두들 속으로 린셀의 결혼 상대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가트는 일부러 소리오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소리오닌은 자신이 속여야 하는 린셀의 결혼상대라는 생각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 가트. 생각보다 빨리 왔군. 여러분, 이 녀석이 이번 혼인을 하게 될 제 막내 동생입니다. 그리고 가트! 여기 이분들이 바론에서부터 너의 혼인 서약서를 가지고 오셨다는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거기다 저 분은 바론의 왕자님이라 하니, 바론에서 얼마나 우리와의 혼인을 신경 쓰고 있는 건지 알 수 있겠지?”

히튼이 아까보다 더 큰 웃음을 내뱉으며 가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큰 형님의 설명에 가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왕자님이었나? 귀한 집 자식인 줄은 알았지만 바론의 왕자였다니. 이거 일이 더 재밌어지겠네. 

한쪽 입술만 올려 웃은 가트는 긴장한 듯한 표정의 에리한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혼인 서약서를 주시죠.”

가타부타 말도 없이 본론을 꺼내는 가트의 행동에 모두들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히튼 역시 가트답지 않게 서둘러 혼인 서약서를 찾는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너무나 결혼이 하고 싶었던 거냐! 홀라당 바뀐 가트의 태도에 히튼은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네, 여기 있습니다.”

괜히 우물쭈물 해봤자 의심만 사게 될 거, 에리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혼인 서약서를 히튼에게 내밀었다. 

히튼은 에리한에게 받은 혼인 서약서의 봉인을 풀고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서약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모호하게 변해갔다. 

어째서 혼인 서약서에 소리오닌이라는 공녀가 아닌 린셀 바리아논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지? 공주와의 결혼은 이미 파기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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