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둘째 왕자와 셋째 왕자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들의 고함에 잠시 인상을 찡그린 히튼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걔가 왜? 역시 결혼 안 하겠다고 깽판 치는 게 분명해! 전에 바론에서 왔던 전령을 완전 다 찢어놨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타만 형님! 그 얘기 나오고 나서부터 애가 온 숲을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들을 싸그리 잡아 죽이는데, 성 안에 피 냄새가 진동을 했지 않습니까?”
“맞아, 맞아! 그렇지!”
성격 나쁜 막내의 뒷담화를 하던 두 사람은, 곧 히튼을 바라봤다. 동의를 구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히튼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간에 가트가 나타났다.
“두 형님에게는 아쉽게도 깽판 칠 마음은 없습니다.”
가트가 자리에 앉으며 두 왕자에게 말했다. 가트가 앉는 걸 본 두 사람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뭐? 너 결혼할 거야?”
“네, 할 겁니다.”
“거짓말! 어제까지만 해도 하기 싫다고 시위했잖아!”
“그 시위. 오늘부터는 안 하는 걸로 하죠.”
가트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태도에 눈이 둥그렇게 변한 형님들이 앞다퉈 그의 이마를 문지르고 눈앞으로 손을 흔들거렸다.
두 형님의 과장된 행동이 귀찮았지만 할 말이 있기에 가만히 참고 있었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시각각 나빠지는 가트의 표정을 보던 히튼이 재빨리 두 왕자를 말리고 나서야 다시 식당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결혼하겠다는 얘기를 하려고 식사시간에 부른 거냐?”
커다란 스테이크 조각을 씹어 먹으며 타만이 얘기했다. 그의 턱으로 육즙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옆에 앉아 그의 턱을 닦아 준 카민이 얘기를 마저 이어갔다.
“그래. 바론의 공주 정도면 괜찮지. 어차피 사브만을 떠날 것도 아니니까, 결혼해서 잘 지내봐!”
조용히 두 형님들의 말을 듣고 있던 가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엥? 뭐야, 결혼한다며. 근데 또 왜 이래?
타만과 카민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 결혼 상대가 바론의 공주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 영애와의 결혼은 한다는군.”
여전히 입을 꾹 다문 가트를 대신해 히튼이 답했다.
“뭐야, 왜 얘기가 달라? 바론 이 자식들, 공주는 어디다 두고!”
쾅! 소리가 나게 포크를 내려놓은 타만이 크게 소리쳤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타만의 입을 막은 카민이 가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바론의 공주가 아닌 새로운 결혼 상대와는 결혼할 마음이 있다는 거지? 깽판을 칠 생각도 없고.”
“그렇습니다.”
한 번에 정리된 카민의 물음에 가트가 대답했다. 가트의 입에서 냉큼 나오는 대답에 카민이 빙긋 웃었다.
“축하해, 잘 됐네. 그럼 그 신부가 보낸 혼인 서약서가 도착하면 준비를 시작하면 되는 건가?”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가트의 말에 형님들의 눈이 그의 얼굴로 향했다.
“뭔데?”
“뭐냐?”
“무슨 말?”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보던 가트가 말했다.
“이번 결혼 문제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형님들은 아무 말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부가 바뀌었다는 것도 다른 당분간은 알리지 말아 주십쇼.”
막내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화했다.
‘이게 뭔 소리?’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부가 바뀐 걸 누구 모르게 하라는 거야?’
혼란스러워 하는 형님들을 위해 가트가 친절히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잘 모르겠으면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그 설명으로 인해 형님들의 얼굴에 더 큰 물음표가 생겨 버렸지만.
가트는 형님들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에 세 사람의 고개도 자동적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 형님들.”
“잠깐! 이게 끝이야?”
타만이 다급하게 가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타만의 손을 힘주어 떼어낸 가트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뭐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바론에 보낼 혼인 서약서를 쓰려면 지금 나가봐야할 것 같은데, 형님. 어려운 일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짧게 한숨을 쉰 가트는 타만이 다시 붙잡을 새라 재빨리 식당을 벗어났다. 여전히 멍한 얼굴의 타만은 쿵, 문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어? 대체 뭐라는 거야, 저 자식은?”
뭔가 엄청 기분 나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이해가 잘 가지 않은 타만이 카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민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보고 나서지 말라는 거 같은데요. 좋게 말하면 지켜만 보라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히튼 형님?”
“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들의 대화를 들은 타만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뭐어? 감히 형님들한테 말하는 태도 좀 보게?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이게 다 히튼 형님 때문이 아닙니까? 어렸을 때부터 오냐오냐 하니까 저 자식이 저렇게 큰 거라고요!”
“타만, 참아. 쟤가 저런 게 하루 이틀인가?”
“아니, 참으라니요?! 그럼 언제까지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받아주실 생각입니까?!”
타만이 앉아서 입을 닦고 있는 히튼을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는 당장이라도 가트를 잡으러 뛰어나갈 것 같은 자세였다. 타만의 옆에 앉은 카민이 히튼의 눈치를 보고 그를 말렸지만, 눈이 뒤집힌 타만에게는 소용없었다.
“앞으로 계속 봐줄 생각이야.”
“네?!”
평이하게 나오는 히튼의 대답에 타만이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우리 사브만이 이렇게 강성하게 된 것도 가트의 공이 크지 않은가? 그 애가 없었다면 여전히 사브만은 주위 나라에 무시나 받는 야만스러운 나라였겠지. 가트 덕에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지 않나.”
“그, 그건…….”
“타만. 가트는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말이야,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제대로 싸우면 마법을 쓸 수 없는 너는 가트의 상대가 되지 않는 걸.”
정곡을 찌르는 형님의 말에 타만은 억울한 얼굴이 되어서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부들 거리는 그의 어깨를 카민이 톡톡, 두드려 위로해 주었다.
“그, 그치만……. 가트 자식 너무 얄밉습니다!”
타만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울먹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인정.”
“맞아요, 형님. 가트가 얄미운 건 사실입니다. 근데 능력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얄미운 건 얄미운 것. 형님들은 그들보다 열댓 살은 어린 동생을 상대로 극단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쵸? 아오! 나는 왜 마법을 못 쓰는 거야?”
“타만 형님! 형님이 이 검술 실력에 마법까지 썼으면 너무 완벽할 걸 알기에 마법을 쓸 수 없는 걸 거예요. 이미 검술만으로도 사브만에서 제일이지 않습니까?”
“뭐? 흐, 흐흥, 물론이지! 내가 마법만 쓸 줄 알았다면 사브만이 뭐야, 바론이랑 하논도 다 내 손바닥 안에 있었을 거라고!”
“맞습니다! 그러니까 형님은 검술만으로도 충분하신 겁니다!”
카민의 칭찬에 다시 우쭐해진 타만의 기분이 좋아졌다. 먹다 남긴 고기도 한입에 다 털어 놓고 싱글거렸다. 그 모습을 본 카민과 히튼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0살짜리 애들보다 못한 이 정신연령을 어쩌면 좋아?
***
로센 공작은 가뿐해진 어깨와 손목을 움직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소리오닌한테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군!”
“능력이라뇨, 그런 거창한 게 아니에요.”
공작의 칭찬에 소리오닌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리오닌이 로센 공작을 치료해 주느라 뻐근해진 손목을 스트레칭하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에리한을 바라봤다.
“에리한 님, 저희 이제 가 봐야하지 않아요?”
“네? 아, 네. 로센 공작님. 더 늦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로센 공작의 어깨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에리한이 깜짝 놀라 답했다. 그의 말에 세리와 페릴은 짐을 챙기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제 가봐야 한다는 말에 눈에 띄게 섭섭한 얼굴을 한 로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하긴 지금 출발해야 저녁에 도착할 테니. 더 늦기 전에 가야겠군요.”
공작이 곁에 있던 시종을 시켜 마차를 준비하게 했다. 시종은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밖으로 향했다.
“제가 마차를 준비해둘 테니 잠깐이라도 편하게 가십시오.”
“고맙습니다. 로센 공작.”
공작은 에리한에게 싱긋 웃어준 뒤 소리오닌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생각해 보면 공작을 포함한 바론의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리오닌은 생각 외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소리오닌. 물론 지금 상황이 힘들겠지만, 바론을 너무 많이 원망하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괜찮아요. 힘들지 않고 원망하지 않아요. 제가 잘 모르는 일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원망하는 게 더 힘든 일이죠.”
“고맙다. 자, 어서 가야겠구나.”
똑 부러지는 소리오닌의 대답에 로센 공작은 허허, 웃었다. 그리고는 마당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공작이 준비해 준 마차는 여러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커다랬다. 청색의 바탕에 은색의 무늬가 그려져 있을 뿐, 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듯 불필요한 장식은 한 개도 붙어 있지 않았다.
소리오닌과 다른 사람들은 공작에게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는 푹신한 방석이 깔려 있었다. 덕분에 사브만까지 가는 길은 편할 것 같았다.
“잘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소리오닌, 바론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번 더 들르거라. 너한테 치료 좀 더 받아야겠어!”
공작은 소리오닌에게 윙크를 한 뒤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답 없이 어색한 표정을 지은 소리오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과 짧은 인사를 마친 뒤 그들은 사브만을 향해 출발했다.